마가복음 2018 막 23강(12:18-44) 첫째 되는 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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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마가복음 제 23 강
말씀 / 마가복음 12:18-44
요절 / 마가복음 12:29,30
첫째 되는 계명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오늘 말씀은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과의 부활논쟁과 첫째 되는 계명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모르시는 분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계십니다. 이 시점에 오늘 말씀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지 혹시 고민해 보셨습니까? 이 고민을 기초로 오늘 말씀의 의미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제1장. 산 자의 하나님(18-27)
18-23절을 보십시오.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물었습니다. 칠 형제가 있는데 장남이 후사가 없이 죽고 형수가 남았는데 그 둘째가 결혼하였다가 또 후사가 없이 죽고 해서 마지막 일곱까지 다 죽었을 때에 부활하면 그 여인은 누구의 아내가 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사두개인이 질문한 것은 시형제 결혼법으로 인한 부활의 모순입니다. 시형제 결혼법은 형이 결혼하여 후손이 없이 죽으면 동생이 형의 아내와 결혼하여 형의 가문을 이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사두개인의 문제 제기에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을 의논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 (24-27).
예수님의 답은 사두개인들이 부활에 대해 오해하였다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오해의 원인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는데 있습니다. 그러면 사두개인들이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모른다고 말씀하신 의미가 무엇일까요? 성경을 모른다는 것은 성경에 어떤 내용이 있는지를 모른다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의미를 모른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에 어떤 내용이 있는지 잘 안다고 해도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미를 모른다면 그는 성경을 모르는 사람인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우리가 보지 못하는 영의 세계로 인도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나를 중심으로 하여 성경을 이해합니다. 나의 복과 나의 구원에 중점을 두고 성경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무엇입니까? 내 중심으로 사는 것 밖에 모르는 우리를 간섭하시고 다스리셔서 영적인 세계를 위해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내 중심으로 사는 것이 죄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의 세계로 끌어가십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를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 죽음이 없는 산자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중심으로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 또한 자기 육체와 구원을 위한 능력으로 받아들입니다. 이처럼 자기중심에 매어 있기 때문에 부활의 세계에서의 ‘나’의 문제에만 집중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두개인들이 제기했던 결혼 문제와 같은 의문이 제기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출3:6절 말씀에 근거하여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산 자의 하나님이라면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에서 아브라함은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라는 뜻이 됩니다. 이삭과 야곱 또한 동일합니다. 그들은 분명 육신으로는 죽은 자이지만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죽은 자가 아니라 산자입니다. 어떻게 죽은 자를 가지고 산 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육신이 죽은 다음에 다시 살아나는 방식의 부활을 생각합니다. 나사로처럼 무덤에 장사 되었다가 예수님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을 부활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부활은 육신이 생존해 있는 현재와는 상관이 없는 부활일 수밖에 없습니다. 육신이 죽어야 가능한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활을 말하는 많은 사람들이 부활을 죽음 이후에 일어날 먼 나중의 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산 자의 하나님을 믿는 신자는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이미 산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아니하리라”(요11:25-26)고 하셨습니다. 이에 우리는 이렇게 반문할 수 있습니다. ‘아니 예수님을 믿은 자도 다 죽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었다는 것과 성경에서 죽었다는 것은 다른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죽음이란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과 단절되어 있는 상태를 죽음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죄와 사망아래 놓여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이 죄와 사망에서 벗어난 사람입니다. 다시는 죽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승리하심으로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하는 곳에서 생명과 의가 왕 노릇하는 곳으로 옮겨놓으신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더 이상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을 전부인양 살아갈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안과 밖으로 산 자와 죽은 자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예수님과 사두개인과의 부활논쟁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앞두고 가지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었습니다.” (표준 새 번역 갈 6:14) 이런 사람이 산 자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제2장. 첫째 계명(28-34)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서 그들이 생각하는 부활사상의 논리적 모순을 질문했던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의 답변에 더 이상 할 말을 잃어버립니다. 그러자 서기관 중 한 사람이 나아와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28) 이것은 ‘우리 신앙생활의 핵심이 무엇인가?’ 하는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29-31). 예수님의 이 답변은 신명기 6:4-5절과 레위기 19:17-18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전 인격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핵심이며 우리 신앙생활의 핵심입니다. 우리 자신이 행복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하면 됩니다.
오늘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의미에서 아주 조금만 더 나아가보려고 합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을 첫째 되는 계명으로 말씀하시고, 이웃 사랑을 둘째 되는 계명으로 말씀하셨을까요? 단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계명이니까 그대로 지키고 실천하라는 의미로 하신 말씀일까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계명 중에 첫째, 둘째 계명이라는 것은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전하고 있는 것이 사랑이라는 뜻이 됩니다. 따라서 비록 표면적으로 말씀을 실천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도 사랑에서 벗어나 있다면 말씀을 실천하지 않는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우리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의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은 전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 외에는 사랑의 대상이 없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오직 하나님께로만 집중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 자신까지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에 대해 사람들은 반발할 것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자기 자신까지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만 사랑할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거기다가 하나님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는 것이나 이웃을 사랑하는 그 비중이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에 대해 우리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습니다. 감히 실천하겠다는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당연히 인간은 하나님의 율법을 실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 앞에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죄인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사랑할 능력이 없다는 말을 하면 ‘그럼 사랑하지 말라는 말이냐?’ 라고 반발하는 사람도 있지만 도대체 어떻게 사랑하겠다는 것인지 저는 그것이 의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대로 사랑할 수는 없지만 사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면 지금보다는 좀 더 나은 관계로 개선될 수 있지 않느냐?’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맞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사랑하려고 애를 쓴다면 좀 더 나은 관계로 개선될 수도 있습니다. 아니 개선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사랑이라는 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뜻은 인간관계의 개선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계명을 통해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십니다. 이 사랑의 계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확증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사랑의 의미를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새롭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증거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신자가 예수님의 피 흘리신 은혜를 알고 그 은혜에 대한 감사함이 있다면 자신이 어떤 처지에 있든 예수님으로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비록 힘든 처지라고 해도 나의 죄 때문에 피 흘려죽으신 예수님으로 감사하고 사랑하는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 역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모습으로 드러내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하기에 우리가 실천해야 할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실천할 수도 없습니다. 믿음이 우리를 십자가에 확증된 주의 사랑에 붙들어 놓을 것이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끌어 갈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지금까지의 말씀만 들으면 우리는 사랑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냐?고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한 예를 알고 있습니다. 그 단적인 예가 ‘사랑의 원자탄’의 대상인 손양원 목사님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자기 두 아들을 죽인 자를 양자로 입양하였습니다. 이것은 정말 말도 안됩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우리를 사랑하사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의 그 십자가 사랑에 강력히 붙들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죽어 마땅한 우리를 살리신 예수님의 그 십자가 사랑을 알고 날마다 그 사랑에 붙들릴 때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의 능력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이 지금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두고 있는 이 시점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로 가고 계십니다. 그 길은 하나님의 아들이 죽는 길입니다. 그리고 그 길만이 죄로 죽을 자기 백성을 구원하고 살리는 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그 사랑에 붙들린바 되고 그 사랑을 믿으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제3장. 과부의 헌금(38-44)
18-27절에서 산 자의 하나님에 대한 말씀을 보았습니다. 이 말씀에서 생각나는 노래 가사가 하나 있습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라고 들어보셨지요! 이 곡은 민중가요입니다. 저도 대학 때 아무 생각 없이 따라 불렀던 기억이 있습니다. 여기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산자여 따르라고 합니다. 여기서 산 자란 독재에 항거하여 민주주의를 실천하려는 자를 산 자로 봅니다. 현실에 안주하며 기득권에 빌붙어 살려는 자를 죽은 자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민주주의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고 해서 산 자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산 자란 믿음의 사람을 산 자로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이라고 하니 또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내가 살아있는 주체로서 내가 믿는 믿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믿음도 역시 성경은 죽은 자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오늘 두 본문을 통하여 산자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볼 수가 있습니다. 먼저 38-40절에서 예수님은 서기관들을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서기관들을 삼가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38-40)고 하십니다. 그들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좋아했고, 종교적인 순결을 상징하는 흰 아마포 옷을 종교적인 책무를 수행할 때뿐만 아니라 시장 같은 곳에서도 입고 다녔습니다. 자신들을 권세 있는 사람으로 인정하고 존경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입니다. 서기관들이 왜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것입니까? 경건한 사람들로 인정되었기에 사람들이 유산을 맡기기도 하고 재산을 관리하게도 하였습니다. 마치 변호사처럼 일을 맡고서 관리를 제대로 해주는 것이 아니라 만만한 과부들의 재산을 삼켜버린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기도할 때는 아주 거창하게 청산유수로 길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외식으로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지금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우리에게도 이런 모습이 다 있습니다. 누구나 권세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존경받고 싶습니다. 그런데 형편이 그렇게 안 될 뿐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러면 산 자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고 자신도 존경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여기는 서기관들이 아니라 가난한 한 과부의 모습에서 보게 됩니다. 41-44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헌금함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십니다. 아예 작정하고 헌금하는 모습을 보시는 것입니다.
헌금함은 성전에 있는 헌금을 넣는 상자로 여인의 뜰에 놓여있었습니다. 이 헌금함은 돈을 넣으면 소리가 들리는 그런 상자입니다. 많이 넣는 사람은 와르르 쏟아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부자들은 와서 많은 돈을 넣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한 과부는 두 렙돈을 넣었습니다. 렙돈은 그리스의 최소 동전 단위이고, 한 렙돈이 한 데나리온의 128분의 1임을 감안하면 과부는 오백 원짜리 동전 두 개를 헌금한 것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여인이 한 헌금이 많은 돈을 헌금한 부자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의 헌금보다 더 많이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 과부의 헌금을 가장 많다고 하신 것입니까? 부자들은 그들의 소유가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은 재산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과부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습니다. 생활비 전부를 드리면 내일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내일은 내일에 맡기는 것입니다. 내일은 우리의 소관이 아닌 것입니다. 공중에 나는 새처럼, 들에 피는 꽃처럼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사는 믿음인 것입니다. 경건하다고 여기며 사람들에게 인사를 받고 다니는 서기관들은 과부의 재산을 삼키는데 가난한 이 과부는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하나님께 바친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오늘 우리에게 이 말씀은 무엇을 전하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사실 이 이름도 없는 가난한 과부가 그렇게 헌금을 하였기에 그 후로는 축복을 받아 부자가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런 이야기가 있다면 헌금을 더 열심히 할텐데 말이지요.
짐작컨대 이 가난한 과부는 그 이후로도 날마다 일용을 양식을 주시는 주님을 믿고 살았을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바로 산 자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이런 산 자의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까? 산 자의 하나님을 믿고 있다면 이런 과부의 모습이 나올 텐데 우리는 이런 믿음이 없기에 매일 염려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하면서 살아갑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다면서 어떤 증거를 보이려고 하고 있습니까?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특별한 옷을 입고 시장에서 문안인사를 받으며 어떤 모임에 가더라도 높은 자리에 앉는 그런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이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한 가난한 과부 그래서 헌금할 것도 없어서 생활비 전부를 넣은 그런 모습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우리는 다 전자가 되고 싶은 사람입니다. 가난한 과부가 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에서 버림받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확증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는 가난한 과부도 과분한 은혜에 감사하며 내일을 주님께 맡기고 사는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임을 살펴보았습니다. 또한 첫째 되는 계명이 무엇인지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날마다의 삶 속에서 산 자의 하나님을 기억하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사하는 가운데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과부와 같이 산 자의 하나님을 믿으므로 은혜에 대한 감사가 넘쳐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마가복음 12:18-44
요절 / 마가복음 12:29,30
첫째 되는 계명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오늘 말씀은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과의 부활논쟁과 첫째 되는 계명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모르시는 분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계십니다. 이 시점에 오늘 말씀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지 혹시 고민해 보셨습니까? 이 고민을 기초로 오늘 말씀의 의미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제1장. 산 자의 하나님(18-27)
18-23절을 보십시오.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물었습니다. 칠 형제가 있는데 장남이 후사가 없이 죽고 형수가 남았는데 그 둘째가 결혼하였다가 또 후사가 없이 죽고 해서 마지막 일곱까지 다 죽었을 때에 부활하면 그 여인은 누구의 아내가 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사두개인이 질문한 것은 시형제 결혼법으로 인한 부활의 모순입니다. 시형제 결혼법은 형이 결혼하여 후손이 없이 죽으면 동생이 형의 아내와 결혼하여 형의 가문을 이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사두개인의 문제 제기에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을 의논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 (24-27).
예수님의 답은 사두개인들이 부활에 대해 오해하였다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오해의 원인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는데 있습니다. 그러면 사두개인들이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모른다고 말씀하신 의미가 무엇일까요? 성경을 모른다는 것은 성경에 어떤 내용이 있는지를 모른다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의미를 모른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에 어떤 내용이 있는지 잘 안다고 해도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미를 모른다면 그는 성경을 모르는 사람인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우리가 보지 못하는 영의 세계로 인도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나를 중심으로 하여 성경을 이해합니다. 나의 복과 나의 구원에 중점을 두고 성경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무엇입니까? 내 중심으로 사는 것 밖에 모르는 우리를 간섭하시고 다스리셔서 영적인 세계를 위해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내 중심으로 사는 것이 죄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의 세계로 끌어가십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를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 죽음이 없는 산자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중심으로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 또한 자기 육체와 구원을 위한 능력으로 받아들입니다. 이처럼 자기중심에 매어 있기 때문에 부활의 세계에서의 ‘나’의 문제에만 집중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두개인들이 제기했던 결혼 문제와 같은 의문이 제기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출3:6절 말씀에 근거하여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산 자의 하나님이라면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에서 아브라함은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라는 뜻이 됩니다. 이삭과 야곱 또한 동일합니다. 그들은 분명 육신으로는 죽은 자이지만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죽은 자가 아니라 산자입니다. 어떻게 죽은 자를 가지고 산 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육신이 죽은 다음에 다시 살아나는 방식의 부활을 생각합니다. 나사로처럼 무덤에 장사 되었다가 예수님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을 부활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부활은 육신이 생존해 있는 현재와는 상관이 없는 부활일 수밖에 없습니다. 육신이 죽어야 가능한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활을 말하는 많은 사람들이 부활을 죽음 이후에 일어날 먼 나중의 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산 자의 하나님을 믿는 신자는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이미 산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아니하리라”(요11:25-26)고 하셨습니다. 이에 우리는 이렇게 반문할 수 있습니다. ‘아니 예수님을 믿은 자도 다 죽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었다는 것과 성경에서 죽었다는 것은 다른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죽음이란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과 단절되어 있는 상태를 죽음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죄와 사망아래 놓여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이 죄와 사망에서 벗어난 사람입니다. 다시는 죽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승리하심으로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하는 곳에서 생명과 의가 왕 노릇하는 곳으로 옮겨놓으신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더 이상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을 전부인양 살아갈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안과 밖으로 산 자와 죽은 자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예수님과 사두개인과의 부활논쟁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앞두고 가지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었습니다.” (표준 새 번역 갈 6:14) 이런 사람이 산 자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제2장. 첫째 계명(28-34)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서 그들이 생각하는 부활사상의 논리적 모순을 질문했던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의 답변에 더 이상 할 말을 잃어버립니다. 그러자 서기관 중 한 사람이 나아와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28) 이것은 ‘우리 신앙생활의 핵심이 무엇인가?’ 하는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29-31). 예수님의 이 답변은 신명기 6:4-5절과 레위기 19:17-18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전 인격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핵심이며 우리 신앙생활의 핵심입니다. 우리 자신이 행복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하면 됩니다.
오늘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의미에서 아주 조금만 더 나아가보려고 합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을 첫째 되는 계명으로 말씀하시고, 이웃 사랑을 둘째 되는 계명으로 말씀하셨을까요? 단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계명이니까 그대로 지키고 실천하라는 의미로 하신 말씀일까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계명 중에 첫째, 둘째 계명이라는 것은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전하고 있는 것이 사랑이라는 뜻이 됩니다. 따라서 비록 표면적으로 말씀을 실천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도 사랑에서 벗어나 있다면 말씀을 실천하지 않는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우리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의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은 전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 외에는 사랑의 대상이 없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오직 하나님께로만 집중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 자신까지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에 대해 사람들은 반발할 것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자기 자신까지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만 사랑할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거기다가 하나님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는 것이나 이웃을 사랑하는 그 비중이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에 대해 우리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습니다. 감히 실천하겠다는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당연히 인간은 하나님의 율법을 실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 앞에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죄인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사랑할 능력이 없다는 말을 하면 ‘그럼 사랑하지 말라는 말이냐?’ 라고 반발하는 사람도 있지만 도대체 어떻게 사랑하겠다는 것인지 저는 그것이 의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대로 사랑할 수는 없지만 사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면 지금보다는 좀 더 나은 관계로 개선될 수 있지 않느냐?’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맞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사랑하려고 애를 쓴다면 좀 더 나은 관계로 개선될 수도 있습니다. 아니 개선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사랑이라는 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뜻은 인간관계의 개선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계명을 통해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십니다. 이 사랑의 계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확증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사랑의 의미를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새롭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증거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신자가 예수님의 피 흘리신 은혜를 알고 그 은혜에 대한 감사함이 있다면 자신이 어떤 처지에 있든 예수님으로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비록 힘든 처지라고 해도 나의 죄 때문에 피 흘려죽으신 예수님으로 감사하고 사랑하는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 역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모습으로 드러내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하기에 우리가 실천해야 할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실천할 수도 없습니다. 믿음이 우리를 십자가에 확증된 주의 사랑에 붙들어 놓을 것이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끌어 갈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지금까지의 말씀만 들으면 우리는 사랑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냐?고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한 예를 알고 있습니다. 그 단적인 예가 ‘사랑의 원자탄’의 대상인 손양원 목사님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자기 두 아들을 죽인 자를 양자로 입양하였습니다. 이것은 정말 말도 안됩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우리를 사랑하사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의 그 십자가 사랑에 강력히 붙들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죽어 마땅한 우리를 살리신 예수님의 그 십자가 사랑을 알고 날마다 그 사랑에 붙들릴 때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의 능력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이 지금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두고 있는 이 시점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로 가고 계십니다. 그 길은 하나님의 아들이 죽는 길입니다. 그리고 그 길만이 죄로 죽을 자기 백성을 구원하고 살리는 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그 사랑에 붙들린바 되고 그 사랑을 믿으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제3장. 과부의 헌금(38-44)
18-27절에서 산 자의 하나님에 대한 말씀을 보았습니다. 이 말씀에서 생각나는 노래 가사가 하나 있습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라고 들어보셨지요! 이 곡은 민중가요입니다. 저도 대학 때 아무 생각 없이 따라 불렀던 기억이 있습니다. 여기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산자여 따르라고 합니다. 여기서 산 자란 독재에 항거하여 민주주의를 실천하려는 자를 산 자로 봅니다. 현실에 안주하며 기득권에 빌붙어 살려는 자를 죽은 자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민주주의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고 해서 산 자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산 자란 믿음의 사람을 산 자로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이라고 하니 또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내가 살아있는 주체로서 내가 믿는 믿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믿음도 역시 성경은 죽은 자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오늘 두 본문을 통하여 산자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볼 수가 있습니다. 먼저 38-40절에서 예수님은 서기관들을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서기관들을 삼가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38-40)고 하십니다. 그들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좋아했고, 종교적인 순결을 상징하는 흰 아마포 옷을 종교적인 책무를 수행할 때뿐만 아니라 시장 같은 곳에서도 입고 다녔습니다. 자신들을 권세 있는 사람으로 인정하고 존경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입니다. 서기관들이 왜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것입니까? 경건한 사람들로 인정되었기에 사람들이 유산을 맡기기도 하고 재산을 관리하게도 하였습니다. 마치 변호사처럼 일을 맡고서 관리를 제대로 해주는 것이 아니라 만만한 과부들의 재산을 삼켜버린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기도할 때는 아주 거창하게 청산유수로 길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외식으로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지금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우리에게도 이런 모습이 다 있습니다. 누구나 권세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존경받고 싶습니다. 그런데 형편이 그렇게 안 될 뿐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러면 산 자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고 자신도 존경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여기는 서기관들이 아니라 가난한 한 과부의 모습에서 보게 됩니다. 41-44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헌금함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십니다. 아예 작정하고 헌금하는 모습을 보시는 것입니다.
헌금함은 성전에 있는 헌금을 넣는 상자로 여인의 뜰에 놓여있었습니다. 이 헌금함은 돈을 넣으면 소리가 들리는 그런 상자입니다. 많이 넣는 사람은 와르르 쏟아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부자들은 와서 많은 돈을 넣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한 과부는 두 렙돈을 넣었습니다. 렙돈은 그리스의 최소 동전 단위이고, 한 렙돈이 한 데나리온의 128분의 1임을 감안하면 과부는 오백 원짜리 동전 두 개를 헌금한 것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여인이 한 헌금이 많은 돈을 헌금한 부자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의 헌금보다 더 많이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 과부의 헌금을 가장 많다고 하신 것입니까? 부자들은 그들의 소유가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은 재산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과부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습니다. 생활비 전부를 드리면 내일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내일은 내일에 맡기는 것입니다. 내일은 우리의 소관이 아닌 것입니다. 공중에 나는 새처럼, 들에 피는 꽃처럼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사는 믿음인 것입니다. 경건하다고 여기며 사람들에게 인사를 받고 다니는 서기관들은 과부의 재산을 삼키는데 가난한 이 과부는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하나님께 바친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오늘 우리에게 이 말씀은 무엇을 전하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사실 이 이름도 없는 가난한 과부가 그렇게 헌금을 하였기에 그 후로는 축복을 받아 부자가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런 이야기가 있다면 헌금을 더 열심히 할텐데 말이지요.
짐작컨대 이 가난한 과부는 그 이후로도 날마다 일용을 양식을 주시는 주님을 믿고 살았을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바로 산 자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이런 산 자의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까? 산 자의 하나님을 믿고 있다면 이런 과부의 모습이 나올 텐데 우리는 이런 믿음이 없기에 매일 염려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하면서 살아갑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다면서 어떤 증거를 보이려고 하고 있습니까?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특별한 옷을 입고 시장에서 문안인사를 받으며 어떤 모임에 가더라도 높은 자리에 앉는 그런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이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한 가난한 과부 그래서 헌금할 것도 없어서 생활비 전부를 넣은 그런 모습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우리는 다 전자가 되고 싶은 사람입니다. 가난한 과부가 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에서 버림받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확증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는 가난한 과부도 과분한 은혜에 감사하며 내일을 주님께 맡기고 사는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임을 살펴보았습니다. 또한 첫째 되는 계명이 무엇인지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날마다의 삶 속에서 산 자의 하나님을 기억하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사하는 가운데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과부와 같이 산 자의 하나님을 믿으므로 은혜에 대한 감사가 넘쳐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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