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2018 막21강(11:1-25)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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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마가복음 제 21 강
말씀 / 마가복음 11:1-25
요절 / 마가복음 11:9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하나님께서 지난주 여름수양회를 통해 풍성한 말씀의 은혜를 주시고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새롭게 허락하여 주심을 감사합니다. 말씀을 준비하기 위해 수고하신 말씀강사님들과 프로그램 준비에 헌신하신 학생들과 섬기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이제부터는 수양회에서 받은 말씀을 굳게 지키고 승리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입니다. 예수님은 이제까지는 자신을 인자로 나타내셨습니다. 그는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입성을 준비하시는 예수님은 자신을 가르켜 “주”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수많은 사람들이 이 예수님을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외치며 열렬히 환영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주의 이름으로 오셔서 하신 일이 무엇인지와 그것이 영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배울 수 있길 기도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우리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섬길 수 있길 기도합니다.
제1장.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1-10)
1-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예루살렘 가까이 감람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제자 중 두 사람을 보내시면서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맞은편 마을에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는 그것을 어떻게 아셨을까요? 혹시 맞은편 마을에 다른 제자들을 미리 보내셔서 누구 집에 나귀새끼가 있는지 알아보신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당할 일을 모두 알고 계셨습니다. 가룟 유다가 그를 배반할 것과 수제자 베드로가 그를 세 번 부인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는 대제사장들과 종교지도자들에게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을 아셨습니다. 그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아셨습니다. 그는 맞은편 마을에 나귀새끼를 매어놓은 집이 어디있는지도 이미 아셨습니다. 주되신 예수님은 만물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 우리가 아뢰기도 전에 그는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는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기에 우리를 모든 것을 이해하실 수 있고 우리를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을 믿을 때 우리는 그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그가 모든 것을 알고 계심을 믿었기에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입니다.
그런데 나귀새끼의 주인이 왜 이렇게 하느냐 물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이것도 아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할 답변까지 주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나귀주인에게 할 답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가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면 나귀주인이 흔쾌히 내어 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가 쓰시겠다”는 말씀이 영어로는 "The Lord needs it"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주님이 그것을 필요로 하신다는 뜻입니다. “주가 쓰시겠다” 말씀하신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그는 만물을 창조하시며 만물을 주관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모든 것이 그의 것입니다. 나귀도 그가 창조하셨고 그의 것입니다. 그는 모든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그렇기에 “주가 쓰시겠다”고 하면 나귀주인도 내어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나귀 주인은 무엇입니까? 그는 잠시 주님의 것을 맡아 돌보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렇기에 “주가 쓰시겠다”고 하시면 마땅히 내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피조물로서 주님을 섬기는 마땅한 태도입니다.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는 우리에게 주님을 섬기는 바른 자세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마리아를 예수님을 잉태하는 성모로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이를 알렸을 때 그녀는 천사에게 “왜 나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그렇게 하셨느냐”며 따지지 않았습니다. 혹은 정혼한 요셉과 상의해 보고 부모님들과 상의해보고 결정하겠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수태고지를 받았을 때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니이다”(눅1:38) 그녀는 주되신 하나님과 그녀가 주님의 것이라는 자기인식이 분명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녀는 주가 쓰겠다고 하실 때 자신을 온전히 내어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그녀는 만세에 복이 있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의 뜻대로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쓰임받은 어린나귀는 역사상 가장 귀한 나귀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그의 주권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우리에게 강요하시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우리가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이야 말로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순종을 통해 큰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쓰고자 하실 때 우리 자신을 내어드릴 수 있는 담대한 믿음을 허락해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가지신 왕 되신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데 원하시면 무엇이든 타실 수 있는데 하필이면 왜 나귀새끼를, 그것도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를 타고자 하신 것일까요?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사람들이 볼 때 폼도 안 나고 우스꽝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놀림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나귀새끼를 타고자 하신 것일까요?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 이유는 그에 대해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예언하셨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슥9:9) 예수님은 자신의 원하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지만 그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나귀새끼를 타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그가 나귀새끼를 타도록 하신 것입니까? 만일 어떤 왕이 코끼리를 타고 입성한다면 그것은 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소를 타고 입성한다면 부를 상징합니다. 말을 타고 입성한다면 권위를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나귀새끼는 무엇을 상징합니까? 그것은 겸손과 평화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나귀새끼를 타심으로 자신을 겸손과 평화의 왕으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겸손과 평화의 왕이십니다. 그는 죄인들을 섬기기 위해 죽기까지 자기를 낮추셨습니다. 그는 모든 막힌 담을 허무시고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시기 위해 자기를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진정한 평화는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내적인 평화입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입니다. 어린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우리를 겸손과 평화로 다스려 주십니다.
8-1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자 많은 사람은 자기 겉옷과 다른 이들은 밭에서 벤 나무 가지를 길에 펴며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를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하며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그들은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왜 이토록 열렬히 환영했을까요? 그들은 예수님을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로 영접했기 때문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는 무슨 뜻입니까? 이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의미합니다. 구체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시는 이, 하나님의 이름을 들어내기 위해 오시는 이란 뜻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오셔서 잃어버린 다윗 왕국의 영광을 회복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습니다. 이 믿음은 그들이 조상 때부터 오랫동안 가져왔던 믿음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믿음이 예수님을 통해 성취될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열렬히 환호하며 예수님을 영접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은 하나님의 뜻대로 믿는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자기들의 뜻대로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의 뜻을 이루어주지 않으시자 왕 되신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빌라도를 협박하는 폭도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다윗 왕국에서는 선량한 시민이요 애국자였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들은 그들의 왕을 대적하고 배역한 대역 죄인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믿지 않을 때 우리의 믿음은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한 세속적인 종교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역사상 신자들을 극렬히 핍박했던 사람들은 실상 불신자들보다는 자기의 뜻을 이루고자 한 세속적인 신자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의 뜻대로 믿는 것인지 자기 뜻대로 믿는 것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도 얼마든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예루살렘의 백성들처럼 우리의 왕 되신 주님을 배반하고 대적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왕 되신 주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믿음을 수 있도록 우리의 믿음을 도와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주의 이름으로 오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나귀새끼를 타셨습니다. 주가 쓰시겠다고 할 때 나귀주인은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했습니다. 아무도 태워 본적인 없는 어린나귀가 예수님을 태우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거기다 수많은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고 나뭇가지를 흔들 때 어린나귀에게 이런 상황은 무척이나 무서웠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태운 어린나귀는 힘들다 주저앉지도 않고 무섭다 도망가지도 않고 묵묵히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어찌보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어린나귀 한 마리가 수많은 예루살렘 사람들보다도, 제자들보다도 더 나은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명심해야할 것은 하나님은 당신의 역사를 결코 나귀에게 맡기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신 예수님은 비록 더디 믿고 마음이 완악할지라도 당신의 제자들을 역사의 주역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는 그들을 통해 세상 만민을 구원코자 하셨습니다. 이것이 주의 이름으로 오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께는 예수님을 태운 어린 나귀가 얼마나 큰 기쁨이 되었을까요? 하물며 비록 만 가지가 부족할지라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자기를 드려 하나님의 뜻을 섬기고자 할 때 하나님은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하나님은 이 기쁨을 이렇게 노래하셨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3:17) 주의 이름으로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심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이야 말로 가장 존귀하고 아름다운 삶임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예수님을 흠모하고 사랑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그의 영광을 들어내신 우리 주님의 존귀하고 아름다운 삶을 일생 배우고 따라갈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제2장.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11-19)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날이 저물자 베다니로 물러나셨다가 이튿날 베다니에서 나오실 때 시장하셨습니다. 그런데 멀리서 보니 무화과나무 하나가 보이는데 잎사귀가 무성했습니다. 그래서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는데 가서 보니 잎사귀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고 하시며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배가 고파서 너무 민감해지신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보통 무화과는 8-9월에 수확을 합니다. 그러나 때때로 잎사귀와 함께 열리는 열매도 있습니다. 이 무화과 열매를 팔레스타인에 사는 아랍인들은 '타크쉬(taqsh)'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은 이 열매를 기대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나무는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렇더라도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어린 나귀를 타고 겸손과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은 성전을 정화하시는 예수님을 통해 해석되어야만 이해가 됩니다. 11절을 보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먼저 성전의 모든 것을 둘러 보셨습니다. 당시 성전은 성전제사에 쓸 제물을 파는 장사꾼들의 소리와 짐승들의 울음소리로 가득했습니다. 이는 거룩한 성전이 아니라 마치 시장과도 같았습니다. 본래 성전에 쓸 제물은 성전 밖에서 구매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성전 안으로 끌어들인 것은 당시 대제사장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먼 곳에서 오는 순례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그들의 종교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성전에서 비즈니스를 하게 한 것입니다. 찬란한 금빛으로 빛나는 성전은 겉은 화려했지만 그 속은 탐욕과 거짓으로 부패해 있었습니다. 성전은 사람들에게는 무엇인가 줄 것 것처럼 기대감을 주지만 사람들은 그곳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이런 성전의 모습은 마치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와 같았습니다. 그렇기에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일은 궁극적으로는 멸망할 예루살렘 성전을 비유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15-19절을 보십시오.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그리고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성전에 대해 가르쳐 말씀하셨습니다. 17절을 읽겠습니다.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신 예수님에 대해 사람들은 많은 오해들을 합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가난한 자들을 위해 비둘기를 파는 자들까지 내쫓으신 것은 너무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이 사건의 본질이 아닙니다. 그는 주의 이름으로 오셔서 이루셔야만 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전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의 이름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통해 보이는 성전을 파괴하고 보이지 않는 성전을 세우고자 하셨습니다. 보이지 않는 성전은 자기 백성을 위해 화목제물로 자기 목숨을 내어 주신 바로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그는 만민이 그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아와 기도하는 집 곧 만민이 기도하는 성전이 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주의 이름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이루어야할 하나님의 사명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명을 온전히 이루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비전으로 충만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집을 향한 주님의 열정이었던 것입니다.
성전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본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교회,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교회는 교인들을 모아놓고 그들의 헌금으로 장사하는 비즈니스에 불과합니다. 비즈니스로 전락한 교회는 아무런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도리어 세상 사람들에게 근심과 비난거리가 될 뿐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의 모습이 어느 정도 그런 모습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혹 무엇을 얻을까하여 교회에 나오지만 부패한 목회자들과 거짓말하는 교인들 때문에 상처받고 실족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교회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사도바울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13:5)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교회는 강도의 굴혈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이 주님이 되지 않고 목사가 주님이 되고 장로가 주님이 되는 교회는 버림을 받은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신앙생활하는 자는 버림을 받은 신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자기의 뜻을 이루려고 주의 이름을 파는 강도가 될 수 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신 예수님은 만민이 하나님께 나아와 기도할 수 있는 성전이 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는 이를 위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만을 위한 성전을 폐하고 만민을 위한 성전을 바로 세우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하나님의 비전 가운데 장사하는 자들의 상을 엎으신 것입니다.
본래 성전은 선한 것이고 거룩한 것입니다. 성전은 역사상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선한 도구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전은 분명한 한계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성전을 맡은 대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의 죄성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전의 한계입니다. 그렇기에 성전은 부패할 수 밖에 없고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의 이름으로 오신 예수님을 통해 보이는 성전을 폐하시고 보이지 않는 성전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만민을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비전을 지금도 변함없이 이루고 계십니다. 이 성전은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고 친히 하나님의 손으로 지으신 성전입니다. 우리는 이 성전을 하나님의 나라에 가서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는 것처럼 분명히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보이지 않는 하늘 성전의 모형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본질은 죄인들의 모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날의 교회도 하나님의 나라를 체험하는데는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교회에 무엇이 있을까 기대하는 것은 도리어 우리를 실망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봐야한 진정한 교회의 모습은 보이는 교회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교회 곧 예수님입니다. 보이는 교회는 우리의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보이는 교회는 실상 섬김의 대상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교회의 개혁을 부르짖기에 앞서 교회를 섬김의 대상으로 보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먼저 돌아 봐야 합니다. 그래야만 예수님처럼 상을 엎더라도 제대로 엎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교회의 본질을 깨닫게 하시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예수님과 같이 사랑하고 자기를 드려 섬기게 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제3장. 하나님을 믿으라(20-25)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이튿날 예수님과 제자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저주한 무화과나무가 뿌리째로 마른 것을 보고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21) 베드로는 무화과나무를 뿌리째로 마르게 한 예수님의 능력이 어디서 온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그것에 대한 예수님은 대답은 무엇입니까? 2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예수님의 답변은 “하나님을 믿으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통해 베드로에게 모든 능력의 원천은 하나님이심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이사야서2:2,3절을 보면 성전을 향한 하나님의 비전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 들 것이라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예루살렘 성전은 산 위에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서게 될 비전, 만방이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하나님의 전에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 길로 행하게 될 비전, 이 하나님의 비전은 여호와의 전의 산을 향한 하나님의 오랜 비전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산을 들어 바다에 던지고자 하십니다. 이는 산에 있던 성전의 멸망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을 폐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비전은 보이는 성전이 아닌 주의 이름으로 오신 예수님을 통해 완성될 보이지 않는 성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여호와의 산은 특정한 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전되신 예수님이 계신 곳, 그의 말씀이 선포되는 그곳은 어디나 여호와의 산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하나님의 비전을 믿으셨습니다. 그는 이 믿음 가운데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이 믿음 가운데 성전을 정화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태산과 같이 불가능해 보이는 고난과 십자가의 길을 가고자 결단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모든 말씀을 선포하셨고 모든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우리의 성전이 되시기 위해 고난과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신 예수님을 통해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산보다 크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산이 하나님보다 크다면 하나님은 산을 옮기실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산보다 크시기에 능히 산을 옮기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보기에는 하나님보다 세상의 산들이 더 크게 보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이 세상에 하나님보다 더 큰 문제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의 문제는 실상 단 하나 뿐입니다. 그 하나의 문제는 바로 산보다 크신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문제도 태산처럼 커 보입니다. 우리의 사명도 태산처럼 커 보입니다. 우리의 진로문제와 장래문제도 태산처럼 커 보입니다. 이렇게 산이 커 보이면 하나님은 산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에게 우리가 가져야할 믿음에 대해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십니다. 24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예수님은 무엇이든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태산같은 문제 앞에서 기도할 엄두를 내지 못하곤 합니다. 기도하면서도 과연 이루어질까 의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이 무엇이든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 다음에는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고 하십니다. 이루어진 기도는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루어진 기도는 이미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믿으라는 것은 현재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셨음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놀라운 약속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들으시지만 내가 기도한대로 들어주지 않으시고 자기 뜻대로 하실 것이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해 놓고도 하나님이 이루어 주시리라는 기대를 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믿어지십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대로 믿는 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가 무엇이든지 기도하면 들어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실상은 우리가 기도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이유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어떤 사람의 말을 잘 들어 줍니까? 우리는 특별히 내가 사랑하고 아주 특별하게 생각하는 사람의 말을 아주 잘 들어 줍니다. 저는 셋째 아들 신우가 무슨 말을 하면 어찌하든 들어주고자 합니다. 제가 이번 주 주일메시지를 맡아서 메시지를 준비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몇 일 동안 끙끙 앓았습니다. 그런데 신우가 이번주 수영장에 가고 싶다고 하며 어린이 집을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빠가 되가지고 아들이 수영장을 가고 싶다는데 이 더위에 수양장을 한번도 데려가 주지 않으면 되겠는가 하는 마음이 들어 결국 어제 수영장을 갖다 왔습니다. 그렇게 했더니 신우의 부탁을 들어줬다는 기쁨에 메시지에 집중이 잘 되었습니다. 제가 이제까지 살면서 이런 경험은 처음 한 것 같습니다. 참 신기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내 마음이 이런데 하나님의 마음은 오죽할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는다고 생각할까요? 이것은 사탄이 우리 마음에 심는 교활한 거짓말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든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는 것을 들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못난 아빠의 마음도 그런데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간절하시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그토록 들어주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오신 예수님의 핏 값으로 사신 당신의 소중한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나를 사랑하시며 특별하게 생각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믿는 것입니다. 기도하라는 것은 바로 이 믿음으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25절을 읽겠습니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기도할 때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는 기도를 하라고 하십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사하여 주신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세우고자 하시는 보이지 않는 성전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성전시대를 사는 유대인들은 죄를 속하려면 제물을 들고 성전에 나아가야 했습니다. 그들의 죄를 위해 제사장이 제사를 지내고 그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성전되신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죄사함을 위해 짐승의 피를 흘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를 중보할 제사장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전되신 예수님께 나아가 주의 이름으로 형제의 죄사함을 위한 기도하면 죄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유대인인 제자들에게는 이를 믿고 기도하는 것이 산을 옮기는 것만큼 어려운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들에게 이 기도를 가르치셨습니다. 또한 이를 통해 산을 옮기는 믿음보다 더 큰 믿음은 용서하는 믿음임을 가르치셨습니다.
저는 주일 말씀을 묵상하며 이 죄인을 구원하시고 택하여 쓰고 계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귀한 것인지를 깨닫고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도운 어린 나귀는 힘들다 하지도 않고 무섭다 도망가지도 않았는데 저는 학생시절 목동생활을 할 때 믿음으로 사는 것을 너무나도 힘들어 했습니다. 그래서 대학을 졸업을 하고 사도훈련을 받고도 힘들다고 목자의 사명을 버리고 군입대를 핑계로 센타를 떠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제 맘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논산신병교육대에서 실시한 신체검사에서 저는 간염판정을 받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저는 그때 하나님께서 제 인생에 간섭하시는 건 좋은데 이건 너무 하지 않느냐고 하면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반발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못난 죄인을 용서하시고 제가 믿을 갖기까지 기다려 주셨습니다. 저는 믿음을 회복한 후에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직장에 들어가기 전까지 풀타임으로 캠퍼스 역사를 열심히 섬겼습니다. 그때 저는 주님께 쓰임 받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깊이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도 이를 잘 까먹고 현실적인 어려움을 태산같이 여기며 믿음 없이 산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제가 최근 직장에서 세무조사를 받으며 큰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사장님께도 많은 질책을 받았고 감봉이라는 인사조치도 받았습니다. 그때 제 안에는 현실의 문제가 태산처럼 보였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참으로 믿음이 없고 못난 죄인에게 주일메시지를 맡기시고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제가 나이 오십이 다되어 퇴직하면 무엇을 해야 하나 하는 두려운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제게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마음에 의심하지 않으면 그대로 되리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주의 이름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친히 제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믿는 자들을 반드시 축복해 주심을 믿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믿음으로 믿음 없는 자가 되지 않고 믿는 자가 되길 기도합니다. 이로써 믿음의 증거를 얻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될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주의 이름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이 무엇이며 그것의 영적인 의미가 무엇인지를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주의 이름으로 오셔서 그의 백성을 섬기시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그는 이를 통해 만민이 그에게 나아와 하나님의 도를 배우며 그의 길로 행하게 될 하나님의 비전이 성취될 것을 믿으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을 때 만민을 구원하기 위해 가셔야할 태산 같은 고난과 십자가의 길을 능히 감당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으심으로 이 땅에 주의 이름으로 오신 당신의 사명을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믿을 때 주의 이름을 위해, 그의 영광을 위해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 내게 범죄한 형제를 용서하고 이 땅에 무너진 예배를 회복하고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는 사명을 능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이를 믿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며 행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일생 예수님처럼 주의 이름을 위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말씀 / 마가복음 11:1-25
요절 / 마가복음 11:9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하나님께서 지난주 여름수양회를 통해 풍성한 말씀의 은혜를 주시고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새롭게 허락하여 주심을 감사합니다. 말씀을 준비하기 위해 수고하신 말씀강사님들과 프로그램 준비에 헌신하신 학생들과 섬기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이제부터는 수양회에서 받은 말씀을 굳게 지키고 승리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입니다. 예수님은 이제까지는 자신을 인자로 나타내셨습니다. 그는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입성을 준비하시는 예수님은 자신을 가르켜 “주”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수많은 사람들이 이 예수님을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외치며 열렬히 환영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주의 이름으로 오셔서 하신 일이 무엇인지와 그것이 영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배울 수 있길 기도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우리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섬길 수 있길 기도합니다.
제1장.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1-10)
1-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예루살렘 가까이 감람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제자 중 두 사람을 보내시면서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맞은편 마을에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는 그것을 어떻게 아셨을까요? 혹시 맞은편 마을에 다른 제자들을 미리 보내셔서 누구 집에 나귀새끼가 있는지 알아보신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당할 일을 모두 알고 계셨습니다. 가룟 유다가 그를 배반할 것과 수제자 베드로가 그를 세 번 부인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는 대제사장들과 종교지도자들에게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을 아셨습니다. 그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아셨습니다. 그는 맞은편 마을에 나귀새끼를 매어놓은 집이 어디있는지도 이미 아셨습니다. 주되신 예수님은 만물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 우리가 아뢰기도 전에 그는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는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기에 우리를 모든 것을 이해하실 수 있고 우리를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을 믿을 때 우리는 그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그가 모든 것을 알고 계심을 믿었기에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입니다.
그런데 나귀새끼의 주인이 왜 이렇게 하느냐 물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이것도 아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할 답변까지 주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나귀주인에게 할 답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가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면 나귀주인이 흔쾌히 내어 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가 쓰시겠다”는 말씀이 영어로는 "The Lord needs it"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주님이 그것을 필요로 하신다는 뜻입니다. “주가 쓰시겠다” 말씀하신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그는 만물을 창조하시며 만물을 주관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모든 것이 그의 것입니다. 나귀도 그가 창조하셨고 그의 것입니다. 그는 모든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그렇기에 “주가 쓰시겠다”고 하면 나귀주인도 내어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나귀 주인은 무엇입니까? 그는 잠시 주님의 것을 맡아 돌보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렇기에 “주가 쓰시겠다”고 하시면 마땅히 내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피조물로서 주님을 섬기는 마땅한 태도입니다.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는 우리에게 주님을 섬기는 바른 자세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마리아를 예수님을 잉태하는 성모로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이를 알렸을 때 그녀는 천사에게 “왜 나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그렇게 하셨느냐”며 따지지 않았습니다. 혹은 정혼한 요셉과 상의해 보고 부모님들과 상의해보고 결정하겠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수태고지를 받았을 때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니이다”(눅1:38) 그녀는 주되신 하나님과 그녀가 주님의 것이라는 자기인식이 분명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녀는 주가 쓰겠다고 하실 때 자신을 온전히 내어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그녀는 만세에 복이 있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의 뜻대로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쓰임받은 어린나귀는 역사상 가장 귀한 나귀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그의 주권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우리에게 강요하시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우리가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이야 말로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순종을 통해 큰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쓰고자 하실 때 우리 자신을 내어드릴 수 있는 담대한 믿음을 허락해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가지신 왕 되신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데 원하시면 무엇이든 타실 수 있는데 하필이면 왜 나귀새끼를, 그것도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를 타고자 하신 것일까요?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사람들이 볼 때 폼도 안 나고 우스꽝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놀림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나귀새끼를 타고자 하신 것일까요?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 이유는 그에 대해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예언하셨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슥9:9) 예수님은 자신의 원하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지만 그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나귀새끼를 타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그가 나귀새끼를 타도록 하신 것입니까? 만일 어떤 왕이 코끼리를 타고 입성한다면 그것은 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소를 타고 입성한다면 부를 상징합니다. 말을 타고 입성한다면 권위를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나귀새끼는 무엇을 상징합니까? 그것은 겸손과 평화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나귀새끼를 타심으로 자신을 겸손과 평화의 왕으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겸손과 평화의 왕이십니다. 그는 죄인들을 섬기기 위해 죽기까지 자기를 낮추셨습니다. 그는 모든 막힌 담을 허무시고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시기 위해 자기를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진정한 평화는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내적인 평화입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입니다. 어린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우리를 겸손과 평화로 다스려 주십니다.
8-1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자 많은 사람은 자기 겉옷과 다른 이들은 밭에서 벤 나무 가지를 길에 펴며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를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하며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그들은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왜 이토록 열렬히 환영했을까요? 그들은 예수님을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로 영접했기 때문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는 무슨 뜻입니까? 이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의미합니다. 구체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시는 이, 하나님의 이름을 들어내기 위해 오시는 이란 뜻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오셔서 잃어버린 다윗 왕국의 영광을 회복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습니다. 이 믿음은 그들이 조상 때부터 오랫동안 가져왔던 믿음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믿음이 예수님을 통해 성취될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열렬히 환호하며 예수님을 영접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은 하나님의 뜻대로 믿는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자기들의 뜻대로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의 뜻을 이루어주지 않으시자 왕 되신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빌라도를 협박하는 폭도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다윗 왕국에서는 선량한 시민이요 애국자였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들은 그들의 왕을 대적하고 배역한 대역 죄인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믿지 않을 때 우리의 믿음은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한 세속적인 종교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역사상 신자들을 극렬히 핍박했던 사람들은 실상 불신자들보다는 자기의 뜻을 이루고자 한 세속적인 신자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의 뜻대로 믿는 것인지 자기 뜻대로 믿는 것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도 얼마든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예루살렘의 백성들처럼 우리의 왕 되신 주님을 배반하고 대적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왕 되신 주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믿음을 수 있도록 우리의 믿음을 도와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주의 이름으로 오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나귀새끼를 타셨습니다. 주가 쓰시겠다고 할 때 나귀주인은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했습니다. 아무도 태워 본적인 없는 어린나귀가 예수님을 태우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거기다 수많은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고 나뭇가지를 흔들 때 어린나귀에게 이런 상황은 무척이나 무서웠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태운 어린나귀는 힘들다 주저앉지도 않고 무섭다 도망가지도 않고 묵묵히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어찌보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어린나귀 한 마리가 수많은 예루살렘 사람들보다도, 제자들보다도 더 나은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명심해야할 것은 하나님은 당신의 역사를 결코 나귀에게 맡기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신 예수님은 비록 더디 믿고 마음이 완악할지라도 당신의 제자들을 역사의 주역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는 그들을 통해 세상 만민을 구원코자 하셨습니다. 이것이 주의 이름으로 오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께는 예수님을 태운 어린 나귀가 얼마나 큰 기쁨이 되었을까요? 하물며 비록 만 가지가 부족할지라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자기를 드려 하나님의 뜻을 섬기고자 할 때 하나님은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하나님은 이 기쁨을 이렇게 노래하셨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3:17) 주의 이름으로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심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이야 말로 가장 존귀하고 아름다운 삶임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예수님을 흠모하고 사랑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그의 영광을 들어내신 우리 주님의 존귀하고 아름다운 삶을 일생 배우고 따라갈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제2장.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11-19)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날이 저물자 베다니로 물러나셨다가 이튿날 베다니에서 나오실 때 시장하셨습니다. 그런데 멀리서 보니 무화과나무 하나가 보이는데 잎사귀가 무성했습니다. 그래서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는데 가서 보니 잎사귀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고 하시며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배가 고파서 너무 민감해지신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보통 무화과는 8-9월에 수확을 합니다. 그러나 때때로 잎사귀와 함께 열리는 열매도 있습니다. 이 무화과 열매를 팔레스타인에 사는 아랍인들은 '타크쉬(taqsh)'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은 이 열매를 기대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나무는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렇더라도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어린 나귀를 타고 겸손과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은 성전을 정화하시는 예수님을 통해 해석되어야만 이해가 됩니다. 11절을 보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먼저 성전의 모든 것을 둘러 보셨습니다. 당시 성전은 성전제사에 쓸 제물을 파는 장사꾼들의 소리와 짐승들의 울음소리로 가득했습니다. 이는 거룩한 성전이 아니라 마치 시장과도 같았습니다. 본래 성전에 쓸 제물은 성전 밖에서 구매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성전 안으로 끌어들인 것은 당시 대제사장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먼 곳에서 오는 순례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그들의 종교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성전에서 비즈니스를 하게 한 것입니다. 찬란한 금빛으로 빛나는 성전은 겉은 화려했지만 그 속은 탐욕과 거짓으로 부패해 있었습니다. 성전은 사람들에게는 무엇인가 줄 것 것처럼 기대감을 주지만 사람들은 그곳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이런 성전의 모습은 마치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와 같았습니다. 그렇기에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일은 궁극적으로는 멸망할 예루살렘 성전을 비유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15-19절을 보십시오.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그리고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성전에 대해 가르쳐 말씀하셨습니다. 17절을 읽겠습니다.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신 예수님에 대해 사람들은 많은 오해들을 합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가난한 자들을 위해 비둘기를 파는 자들까지 내쫓으신 것은 너무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이 사건의 본질이 아닙니다. 그는 주의 이름으로 오셔서 이루셔야만 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전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의 이름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통해 보이는 성전을 파괴하고 보이지 않는 성전을 세우고자 하셨습니다. 보이지 않는 성전은 자기 백성을 위해 화목제물로 자기 목숨을 내어 주신 바로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그는 만민이 그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아와 기도하는 집 곧 만민이 기도하는 성전이 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주의 이름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이루어야할 하나님의 사명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명을 온전히 이루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비전으로 충만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집을 향한 주님의 열정이었던 것입니다.
성전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본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교회,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교회는 교인들을 모아놓고 그들의 헌금으로 장사하는 비즈니스에 불과합니다. 비즈니스로 전락한 교회는 아무런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도리어 세상 사람들에게 근심과 비난거리가 될 뿐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의 모습이 어느 정도 그런 모습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혹 무엇을 얻을까하여 교회에 나오지만 부패한 목회자들과 거짓말하는 교인들 때문에 상처받고 실족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교회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사도바울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13:5)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교회는 강도의 굴혈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이 주님이 되지 않고 목사가 주님이 되고 장로가 주님이 되는 교회는 버림을 받은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신앙생활하는 자는 버림을 받은 신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자기의 뜻을 이루려고 주의 이름을 파는 강도가 될 수 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신 예수님은 만민이 하나님께 나아와 기도할 수 있는 성전이 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는 이를 위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만을 위한 성전을 폐하고 만민을 위한 성전을 바로 세우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하나님의 비전 가운데 장사하는 자들의 상을 엎으신 것입니다.
본래 성전은 선한 것이고 거룩한 것입니다. 성전은 역사상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선한 도구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전은 분명한 한계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성전을 맡은 대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의 죄성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전의 한계입니다. 그렇기에 성전은 부패할 수 밖에 없고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의 이름으로 오신 예수님을 통해 보이는 성전을 폐하시고 보이지 않는 성전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만민을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비전을 지금도 변함없이 이루고 계십니다. 이 성전은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고 친히 하나님의 손으로 지으신 성전입니다. 우리는 이 성전을 하나님의 나라에 가서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는 것처럼 분명히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보이지 않는 하늘 성전의 모형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본질은 죄인들의 모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날의 교회도 하나님의 나라를 체험하는데는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교회에 무엇이 있을까 기대하는 것은 도리어 우리를 실망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봐야한 진정한 교회의 모습은 보이는 교회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교회 곧 예수님입니다. 보이는 교회는 우리의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보이는 교회는 실상 섬김의 대상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교회의 개혁을 부르짖기에 앞서 교회를 섬김의 대상으로 보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먼저 돌아 봐야 합니다. 그래야만 예수님처럼 상을 엎더라도 제대로 엎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교회의 본질을 깨닫게 하시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예수님과 같이 사랑하고 자기를 드려 섬기게 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제3장. 하나님을 믿으라(20-25)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이튿날 예수님과 제자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저주한 무화과나무가 뿌리째로 마른 것을 보고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21) 베드로는 무화과나무를 뿌리째로 마르게 한 예수님의 능력이 어디서 온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그것에 대한 예수님은 대답은 무엇입니까? 2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예수님의 답변은 “하나님을 믿으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통해 베드로에게 모든 능력의 원천은 하나님이심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이사야서2:2,3절을 보면 성전을 향한 하나님의 비전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 들 것이라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예루살렘 성전은 산 위에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서게 될 비전, 만방이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하나님의 전에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 길로 행하게 될 비전, 이 하나님의 비전은 여호와의 전의 산을 향한 하나님의 오랜 비전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산을 들어 바다에 던지고자 하십니다. 이는 산에 있던 성전의 멸망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을 폐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비전은 보이는 성전이 아닌 주의 이름으로 오신 예수님을 통해 완성될 보이지 않는 성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여호와의 산은 특정한 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전되신 예수님이 계신 곳, 그의 말씀이 선포되는 그곳은 어디나 여호와의 산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하나님의 비전을 믿으셨습니다. 그는 이 믿음 가운데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이 믿음 가운데 성전을 정화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태산과 같이 불가능해 보이는 고난과 십자가의 길을 가고자 결단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모든 말씀을 선포하셨고 모든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우리의 성전이 되시기 위해 고난과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신 예수님을 통해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산보다 크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산이 하나님보다 크다면 하나님은 산을 옮기실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산보다 크시기에 능히 산을 옮기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보기에는 하나님보다 세상의 산들이 더 크게 보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이 세상에 하나님보다 더 큰 문제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의 문제는 실상 단 하나 뿐입니다. 그 하나의 문제는 바로 산보다 크신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문제도 태산처럼 커 보입니다. 우리의 사명도 태산처럼 커 보입니다. 우리의 진로문제와 장래문제도 태산처럼 커 보입니다. 이렇게 산이 커 보이면 하나님은 산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에게 우리가 가져야할 믿음에 대해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십니다. 24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예수님은 무엇이든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태산같은 문제 앞에서 기도할 엄두를 내지 못하곤 합니다. 기도하면서도 과연 이루어질까 의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이 무엇이든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 다음에는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고 하십니다. 이루어진 기도는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루어진 기도는 이미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믿으라는 것은 현재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셨음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놀라운 약속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들으시지만 내가 기도한대로 들어주지 않으시고 자기 뜻대로 하실 것이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해 놓고도 하나님이 이루어 주시리라는 기대를 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믿어지십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대로 믿는 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가 무엇이든지 기도하면 들어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실상은 우리가 기도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이유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어떤 사람의 말을 잘 들어 줍니까? 우리는 특별히 내가 사랑하고 아주 특별하게 생각하는 사람의 말을 아주 잘 들어 줍니다. 저는 셋째 아들 신우가 무슨 말을 하면 어찌하든 들어주고자 합니다. 제가 이번 주 주일메시지를 맡아서 메시지를 준비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몇 일 동안 끙끙 앓았습니다. 그런데 신우가 이번주 수영장에 가고 싶다고 하며 어린이 집을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빠가 되가지고 아들이 수영장을 가고 싶다는데 이 더위에 수양장을 한번도 데려가 주지 않으면 되겠는가 하는 마음이 들어 결국 어제 수영장을 갖다 왔습니다. 그렇게 했더니 신우의 부탁을 들어줬다는 기쁨에 메시지에 집중이 잘 되었습니다. 제가 이제까지 살면서 이런 경험은 처음 한 것 같습니다. 참 신기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내 마음이 이런데 하나님의 마음은 오죽할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는다고 생각할까요? 이것은 사탄이 우리 마음에 심는 교활한 거짓말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든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는 것을 들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못난 아빠의 마음도 그런데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간절하시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그토록 들어주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오신 예수님의 핏 값으로 사신 당신의 소중한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나를 사랑하시며 특별하게 생각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믿는 것입니다. 기도하라는 것은 바로 이 믿음으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25절을 읽겠습니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기도할 때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는 기도를 하라고 하십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사하여 주신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세우고자 하시는 보이지 않는 성전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성전시대를 사는 유대인들은 죄를 속하려면 제물을 들고 성전에 나아가야 했습니다. 그들의 죄를 위해 제사장이 제사를 지내고 그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성전되신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죄사함을 위해 짐승의 피를 흘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를 중보할 제사장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전되신 예수님께 나아가 주의 이름으로 형제의 죄사함을 위한 기도하면 죄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유대인인 제자들에게는 이를 믿고 기도하는 것이 산을 옮기는 것만큼 어려운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들에게 이 기도를 가르치셨습니다. 또한 이를 통해 산을 옮기는 믿음보다 더 큰 믿음은 용서하는 믿음임을 가르치셨습니다.
저는 주일 말씀을 묵상하며 이 죄인을 구원하시고 택하여 쓰고 계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귀한 것인지를 깨닫고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도운 어린 나귀는 힘들다 하지도 않고 무섭다 도망가지도 않았는데 저는 학생시절 목동생활을 할 때 믿음으로 사는 것을 너무나도 힘들어 했습니다. 그래서 대학을 졸업을 하고 사도훈련을 받고도 힘들다고 목자의 사명을 버리고 군입대를 핑계로 센타를 떠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제 맘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논산신병교육대에서 실시한 신체검사에서 저는 간염판정을 받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저는 그때 하나님께서 제 인생에 간섭하시는 건 좋은데 이건 너무 하지 않느냐고 하면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반발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못난 죄인을 용서하시고 제가 믿을 갖기까지 기다려 주셨습니다. 저는 믿음을 회복한 후에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직장에 들어가기 전까지 풀타임으로 캠퍼스 역사를 열심히 섬겼습니다. 그때 저는 주님께 쓰임 받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깊이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도 이를 잘 까먹고 현실적인 어려움을 태산같이 여기며 믿음 없이 산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제가 최근 직장에서 세무조사를 받으며 큰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사장님께도 많은 질책을 받았고 감봉이라는 인사조치도 받았습니다. 그때 제 안에는 현실의 문제가 태산처럼 보였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참으로 믿음이 없고 못난 죄인에게 주일메시지를 맡기시고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제가 나이 오십이 다되어 퇴직하면 무엇을 해야 하나 하는 두려운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제게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마음에 의심하지 않으면 그대로 되리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주의 이름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친히 제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믿는 자들을 반드시 축복해 주심을 믿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믿음으로 믿음 없는 자가 되지 않고 믿는 자가 되길 기도합니다. 이로써 믿음의 증거를 얻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될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주의 이름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이 무엇이며 그것의 영적인 의미가 무엇인지를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주의 이름으로 오셔서 그의 백성을 섬기시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그는 이를 통해 만민이 그에게 나아와 하나님의 도를 배우며 그의 길로 행하게 될 하나님의 비전이 성취될 것을 믿으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을 때 만민을 구원하기 위해 가셔야할 태산 같은 고난과 십자가의 길을 능히 감당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으심으로 이 땅에 주의 이름으로 오신 당신의 사명을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믿을 때 주의 이름을 위해, 그의 영광을 위해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 내게 범죄한 형제를 용서하고 이 땅에 무너진 예배를 회복하고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는 사명을 능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이를 믿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며 행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일생 예수님처럼 주의 이름을 위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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