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2018 막 20강(10:32-52) 섬기러 오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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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마가복음 제 20 강
말씀 | 마가복음 10:32-52
요절 | 마가복음 10:45
섬기러 오신 예수님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이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섬김의 도를 이제까지와는 다른 차원으로 끌어 올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생활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섬김을 통해서 제자공동체는 다툼과 갈등을 극복하고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심으로 그를 믿는 자들을 죄로부터 구원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맹인 거지 바디매오를 섬기심으로 그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그는 맹인이었지만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심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의 예수님께 대한 믿음은 잘못된 메시아 관과 인간적인 야심으로 영적인 눈이 어두운 제자들에게 눈을 떠서 예수님을 따르라는 메시지를 전해줍니다. 우리도 영적인 눈을 떠서 섬기는 삶의 유익을 배우고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의 길을 따르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너무나 단호하고 엄숙했습니다. 제자들은 그 모습을 보고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고난을 받고 죽으시리라는 것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젊은 나이에 죽으시면 자신들의 꿈은 깨어지고 그들의 장래는 막연해집니다. 그들은 장래에 대한 불안이 현실로 다가옴을 느꼈습니다. 그를 따르는 자들이 두려워하였습니다. 이런 제자들을 위로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는 열두 제자를 데리고 자기가 당할 일을 더욱 상세하고 생동감있게 말씀하십니다. 33,34절을 보십시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이렇게 자세하게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시는 것은 제자들이 이를 현실로 받아들이도록 마음을 준비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죽고자 하면 살 수 있습니다. 고난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이를 감당할 각오와 힘이 생깁니다. 제일 힘든 것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엉거주춤한 상태입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자세로 일을 할 때 살 길이 열립니다. 또한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하실 일의 핵심이 고난을 받고 죽는 것이기 때문에 제자들이 이를 알고 구원의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꼭 받아들여야 할 진리는 제자들이 아무리 듣기 싫어해도 받아들일 때까지 반복해서 가르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신이 가야 할 길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요구와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는 한이 있어도, 심지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가고자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길이 결국 생명을 얻는 길이요 모두를 살리는 길이기에 굳게 결단을 하고 나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이때 야고보와 요한이 나아와 철없이 예수님께 청탁을 했습니다.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그들은 예수님의 수제자 그룹에 있습니다. 지금 베드로가 수석 제자이고 자기들이 다음이었습니다. 그들은 베드로를 제치고 최고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올수록 초조해지고 조바심이 났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 몰래 예수님께 이런 부탁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두 제자에게 그들이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은 죽고자 하는데 첫째가 되어 자기 마음대로 하고자 하는 제자들을 볼 때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구하는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말씀해 주십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38).” 여기서 ‘잔’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마셔야 하는 고난의 잔을 뜻합니다(막14:36). 예수님은 끔찍한 육체적인 고난뿐만 아니라 죄의 형벌로서 잠시 하나님께 버림받기까지 하십니다. 예수님은 또다시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세례’ 역시 십자가의 죽음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할 수 있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은 최고가 될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학생들은 10억을 당장에 얻을 수만 있다면 2,3년 감옥에 가는 것도 좋다고 생각을 합니다. 권력에의 의지와 함께 돈에 대한 욕구가 사람들의 눈을 멀게 만드는 것입니다. 얼마전 증권가에서 일어난 일을 잘 알 것입니다. 128억을 얻을 수만 있다면 2년 정도 감옥에 가는 것도 괜찮다고 말하고 실행한 이들이 있습니다. 돈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는 모습입니다. 이런 탐욕과 우상숭배가 자신들을 파멸로 이끌고 있지만 그것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이 장차 주와 복음을 위해서 많은 고난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제로 야고보는 열두 제자 중 첫 번째 순교자가 됩니다(행12:2). 요한은 밧모 섬에 추방되어 말년까지 박해를 받으면서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이런 엄청난 고난을 받을지라도 그들의 요구는 관철되지 않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에게는 고난이 따르지만 예수님의 좌우편은 예비된 자들이 앉을 것입니다. 그 자리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입니다. 또 고난과 영광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고난을 받는다고 해서 반드시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은 아닙니다. 고난을 받지 않은 사람이 높은 자리에 앉을 수도 있고, 그것이 부당한 것은 아닙니다. 고난을 받는 것이 사명일 수도 있고, 높은 자리에 앉아서 사명을 감당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주님을 위해서 고난을 받았다고 해서 첫째 자리를 바라기보다 순수한 자세로 이 땅에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해야 합니다. 주님은 약속해 주셨습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열 명의 제자들은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보좌 좌우편을 요구했다는 소식을 듣고 화를 냈습니다. ‘모든’ 제자들이 야고보와 요한의 행동을 비열하다고 여겨 화를 냈는데 특히 베드로가 더욱 화를 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 같이 첫 자리에 앉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은 크고자 하는 자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어떤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까? 42-4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임의로 주관하는 것을 보면서 그들은 멋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푸틴 대통령은 정상회담을 하면 지각을 함으로 기선을 제압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그보다 20분 더 늦게 회담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래서 약속시간보다 50분 늦게 회담을 시작했습니다. 독재자들의 권세를 보고 두려워하면서도 사람들은 부러워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두 항공사들의 회장들이 갑질을 하다가 이제는 거센 저항에 부딪쳐서 수치를 당하고 있습니다. 임의로 주관하고 권세를 부리는 것이 더 이상 사람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아니라 부끄러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은 달라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섬기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섬기는 것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를 존중하고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또 섬기는 자는 타인을 위해서 수고하고 희생합니다. 그가 잘 되도록 돕습니다. 위대성은 지위나 직함의 문제가 아니라 인격의 문제입니다. 다른 사람을 품고 도울만한 능력, 겸손, 넓은 마음, 감정 극복을 통해서 친절과 부드러운 자세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에서 섬김이라는 말씀이 요한복음에서는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계명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그의 제자가 되고 기쁨을 누리며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작은 것 하나라도 섬기게 됩니다. 이런 섬김을 통해서 공동체는 하나가 되고 보이지 않는 갈등을 해결하게 됩니다. 어려움에 처한 형제에게 관심을 갖고 기도하며 위로해 주고, 외로운 사람들과 대화하며 교제하는 것도 섬김입니다.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애를 쓰다보면 자기중심적이 되기 쉽습니다. 하지만 일상생활 속에서 활발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면 힘이 되고 활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런 섬김을 생활화하는 사람이 위대한 사람입니다.
사람이 왜 슬프고 비참합니까? 섬김을 받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부부 사이에도 그러하고 부모와 자식 간에도 그러하고 동역자들 사이에도 그러합니다. 지배하고자 하면 지배하는 한 사람만 기분이 좋지만 섬기고자 하면 모든 사람에게 기쁨이 됩니다. 섬김의 범위가 넓어지는 것이 성숙해가는 척도입니다. 자기와 가족을 넘어서 교회와 국가를 섬기는 사람들이 지도자로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가장 좋은 자리는 영광의 자리가 아니라 섬기는 자리입니다. 제가 섬기는 삶을 힘써 실천하고자 합니다. 섬기는 일은 한 두 번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몸에 익도록 부지런히 연습해야 합니다. 저는 동역자들 간에 서로 사랑하고 섬기는 모습을 볼 때 기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섬기는 생활을 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기도하면 응답해 주십니다.
45절을 보십시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죄인들을 섬기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목숨을 인간들의 심판에 대한 대속물로 주셨습니다. 그는 고귀한 목숨을 바쳐 쓸모없는 죄인들을 섬기셨습니다. 그의 섬김을 통해서 죄인들이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악한 죄인들이 예수님의 섬김을 통해서 마음의 변화를 받고 거룩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사실 사람이 사회적인 지위가 높아질수록 섬기기가 어렵습니다. 섬김을 받는 위치에 있을수록 희생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장 높은 지위에 있었지만 가장 밑에까지 낮아지셔서 섬기셨습니다.
우리는 섬기는 생활을 하면서 때로는 내가 섬기는 데 있어서 한계가 어디인가? 도대체 어디까지 섬겨야 하는가 고민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셨다면 우리는 양을 섬기기 위해서 목숨까지 버려야 합니다. 요한일서 3:16절은 말씀합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습니다(요 15:13).
사람이 가난을 벗어나서 물질적인 부요에 이른다고 해서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은 세상 끝날 까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좀 더 근본적인 사랑을 해야 하고 섬김을 실천해야 합니다. 아이에게 고기를 주기보다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심고 자기 발견을 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갖도록 섬겨야 합니다.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주는 생활을 하도록 섬겨야 합니다. 우리가 깨진 항아리에 물 뭇기 식의 섬김을 하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순종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헨리 나우웬 박사는 하버드 대학을 사임하고 메사추세츠에 있는 작은 정신박약자 시설인 데이브레이크 학원의 직원으로 들어갔습니다. 상식적으로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세계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신학자가 하버드 교수의 많은 보수와 명예를 버리고 정신박약자들의 용변 지도와 행동 교정과 식사, 세수, 옷 입히는 훈련 같은 구질구질하고 고생스러운 일에 작은 보수를 받고 종사하였습니다. 전세계가 “왜 그러느냐”고 물었습니다. 이토록 위대한 신학자가 학생들을 가르쳐 훌륭한 목사와 학자들을 길러내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 왜 하버드를 떠나 정신박약자 시설에 들어가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나우웬 박사는 책 한권을 썼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란 책입니다. 여기에서 나우웬 박사는 “예수를 정말 아는 길이 무엇인가”라고 묻습니다. 그의 결론은 예수를 아는 길은 “내리막길을 살아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이셨던 종의 모습, 곧 복음의 교훈은 내리막길에서 체험된다는 것입니다.
나우웬 박사 자신은 그동안 올라가는 길만 추구해 왔습니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하여 천재 신동이라 추앙되고, 하버드 대학 교수라는 정상에 올랐으며, 30여권의 저서는 모두가 베스트셀러이고 그의 얼굴을 한번 만이라도 보기를 원하는 사람이 전 세계에 깔려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그 동안 작은 성공의 외로운 꼭대기를 향하여, 작은 인기, 작은 권력의 꼭대기를 향하여 오르막길만을 추구해 왔다. 그러나 어느 날 아담 군(정신박약자 중 한 청년) 곁에 앉았을 때, 이런 인간들의 고통에 동참하는 내리막길을 통하여 예수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르막길에서는 예수가 보이지 않는다. 내리막길에서 복음서의 진정한 예수를 만날 수 있다.”
예수님이 여리고에 이르렀을 때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소리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는 길 가에 앉아 있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이렇게 소리 지른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고 했지만 그는 더욱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크게 소리 질렀습니다. 그는 일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기회를 놓칠 수 없었습니다. 또 자기를 방해하는 사람들과 싸우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주님께 불쌍히 여겨 달라고 소리쳤습니다. 이는 그의 기도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분명히 알았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메시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사명을 감당하러 올라가는 중이지만 머물러 서서 그를 기다렸습니다. 예수님은 맹인 거지를 겸손히 섬기셨습니다. 자기 일을 멈추고 그를 섬기셨습니다.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일렀습니다.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그러자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그는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그는 부르심에 응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 질문에 그는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분명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진정으로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이점에서 앞에 나온 야고보와 요한과는 비교가 됩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무엇을 구해야 할지를 안다는 것은 자기의 처지를 안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지금 자기의 형편을 제대로 알기에 올바로 구할 수 있습니다. 또한 맹인이 보기를 원한다는 말은 믿음이 없이는 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는 당시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구원자이심을 믿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맹인이 눈을 뜨는 것은 성경에 약속된 메시아가 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는 곧 보게 되어 예수님을 길에서 따랐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섬기는 종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각종 죄인들을 섬기셨습니다. 그의 섬김을 통해서 맹인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병자가 깨끗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특권의식을 버리고 낮아져서 섬기며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제자들이 하나가 되고 병든 시대를 치유하고 살리는 사역을 하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섬길 일들을 찾으면 할 일이 무수하게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기까지 섬기신 예수님의 삶을 조금이나마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마가복음 10:32-52
요절 | 마가복음 10:45
섬기러 오신 예수님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이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섬김의 도를 이제까지와는 다른 차원으로 끌어 올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생활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섬김을 통해서 제자공동체는 다툼과 갈등을 극복하고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심으로 그를 믿는 자들을 죄로부터 구원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맹인 거지 바디매오를 섬기심으로 그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그는 맹인이었지만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심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의 예수님께 대한 믿음은 잘못된 메시아 관과 인간적인 야심으로 영적인 눈이 어두운 제자들에게 눈을 떠서 예수님을 따르라는 메시지를 전해줍니다. 우리도 영적인 눈을 떠서 섬기는 삶의 유익을 배우고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의 길을 따르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너무나 단호하고 엄숙했습니다. 제자들은 그 모습을 보고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고난을 받고 죽으시리라는 것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젊은 나이에 죽으시면 자신들의 꿈은 깨어지고 그들의 장래는 막연해집니다. 그들은 장래에 대한 불안이 현실로 다가옴을 느꼈습니다. 그를 따르는 자들이 두려워하였습니다. 이런 제자들을 위로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는 열두 제자를 데리고 자기가 당할 일을 더욱 상세하고 생동감있게 말씀하십니다. 33,34절을 보십시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이렇게 자세하게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시는 것은 제자들이 이를 현실로 받아들이도록 마음을 준비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죽고자 하면 살 수 있습니다. 고난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이를 감당할 각오와 힘이 생깁니다. 제일 힘든 것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엉거주춤한 상태입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자세로 일을 할 때 살 길이 열립니다. 또한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하실 일의 핵심이 고난을 받고 죽는 것이기 때문에 제자들이 이를 알고 구원의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꼭 받아들여야 할 진리는 제자들이 아무리 듣기 싫어해도 받아들일 때까지 반복해서 가르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신이 가야 할 길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요구와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는 한이 있어도, 심지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가고자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길이 결국 생명을 얻는 길이요 모두를 살리는 길이기에 굳게 결단을 하고 나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이때 야고보와 요한이 나아와 철없이 예수님께 청탁을 했습니다.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그들은 예수님의 수제자 그룹에 있습니다. 지금 베드로가 수석 제자이고 자기들이 다음이었습니다. 그들은 베드로를 제치고 최고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올수록 초조해지고 조바심이 났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 몰래 예수님께 이런 부탁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두 제자에게 그들이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은 죽고자 하는데 첫째가 되어 자기 마음대로 하고자 하는 제자들을 볼 때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구하는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말씀해 주십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38).” 여기서 ‘잔’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마셔야 하는 고난의 잔을 뜻합니다(막14:36). 예수님은 끔찍한 육체적인 고난뿐만 아니라 죄의 형벌로서 잠시 하나님께 버림받기까지 하십니다. 예수님은 또다시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세례’ 역시 십자가의 죽음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할 수 있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은 최고가 될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학생들은 10억을 당장에 얻을 수만 있다면 2,3년 감옥에 가는 것도 좋다고 생각을 합니다. 권력에의 의지와 함께 돈에 대한 욕구가 사람들의 눈을 멀게 만드는 것입니다. 얼마전 증권가에서 일어난 일을 잘 알 것입니다. 128억을 얻을 수만 있다면 2년 정도 감옥에 가는 것도 괜찮다고 말하고 실행한 이들이 있습니다. 돈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는 모습입니다. 이런 탐욕과 우상숭배가 자신들을 파멸로 이끌고 있지만 그것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이 장차 주와 복음을 위해서 많은 고난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제로 야고보는 열두 제자 중 첫 번째 순교자가 됩니다(행12:2). 요한은 밧모 섬에 추방되어 말년까지 박해를 받으면서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이런 엄청난 고난을 받을지라도 그들의 요구는 관철되지 않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에게는 고난이 따르지만 예수님의 좌우편은 예비된 자들이 앉을 것입니다. 그 자리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입니다. 또 고난과 영광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고난을 받는다고 해서 반드시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은 아닙니다. 고난을 받지 않은 사람이 높은 자리에 앉을 수도 있고, 그것이 부당한 것은 아닙니다. 고난을 받는 것이 사명일 수도 있고, 높은 자리에 앉아서 사명을 감당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주님을 위해서 고난을 받았다고 해서 첫째 자리를 바라기보다 순수한 자세로 이 땅에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해야 합니다. 주님은 약속해 주셨습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열 명의 제자들은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보좌 좌우편을 요구했다는 소식을 듣고 화를 냈습니다. ‘모든’ 제자들이 야고보와 요한의 행동을 비열하다고 여겨 화를 냈는데 특히 베드로가 더욱 화를 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 같이 첫 자리에 앉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은 크고자 하는 자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어떤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까? 42-4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임의로 주관하는 것을 보면서 그들은 멋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푸틴 대통령은 정상회담을 하면 지각을 함으로 기선을 제압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그보다 20분 더 늦게 회담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래서 약속시간보다 50분 늦게 회담을 시작했습니다. 독재자들의 권세를 보고 두려워하면서도 사람들은 부러워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두 항공사들의 회장들이 갑질을 하다가 이제는 거센 저항에 부딪쳐서 수치를 당하고 있습니다. 임의로 주관하고 권세를 부리는 것이 더 이상 사람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아니라 부끄러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은 달라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섬기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섬기는 것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를 존중하고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또 섬기는 자는 타인을 위해서 수고하고 희생합니다. 그가 잘 되도록 돕습니다. 위대성은 지위나 직함의 문제가 아니라 인격의 문제입니다. 다른 사람을 품고 도울만한 능력, 겸손, 넓은 마음, 감정 극복을 통해서 친절과 부드러운 자세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에서 섬김이라는 말씀이 요한복음에서는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계명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그의 제자가 되고 기쁨을 누리며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작은 것 하나라도 섬기게 됩니다. 이런 섬김을 통해서 공동체는 하나가 되고 보이지 않는 갈등을 해결하게 됩니다. 어려움에 처한 형제에게 관심을 갖고 기도하며 위로해 주고, 외로운 사람들과 대화하며 교제하는 것도 섬김입니다.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애를 쓰다보면 자기중심적이 되기 쉽습니다. 하지만 일상생활 속에서 활발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면 힘이 되고 활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런 섬김을 생활화하는 사람이 위대한 사람입니다.
사람이 왜 슬프고 비참합니까? 섬김을 받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부부 사이에도 그러하고 부모와 자식 간에도 그러하고 동역자들 사이에도 그러합니다. 지배하고자 하면 지배하는 한 사람만 기분이 좋지만 섬기고자 하면 모든 사람에게 기쁨이 됩니다. 섬김의 범위가 넓어지는 것이 성숙해가는 척도입니다. 자기와 가족을 넘어서 교회와 국가를 섬기는 사람들이 지도자로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가장 좋은 자리는 영광의 자리가 아니라 섬기는 자리입니다. 제가 섬기는 삶을 힘써 실천하고자 합니다. 섬기는 일은 한 두 번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몸에 익도록 부지런히 연습해야 합니다. 저는 동역자들 간에 서로 사랑하고 섬기는 모습을 볼 때 기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섬기는 생활을 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기도하면 응답해 주십니다.
45절을 보십시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죄인들을 섬기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목숨을 인간들의 심판에 대한 대속물로 주셨습니다. 그는 고귀한 목숨을 바쳐 쓸모없는 죄인들을 섬기셨습니다. 그의 섬김을 통해서 죄인들이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악한 죄인들이 예수님의 섬김을 통해서 마음의 변화를 받고 거룩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사실 사람이 사회적인 지위가 높아질수록 섬기기가 어렵습니다. 섬김을 받는 위치에 있을수록 희생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장 높은 지위에 있었지만 가장 밑에까지 낮아지셔서 섬기셨습니다.
우리는 섬기는 생활을 하면서 때로는 내가 섬기는 데 있어서 한계가 어디인가? 도대체 어디까지 섬겨야 하는가 고민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셨다면 우리는 양을 섬기기 위해서 목숨까지 버려야 합니다. 요한일서 3:16절은 말씀합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습니다(요 15:13).
사람이 가난을 벗어나서 물질적인 부요에 이른다고 해서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은 세상 끝날 까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좀 더 근본적인 사랑을 해야 하고 섬김을 실천해야 합니다. 아이에게 고기를 주기보다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심고 자기 발견을 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갖도록 섬겨야 합니다.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주는 생활을 하도록 섬겨야 합니다. 우리가 깨진 항아리에 물 뭇기 식의 섬김을 하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순종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헨리 나우웬 박사는 하버드 대학을 사임하고 메사추세츠에 있는 작은 정신박약자 시설인 데이브레이크 학원의 직원으로 들어갔습니다. 상식적으로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세계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신학자가 하버드 교수의 많은 보수와 명예를 버리고 정신박약자들의 용변 지도와 행동 교정과 식사, 세수, 옷 입히는 훈련 같은 구질구질하고 고생스러운 일에 작은 보수를 받고 종사하였습니다. 전세계가 “왜 그러느냐”고 물었습니다. 이토록 위대한 신학자가 학생들을 가르쳐 훌륭한 목사와 학자들을 길러내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 왜 하버드를 떠나 정신박약자 시설에 들어가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나우웬 박사는 책 한권을 썼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란 책입니다. 여기에서 나우웬 박사는 “예수를 정말 아는 길이 무엇인가”라고 묻습니다. 그의 결론은 예수를 아는 길은 “내리막길을 살아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이셨던 종의 모습, 곧 복음의 교훈은 내리막길에서 체험된다는 것입니다.
나우웬 박사 자신은 그동안 올라가는 길만 추구해 왔습니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하여 천재 신동이라 추앙되고, 하버드 대학 교수라는 정상에 올랐으며, 30여권의 저서는 모두가 베스트셀러이고 그의 얼굴을 한번 만이라도 보기를 원하는 사람이 전 세계에 깔려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그 동안 작은 성공의 외로운 꼭대기를 향하여, 작은 인기, 작은 권력의 꼭대기를 향하여 오르막길만을 추구해 왔다. 그러나 어느 날 아담 군(정신박약자 중 한 청년) 곁에 앉았을 때, 이런 인간들의 고통에 동참하는 내리막길을 통하여 예수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르막길에서는 예수가 보이지 않는다. 내리막길에서 복음서의 진정한 예수를 만날 수 있다.”
예수님이 여리고에 이르렀을 때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소리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는 길 가에 앉아 있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이렇게 소리 지른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고 했지만 그는 더욱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크게 소리 질렀습니다. 그는 일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기회를 놓칠 수 없었습니다. 또 자기를 방해하는 사람들과 싸우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주님께 불쌍히 여겨 달라고 소리쳤습니다. 이는 그의 기도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분명히 알았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메시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사명을 감당하러 올라가는 중이지만 머물러 서서 그를 기다렸습니다. 예수님은 맹인 거지를 겸손히 섬기셨습니다. 자기 일을 멈추고 그를 섬기셨습니다.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일렀습니다.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그러자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그는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그는 부르심에 응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 질문에 그는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분명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진정으로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이점에서 앞에 나온 야고보와 요한과는 비교가 됩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무엇을 구해야 할지를 안다는 것은 자기의 처지를 안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지금 자기의 형편을 제대로 알기에 올바로 구할 수 있습니다. 또한 맹인이 보기를 원한다는 말은 믿음이 없이는 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는 당시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구원자이심을 믿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맹인이 눈을 뜨는 것은 성경에 약속된 메시아가 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는 곧 보게 되어 예수님을 길에서 따랐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섬기는 종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각종 죄인들을 섬기셨습니다. 그의 섬김을 통해서 맹인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병자가 깨끗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특권의식을 버리고 낮아져서 섬기며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제자들이 하나가 되고 병든 시대를 치유하고 살리는 사역을 하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섬길 일들을 찾으면 할 일이 무수하게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기까지 섬기신 예수님의 삶을 조금이나마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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