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8성탄 3강(눅2:1-20)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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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성탄 제 3 강
말씀 | 누가복음 2:1-20
요절 | 누가복음 2:10,11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느니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크리스마스는 무슨 뜻입니까? 예수를 뜻하는 라틴어 ‘Christus’와 예배라는 ‘Maese’가 합쳐진 말입니다. 그러므로 크리스마스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하는 날입니다. 크리스마스를 ‘X-mas’라고 쓰는 것은 그리스어의 영향입니다. X는 크리스토스(ΧΡΙΣΤΟΣ)의 첫 글자입니다. 크리스마스는 하나님이 우리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죄악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이 어떤 모습으로 오셨는지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이 시간 우리를 위해 오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예배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가이사 아구스도의 본명은 옥타비아누스인데 율리우스 시저의 조카입니다. 그가 18세 되던 해에 시저가 암살을 당하자 유언장에 의해 그의 양자가 되었고 후에 왕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로마는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긴 정복 전쟁을 통해 대제국을 형성하였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는 탁월한 능력으로 로마제국을 다스려 법과 질서를 회복하고 평화와 번영을 가져왔습니다. 그가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이룩하려고 힘쓴 결과, 세계는 표면상으로 오래 세월 동안 전에 없던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알렉산더 대왕을 통해 헬레니즘 세계를 형성하여 문화적인 통일을 이루게 하시고, 가이사 아구스도를 통해 세계를 정치적으로 통일하게 하심으로 짧은 기간 동안 그리스도의 복음이 급속도로 온 세계에 전파되게 준비하셨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가 호적을 하라 함으로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의 호적 명령은 BC 700년 전에 미가 선지자로 하신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 응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미가 5:2).” 로마 황제는 천하를 호령하고 움직이는 권세를 가진 자였습니다. 그의 말에 따라 세상이 움직였고, 사람들은 이런 가이사를 주목하였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어떠합니까? 영원부터 계신 하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구유에 누이신 예수님과 사람인데 신처럼 떠받들어진 로마황제의 모습은 대조를 이룹니다. 본문에는 ‘구유’라는 단어가 세 번 반복되어 나옵니다(7,12,16). 예수님은 구유에 누이셨습니다. 구유는 짐승의 먹이를 담는 나무통입니다. 예수님은 짐승들의 먹이로 오셨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은 구원자로서 짐승 같은 사람들의 먹이가 되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짐승 같은 사람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베드로후서 2장 12절은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고 그들의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이 사람들은 무법한 자들,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당돌하고 자긍하며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사람들을 비방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성 없는 짐승 같다고 했습니다. 이성 없는 사람이란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 하나님 편에서 사물을 보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감성적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 감각을 따라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감정대로, 육체의 욕구대로 행동하는 사람이 곧 이성 없는 짐승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육체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어쩌면 모든 사람이 이런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이런 사람들의 먹이가 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런 짐승 같은 사람들, 감각적인 사람들이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을 먹으면, 곧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어떻게 됩니까? 이성적이 되고, 생각하는 사람, 특히 하나님 편에서 생각하는 사람이 됩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믿으면 감각적인 데 머물지 않고 이성적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 편에서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진리에 기초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그 아기가 왕이신 그리스도, 구원자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구유에 뉘어 있는 그 아기가 구원자의 표적입니다. 이는 또한 구원의 특징을 말해 줍니다. 아기는 연약함의 표적입니다. 아기는 세상에서 가장 약한 존재입니다. 쉽게 감기에 걸리고 중이염을 앓고 배앓이를 합니다. 아기는 연약하지만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 아기를 보는 누구든 웃게 만드는 그런 존재입니다. 아기가 방긋 웃을 때 아무리 마음이 사나운 사람이라도 웃게 됩니다. 마음이 부드러워집니다. 아기 앞에서는 누구든 자기를 감추지 않습니다. 아기 앞에서는 누구도 경계심을 가지거나 긴장하지 않습니다. 아기에 대해서는 누구든지 평안한 마음으로 웃으면서 대할 수 있습니다. 아기는 어떤 사람에 대해서든지 판단하지 않습니다. 선입견도 없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보고 방긋 웃어줍니다. 아기가 방긋 웃어줄 때, 긴장된 마음이 녹아집니다. 차가운 마음도 따뜻해집니다. 사나운 마음이 부드러워집니다. 작고 연약한 아기에게 이런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아기로 오신 예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한 강도는 평생 강도짓만 하다가 십자가형을 받았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께 부탁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그는 예수님이 죄가 없는 의로운 분이심을 잘 알았습니다. 평생 죄만 지은 사람이 의로운 예수님께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하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는 부탁했고 예수님은 그의 부탁을 들어주셨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온 몸에 문둥병 걸린 사람도 예수님께로 나아올 수 있었습니다. 당시 문둥병자는 완전 따로 살아야 했습니다. 사람에게 가까이 올 수 없었습니다. 누구도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가 사람을 향해 가면 누구든 그를 향해 돌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돌을 던지지 않았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보고 엎드려 구했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손을 대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지금까지 누가 문둥병자에게 손을 댄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문둥병자에게 손을 댔습니다. 마치 그 사람이 문둥병자가 아닌 것처럼 혹은 문둥병자인 줄 모르는 것처럼 그렇게 손을 댔습니다. 아기는 문둥병자가 무엇인지 모르니 손을 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한 바리새인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그 동네에서 죄인인 한 여자가 와서 예수님의 뒤로 와서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닦았습니다. 그러자 그 바리새인이 비난했습니다. “이 사람이 선지자라면 이 여자가 어떤 여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을 것이다.” 여기서 죄인이라는 말은 공식적으로 죄인으로 인정된 여자, 구체적으로 말하면 아마도 창녀였습니다. 그런 여자가 예수님께로 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죄인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이미 그 여자를 용서하셨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바리새인처럼 그렇게 여자를 죄인으로 규정하고 비난한 분이라면 그 여자는 예수님께로 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기도 자기에게 오는 여자가 죄인인지, 의인인지 구별하지 않습니다. 창녀인 여자에게라도 방긋 웃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그러면 예수님은 왜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십니까? 어떤 사람이 오든 왜 판단하지 않으시며 돌을 던지지 않으십니까? 예수님은 사람을 고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문둥병자를 받아들일 수 있음은 그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받아들이셨는데, 죄인들을 병자로 여기고, 병을 고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문둥병자를 멀리하는 것은 문둥병을 고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병자를 배척하는 것은 병을 고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중병이라도 고칠 수 있는 의사는 중환자를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 같은 죄인도 받아주시고 용서하시며 목자로 살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있는 모습 그대로 그에게 나아갈 때 나를 영접해 주시고 웃어 주시고 사랑해 주십니다.
구주 탄생 소식이 가장 먼저 누구에게 전해졌습니까?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떼를 지키고 있는데 그들에게 구주 탄생의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왕이나 대제사장이나 계급이 높은 사람들에게 전하면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목자들에게 마구간에 누인 아기에 대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당시는 목자들이 비천한 계급에 속하여 목자들의 증언은 법정에서 인정도 받지 못했습니다. 율법 사회에서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종교지도자들은 그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목자들은 주로 밖에서 머물러서 살아가는 사람들로서 주류 사회에서 이방인이었습니다. 가난하고 비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심령이 가난하고 겸손하며 순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속에 물들지 않았고 밤에도 자지 않고 양 떼들을 지키는 충성된 자들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메시야를 기다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목자들처럼 겸손하고 순수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십니다.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했습니다. 10,11절을 보십시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오늘’은 영원한 현재로서 구주 탄생은 과거 역사가 아니라 오늘날 지금 일어나는 역사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날 그를 구주로 영접한 자의 마음속에서 현재적으로 탄생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영존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구주 탄생의 소식은 언제나 듣고 들어도 늘 기쁘고, 마음에 평강을 줍니다. 우리의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 땅에 구주가 탄생하셨다는 소식입니다. 인류에게 공통된 가장 큰 슬픔의 나쁜 소식은 죄로 인해 죽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을 때마다 슬퍼하며 통곡합니다. 죽음은 인류 공동의 적이며 예외가 없습니다. 그러나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요 그 이후에는 영원한 심판이 있습니다. 누가 이런 죄로 인한 죽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누가 나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한 아기로 이 땅에 찾아오셨습니다. 이 땅에 오셔서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시며, 죄로 병든 사람들을 정죄하지 않으시고 섬기셨습니다. 마침내는 나와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서 죄로 인해 죽음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세상에 이것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들려오는 뉴스는 나쁜 소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런 소식을 들으면 불안과 걱정과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불신을 심고 관계성을 깨뜨리고 영혼을 파괴시킵니다. 그래서 세상 소식을 계속해서 듣고 있으면 힘이 빠지고 분노와 절망에 휩싸이게 됩니다. 반면에 좋은 소식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활력을 일으킵니다.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소식이 어떤 것이 있습니까? 장학금을 받았다는 소식, 형제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소식, 좋고 넓은 집으로 이사 갔다는 소식을 들으면 기분이 좋습니다. 우리 영혼이 구원 받고 영원히 살게 되었다는 소식은 얼마나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까? 육신이 건강하게 사는 것도 기쁜데, 영혼이 건강하게 영원히 산다는 소식이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큰 기쁨은 그 기쁨이 있으면 다른 기쁨이 필요 없는 기쁨입니다. 내적인 기쁨이기 때문에 조건이 필요 없는 기쁨입니다. 이런 기쁨은 하나님밖에는 줄 수가 없습니다. 자신이 심판받아 죽을 수밖에 없는 자라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절박한 심정 가운데 있을 때 구주 성탄이 큰 기쁨의 소식이 됩니다. 기쁨은 있는 모습 그대로 예수님께 나아갈 때 임하게 됩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예수님의 탄생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사람들에게 평화가 임합니다. 예수님의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고,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드러났습니다. 땅에 있는 사람들은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하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 화평이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이번 성탄에 목자들과 같이 예수님이 탄생하신 곳으로 나아가서 구유에 누인 아기를 깊이 만나고 성탄의 기쁨이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나를 영접해 주시는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웃음을 회복하기를 기도합니다. 구유에 누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가 진정 부요한 자가 되고 평안을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구유에 누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겸손한 마음이 되어 진리에 눈을 뜨고 말씀으로 다스림 받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누가복음 2:1-20
요절 | 누가복음 2:10,11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느니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크리스마스는 무슨 뜻입니까? 예수를 뜻하는 라틴어 ‘Christus’와 예배라는 ‘Maese’가 합쳐진 말입니다. 그러므로 크리스마스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하는 날입니다. 크리스마스를 ‘X-mas’라고 쓰는 것은 그리스어의 영향입니다. X는 크리스토스(ΧΡΙΣΤΟΣ)의 첫 글자입니다. 크리스마스는 하나님이 우리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죄악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이 어떤 모습으로 오셨는지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이 시간 우리를 위해 오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예배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가이사 아구스도의 본명은 옥타비아누스인데 율리우스 시저의 조카입니다. 그가 18세 되던 해에 시저가 암살을 당하자 유언장에 의해 그의 양자가 되었고 후에 왕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로마는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긴 정복 전쟁을 통해 대제국을 형성하였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는 탁월한 능력으로 로마제국을 다스려 법과 질서를 회복하고 평화와 번영을 가져왔습니다. 그가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이룩하려고 힘쓴 결과, 세계는 표면상으로 오래 세월 동안 전에 없던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알렉산더 대왕을 통해 헬레니즘 세계를 형성하여 문화적인 통일을 이루게 하시고, 가이사 아구스도를 통해 세계를 정치적으로 통일하게 하심으로 짧은 기간 동안 그리스도의 복음이 급속도로 온 세계에 전파되게 준비하셨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가 호적을 하라 함으로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의 호적 명령은 BC 700년 전에 미가 선지자로 하신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 응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미가 5:2).” 로마 황제는 천하를 호령하고 움직이는 권세를 가진 자였습니다. 그의 말에 따라 세상이 움직였고, 사람들은 이런 가이사를 주목하였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어떠합니까? 영원부터 계신 하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구유에 누이신 예수님과 사람인데 신처럼 떠받들어진 로마황제의 모습은 대조를 이룹니다. 본문에는 ‘구유’라는 단어가 세 번 반복되어 나옵니다(7,12,16). 예수님은 구유에 누이셨습니다. 구유는 짐승의 먹이를 담는 나무통입니다. 예수님은 짐승들의 먹이로 오셨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은 구원자로서 짐승 같은 사람들의 먹이가 되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짐승 같은 사람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베드로후서 2장 12절은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고 그들의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이 사람들은 무법한 자들,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당돌하고 자긍하며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사람들을 비방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성 없는 짐승 같다고 했습니다. 이성 없는 사람이란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 하나님 편에서 사물을 보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감성적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 감각을 따라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감정대로, 육체의 욕구대로 행동하는 사람이 곧 이성 없는 짐승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육체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어쩌면 모든 사람이 이런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이런 사람들의 먹이가 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런 짐승 같은 사람들, 감각적인 사람들이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을 먹으면, 곧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어떻게 됩니까? 이성적이 되고, 생각하는 사람, 특히 하나님 편에서 생각하는 사람이 됩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믿으면 감각적인 데 머물지 않고 이성적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 편에서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진리에 기초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그 아기가 왕이신 그리스도, 구원자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구유에 뉘어 있는 그 아기가 구원자의 표적입니다. 이는 또한 구원의 특징을 말해 줍니다. 아기는 연약함의 표적입니다. 아기는 세상에서 가장 약한 존재입니다. 쉽게 감기에 걸리고 중이염을 앓고 배앓이를 합니다. 아기는 연약하지만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 아기를 보는 누구든 웃게 만드는 그런 존재입니다. 아기가 방긋 웃을 때 아무리 마음이 사나운 사람이라도 웃게 됩니다. 마음이 부드러워집니다. 아기 앞에서는 누구든 자기를 감추지 않습니다. 아기 앞에서는 누구도 경계심을 가지거나 긴장하지 않습니다. 아기에 대해서는 누구든지 평안한 마음으로 웃으면서 대할 수 있습니다. 아기는 어떤 사람에 대해서든지 판단하지 않습니다. 선입견도 없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보고 방긋 웃어줍니다. 아기가 방긋 웃어줄 때, 긴장된 마음이 녹아집니다. 차가운 마음도 따뜻해집니다. 사나운 마음이 부드러워집니다. 작고 연약한 아기에게 이런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아기로 오신 예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한 강도는 평생 강도짓만 하다가 십자가형을 받았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께 부탁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그는 예수님이 죄가 없는 의로운 분이심을 잘 알았습니다. 평생 죄만 지은 사람이 의로운 예수님께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하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는 부탁했고 예수님은 그의 부탁을 들어주셨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온 몸에 문둥병 걸린 사람도 예수님께로 나아올 수 있었습니다. 당시 문둥병자는 완전 따로 살아야 했습니다. 사람에게 가까이 올 수 없었습니다. 누구도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가 사람을 향해 가면 누구든 그를 향해 돌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돌을 던지지 않았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보고 엎드려 구했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손을 대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지금까지 누가 문둥병자에게 손을 댄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문둥병자에게 손을 댔습니다. 마치 그 사람이 문둥병자가 아닌 것처럼 혹은 문둥병자인 줄 모르는 것처럼 그렇게 손을 댔습니다. 아기는 문둥병자가 무엇인지 모르니 손을 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한 바리새인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그 동네에서 죄인인 한 여자가 와서 예수님의 뒤로 와서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닦았습니다. 그러자 그 바리새인이 비난했습니다. “이 사람이 선지자라면 이 여자가 어떤 여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을 것이다.” 여기서 죄인이라는 말은 공식적으로 죄인으로 인정된 여자, 구체적으로 말하면 아마도 창녀였습니다. 그런 여자가 예수님께로 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죄인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이미 그 여자를 용서하셨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바리새인처럼 그렇게 여자를 죄인으로 규정하고 비난한 분이라면 그 여자는 예수님께로 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기도 자기에게 오는 여자가 죄인인지, 의인인지 구별하지 않습니다. 창녀인 여자에게라도 방긋 웃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그러면 예수님은 왜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십니까? 어떤 사람이 오든 왜 판단하지 않으시며 돌을 던지지 않으십니까? 예수님은 사람을 고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문둥병자를 받아들일 수 있음은 그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받아들이셨는데, 죄인들을 병자로 여기고, 병을 고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문둥병자를 멀리하는 것은 문둥병을 고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병자를 배척하는 것은 병을 고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중병이라도 고칠 수 있는 의사는 중환자를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 같은 죄인도 받아주시고 용서하시며 목자로 살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있는 모습 그대로 그에게 나아갈 때 나를 영접해 주시고 웃어 주시고 사랑해 주십니다.
구주 탄생 소식이 가장 먼저 누구에게 전해졌습니까?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떼를 지키고 있는데 그들에게 구주 탄생의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왕이나 대제사장이나 계급이 높은 사람들에게 전하면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목자들에게 마구간에 누인 아기에 대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당시는 목자들이 비천한 계급에 속하여 목자들의 증언은 법정에서 인정도 받지 못했습니다. 율법 사회에서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종교지도자들은 그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목자들은 주로 밖에서 머물러서 살아가는 사람들로서 주류 사회에서 이방인이었습니다. 가난하고 비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심령이 가난하고 겸손하며 순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속에 물들지 않았고 밤에도 자지 않고 양 떼들을 지키는 충성된 자들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메시야를 기다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목자들처럼 겸손하고 순수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십니다.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했습니다. 10,11절을 보십시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오늘’은 영원한 현재로서 구주 탄생은 과거 역사가 아니라 오늘날 지금 일어나는 역사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날 그를 구주로 영접한 자의 마음속에서 현재적으로 탄생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영존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구주 탄생의 소식은 언제나 듣고 들어도 늘 기쁘고, 마음에 평강을 줍니다. 우리의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 땅에 구주가 탄생하셨다는 소식입니다. 인류에게 공통된 가장 큰 슬픔의 나쁜 소식은 죄로 인해 죽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을 때마다 슬퍼하며 통곡합니다. 죽음은 인류 공동의 적이며 예외가 없습니다. 그러나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요 그 이후에는 영원한 심판이 있습니다. 누가 이런 죄로 인한 죽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누가 나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한 아기로 이 땅에 찾아오셨습니다. 이 땅에 오셔서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시며, 죄로 병든 사람들을 정죄하지 않으시고 섬기셨습니다. 마침내는 나와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서 죄로 인해 죽음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세상에 이것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들려오는 뉴스는 나쁜 소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런 소식을 들으면 불안과 걱정과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불신을 심고 관계성을 깨뜨리고 영혼을 파괴시킵니다. 그래서 세상 소식을 계속해서 듣고 있으면 힘이 빠지고 분노와 절망에 휩싸이게 됩니다. 반면에 좋은 소식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활력을 일으킵니다.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소식이 어떤 것이 있습니까? 장학금을 받았다는 소식, 형제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소식, 좋고 넓은 집으로 이사 갔다는 소식을 들으면 기분이 좋습니다. 우리 영혼이 구원 받고 영원히 살게 되었다는 소식은 얼마나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까? 육신이 건강하게 사는 것도 기쁜데, 영혼이 건강하게 영원히 산다는 소식이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큰 기쁨은 그 기쁨이 있으면 다른 기쁨이 필요 없는 기쁨입니다. 내적인 기쁨이기 때문에 조건이 필요 없는 기쁨입니다. 이런 기쁨은 하나님밖에는 줄 수가 없습니다. 자신이 심판받아 죽을 수밖에 없는 자라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절박한 심정 가운데 있을 때 구주 성탄이 큰 기쁨의 소식이 됩니다. 기쁨은 있는 모습 그대로 예수님께 나아갈 때 임하게 됩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예수님의 탄생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사람들에게 평화가 임합니다. 예수님의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고,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드러났습니다. 땅에 있는 사람들은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하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 화평이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이번 성탄에 목자들과 같이 예수님이 탄생하신 곳으로 나아가서 구유에 누인 아기를 깊이 만나고 성탄의 기쁨이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나를 영접해 주시는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웃음을 회복하기를 기도합니다. 구유에 누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가 진정 부요한 자가 되고 평안을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구유에 누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겸손한 마음이 되어 진리에 눈을 뜨고 말씀으로 다스림 받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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