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8성탄2강(1:57-80) 구원의 뿔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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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성탄 제 2 강
말씀 | 누가복음 1:57-80
요절 | 누가복음 1:69
구원의 뿔 예수님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성탄절이 다가오면서 분위기가 조금씩 뜨고 있습니다. 눈도 많이 내렸습니다. 성탄절의 주인공은 산타크로스 할아버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성육신하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속량하시며 구원의 뿔이시오 돋는 해가 되십니다. 이 시간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하실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성탄절의 의미를 깊이 묵상함으로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감사와 기쁨이 솟아오르기를 기도합니다.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을 때에 이웃과 친족이 주께서 저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였습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믿음으로 살았는데 늙도록 자식이 없었습니다. 이때 보는 이들도 안타까웠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믿음으로 살면 하나님이 축복해주셔야 한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아도 별다른 축복도 없는 것 같으면 마음이 힘들어집니다. 당시 자식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하나님의 은혜로 늘그막에 자식을 낳음으로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을 체험하게 되어 기뻐했습니다. 믿음으로 살 때 고난이 있지만 고난이 클수록 하나님의 은혜도 깊고 풍성합니다.
그들은 아이를 할례 하러 와서 이름을 짓고자 할 때 그 과정에서 논란을 빚었습니다. 친족들은 그 부친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 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친은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네 친족 중에 이 이름으로 이름 한 이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 부친 사가랴에게 형용하여 무엇으로 이름하려 하는가 물었습니다. 그는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습니다. 다 기이히 여길 때에 그의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다 두려워하였습니다. 온 유대 산중에 그 모든 말이 퍼지매 듣는 사람이 다 이 아이가 장차 어찌될꼬 하며 큰 기대감을 품었습니다. 모두 주의 손이 저와 함께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가랴는 입이 열리자마자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을 합니다. 그의 첫 마디는 “찬송하리로다”입니다. 그는 벙어리 훈련을 받는 기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아들이 태어나는 것을 시작으로 하나님께서 앞으로 어떤 일을 행하실지 예언하였습니다.
첫째,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하십니다. 돌아보셨다는 뜻은 방문하셨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난 400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아서 버려진 것 같았습니다. 그들은 헬라와 페르샤와 로마의 압제 속에서 탄식하며 부르짖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메시야에 대한 갈망이 강렬했습니다. 68절을 보십시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여기서 “속량하다”는 것은 포로나 노예 상태에 있는 사람을 대가를 지불하고 자유롭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바로의 압제에 시달리고 있는 백성들을 하나님은 돌아보시고 모세를 통해서 열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통해서 심판에서 구원하시고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죄와 세상과 사탄의 세력에 매여 노예와 같이 살았습니다. 사람들은 이 세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죄와 세상과 사탄의 세력을 이길 수 없습니다. 죄란 얼마나 끈질깁니까?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 사람이 죽기까지 죄는 사람에게 달라붙어 괴롭힙니다. 우리의 육신이 연약하여 끊임없이 죄를 범하고 사탄의 고소를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죄인들을 속량하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켰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피 값으로 우리를 속량하시고 자신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12은 말씀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그의 사랑을 받으며 감사함으로 선행을 하며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습니다.
둘째, 구원의 뿔을 일으키셨습니다. 69-71절을 보십시오.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 뿔은 힘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나 한 사람의 죄짐도 감당하지 못하여 픽픽 잘 쓰러집니다. 다른 한 사람의 죄를 감당하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온 인류의 죄짐을 감당하려면 어떤 능력이 있어야하겠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태어나셔야 했습니다. 누가 죽음 권세를 이길 수 있습니까? 아담 이래로 모든 인류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에 따라 죽어야했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뿔되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지 삼일 만에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의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우리 원수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미워하는 자입니다. 이런 원수에게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구원의 뿔을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습니다.
사탄은 열 개의 뿔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인간의 약점을 이용하여 마구 찌릅니다. 뿔에 찔리게 되면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죽게 됩니다. 정욕과 교만과 허무주의의 뿔에 찔려 신음신음 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의 다스림을 받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두려움의 뿔에 찔려 무기력하게 사는 사람도 예수님을 믿고 평안을 얻고 담대하게 살고 있습니다. 미움의 뿔에 찔려서 끊임없이 고통하던 사람도 예수님을 믿고 그 사랑에 감격하여 미워하던 사람을 용서하고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원수가 누구인지 잘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 내가 어떤 원수의 손에 갇혀 있는가를 깨달아야 원수와 싸우고 그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애굽의 바로 왕은 이스라엘을 노예로 삼아서 노동력을 착취했습니다. 기드온 시대에 미디안이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추수 때마다 열매를 빼앗아갔습니다. 모든 인생들은 죽도록 수고하다가 결국에는 한 줌의 흙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우리는 의롭고 진실 되고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데 이렇게 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내적인 원수가 있습니다. 우리 속에서는 선하고 의롭게 살고자 하는 소욕과 죄의 소욕이 끊임없이 싸웁니다(롬7장). 우리가 죄를 지으면 죄가 우리를 포로로 삼습니다. 그래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이로 인해서 정죄의식과 자책감을 가지게 됩니다. 누군가가 죄 문제를 담당해주어야 하는데, 예수님께서 이런 죄 문제를 담당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진실한 회개와 주님의 구원을 간구할 때 내 안에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해결되지 않던 죄 문제가 해결됩니다.
예수님은 정말로 힘이 세십니다. 그는 거라사 광인을 말씀 한 마디로 치료하셨습니다. 광풍을 잠잠하게 하셨습니다. 중풍병자에게 죄사함을 선포하고 일어나 걷게 하셨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말씀 한마디로 살리셨습니다. 영화 워룸(War Room)은 우리의 원수가 사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사탄임을 깨우쳐 줍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남편 속에 있는 죄가 원수이지 그 남편이 원수가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기도로 사탄과 싸웠습니다. 그리고 가정을 지켰습니다. 우리가 기도로 나와 가정과 교회를 파괴하려는 사탄의 세력과 영적인 싸움을 싸우기를 기도합니다.
왜 하나님이 죄인된 우리를 구원하십니까? 72,73절을 보십시오.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맹세라.” 구원의 근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조상들과 세운 언약입니다. 1장을 보면 ‘긍휼’이란 단어가 반복됩니다(50,54,58,72,78). 구원 역사의 밑바닥에는 하나님의 크신 긍휼이 흐르고 있습니다. 구원의 역사는 인간의 열심과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긍휼하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사가랴는 믿음으로 산 조상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현재 이스라엘의 형편은 보잘 것이 없고 허물투성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나님은 긍휼과 거룩하신 약속의 말씀에 기초해서 구원하십니다. 특히 창세기 22:16-18에 기록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를 언급합니다. 긍휼과 약속을 기초로 구원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은 선하고 신실하십니다.
셋째,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십니다. 74,75절을 보십시오. “우리로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입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입고 구원을 받았으니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종신토록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되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길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제일 되는 삶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데 방해되는 요소는 죄로 인한 두려움입니다. 성결하고 의로운 생활을 하지 않으면 두려움이 생깁니다. 그런데 죄 문제가 해결되면 두려움이 없어지고 평강이 임하게 됩니다. 그래서 두려움이 없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됩니다. 우리 인생은 자기를 위해서 살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라고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구원 자체를 목적으로 삼기 때문에 구원의 은혜를 받은 후에 욕심을 따라 살다가 더욱 비참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그와 바른 관계를 맺고 거룩한 삶을 살며 사명을 감당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은 가나안 땅에서 잘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사명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성결과 의를 갖추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 광야훈련을 시키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통해 구원받은 후에는 끊임없이 성화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에서 자라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죽기까지 감당함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넷째, 돋는 해로 임하신 예수님. 78,79절을 보십시오.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돋는 해가 임하기 전에 인간의 영적인 상태가 어떠했습니까? 사람들은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었습니다. 늘 어둡고 부정적이고 운명적인 생각에 시달립니다. 허무, 무의미, 무기력, 우울함 등 삶의 의욕과 희망을 상실한 채 살아갑니다. 살아있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와 같이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이런 인생들에게 돋는 해로서 위로부터 임하십니다. 돋는 해는 강한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고 세상을 환하게 밝힙니다. 돋는 해가 떠오르기 전에 세상은 가장 어둡고 차갑습니다. 깜깜한 어둠 가운데서 해가 떠오르게 되면 어두움이 서서히 물러갑니다. 또한 돋는 해는 치료의 역사를 일으킵니다. 이사야 60:1,2은 말씀합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깜깜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말라기 4: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돋는 해 되신 예수님을 영접할 때 병든 내면이 치료되어서 송아지 같이 뛰는 삶을 살게 됩니다.
세상 어두움의 세력은 너무나 강하여서 촛불이나 등불과 같은 작은 빛으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촛불을 통해서 시민 혁명이 일어났지만, 인간의 내면에 있는 부패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또 다시 반복됩니다. 강렬하게 떠오르는 돋는 해 되신 예수님만이 인류의 어두움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어둠과 죽음의 세력을 완전히 물리치시고 생명력이 넘치는 인생을 살게 하시는 돋는 해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8장 12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이런 구원자가 오시는 길을 준비하기 위해서 요한은 장차 어떤 일을 하게 됩니까? 76,77절을 보십시오.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예비하여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요한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일을 합니다. 그것은 죄 사함을 받도록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실제적인 문제에서 구원이 필요했습니다.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이 되고 가난과 질병으로부터 구원을 받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절실한 것은 죄로부터 구원받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어둠 속에서 절망하고 있지만 그 원인이 무엇인지 잘 깨닫 지 못하고 안다고 해도 해결할 힘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그의 인생 문제가 죄와 죽음이라는 것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받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였습니다. 율법은 항상 요구만 하고 지키지 못하면 정죄합니다. 잘 하다가 하나만 범해도 죄인이 됩니다. 사람들은 율법을 통해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절망하게 됩니다. 구원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합니다. 그 구원자가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의 사명은 이를 깨우쳐 주는 것입니다. 죄 사함을 받으려면 먼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에게 죄 사함을 받는 회개의 세례를 받도록 도전했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는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말하면서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헤롯왕의 간음 문제에 도전을 했다가 목 베임을 당했습니다.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죄 사함을 받게 하는 구원의 진리를 전파했습니다. 그가 이런 삶을 살기까지 어떤 훈련을 받았습니까?
80절을 보십시오.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빈 들은 광야입니다.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입니다. 그러나 빈 들은 영적인 훈련을 받을 수 있는 장소입니다. 한마디로 광야 훈련을 받은 것입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늙어서 자식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요한을 감싸고 온실 같은 환경에서 살도록 하기 쉬웠지만 광야로 보내어서 훈련받게 하였습니다. 빈들은 외로운 곳입니다. 고독한 곳입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준행하며 기도에 힘썼습니다. 눅3:2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을 때 그를 통해 회개운동이 들판을 태우는 불길 같이 번져나갔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구원의 뿔이시오 돋는 해가 되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깊이 영접하고 구원의 감격을 누리며 성결과 의로 종신토록 하나님을 섬기는 은혜를 주셔서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이번 성탄에 이웃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찬양을 합시다.
말씀 | 누가복음 1:57-80
요절 | 누가복음 1:69
구원의 뿔 예수님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성탄절이 다가오면서 분위기가 조금씩 뜨고 있습니다. 눈도 많이 내렸습니다. 성탄절의 주인공은 산타크로스 할아버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성육신하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속량하시며 구원의 뿔이시오 돋는 해가 되십니다. 이 시간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하실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성탄절의 의미를 깊이 묵상함으로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감사와 기쁨이 솟아오르기를 기도합니다.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을 때에 이웃과 친족이 주께서 저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였습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믿음으로 살았는데 늙도록 자식이 없었습니다. 이때 보는 이들도 안타까웠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믿음으로 살면 하나님이 축복해주셔야 한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아도 별다른 축복도 없는 것 같으면 마음이 힘들어집니다. 당시 자식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하나님의 은혜로 늘그막에 자식을 낳음으로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을 체험하게 되어 기뻐했습니다. 믿음으로 살 때 고난이 있지만 고난이 클수록 하나님의 은혜도 깊고 풍성합니다.
그들은 아이를 할례 하러 와서 이름을 짓고자 할 때 그 과정에서 논란을 빚었습니다. 친족들은 그 부친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 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친은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네 친족 중에 이 이름으로 이름 한 이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 부친 사가랴에게 형용하여 무엇으로 이름하려 하는가 물었습니다. 그는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습니다. 다 기이히 여길 때에 그의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다 두려워하였습니다. 온 유대 산중에 그 모든 말이 퍼지매 듣는 사람이 다 이 아이가 장차 어찌될꼬 하며 큰 기대감을 품었습니다. 모두 주의 손이 저와 함께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가랴는 입이 열리자마자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을 합니다. 그의 첫 마디는 “찬송하리로다”입니다. 그는 벙어리 훈련을 받는 기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아들이 태어나는 것을 시작으로 하나님께서 앞으로 어떤 일을 행하실지 예언하였습니다.
첫째,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하십니다. 돌아보셨다는 뜻은 방문하셨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난 400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아서 버려진 것 같았습니다. 그들은 헬라와 페르샤와 로마의 압제 속에서 탄식하며 부르짖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메시야에 대한 갈망이 강렬했습니다. 68절을 보십시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여기서 “속량하다”는 것은 포로나 노예 상태에 있는 사람을 대가를 지불하고 자유롭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바로의 압제에 시달리고 있는 백성들을 하나님은 돌아보시고 모세를 통해서 열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통해서 심판에서 구원하시고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죄와 세상과 사탄의 세력에 매여 노예와 같이 살았습니다. 사람들은 이 세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죄와 세상과 사탄의 세력을 이길 수 없습니다. 죄란 얼마나 끈질깁니까?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 사람이 죽기까지 죄는 사람에게 달라붙어 괴롭힙니다. 우리의 육신이 연약하여 끊임없이 죄를 범하고 사탄의 고소를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죄인들을 속량하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켰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피 값으로 우리를 속량하시고 자신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12은 말씀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그의 사랑을 받으며 감사함으로 선행을 하며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습니다.
둘째, 구원의 뿔을 일으키셨습니다. 69-71절을 보십시오.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 뿔은 힘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나 한 사람의 죄짐도 감당하지 못하여 픽픽 잘 쓰러집니다. 다른 한 사람의 죄를 감당하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온 인류의 죄짐을 감당하려면 어떤 능력이 있어야하겠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태어나셔야 했습니다. 누가 죽음 권세를 이길 수 있습니까? 아담 이래로 모든 인류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에 따라 죽어야했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뿔되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지 삼일 만에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의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우리 원수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미워하는 자입니다. 이런 원수에게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구원의 뿔을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습니다.
사탄은 열 개의 뿔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인간의 약점을 이용하여 마구 찌릅니다. 뿔에 찔리게 되면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죽게 됩니다. 정욕과 교만과 허무주의의 뿔에 찔려 신음신음 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의 다스림을 받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두려움의 뿔에 찔려 무기력하게 사는 사람도 예수님을 믿고 평안을 얻고 담대하게 살고 있습니다. 미움의 뿔에 찔려서 끊임없이 고통하던 사람도 예수님을 믿고 그 사랑에 감격하여 미워하던 사람을 용서하고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원수가 누구인지 잘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 내가 어떤 원수의 손에 갇혀 있는가를 깨달아야 원수와 싸우고 그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애굽의 바로 왕은 이스라엘을 노예로 삼아서 노동력을 착취했습니다. 기드온 시대에 미디안이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추수 때마다 열매를 빼앗아갔습니다. 모든 인생들은 죽도록 수고하다가 결국에는 한 줌의 흙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우리는 의롭고 진실 되고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데 이렇게 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내적인 원수가 있습니다. 우리 속에서는 선하고 의롭게 살고자 하는 소욕과 죄의 소욕이 끊임없이 싸웁니다(롬7장). 우리가 죄를 지으면 죄가 우리를 포로로 삼습니다. 그래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이로 인해서 정죄의식과 자책감을 가지게 됩니다. 누군가가 죄 문제를 담당해주어야 하는데, 예수님께서 이런 죄 문제를 담당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진실한 회개와 주님의 구원을 간구할 때 내 안에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해결되지 않던 죄 문제가 해결됩니다.
예수님은 정말로 힘이 세십니다. 그는 거라사 광인을 말씀 한 마디로 치료하셨습니다. 광풍을 잠잠하게 하셨습니다. 중풍병자에게 죄사함을 선포하고 일어나 걷게 하셨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말씀 한마디로 살리셨습니다. 영화 워룸(War Room)은 우리의 원수가 사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사탄임을 깨우쳐 줍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남편 속에 있는 죄가 원수이지 그 남편이 원수가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기도로 사탄과 싸웠습니다. 그리고 가정을 지켰습니다. 우리가 기도로 나와 가정과 교회를 파괴하려는 사탄의 세력과 영적인 싸움을 싸우기를 기도합니다.
왜 하나님이 죄인된 우리를 구원하십니까? 72,73절을 보십시오.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맹세라.” 구원의 근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조상들과 세운 언약입니다. 1장을 보면 ‘긍휼’이란 단어가 반복됩니다(50,54,58,72,78). 구원 역사의 밑바닥에는 하나님의 크신 긍휼이 흐르고 있습니다. 구원의 역사는 인간의 열심과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긍휼하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사가랴는 믿음으로 산 조상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현재 이스라엘의 형편은 보잘 것이 없고 허물투성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나님은 긍휼과 거룩하신 약속의 말씀에 기초해서 구원하십니다. 특히 창세기 22:16-18에 기록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를 언급합니다. 긍휼과 약속을 기초로 구원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은 선하고 신실하십니다.
셋째,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십니다. 74,75절을 보십시오. “우리로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입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입고 구원을 받았으니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종신토록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되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길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제일 되는 삶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데 방해되는 요소는 죄로 인한 두려움입니다. 성결하고 의로운 생활을 하지 않으면 두려움이 생깁니다. 그런데 죄 문제가 해결되면 두려움이 없어지고 평강이 임하게 됩니다. 그래서 두려움이 없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됩니다. 우리 인생은 자기를 위해서 살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라고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구원 자체를 목적으로 삼기 때문에 구원의 은혜를 받은 후에 욕심을 따라 살다가 더욱 비참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그와 바른 관계를 맺고 거룩한 삶을 살며 사명을 감당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은 가나안 땅에서 잘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사명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성결과 의를 갖추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 광야훈련을 시키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통해 구원받은 후에는 끊임없이 성화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에서 자라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죽기까지 감당함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넷째, 돋는 해로 임하신 예수님. 78,79절을 보십시오.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돋는 해가 임하기 전에 인간의 영적인 상태가 어떠했습니까? 사람들은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었습니다. 늘 어둡고 부정적이고 운명적인 생각에 시달립니다. 허무, 무의미, 무기력, 우울함 등 삶의 의욕과 희망을 상실한 채 살아갑니다. 살아있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와 같이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이런 인생들에게 돋는 해로서 위로부터 임하십니다. 돋는 해는 강한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고 세상을 환하게 밝힙니다. 돋는 해가 떠오르기 전에 세상은 가장 어둡고 차갑습니다. 깜깜한 어둠 가운데서 해가 떠오르게 되면 어두움이 서서히 물러갑니다. 또한 돋는 해는 치료의 역사를 일으킵니다. 이사야 60:1,2은 말씀합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깜깜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말라기 4: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돋는 해 되신 예수님을 영접할 때 병든 내면이 치료되어서 송아지 같이 뛰는 삶을 살게 됩니다.
세상 어두움의 세력은 너무나 강하여서 촛불이나 등불과 같은 작은 빛으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촛불을 통해서 시민 혁명이 일어났지만, 인간의 내면에 있는 부패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또 다시 반복됩니다. 강렬하게 떠오르는 돋는 해 되신 예수님만이 인류의 어두움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어둠과 죽음의 세력을 완전히 물리치시고 생명력이 넘치는 인생을 살게 하시는 돋는 해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8장 12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이런 구원자가 오시는 길을 준비하기 위해서 요한은 장차 어떤 일을 하게 됩니까? 76,77절을 보십시오.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예비하여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요한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일을 합니다. 그것은 죄 사함을 받도록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실제적인 문제에서 구원이 필요했습니다.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이 되고 가난과 질병으로부터 구원을 받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절실한 것은 죄로부터 구원받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어둠 속에서 절망하고 있지만 그 원인이 무엇인지 잘 깨닫 지 못하고 안다고 해도 해결할 힘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그의 인생 문제가 죄와 죽음이라는 것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받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였습니다. 율법은 항상 요구만 하고 지키지 못하면 정죄합니다. 잘 하다가 하나만 범해도 죄인이 됩니다. 사람들은 율법을 통해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절망하게 됩니다. 구원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합니다. 그 구원자가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의 사명은 이를 깨우쳐 주는 것입니다. 죄 사함을 받으려면 먼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에게 죄 사함을 받는 회개의 세례를 받도록 도전했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는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말하면서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헤롯왕의 간음 문제에 도전을 했다가 목 베임을 당했습니다.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죄 사함을 받게 하는 구원의 진리를 전파했습니다. 그가 이런 삶을 살기까지 어떤 훈련을 받았습니까?
80절을 보십시오.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빈 들은 광야입니다.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입니다. 그러나 빈 들은 영적인 훈련을 받을 수 있는 장소입니다. 한마디로 광야 훈련을 받은 것입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늙어서 자식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요한을 감싸고 온실 같은 환경에서 살도록 하기 쉬웠지만 광야로 보내어서 훈련받게 하였습니다. 빈들은 외로운 곳입니다. 고독한 곳입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준행하며 기도에 힘썼습니다. 눅3:2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을 때 그를 통해 회개운동이 들판을 태우는 불길 같이 번져나갔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구원의 뿔이시오 돋는 해가 되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깊이 영접하고 구원의 감격을 누리며 성결과 의로 종신토록 하나님을 섬기는 은혜를 주셔서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이번 성탄에 이웃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찬양을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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