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8lk1강(1:26-56) 영원한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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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성탄말씀 제 1 강
말씀 | 누가복음 1:26-56
요절 | 누가복음 1:33
영원한 왕 예수님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즐거운 성탄절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 하면서 마리아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가 살펴보고자 합니다. 특히 은혜 받은 마리아의 찬송 시에는 메시아를 보내주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왕 되신 예수님의 통치의 성격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으로 인해 받은 은혜가 무엇입니까? 또 우리가 믿고 충성하는 예수님은 어떤 왕이십니까? 예수님의 통치를 받음으로 우리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어떤 모습으로 임하였습니까?
첫째, 마리아에게 임한 은혜(26-45). 하나님이 천사 가브리엘을 보내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 가서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에게 이르렀습니다. 마리아는 다윗의 자손 요셉과 약혼한 상태였습니다. 약혼을 하면 두 사람은 법적으로 부부로 인정되었습니다. 약혼기간에는 정조를 지켜야만 했고 정조를 어기면 사형을 당했습니다(신 22:22-23).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요셉은 비록 가난한 목수였지만, 다윗 가문의 자손으로서 왕손의 품격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는 시대에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믿음을 버리고 이교도와 같이 살아갔고 감정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고 공동체를 상실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당시에 보기 드문 경건한 청년이었습니다. 나중에 약혼한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배신감으로 괴로웠지만 마리아가 해를 당하지 않도록 조용히 이혼증서를 주어서 끊고자 했습니다. 이처럼 요셉은 의롭고 진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는 요셉에게 비빔밥과 된장찌개를 맛있게 끓여주고 사랑을 받는 상상을 하며 즐거워했습니다. 요셉과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자식들을 낳아 키울 꿈에 부풀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는 어떤 여인이었습니까? 마리아는 미리암의 헬라어 음역입니다. 애굽어에서 ‘가장 사랑받는 자’라는 뜻입니다. 27절에 ‘약혼한 처녀’, ‘그 처녀의 이름’이라고 하면서 마리아가 처녀라는 사실을 두 번 강조합니다. 이는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 중에서 탄생하셔야 할 뿐만 아니라 처녀의 몸에서 탄생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신앙이 깊은 여인이었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 내면성을 갖추었습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마리아가 성모로 택함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 때문입니다.
천사는 마리아를 만나 인사하였습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이는 보통 인사가 아닙니다. 기드온과 같이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과 선택을 받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약속입니다. “은혜”는 자격이 없는 인간에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물입니다. 히브리적인 개념에서 은혜(헨)란 하나님이 장막을 치시고 그 백성과 함께 거하며 그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그림입니다. 이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예수님,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시고 이 땅에 거하시는 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중에 은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구현된 속죄의 사랑입니다. 그 은혜로 말미암아 죄로 인해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특별히 하나님의 아들을 낳고 키우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여성으로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은혜입니다. 마리아가 받은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에 천사 가브리엘도 흠모하여 “은혜를 받은 자여!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는도다”라고 말했습니다.
마리아는 천사의 인사를 받고 놀랐습니다. 아무런 자격도 없고 어떤 기대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천사의 인사가 어찌함인가 생각했습니다. 이런 마리아에게 천사는 무서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마리아는 무엇이 무서웠을까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실체를 발견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성전에서 여호와의 영광을 보고 말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구나.’ 이 말은 ‘나는 이제 죽었구나’라는 말입니다. 밤새도록 수고하였지만 아무 것도 잡지 못한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렸을 때 두 배 가득 고기를 잡았습니다. 이때 그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두려워하였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설 때 모두가 두렵습니다. 두려움의 원인은 죄로 인한 형벌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깊이 발견함에서 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있습니다. 그의 부르심을 감당하고자 할 때에 따르는 부담과 희생을 생각할 때 불안해 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사의 말대로 마리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받았습니다. NIV 영어 성경에서는 “Do not be afraid, Mary; you have found favor with God(30)”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이는 하나님 안에서 은혜를 발견한다는 뜻입니다. 마리아를 보시는 하나님의 눈은 호의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리아에게 가장 좋은 선물을 주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마리아보다 더 사랑스럽고, 더 충성스럽고, 더 믿음직한 여인은 없는 것처럼 그렇게 마리아를 보십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천사의 말에 당황하거나 무서워할 것이 없습니다. 이 하나님은 마리아를 시작으로 이후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고자 하십니다. 이제 누구든지 하나님에게서 제일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하시는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평생 강도짓만 하던 사람에게도 판단하고 정죄하기보다는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 옆에 십자가에 못 박힌 그 강도라도 하나님에게서 저주가 아니라 은혜를 볼 수 있었습니다.
31절을 보십시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예수”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라”는 뜻으로 구약의 ‘여호수아’와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죄로부터 그의 백성을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을 보면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마리아가 낳은 아들은 장차 어떤 분이 되십니까?
첫째로, 그는 큰 자가 됩니다. 32절을 보십시오.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15절에서 천사 가브리엘은 세례 요한을 주 앞에서 큰 자라고 했습니다. 이는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선구자로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도록 준비하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처럼 많은 사람을 예수님께로 인도하여 구원을 받게 하는 자는 하늘의 별과 같이 하나님 앞에 큰 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명 때문에 큰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존재 자체가 큰 분이십니다. 또한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 면에서도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으로 큰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격을 가지셨습니다. 가장 높은 분이시지만 가장 낮은 위치에서 섬기는 인생을 사셨습니다. 그의 삶을 통해서 겸손과 섬김이 위대하다는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위대성은 그 분의 권세와 업적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그는 자연세계와 영적 세계를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셨습니다. 말씀 한 마디로 광풍을 잠잠케 하시고 귀신들린 사람, 각종 질병에 걸린 사람들을 치료해주셨습니다. 죽은 나사로도 살리셨습니다. 무엇보다 십자가와 부활로 인간의 근본문제인 죄와 죽음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가장 크신 분입니다.
둘째로,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는 완전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본체가 하나님이십니다. 그가 지극히 높으신 분이기 때문에 우주의 티끌과 같은 인간은 예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창조주로서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신 분이십니다. 그는 시작이나 끝이 없으시고 하늘과 땅에 충만하십니다. 그분의 인성도 그 자체의 고유한 속성을 잃지 않습니다. 즉 인성은 시작의 날이 있으며, 창조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 인성은 유한하며, 참 육신의 모든 속성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부활로 인성에 불멸성을 부여받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인성의 실재를 바꾸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과 부활이 그분의 몸의 실재에 의존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두 본성은 한 위격에 밀접하게 연합되어 있어 그분의 죽음으로도 나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에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 위탁하신 것은 육신에서 분리된 참된 인간의 영이었습니다. 한편 그리스도의 신성은 무덤에 누워계실 때조차도 항상 그분의 인성과 연합된 채로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신성은 얼마동안 그것이 드러나지 않았던 유아시기에도, 항상 그분 안에 유지되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참 하나님과 참 사람으로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 참 하나님이셔야 했던 것은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죽음을 정복하시기 위한 것이었으며, 그가 참 사람이셔야 했던 것은 육신의 연약함에 따라 우리를 위해 죽으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그는 왕 중의 왕으로서 그의 통치는 영원무궁합니다.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32b,33).”
예수님은 다윗의 혈통을 이어 받은 약속된 메시아로서 왕권과 통치권이 주어집니다. 다윗은 이상적인 왕이었습니다. 그는 왕이 되어서 백성들을 진실로 사랑했고 백성들의 안녕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고 싸웠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고 하나님과 백성들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그가 사랑과 공평과 정의로 다스렸기 때문에 백성들은 행복과 평안을 누렸습니다. 이후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과 같은 왕이 나타나서 자신들을 통치해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이런 다윗은 장차 오실 참된 왕 메시아에 대한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고 그 분의 통치를 받는 사람은 온유와 겸손과 사랑으로 다스림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연약한 자들의 연약함을 깊이 이해하시고 긍휼히 여기사 감당해주십니다. 죄로 병든 영혼이라도 정죄치 않으시고 용서해주시고 병든 내면을 치유하셔서 건강한 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거짓된 세상에서 진리로 인도함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은 천국의 기쁨을 맛보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도 그렇고 북한도 그렇고 우리나라를 보면 통치자가 바뀌면 다음에 피바람이 불어닥칩니다. 정권이 교체되면서 보복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지금 정권이 끝나고 나면 어떻게 될까요? 왜 이런 보복의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일까요? 문제의 본질을 보면 인간의 권력에 대한 욕망과 물질에 대한 탐욕이 항상 걸려 있습니다. 욕심으로 인해서 인간은 고통을 겪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이 땅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지옥의 불구덩이에서 고통을 받는 현실을 볼 때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공의와 인애로 다스릴 때 우리는 평강을 누립니다.
예수님의 통치가 지금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 실현되고 있습니까? 내가 마음의 중심에 주님을 모시고 그의 다스림을 받을 때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친절과 온유와 오래참음의 열매를 맺습니다. 주님의 다스림을 받으면서 왜 염려하십니까? 많은 중년의 사람들이 노후를 염려하는데 사후를 염려하지 않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된다면 무슨 염려가 있겠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먹고 사는 것에 대한 불안과 염려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과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평강의 왕이십니다(사 9:6). 나의 신분이 낮건 높건, 부하건 가난하건, 질병이 있건 없건, 현직에 있건 은퇴하건 주님이 다스려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이명박 정부에 충성했던 사람들, 박근혜 정부에 충성했던 사람들이 불행해졌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섬기는 것으로 인해서 이후에 어떻게 될까요? 주와 복음을 위해서 충성한 것들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마리아는 처녀인 자신이 어떻게 잉태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천사에게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물었습니다. 천사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처녀인 마리아의 몸에 성령이 임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씨가 잉태되어서 하나님의 아들을 낳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이로 인해 예수님은 아담의 죄성을 물려받지 않은 흠 없는 인간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신비스러운 방법으로 잉태되신 후에 인간의 탄생과 성장 과정을 똑같이 밟으셨습니다. 그래서 완전한 하나님이시오, 죄가 없으신 완전한 인간으로서 인간의 죄를 대속할 수 있게 되신 것입니다.
천사는 마리아가 믿음을 갖도록 엘리사벳의 예를 들었습니다. 그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습니다.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 하던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습니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습니다. 마리아는 “주의 계집 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하며 순종하였습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서 순종하였습니다. 자신은 요셉의 약혼녀 이전에 주의 여종이라는 정체성이 분명하였습니다. 당시 종은 자기 것이 없었습니다. 주인의 소유였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은 주님께 속해 있고 나의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라는 고백을 한 것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주인이고 하나님을 종처럼 생각합니다. 주님이 자신의 뜻대로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힘들어 합니다. 이는 주객이 전도된 것입니다. 마리아의 결정은 인간적으로 보면 사람들의 오해를 사서 돌에 맞아죽을 수도 있고, 사람들의 조롱과 의심을 받으면서 평생 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창조주요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믿고 자신은 그의 종이요 청지기임을 알 때 올바른 선택과 결정을 할 수 있습니다. 모라비안 성도들은 자신은 주님의 종이라는 분명한 정체성이 있었기 때문에 선교 역사를 위해서라면 공동묘지 관리원이 되기도 하고 신발 두 짝만 들고 알레스카에 선교사로 나가기도 했습니다. 가라면 가고 서라면 섰습니다. 그리할 때 그들은 300년 동안 세계 선교에 위대하게 쓰임 받았고 지금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순종을 배워 나의 인생에 두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기를 기도합니다.
마리아는 믿음으로 결정을 하고 삼일길이나 멀리 있는 엘리사벳을 찾아갔습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문안 인사를 듣고 어떻게 축복하고 격려했습니까?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고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신앙적인 권면을 들은 후에 심령에 드리워졌던 근심과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성령의 밝은 빛으로 충만해졌습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믿음의 말, 지혜로운 말, 격려의 말을 듣고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 계집 종의 비천함을 돌아 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마리아가 찬양한 내용을 살펴보면,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 인생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보편적인 하나님으로 나아갑니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마리아는 하나님이 큰 일을 행하셨다고 했는데 이는 예수님을 잉태하고 낳는 일입니다. 마리아가 만세에 복이 있는 여인이 된 것은 이 일에 쓰임 받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복은 어디에 있을까요? 구원을 받고 만민 구속역사에 쓰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사명을 복으로 주셨습니다. 각 사람은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그 사명을 이루며 산다는 것은 그 삶을 참으로 위대하게 합니다. 우리가 그 사명을 감당하지만 자랑할 것은 아닙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내가 어떤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더라고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에 나오는 비천한 자, 굶주린 자는 절망하기 쉬운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높이시며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심은 이 세상에서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 있는 자들이라 하더라도 복음을 듣고 절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절망적인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이 소망을 주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상한 갈대,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자도 치료하시고 능력을 주셔서 살게 하십니다. 죄인을 용서하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며 무능한 자에게 능력을 부어주셔서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이런 구원의 역사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영원한 왕이신 예수님으로 인해서 이 세상에서 비천한 자, 고달픈 자, 슬픈 자, 절망한 자들이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누가는 이런 예수님을 누가복음 전체에서 그리고 있기 때문에 누가복음을 비천한 자들을 위한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이번 성탄절을 맞이하여 이 땅에 낮아져 오신 예수님을 깊이 영접하고 배우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영원한 왕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는 가운데 평강과 기쁨이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인생의 고난과 슬픔으로 힘든 우리가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안에서 참된 위로를 받고 소망을 발견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누가복음 1:26-56
요절 | 누가복음 1:33
영원한 왕 예수님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즐거운 성탄절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 하면서 마리아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가 살펴보고자 합니다. 특히 은혜 받은 마리아의 찬송 시에는 메시아를 보내주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왕 되신 예수님의 통치의 성격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으로 인해 받은 은혜가 무엇입니까? 또 우리가 믿고 충성하는 예수님은 어떤 왕이십니까? 예수님의 통치를 받음으로 우리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어떤 모습으로 임하였습니까?
첫째, 마리아에게 임한 은혜(26-45). 하나님이 천사 가브리엘을 보내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 가서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에게 이르렀습니다. 마리아는 다윗의 자손 요셉과 약혼한 상태였습니다. 약혼을 하면 두 사람은 법적으로 부부로 인정되었습니다. 약혼기간에는 정조를 지켜야만 했고 정조를 어기면 사형을 당했습니다(신 22:22-23).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요셉은 비록 가난한 목수였지만, 다윗 가문의 자손으로서 왕손의 품격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는 시대에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믿음을 버리고 이교도와 같이 살아갔고 감정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고 공동체를 상실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당시에 보기 드문 경건한 청년이었습니다. 나중에 약혼한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배신감으로 괴로웠지만 마리아가 해를 당하지 않도록 조용히 이혼증서를 주어서 끊고자 했습니다. 이처럼 요셉은 의롭고 진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는 요셉에게 비빔밥과 된장찌개를 맛있게 끓여주고 사랑을 받는 상상을 하며 즐거워했습니다. 요셉과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자식들을 낳아 키울 꿈에 부풀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는 어떤 여인이었습니까? 마리아는 미리암의 헬라어 음역입니다. 애굽어에서 ‘가장 사랑받는 자’라는 뜻입니다. 27절에 ‘약혼한 처녀’, ‘그 처녀의 이름’이라고 하면서 마리아가 처녀라는 사실을 두 번 강조합니다. 이는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 중에서 탄생하셔야 할 뿐만 아니라 처녀의 몸에서 탄생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신앙이 깊은 여인이었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 내면성을 갖추었습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마리아가 성모로 택함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 때문입니다.
천사는 마리아를 만나 인사하였습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이는 보통 인사가 아닙니다. 기드온과 같이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과 선택을 받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약속입니다. “은혜”는 자격이 없는 인간에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물입니다. 히브리적인 개념에서 은혜(헨)란 하나님이 장막을 치시고 그 백성과 함께 거하며 그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그림입니다. 이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예수님,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시고 이 땅에 거하시는 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중에 은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구현된 속죄의 사랑입니다. 그 은혜로 말미암아 죄로 인해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특별히 하나님의 아들을 낳고 키우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여성으로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은혜입니다. 마리아가 받은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에 천사 가브리엘도 흠모하여 “은혜를 받은 자여!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는도다”라고 말했습니다.
마리아는 천사의 인사를 받고 놀랐습니다. 아무런 자격도 없고 어떤 기대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천사의 인사가 어찌함인가 생각했습니다. 이런 마리아에게 천사는 무서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마리아는 무엇이 무서웠을까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실체를 발견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성전에서 여호와의 영광을 보고 말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구나.’ 이 말은 ‘나는 이제 죽었구나’라는 말입니다. 밤새도록 수고하였지만 아무 것도 잡지 못한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렸을 때 두 배 가득 고기를 잡았습니다. 이때 그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두려워하였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설 때 모두가 두렵습니다. 두려움의 원인은 죄로 인한 형벌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깊이 발견함에서 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있습니다. 그의 부르심을 감당하고자 할 때에 따르는 부담과 희생을 생각할 때 불안해 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사의 말대로 마리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받았습니다. NIV 영어 성경에서는 “Do not be afraid, Mary; you have found favor with God(30)”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이는 하나님 안에서 은혜를 발견한다는 뜻입니다. 마리아를 보시는 하나님의 눈은 호의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리아에게 가장 좋은 선물을 주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마리아보다 더 사랑스럽고, 더 충성스럽고, 더 믿음직한 여인은 없는 것처럼 그렇게 마리아를 보십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천사의 말에 당황하거나 무서워할 것이 없습니다. 이 하나님은 마리아를 시작으로 이후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고자 하십니다. 이제 누구든지 하나님에게서 제일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하시는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평생 강도짓만 하던 사람에게도 판단하고 정죄하기보다는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 옆에 십자가에 못 박힌 그 강도라도 하나님에게서 저주가 아니라 은혜를 볼 수 있었습니다.
31절을 보십시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예수”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라”는 뜻으로 구약의 ‘여호수아’와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죄로부터 그의 백성을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을 보면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마리아가 낳은 아들은 장차 어떤 분이 되십니까?
첫째로, 그는 큰 자가 됩니다. 32절을 보십시오.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15절에서 천사 가브리엘은 세례 요한을 주 앞에서 큰 자라고 했습니다. 이는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선구자로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도록 준비하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처럼 많은 사람을 예수님께로 인도하여 구원을 받게 하는 자는 하늘의 별과 같이 하나님 앞에 큰 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명 때문에 큰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존재 자체가 큰 분이십니다. 또한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 면에서도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으로 큰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격을 가지셨습니다. 가장 높은 분이시지만 가장 낮은 위치에서 섬기는 인생을 사셨습니다. 그의 삶을 통해서 겸손과 섬김이 위대하다는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위대성은 그 분의 권세와 업적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그는 자연세계와 영적 세계를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셨습니다. 말씀 한 마디로 광풍을 잠잠케 하시고 귀신들린 사람, 각종 질병에 걸린 사람들을 치료해주셨습니다. 죽은 나사로도 살리셨습니다. 무엇보다 십자가와 부활로 인간의 근본문제인 죄와 죽음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가장 크신 분입니다.
둘째로,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는 완전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본체가 하나님이십니다. 그가 지극히 높으신 분이기 때문에 우주의 티끌과 같은 인간은 예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창조주로서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신 분이십니다. 그는 시작이나 끝이 없으시고 하늘과 땅에 충만하십니다. 그분의 인성도 그 자체의 고유한 속성을 잃지 않습니다. 즉 인성은 시작의 날이 있으며, 창조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 인성은 유한하며, 참 육신의 모든 속성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부활로 인성에 불멸성을 부여받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인성의 실재를 바꾸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과 부활이 그분의 몸의 실재에 의존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두 본성은 한 위격에 밀접하게 연합되어 있어 그분의 죽음으로도 나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에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 위탁하신 것은 육신에서 분리된 참된 인간의 영이었습니다. 한편 그리스도의 신성은 무덤에 누워계실 때조차도 항상 그분의 인성과 연합된 채로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신성은 얼마동안 그것이 드러나지 않았던 유아시기에도, 항상 그분 안에 유지되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참 하나님과 참 사람으로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 참 하나님이셔야 했던 것은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죽음을 정복하시기 위한 것이었으며, 그가 참 사람이셔야 했던 것은 육신의 연약함에 따라 우리를 위해 죽으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그는 왕 중의 왕으로서 그의 통치는 영원무궁합니다.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32b,33).”
예수님은 다윗의 혈통을 이어 받은 약속된 메시아로서 왕권과 통치권이 주어집니다. 다윗은 이상적인 왕이었습니다. 그는 왕이 되어서 백성들을 진실로 사랑했고 백성들의 안녕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고 싸웠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고 하나님과 백성들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그가 사랑과 공평과 정의로 다스렸기 때문에 백성들은 행복과 평안을 누렸습니다. 이후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과 같은 왕이 나타나서 자신들을 통치해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이런 다윗은 장차 오실 참된 왕 메시아에 대한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고 그 분의 통치를 받는 사람은 온유와 겸손과 사랑으로 다스림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연약한 자들의 연약함을 깊이 이해하시고 긍휼히 여기사 감당해주십니다. 죄로 병든 영혼이라도 정죄치 않으시고 용서해주시고 병든 내면을 치유하셔서 건강한 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거짓된 세상에서 진리로 인도함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은 천국의 기쁨을 맛보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도 그렇고 북한도 그렇고 우리나라를 보면 통치자가 바뀌면 다음에 피바람이 불어닥칩니다. 정권이 교체되면서 보복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지금 정권이 끝나고 나면 어떻게 될까요? 왜 이런 보복의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일까요? 문제의 본질을 보면 인간의 권력에 대한 욕망과 물질에 대한 탐욕이 항상 걸려 있습니다. 욕심으로 인해서 인간은 고통을 겪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이 땅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지옥의 불구덩이에서 고통을 받는 현실을 볼 때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공의와 인애로 다스릴 때 우리는 평강을 누립니다.
예수님의 통치가 지금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 실현되고 있습니까? 내가 마음의 중심에 주님을 모시고 그의 다스림을 받을 때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친절과 온유와 오래참음의 열매를 맺습니다. 주님의 다스림을 받으면서 왜 염려하십니까? 많은 중년의 사람들이 노후를 염려하는데 사후를 염려하지 않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된다면 무슨 염려가 있겠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먹고 사는 것에 대한 불안과 염려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과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평강의 왕이십니다(사 9:6). 나의 신분이 낮건 높건, 부하건 가난하건, 질병이 있건 없건, 현직에 있건 은퇴하건 주님이 다스려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이명박 정부에 충성했던 사람들, 박근혜 정부에 충성했던 사람들이 불행해졌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섬기는 것으로 인해서 이후에 어떻게 될까요? 주와 복음을 위해서 충성한 것들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마리아는 처녀인 자신이 어떻게 잉태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천사에게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물었습니다. 천사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처녀인 마리아의 몸에 성령이 임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씨가 잉태되어서 하나님의 아들을 낳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이로 인해 예수님은 아담의 죄성을 물려받지 않은 흠 없는 인간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신비스러운 방법으로 잉태되신 후에 인간의 탄생과 성장 과정을 똑같이 밟으셨습니다. 그래서 완전한 하나님이시오, 죄가 없으신 완전한 인간으로서 인간의 죄를 대속할 수 있게 되신 것입니다.
천사는 마리아가 믿음을 갖도록 엘리사벳의 예를 들었습니다. 그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습니다.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 하던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습니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습니다. 마리아는 “주의 계집 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하며 순종하였습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서 순종하였습니다. 자신은 요셉의 약혼녀 이전에 주의 여종이라는 정체성이 분명하였습니다. 당시 종은 자기 것이 없었습니다. 주인의 소유였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은 주님께 속해 있고 나의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라는 고백을 한 것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주인이고 하나님을 종처럼 생각합니다. 주님이 자신의 뜻대로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힘들어 합니다. 이는 주객이 전도된 것입니다. 마리아의 결정은 인간적으로 보면 사람들의 오해를 사서 돌에 맞아죽을 수도 있고, 사람들의 조롱과 의심을 받으면서 평생 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창조주요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믿고 자신은 그의 종이요 청지기임을 알 때 올바른 선택과 결정을 할 수 있습니다. 모라비안 성도들은 자신은 주님의 종이라는 분명한 정체성이 있었기 때문에 선교 역사를 위해서라면 공동묘지 관리원이 되기도 하고 신발 두 짝만 들고 알레스카에 선교사로 나가기도 했습니다. 가라면 가고 서라면 섰습니다. 그리할 때 그들은 300년 동안 세계 선교에 위대하게 쓰임 받았고 지금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순종을 배워 나의 인생에 두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기를 기도합니다.
마리아는 믿음으로 결정을 하고 삼일길이나 멀리 있는 엘리사벳을 찾아갔습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문안 인사를 듣고 어떻게 축복하고 격려했습니까?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고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신앙적인 권면을 들은 후에 심령에 드리워졌던 근심과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성령의 밝은 빛으로 충만해졌습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믿음의 말, 지혜로운 말, 격려의 말을 듣고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 계집 종의 비천함을 돌아 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마리아가 찬양한 내용을 살펴보면,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 인생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보편적인 하나님으로 나아갑니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마리아는 하나님이 큰 일을 행하셨다고 했는데 이는 예수님을 잉태하고 낳는 일입니다. 마리아가 만세에 복이 있는 여인이 된 것은 이 일에 쓰임 받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복은 어디에 있을까요? 구원을 받고 만민 구속역사에 쓰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사명을 복으로 주셨습니다. 각 사람은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그 사명을 이루며 산다는 것은 그 삶을 참으로 위대하게 합니다. 우리가 그 사명을 감당하지만 자랑할 것은 아닙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내가 어떤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더라고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에 나오는 비천한 자, 굶주린 자는 절망하기 쉬운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높이시며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심은 이 세상에서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 있는 자들이라 하더라도 복음을 듣고 절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절망적인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이 소망을 주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상한 갈대,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자도 치료하시고 능력을 주셔서 살게 하십니다. 죄인을 용서하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며 무능한 자에게 능력을 부어주셔서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이런 구원의 역사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영원한 왕이신 예수님으로 인해서 이 세상에서 비천한 자, 고달픈 자, 슬픈 자, 절망한 자들이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누가는 이런 예수님을 누가복음 전체에서 그리고 있기 때문에 누가복음을 비천한 자들을 위한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이번 성탄절을 맞이하여 이 땅에 낮아져 오신 예수님을 깊이 영접하고 배우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영원한 왕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는 가운데 평강과 기쁨이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인생의 고난과 슬픔으로 힘든 우리가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안에서 참된 위로를 받고 소망을 발견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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