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9년 창8강(9:18-11:26) 바벨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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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창세기 제 8 강
말씀 | 창세기 9:18-11:26
요절 | 창세기 11:9
바벨탑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아담이 인류의 조상이라면 노아는 홍수 심판 이후에 새로운 인류 역사의 조상입니다. 그래서 노아를 제 2의 아담이라고 부릅니다. 아담의 아들 중에 가인이 죄를 범한 것처럼, 노아의 아들 가운데 함이 악을 행합니다. 이를 볼 때 홍수 심판 전이나 홍수 심판 이후에 인간의 모습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인간은 죄악 되고 하나님처럼 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역에 도전합니다. 바벨탑을 세워서 인간 중심의 사회를 이루고 인간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을 언어를 혼잡하게 함으로 흩어버리십니다. 바벨탑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바벨탑을 쌓는 인간의 교만과 그를 다루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배우기를 원합니다.
첫째, 노아의 술주정과 아들들의 대응(9:18-29)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였습니다. 노아의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졌습니다.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주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었습니다. ‘벌거벗었다’라는 것은 하체를 드러낸 상태를 말합니다(22). 홍수 후에 노아의 모습은 홍수 이전에 의인이요 완전한 자로서의 모습과 사뭇 다릅니다. 홍수 전에는 방주를 만드는 사명이 있었기 때문에 깨어서 영적인 투쟁을 잘 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완전한 자요 의인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홍수 심판 후에 생활의 안정을 찾게 되자 마음이 풀어졌습니다. 선줄로 아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을수록 하나님께 더욱 헌신함으로 복을 계속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노아는 현실과 타협하며 외로움과 고독을 달래고자 포도주를 마신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술에 취하자 술주정을 하며 추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여하튼 사람은 그 누구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부족한 인간을 쓰셔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고 구속 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아버지가 술주정 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된 아들들은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렸습니다. 자기 아버지의 부끄러움을 즐기고 떠들어대며 돌아다닌 것입니다. 이로 인해 아버지의 권위를 훼손했습니다. 노아는 아버지이면서 동시에 선지자이며 제사장입니다. 인류의 새 조상입니다. 그러나 함의 태도는 아버지를 거스름으로 아버지를 세운 하나님을 대적하였습니다. 함의 문제는 바벨탑 사건과 연결하여 보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음입니다. 10:8에 함의 손자 가운데 니므롯이 나오는데, ‘니므롯’은 ‘우리가 반역하리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제 오계명에 두고 있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모에 대한 태도가 하나님께 대한 태도로 나타납니다. 이것을 권위주의라고 부르며 공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을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반면 셈과 야벳은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습니다(23). 셈과 야벳은 함처럼 아버지의 허물과 수치를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수치를 가리어주었습니다. 그들의 행동에는 아버지에 대한 공경심과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이 담겨 있습니다. 사랑은 형제의 허물을 덮어주는 것입니다. 형제의 허물을 떠들며 다니는 것은 이간질시키는 것입니다.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고 감당해 줄 때 공동체가 유지되고 사람이 숨을 쉬며 살 수 있습니다. 판단과 정죄하는 모임 속에서는 생명이 활발하게 역사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 없는 지식은 상처를 주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하되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분별력을 가지고 사랑하고 행동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술이 깬 노아는 아들들이 행한 일을 알고 어떻게 말합니까? 25절을 보십시오.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왜 함을 저주하지 않고 그의 아들 가나안을 저주할까요? 이 글을 읽는 일차 대상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자 하는 이스라엘 자손이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의 후손들이 저주를 받은 사실을 깨우쳐주어서 이스라엘 군대에게 용기를 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26,27절을 보십시오.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셈이 장자였는데 자신의 허물을 덮어준 것을 귀하게 여기고 축복하였습니다. 그는 영광스럽게 됩니다. 야벳은 창대하게 되는데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십니다. 그러니 셈은 얼마나 더 창대하겠습니까? 반면에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됩니다. 노아가 셈과 야벳은 축복하고 함은 저주하는데, 이것은 단순한 개인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예언적인 성격이 있습니다. 가나안이 저주를 받은 것은 단지 함의 자손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도 함처럼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기생 라합은 가나안 사람이었지만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그와 온 집안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수 2장). 반면 아간은 이스라엘 사람이었지만 악을 행하여 그와 온 집안이 멸망하였습니다(수7장).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십니다. 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오십 년을 살았고 그의 나이가 구백오십 세가 되어 죽었습니다.
둘째, 셈과 함과 야벳의 족보(10:1-32)
홍수 후에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족보가 나옵니다. 족보는 중요한 계보를 뒤에 배치하였습니다. 먼저 야벳 족속의 족보입니다. 야벳의 아들은 고멜과 마곡과 마대와 야완과 두발과 메삭과 디라스입니다. 고멜의 아들은 아스그나스와 리밧과 도갈마요 야완의 아들은 엘리사와 달시스와 깃딤과 도다님입니다. 이들로부터 여러 나라 백성으로 나뉘어서 각기 언어와 종족과 나라대로 바닷가의 땅에 머물렀습니다. 이들은 주로 유럽과 지중해 부근의 민족들이 되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아스그나스는 독일인과 아센인, 리밧은 켈트족과 파플라고니아족, 도갈마는 알메니아인입니다. 마곡은 현재 루마니아, 우크라이나, 몽골을 마대는 현재 이란, 야완은 지금의 그리스인입니다.
함의 아들은 현재 아프리카 지역으로 흩어졌습니다. 구스는 옛적 에디오피아를 말하고 미스라임은 이집트, 붓은 리비아, 가나안은 현재 팔레스타인 지역입니다. 8,9절을 보십시오.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첫 용사라 그가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니므롯은 “우리는 반역하리라” 뜻입니다. 그는 바벨탑이 있는 지역을 통합하여 국가를 세운 전제군주입니다. 그는 용감한 사냥꾼으로서 사람을 살육하는 자였습니다. 니므롯을 용감한 사냥꾼이라고 했는데, ‘용감한’이란 단어는 6장에서 네피림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6:4). 네피림으로 인해 죄악과 포악함이 온 땅에 가득하였는데(6:5,11), 홍수 후에 니므롯이 네피림의 역할을 감당했던 것 같습니다.
셈의 후손들(10:21-32)은 맨 나중에 기록함으로써 그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셈의 후손 중 에벨 자손이라는 말이 ‘이브리’인데 이 말에서 ‘히브리’라는 이름이 생긴 것으로 추정합니다. 에벨의 아들 벨렉 시대에 세상이 나뉘었다고 언급되고 있습니다(10:25). 벨렉이란 이름이 ‘나뉘다’라는 동사에서 나왔습니다. 이때 대륙의 이동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사람의 영향력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야벳에게서 14개 나라가 나왔고, 함에게서 30개 나라, 셈에게서 26개 나라가 나왔습니다. 총 70개 나라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노아의 후손들은 생육하고 번성했습니다. 우리는 가정의 달 5월에 가정의 중요성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의 가문을 일으킬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번 주 일용할 양식을 묵상하다가 한 가지를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히스기야는 병에 걸려 죽게 되었지만 벽을 향하여 통곡하며 기도했을 때 하나님이 응답하셔서 15년 동안 생명을 연장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바벨론에서 온 축하사절단에게 나라의 모든 내탕고를 보여주고 자기 자랑을 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그의 죄에 대해서 책망했습니다. 그의 모든 보물은 바벨론으로 옮길 것이고 그의 후손들은 바벨론의 환관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사는 날에는 태평과 진실이 있을 진대 어찌 선하지 아니하리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역사의식이 없었습니다. 또한 자기의 영광만 구했습니다. 그가 남긴 유산으로 인해 결국 나라는 망하고 자기의 후손들은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역사의식을 가지고 믿음의 유산을 남겨서 후손들을 통해 아름다운 믿음의 역사를 계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언어를 혼잡하게 하신 하나님(11:1-26)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실시한 언어 연구에 의하면, 다양한 인간의 언어들은 궁극적으로 공통 어원(common source)으로 모아지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세계적인 비교 언어학자인 막스 말러(Max F. Maller, 1823-1900)는 고대의 언어들을 연구하여 그것들의 유사점과 상이점을 관찰하였습니다. 그는 옥스포드 대학에서 가르쳤는데 그의 책 ‘언어과학(Science of Language)’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언어가 취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형식들을 검사했다. 그리고 우리들은 이 세 분명한 형식(어근, 어미, 어형변화)들을 인간 언어의 한 공통의 기원과 조화시킬 수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나는 확실히 ‘예’ 라고 답할 것이다.” 산스크리트어(Sanskrit)는 인도의 고대 언어이며, 고전적인 언어입니다. 윌리암 존스 경(Sir William Jones)은 이 언어에 대한 깊은 연구를 하였습니다. 그는 1786년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산스크리트어는 비록 오래 되었지만 놀라운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 언어는 그리스어(Greek)보다 더 완벽하고, 라틴어(Latin)보다 더 풍부하고, 두 언어들보다 더 우아하고 세련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 다 강한 유사성을 가졌고, 둘 다 문법의 형식과 동사의 뿌리가 같다. 그래서 어떠한 언어학자도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어떤 공통의 어원으로부터 이 언어들이 발생했다는 믿음 없이 세 언어 모두를 조사할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언어와 말이 하나였으니 인간의 문명이 급속도로 발전하였습니다. 그들은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였습니다. 그들은 서로 말했습니다.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2,3).” 벽돌과 역청은 새로운 소재를 발견한 것과 같습니다. 탑을 쌓은 재료인 벽돌은 규격화와 대량생산이 가능했습니다.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할 수 있었기 때문에 견고한 건축이 가능하였습니다. 건축 문화에 있어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고자 시도하였습니다. ‘탑’은 ‘지구라트’(Ziggurat)라고 부르는데 여러 계단으로 이루어져 꼭대기에 신전 탑이 올려 진 형태입니다. 피라미드(pyramid)처럼 삼각형으로 경사를 이루고, 중앙에 계단을 만들어 꼭대기에 오르게 합니다. 그 위에는 조그만 사당을 갖추고 신들이 이 사당에 내려와 사람을 잠깐 동안 만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문명이 발달할수록 하나님의 영역에 도전하고자 합니다. 오늘날도 유전자 복제와 변형, 세계에서 최고로 높은 빌딩을 경쟁적으로 짓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123층의 롯데타워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달과 화성을 탐사하고 거기서 인류가 살고자 계획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를 통해서 인간의 영광을 드러내고 인간의 힘으로 유토피아를 건설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흩어져서 살지 않고자 했습니다. 2001년 미국의 영광이라고 생각했던 월드트레이드 센터가 무너졌습니다. 사람들은 거대한 대리석과 H빔으로 만들어진 이 건물이 무너질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이었던 이 건물이 무너짐으로 큰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니므롯과 그의 추종자들은 하나님께 반역을 하고자 시도했습니다. 바벨탑을 쌓아서 사람들을 굳게 결속시키고 지속적인 단합을 유지하고자 했습니다. 바벨은 아카디아어 ‘bab-ilu’인데 이는 ‘the gate of god; 신의 문’이라는 뜻이고 여기서 바벨론이 나왔습니다. 당시 바벨론은 하나님 없이 사람이 이룬 업적의 원형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셨습니다.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교만이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높아지는 것을 보고 막고자 하셨습니다. 그들을 살리는 길을 찾으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온 지면에 흩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자 탑을 세우면서 벽돌을 올리라고 하는데 흙을 보내고 역청을 달라고 하는데 나무를 주는 등 혼란이 생기자 서로 싸우고 건설현장이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언어가 통하는 사람들끼리 온 지면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세상에는 언어 장벽 (language barrier)이 생겼고, 언어의 혼잡으로 생각, 문화, 생활양식 등이 모두 달라졌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은 ‘바벨’을 영광과 자랑으로 삼았지만 하나님은 ‘혼란’의 상징으로 만드셨습니다.
인간이 교만하게 되면 하나님이 낮추시고 흩으십니다. 인간 이성을 하나님의 위치에 두고 교만해졌을 때 1,2차 세계대전을 통해서 낮추셨습니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가 공인된 후에 교황권이 강화되면서 부와 권력이 생겼습니다. 교회는 갈수록 부패해졌고 결국 종교개혁을 통해서 흩으셨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핍박을 통해서 흩으심으로 세계 선교에 힘쓰게 하셨습니다. 교회는 하나가 되면서 동시에 흩어져야 합니다.
바벨탑 사건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인간의 교만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는 낮추시고 겸손한 자는 높이십니다. 교만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살인과 사기, 음행의 죄를 크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심각한 죄가 교만입니다. C. 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본질적인 악, 최고의 악은 교만이다. 천사가 사탄이 된 것이 바로 교만 때문이다. 교만은 다른 모든 악의 기본이 된다. 당신이 교만할 때 하나님을 알 수 없다. 교만한 자는 항상 다른 사람을 내려다보고 멸시한다. 당신이 다른 사람을 멸시하고 내려다보는 한 당신 보다 위에 있는 것을 볼 수가 없다.” 교만은 결국 눈에 뵈는 것이 없게 만들고 스스로를 하나님 같은 위치에 놓게 만듭니다. 그래서 잠언 16:18에서도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5:5에서도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고 했습니다.
다니엘서에 느부갓네살은 바벨론 왕궁 지붕에서 거닐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이 말이 아직 그의 입에 있을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내려 “나라의 왕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사람에게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면서 소처럼 풀을 먹고 일곱 때를 지냈습니다. 그는 이를 통해서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그를 낮추시고 하나님이 그를 세우신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세우시고 축복하실 때에 마음을 낮추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축복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10-26절을 보면 셈의 족보는 아브람에게 연결됩니다. 이는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실 메시아를 여자의 후손에서 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이 누구를 통해서 그 약속을 이루시는지를 보여주는 족보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적 선택에 의해서 창세기 3장 15절에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인 메시아에 대한 약속이 성취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새로운 소망의 역사를 이루는 분이십니다. 홍수로 쓸어버리는 중에도 살아남은 노아의 자손들이 또 다시 바벨탑을 쌓은 것을 볼 때 사람에게는 소망을 두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은혜로 사람을 택하셔서 구원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그를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고 성령을 보내셔서 모든 족속에게 모든 언어로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성령은 혼잡했던 언어를 방언을 주심으로 그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택한 자를 통해서 줄기차게 생명 구원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이 친히 구원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것을 생각할 때 믿음을 지키며 힘 있게 복음 역사를 감당할 수 있습니다.
말씀 | 창세기 9:18-11:26
요절 | 창세기 11:9
바벨탑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아담이 인류의 조상이라면 노아는 홍수 심판 이후에 새로운 인류 역사의 조상입니다. 그래서 노아를 제 2의 아담이라고 부릅니다. 아담의 아들 중에 가인이 죄를 범한 것처럼, 노아의 아들 가운데 함이 악을 행합니다. 이를 볼 때 홍수 심판 전이나 홍수 심판 이후에 인간의 모습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인간은 죄악 되고 하나님처럼 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역에 도전합니다. 바벨탑을 세워서 인간 중심의 사회를 이루고 인간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을 언어를 혼잡하게 함으로 흩어버리십니다. 바벨탑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바벨탑을 쌓는 인간의 교만과 그를 다루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배우기를 원합니다.
첫째, 노아의 술주정과 아들들의 대응(9:18-29)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였습니다. 노아의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졌습니다.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주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었습니다. ‘벌거벗었다’라는 것은 하체를 드러낸 상태를 말합니다(22). 홍수 후에 노아의 모습은 홍수 이전에 의인이요 완전한 자로서의 모습과 사뭇 다릅니다. 홍수 전에는 방주를 만드는 사명이 있었기 때문에 깨어서 영적인 투쟁을 잘 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완전한 자요 의인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홍수 심판 후에 생활의 안정을 찾게 되자 마음이 풀어졌습니다. 선줄로 아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을수록 하나님께 더욱 헌신함으로 복을 계속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노아는 현실과 타협하며 외로움과 고독을 달래고자 포도주를 마신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술에 취하자 술주정을 하며 추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여하튼 사람은 그 누구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부족한 인간을 쓰셔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고 구속 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아버지가 술주정 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된 아들들은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렸습니다. 자기 아버지의 부끄러움을 즐기고 떠들어대며 돌아다닌 것입니다. 이로 인해 아버지의 권위를 훼손했습니다. 노아는 아버지이면서 동시에 선지자이며 제사장입니다. 인류의 새 조상입니다. 그러나 함의 태도는 아버지를 거스름으로 아버지를 세운 하나님을 대적하였습니다. 함의 문제는 바벨탑 사건과 연결하여 보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음입니다. 10:8에 함의 손자 가운데 니므롯이 나오는데, ‘니므롯’은 ‘우리가 반역하리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제 오계명에 두고 있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모에 대한 태도가 하나님께 대한 태도로 나타납니다. 이것을 권위주의라고 부르며 공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을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반면 셈과 야벳은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습니다(23). 셈과 야벳은 함처럼 아버지의 허물과 수치를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수치를 가리어주었습니다. 그들의 행동에는 아버지에 대한 공경심과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이 담겨 있습니다. 사랑은 형제의 허물을 덮어주는 것입니다. 형제의 허물을 떠들며 다니는 것은 이간질시키는 것입니다.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고 감당해 줄 때 공동체가 유지되고 사람이 숨을 쉬며 살 수 있습니다. 판단과 정죄하는 모임 속에서는 생명이 활발하게 역사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 없는 지식은 상처를 주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하되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분별력을 가지고 사랑하고 행동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술이 깬 노아는 아들들이 행한 일을 알고 어떻게 말합니까? 25절을 보십시오.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왜 함을 저주하지 않고 그의 아들 가나안을 저주할까요? 이 글을 읽는 일차 대상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자 하는 이스라엘 자손이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의 후손들이 저주를 받은 사실을 깨우쳐주어서 이스라엘 군대에게 용기를 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26,27절을 보십시오.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셈이 장자였는데 자신의 허물을 덮어준 것을 귀하게 여기고 축복하였습니다. 그는 영광스럽게 됩니다. 야벳은 창대하게 되는데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십니다. 그러니 셈은 얼마나 더 창대하겠습니까? 반면에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됩니다. 노아가 셈과 야벳은 축복하고 함은 저주하는데, 이것은 단순한 개인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예언적인 성격이 있습니다. 가나안이 저주를 받은 것은 단지 함의 자손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도 함처럼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기생 라합은 가나안 사람이었지만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그와 온 집안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수 2장). 반면 아간은 이스라엘 사람이었지만 악을 행하여 그와 온 집안이 멸망하였습니다(수7장).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십니다. 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오십 년을 살았고 그의 나이가 구백오십 세가 되어 죽었습니다.
둘째, 셈과 함과 야벳의 족보(10:1-32)
홍수 후에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족보가 나옵니다. 족보는 중요한 계보를 뒤에 배치하였습니다. 먼저 야벳 족속의 족보입니다. 야벳의 아들은 고멜과 마곡과 마대와 야완과 두발과 메삭과 디라스입니다. 고멜의 아들은 아스그나스와 리밧과 도갈마요 야완의 아들은 엘리사와 달시스와 깃딤과 도다님입니다. 이들로부터 여러 나라 백성으로 나뉘어서 각기 언어와 종족과 나라대로 바닷가의 땅에 머물렀습니다. 이들은 주로 유럽과 지중해 부근의 민족들이 되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아스그나스는 독일인과 아센인, 리밧은 켈트족과 파플라고니아족, 도갈마는 알메니아인입니다. 마곡은 현재 루마니아, 우크라이나, 몽골을 마대는 현재 이란, 야완은 지금의 그리스인입니다.
함의 아들은 현재 아프리카 지역으로 흩어졌습니다. 구스는 옛적 에디오피아를 말하고 미스라임은 이집트, 붓은 리비아, 가나안은 현재 팔레스타인 지역입니다. 8,9절을 보십시오.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첫 용사라 그가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니므롯은 “우리는 반역하리라” 뜻입니다. 그는 바벨탑이 있는 지역을 통합하여 국가를 세운 전제군주입니다. 그는 용감한 사냥꾼으로서 사람을 살육하는 자였습니다. 니므롯을 용감한 사냥꾼이라고 했는데, ‘용감한’이란 단어는 6장에서 네피림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6:4). 네피림으로 인해 죄악과 포악함이 온 땅에 가득하였는데(6:5,11), 홍수 후에 니므롯이 네피림의 역할을 감당했던 것 같습니다.
셈의 후손들(10:21-32)은 맨 나중에 기록함으로써 그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셈의 후손 중 에벨 자손이라는 말이 ‘이브리’인데 이 말에서 ‘히브리’라는 이름이 생긴 것으로 추정합니다. 에벨의 아들 벨렉 시대에 세상이 나뉘었다고 언급되고 있습니다(10:25). 벨렉이란 이름이 ‘나뉘다’라는 동사에서 나왔습니다. 이때 대륙의 이동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사람의 영향력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야벳에게서 14개 나라가 나왔고, 함에게서 30개 나라, 셈에게서 26개 나라가 나왔습니다. 총 70개 나라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노아의 후손들은 생육하고 번성했습니다. 우리는 가정의 달 5월에 가정의 중요성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의 가문을 일으킬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번 주 일용할 양식을 묵상하다가 한 가지를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히스기야는 병에 걸려 죽게 되었지만 벽을 향하여 통곡하며 기도했을 때 하나님이 응답하셔서 15년 동안 생명을 연장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바벨론에서 온 축하사절단에게 나라의 모든 내탕고를 보여주고 자기 자랑을 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그의 죄에 대해서 책망했습니다. 그의 모든 보물은 바벨론으로 옮길 것이고 그의 후손들은 바벨론의 환관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사는 날에는 태평과 진실이 있을 진대 어찌 선하지 아니하리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역사의식이 없었습니다. 또한 자기의 영광만 구했습니다. 그가 남긴 유산으로 인해 결국 나라는 망하고 자기의 후손들은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역사의식을 가지고 믿음의 유산을 남겨서 후손들을 통해 아름다운 믿음의 역사를 계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언어를 혼잡하게 하신 하나님(11:1-26)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실시한 언어 연구에 의하면, 다양한 인간의 언어들은 궁극적으로 공통 어원(common source)으로 모아지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세계적인 비교 언어학자인 막스 말러(Max F. Maller, 1823-1900)는 고대의 언어들을 연구하여 그것들의 유사점과 상이점을 관찰하였습니다. 그는 옥스포드 대학에서 가르쳤는데 그의 책 ‘언어과학(Science of Language)’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언어가 취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형식들을 검사했다. 그리고 우리들은 이 세 분명한 형식(어근, 어미, 어형변화)들을 인간 언어의 한 공통의 기원과 조화시킬 수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나는 확실히 ‘예’ 라고 답할 것이다.” 산스크리트어(Sanskrit)는 인도의 고대 언어이며, 고전적인 언어입니다. 윌리암 존스 경(Sir William Jones)은 이 언어에 대한 깊은 연구를 하였습니다. 그는 1786년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산스크리트어는 비록 오래 되었지만 놀라운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 언어는 그리스어(Greek)보다 더 완벽하고, 라틴어(Latin)보다 더 풍부하고, 두 언어들보다 더 우아하고 세련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 다 강한 유사성을 가졌고, 둘 다 문법의 형식과 동사의 뿌리가 같다. 그래서 어떠한 언어학자도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어떤 공통의 어원으로부터 이 언어들이 발생했다는 믿음 없이 세 언어 모두를 조사할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언어와 말이 하나였으니 인간의 문명이 급속도로 발전하였습니다. 그들은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였습니다. 그들은 서로 말했습니다.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2,3).” 벽돌과 역청은 새로운 소재를 발견한 것과 같습니다. 탑을 쌓은 재료인 벽돌은 규격화와 대량생산이 가능했습니다.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할 수 있었기 때문에 견고한 건축이 가능하였습니다. 건축 문화에 있어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고자 시도하였습니다. ‘탑’은 ‘지구라트’(Ziggurat)라고 부르는데 여러 계단으로 이루어져 꼭대기에 신전 탑이 올려 진 형태입니다. 피라미드(pyramid)처럼 삼각형으로 경사를 이루고, 중앙에 계단을 만들어 꼭대기에 오르게 합니다. 그 위에는 조그만 사당을 갖추고 신들이 이 사당에 내려와 사람을 잠깐 동안 만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문명이 발달할수록 하나님의 영역에 도전하고자 합니다. 오늘날도 유전자 복제와 변형, 세계에서 최고로 높은 빌딩을 경쟁적으로 짓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123층의 롯데타워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달과 화성을 탐사하고 거기서 인류가 살고자 계획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를 통해서 인간의 영광을 드러내고 인간의 힘으로 유토피아를 건설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흩어져서 살지 않고자 했습니다. 2001년 미국의 영광이라고 생각했던 월드트레이드 센터가 무너졌습니다. 사람들은 거대한 대리석과 H빔으로 만들어진 이 건물이 무너질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이었던 이 건물이 무너짐으로 큰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니므롯과 그의 추종자들은 하나님께 반역을 하고자 시도했습니다. 바벨탑을 쌓아서 사람들을 굳게 결속시키고 지속적인 단합을 유지하고자 했습니다. 바벨은 아카디아어 ‘bab-ilu’인데 이는 ‘the gate of god; 신의 문’이라는 뜻이고 여기서 바벨론이 나왔습니다. 당시 바벨론은 하나님 없이 사람이 이룬 업적의 원형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셨습니다.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교만이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높아지는 것을 보고 막고자 하셨습니다. 그들을 살리는 길을 찾으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온 지면에 흩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자 탑을 세우면서 벽돌을 올리라고 하는데 흙을 보내고 역청을 달라고 하는데 나무를 주는 등 혼란이 생기자 서로 싸우고 건설현장이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언어가 통하는 사람들끼리 온 지면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세상에는 언어 장벽 (language barrier)이 생겼고, 언어의 혼잡으로 생각, 문화, 생활양식 등이 모두 달라졌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은 ‘바벨’을 영광과 자랑으로 삼았지만 하나님은 ‘혼란’의 상징으로 만드셨습니다.
인간이 교만하게 되면 하나님이 낮추시고 흩으십니다. 인간 이성을 하나님의 위치에 두고 교만해졌을 때 1,2차 세계대전을 통해서 낮추셨습니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가 공인된 후에 교황권이 강화되면서 부와 권력이 생겼습니다. 교회는 갈수록 부패해졌고 결국 종교개혁을 통해서 흩으셨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핍박을 통해서 흩으심으로 세계 선교에 힘쓰게 하셨습니다. 교회는 하나가 되면서 동시에 흩어져야 합니다.
바벨탑 사건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인간의 교만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는 낮추시고 겸손한 자는 높이십니다. 교만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살인과 사기, 음행의 죄를 크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심각한 죄가 교만입니다. C. 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본질적인 악, 최고의 악은 교만이다. 천사가 사탄이 된 것이 바로 교만 때문이다. 교만은 다른 모든 악의 기본이 된다. 당신이 교만할 때 하나님을 알 수 없다. 교만한 자는 항상 다른 사람을 내려다보고 멸시한다. 당신이 다른 사람을 멸시하고 내려다보는 한 당신 보다 위에 있는 것을 볼 수가 없다.” 교만은 결국 눈에 뵈는 것이 없게 만들고 스스로를 하나님 같은 위치에 놓게 만듭니다. 그래서 잠언 16:18에서도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5:5에서도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고 했습니다.
다니엘서에 느부갓네살은 바벨론 왕궁 지붕에서 거닐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이 말이 아직 그의 입에 있을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내려 “나라의 왕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사람에게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면서 소처럼 풀을 먹고 일곱 때를 지냈습니다. 그는 이를 통해서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그를 낮추시고 하나님이 그를 세우신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세우시고 축복하실 때에 마음을 낮추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축복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10-26절을 보면 셈의 족보는 아브람에게 연결됩니다. 이는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실 메시아를 여자의 후손에서 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이 누구를 통해서 그 약속을 이루시는지를 보여주는 족보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적 선택에 의해서 창세기 3장 15절에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인 메시아에 대한 약속이 성취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새로운 소망의 역사를 이루는 분이십니다. 홍수로 쓸어버리는 중에도 살아남은 노아의 자손들이 또 다시 바벨탑을 쌓은 것을 볼 때 사람에게는 소망을 두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은혜로 사람을 택하셔서 구원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그를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고 성령을 보내셔서 모든 족속에게 모든 언어로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성령은 혼잡했던 언어를 방언을 주심으로 그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택한 자를 통해서 줄기차게 생명 구원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이 친히 구원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것을 생각할 때 믿음을 지키며 힘 있게 복음 역사를 감당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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