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Document
주일말씀 성경별메시지 심포지엄 성경 검색
문제지 성경별문제지

창세기 2019년 창6강(6:1-22) 구원의 방주(이디모데)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96회 작성일 19-04-29 15:42

본문

2019년 창세기 제 6 강       

구원의 방주

말씀 / 창세기 6:1-22
요절 / 창세기 6:13,14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1장. 노아시대의 사람들

창세기 5장에서 성경은 세상의 문명을 이룬 가인의 후손과 이에 맞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한 셋의 후손을 소개하였습니다. 이들이 이 땅에서 장수하면서 후손들을 많이 낳아서 사람들이 땅위에 번성하기 시작하였습니다.

 4절을 보겠습니다.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본문의 용사(heroes of old)라고 불리는 이들은 네피림처럼 체격이 크고 성질이 포악해서 싸움을 잘 했습니다. 한마디로 힘이 쎄고 강했습니다. 이런 용사들은 영웅 대접을 받았고 명성을 떨치는 자(man of renown)들이 되었습니다. 왜 힘센 자가 명성을 떨치는 자가 되었을까요? 이는 힘이 당시 세상을 다스리는 원천이 되었다는 뜻이 아닐까요? 힘만 있으면 아름다운 여인들도 얼마든지 마음대로 취할 수 있고, 남의 것도 마음대로 빼앗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후로 사람들은 자기들의 힘이 선악을 구분 짓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힘센 자가 곧 선이요, 정의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시대를 살아가던 사람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정글과 같은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힘이 없는 동물이 잡혀먹는 것과 같이, 그들에게 힘이 없는 것은 곧 악이요, 죽음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세상을 살아갈 힘을 기르기 위해서 애를 썼습니다. 여인들은 나름대로 선택되어지기 위해 아름다워지고자 열심히 얼굴과 몸매를 가꾸고, 남성들은 살아남고자 힘을 길렀습니다. 싸우는 방법을 배우고 터득하느라 바쁘게 보냈습니다. 태권도, 합기도, 특공무술에 주짓수 등 닥치는 대로 배우고 무기를 다루는 법도 배웠습니다. 좀 약한 상대들은 실제로 죽여 가면서 실전도 익혔습니다. 이렇게 해서 싸움 승률이 높아진 사람들은 점차 용사로 인정받고 유명해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세상을 하나님은 어떻게 보셨습니까? 

  5,6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하나님께서 보실 때 세상은 사람의 죄악으로 가득한 곳이 되었습니다.
  11,12절도 보겠습니다.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하나님은 온 땅이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다고 보셨습니다. 포악함이 가득한 세상, 힘이 있으면 남의 것을 억압하고 빼앗고, 힘이 없으면 잡아먹히는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법칙이 통하는 세상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부패해진 결과라고 말씀하십니다.
 부패했다는 영어 'corrupt'는 라틴어 ‘Cor(함께)'+’Rupt(파멸하다)'로서 ‘함께 파멸하다’의 뜻입니다. 하나님이 부패했다고 말씀하실 때는 사실 원형이 있다는 뜻이요, 그 원래의 아름다운 모습과 선한 기능들이 모두 파멸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그 부패는 자신만의 파멸이 아니라 자신과 같은 공간에 있는 다른 것들도 같이 파멸시켜 버립니다. 부패한 음식이나 과일에서 곰팡이가 피어나며 썩어가기 시작하면 그것이 곧 다른 것들도 금방 썩게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과일뿐 아니라 그것을 담은 박스나 벽 등 그 부패한 것을 치우지 않는다면 점차 그 주변의 모든 것들도 다 부패하게 될 것이며, 곧 못쓰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집에 곰팡이가 음식이 썩어 집안 곳곳에 곰팡이가 번식해 나가며 썩는 냄새가 집안에 진동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냥 두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과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릴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이는 그들이 자신의 안목의 정욕을 채우고 이생의 자랑거리로 삼으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힘과 지혜를 잘 사용하여 세상을 더 아름답게 가꾸어 보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마음과는 전혀 상관없이 자기들의 이기적인 욕심에 따라 파괴하고 남을 짓누르는데 재능을 사용하며 자신과 세상을 파괴하고 있는 부패한 사람들을 보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지난 한주만 해도 국내외간에 너무나 많은 일들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우리 국회에서는 정치지도자들의 정당간 힘겨루기로 빠루(쇠지렛대)까지 등장하며 폭력과 욕설이 난무한 파행을 계속하고, 경남 진주에서는 한 사람이 방화 후 무차별 살인으로 십 수명이 넘는 사상자를 내었습니다. 미국의 트럼프는 여전히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싶어하고, 북한의 김정은이도 핵을 놓지 않고 중국과 러시아를 오가며 위험한 곡예를 하고 있습니다. 멕시코에서는 이틀새 2명의 시장이 무차별 총기 난사와 끔찍한 고문으로 죽임을 당했고, 스리랑카에서는 교회 테러로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이런 물리적인 폭력뿐 아니라 승리, 정준영 등과 같은 인기 연예인들에 의해 많은 여성들이 성폭력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성폭력, 언어폭력, 데이트 폭력, 사이버 폭력 등 각종 폭력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계속 자행되고 있습니다.

  이것들이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후 사람들에게 나타난 부패의 증상들입니다. 전에는 선악과가 하나님이 주신 것 하나밖에 없었는데, 이제는 사람 수만큼 선악과가 생겼습니다. 각자 선악의 기준들이 다르고, 자기 나름대로 선악을 판단하며 파괴하고 부수는 일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습니다. 죄악으로 부패해진 사람들이 점점 더 강포해지고 있습니다.

  이를 보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6절을 보겠습니다.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하나님께서 한탄하시고(grieved) 근심하셨습니다(filled with pain). 마치 사랑하는 자녀가 불량아요, 살인자가 되어 점점 더 못쓰게 되어가는 것을 보는 부모처럼 마음이 너무 슬프고  고통스러우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은 세상을 다 쓸어버리기로 결단하셨습니다(7절). 여기서 쓸어버린다는 말은  히브리어' ‘마하’(מְחֶה)로서, '씻다' '지워버리다' '닦아내다'를 의미하며, 흔적도 없이 깨끗이 쓸어버릴 것을 의미합니다. 즉 모든 부패함을 싹 없애버리는 대 청소를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들이 감히 그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자기 잘났다고 까부는 것들 보기가 아니꼬워서 그러시는 걸까요? ‘이것들이 보자보자 하니까... 확.. 그냥.. 너만 힘있어? 내가 진정한 힘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마’ 하신 것일까요? 그렇다면 하나님도 그저 그 시대의 좀 더 힘센 용사나 별로 다를 것이 없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이십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위해서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생각에는 죽이고 파멸시키는 것이 없습니다. 파괴가 있다면 그것은 다른 귀한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고, 새로운 것을 탄생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쓸어버리시겠다는 결단을 하게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바로 노아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But Noah found favor in the eyes of the LORD.)” 성경은 노아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은혜를 입다’는 것은 ‘발견되었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눈에 노아가 발견된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가 좋은 대로 살아가던 때에 노아는 달랐습니다. 9절은 말씀합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하나님은 폭력이 난무하던 그 시대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의인 노아를 발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노아를 발견하고는 노아를 그 부패로부터 지켜주고 싶었습니다. 힘이 말하던 그 시대에 노아는 분명 약자에 속했을 것입니다. 싸움을 잘하거나 힘이 센 용사도 아니요, 유명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한 여자의 남편이요, 세 아이의 아버지인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용사들 사이에서는 아싸(아웃사이더)였고, 갑분싸(갑자기 분위기 싸해짐)였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별로 값어치가 없는 존재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에게 매우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은 노아를 부패함으로부터 지켜주고 싶었습니다. 노아의 가족들을 보존해주고 싶었습니다. 노아가 세상 죄악에 물들거나, 그들의 폭력에 의해 희생되기 전에 노아를 위해서라도 세상 대청소를 결행해야겠다고 결심하셨습니다. 또한 노아에게 하나님이 세상을 대청소하실 계획을 알려주시고 그때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인 방주를 짓는 법도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방주를 다 지을 때까지 120년간이나 참고 기다려주셨습니다.

 제가 억지인 것 같습니까? 지난주에 2가지 맛있는 과일요리를 얻어먹었습니다. 한번은 동생 안드레아 목자 집에서 딸기잼을 얻어먹었고, 다른 한번은 우리 집에서 에즈라가 만든 바나나 밀크셰이크를 얻어먹었습니다. 둘 다 너무 맛있었습니다. 딸기의 향과 맛이 그대로 묻어있고 집에서 직접 만든 수제라 그런지 강한 설탕의 맛이 없어서 정말 좋았습니다. 바나나 밀크셰이크도 맛있는 바나나 맛과 향이 그대로 살아있어 정말 기분 좋게 먹었습니다. 그런데 이것들을 만든 동기가 비슷했습니다. 둘 다 모두 썩어가는 과일을 보다가 아직 썩지 않은 부분을 발견한 것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모두 다 썩어버렸다면 그냥 버렸을 것이요, 과일들이 너무 싱싱했었더라면 그냥 통째로 편하게 먹어버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성한 부분을 발견한 순간 그들이 썩은 것을 도려내어 잼을 만들고, 밀크셰이크를 만드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목적은 바로 성한 것을 ‘보존’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생각에 수고와 노력이 접목되자 그처럼 맛있는 색다른 명품이 탄생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아! 하나님은 노아를 지켜주고 싶으셨구나!’ 노아는 하나님에게 너무나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그런 타락한 세상의 가치관에 물들지 않은 사람, 선과 악의 판단 기준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아는 사람, 하나님과 함께 서서 하나님이 바라보는 곳을 같이 바라보는 사람. 하나님이 서면 자기도 서고 하나님이 가시면 자기도 같이 가는 사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 이 사람은 전 지구와도 바꾸기 싫은 소중한 사람입니다. 전 지구를 모두 쓸어버리는 대 청소를 감행해서라도 구원해주고 싶은 사람이요, 이 한 사람만을 위해서라면 지구를 새롭게 창조해도 좋겠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하나님에게 노아는 그 시대의 의인이었습니다.

2장.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라.

13,14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하나님은 지구 대청소 전, 노아에게 살 수 있는 비결을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은 방주를 만드는 것입니다. 방주(Ark)는 노아가 자기가 보기 좋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노아의 힘과 지혜로 만드는 것이 아닌, 전적으로 방주에 대한 설계는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방주는 또한 돛이나 키가 없습니다. 즉, 배의 방향을 내가 임의로 조정하고 정하지 않습니다. 이것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방주는 영어로 Ark 인데 이는 성경에서 단 두 군데에 나오는 단어입니다. 즉, 노아의 방주(Ark of Noah)와 하나님의 말씀(십계명)이 담긴 언약궤(Ark of the Covenant)입니다.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지어진 신성한 것이며, 그 안에 사람들을 살리고 구원해 줄 수 있는 길이 담겨져 있는 곳입니다. 생명을 보존하고 인간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지킬 수 있는 길이 그 안에 있습니다.

 방주를 만들 때의 원칙이 있었습니다. 먼저는 방주(Ark)는 고페르 나무(cypress wood)로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무는 부력을 발생시켜 물위에 뜨게 만들어줍니다. 세상 물속에 휩쓸리지 않고 그 위에 떠있게 만들어줌으로 생명을 보존해 줄 수 있습니다. 특히 나무 고페르 라는 단어의 원뜻에는 ‘둥지’ ‘거처’라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방주는 그들을 세상의 악함과 이로 인한 죽음으로부터 지켜주는 ‘안전한 둥지’요 ‘삶의 거처’가 됩니다.

 또한 그 방주는 안팎으로 역청을 칠하라(coat it with pitch inside and out)고 하십니다. 역청은 물의 침입을 방지하는 방수 역할을 하는 진액입니다. 이를 칠해주면 나무로 스며드는 물기를 막아냅니다. 가라앉지는 앉지만 물기가 계속 스며들다보면 결국 나무가 젖어 무거워지고 물이 스며들어 배가 결국 가라앉게 될 것입니다. 역청을 발라주면 물이 들어오는 것을 아예 방지해 줄 수 있기에 안전할 수 있습니다. 역청에 대한 히브리 원어가 ‘카파르’로서 이는 ‘덮개’라는 뜻과 함께 ‘속죄하다’ ‘용서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뜻은 ‘서로 용서하여 화목을 이루다’라는 뜻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세상 강포함에 물들지 않고 맞설 수 있는 것은 서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이 ‘역청’은 상징적으로 예수님의 보혈을 의미합니다. 세상 죄악과 강포함으로 얼룩진 저희 몸과 영혼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흘리신 보혈의 피로 우리의 안과 밖을 덮을 때 우리의 죄가 용서받고 동시에 밖에서 들어오는 세상 죄악과 강포에 물들지 않게 됩니다. 세상을 쓸어버리는 심판과 정죄의 물이 침범할 때마다 예수님의 피로 죄 씻음을 받아 용서를 받은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서로 용서하고 사랑해줌으로 하나님과 사람들과 화목을 이루게 하는 것. 이것이 방주의 역할입니다. 방주는 어떤 죄인도 속죄함과 용서를 받을 수 있는 둥지요, 거처가 되는 곳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방주는 하나님의 설계에 따라 3층으로 이루어지고 각 층에는 칸들이 적당히 맞게 지어져야 합니다. 이 칸들은 각종 동물들이 거할 방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방주에 대한 설계도는 지금 선박 기술에서도 기초적으로 쓰이는 가장 안전한 선박건조 비율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안전하게 지어진 방주에는 많은 칸들이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와 그 가족 혼자 살기위해 방주를 지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살면서 다른 생명들도 보존하고 살릴 수 있는 방을 여분으로 만들도록 하셨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이 구상하신 설계도에 따라 다 준행하였습니다. 노아가 만약 힘들다고 부실공사를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배는 40일 밤낮 쏟아 붓는 비를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고, 결국 노아는 물론 그 배에 탔던 사람과 동물들도 모두 다 같이 죽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준행하는 것은 힘들지만 그것이 자기 자신을 지키고, 자기에게 허락하신 생명들을 보존하는 길입니다.

 노아는 세상의 모든 동물들을 암수 한 쌍 씩 담을 수 있는 큰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노아의 방주는 자기뿐 아니라 가족을 살리고, 세상을 구원하는 구원의 방주였습니다.

 이 홍수 이후로 하나님께서 다시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셨기 때문에 이제는 눈에 보이는 이 구원의 방주를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들과 이 방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보건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은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라’는 음성을 들으실 것이라 믿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오늘날 우리에게 지으라고 하시는 방주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제일 먼저는 우리 자신의 신앙의 방주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실제 방주를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영혼의 방주, 신앙의 방주는 눈에 보이는 고정된 사이즈가 아닙니다. 도리어 이는 우리 신앙의 성숙도에 따라서 그 방주의 크기가 달라질 것입니다. 신앙이 성숙해져 예수님을 닮아갈수록,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가고 배워갈수록 우리 마음 안에 칸들이 늘어날 것입니다. 그때 어떤 종류의 영혼들도 우리 그늘 안에 거하며 보존되고 안식을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의 성숙도에 따라 나 한사람 간신히 탈까말까 하는 돛단배가 되어 부끄러운 구원을 얻기도 하고, 때로는 많은 사람을 태울 수 있는 여객선과 같은 큰 생명선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순간 한사람도 감당하지 못하는  저의 좁은 내면을 봅니다. 제 마음 안에 나와 다른 사람을 용납하여 맞아들일 방이 없음을 봅니다. 제가 예수님을 부지런히 배우는 가운데 성숙하여져서 저의 신앙 둥지 아래에서 안식을 찾을 수 있는 자로 성장시켜 주시길 기도드립니다. 

 다음에 우리가 지어야 할 방주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가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노아의 방주는 노아와 그 가족이 들어가는 둥지요, 거처가 되었습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나름대로 타당한 이유를 대면서 비결혼, 비출산을 선호합니다. 자녀를 고생시키지 않기 위해서 아예 결혼도 하지 않고, 낳지도 않겠다고 합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자기 힘을 키우기도 바쁘고 험한 세상에서 결혼하는 것, 자녀를 키우는 것은 노아가 산꼭대기위에 방주를 짓는 것과 같이 어리석어 보이고, 고생을 사서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녀들을 낳아 믿음이 계승되고 보존되기를 원하십니다. 가능하면 더 많이 낳아 생육하고 번성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믿고 결혼하고 하나님을 믿고 자녀를 낳으면 하나님께서 결혼을 축복해주시고 자녀들을 지켜주실 것을 믿길 원하십니다.  가정은 자녀들을 지켜주는 둥지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상처받고 지친 자녀들이 마음놓고 쉴 수 있고, 방전된 에너지를 재충전 받아 세상으로 나갈 수 있는 충전소(power station)이 되어야 합니다. 부모들이 그 자녀에게 든든한 버팀목과 자녀들의 믿음의 지원자요, 삶의 모델이 될 때 자녀들은 세상에 나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 내는 위대한 복의 근원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방주는 믿음의 신앙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서로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고 예수님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는 그 사랑의 공동체 속에서 우리 자신과 자녀들을 지키고, 동시에 세상에서 방황하는 영혼들도 초대하여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우리 모두 세상의 부패와 쓸어버림으로부터 보존될 것입니다.

 노아이후 이 구원의 방주를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 제대로 보여주신 가장 좋은 샘플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직접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나무 십자가에 직접 달리셨습니다. 또한 십자가상에서 보혈을 흘리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보혈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 죄악과 심판의 물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역청’과 같습니다. 세상 죄악과 강포함으로 얼룩진 저희 몸과 영혼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흘리신 보혈의 피로 우리의 안과 밖을 덮을 때 우리의 죄가 용서받고 동시에 밖에서 들어오는 세상 죄악과 강포에 물들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의 보혈은 이처럼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고 하나님과 화목케하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또한 이 보혈의 능력에 힘입어 우리는 예수님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랑해줄 능력을 덧입게 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함께 모인 신앙 공동체를 통해 서로 화해와 용서와 사랑을 배우고 실천함으로 우리는 이 땅에서 천국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그 크신 믿음과 사랑으로 자신의 열두제자를 비롯한 수많은 병자들과 죄인들, 이방인들을 영접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며 자신의 몸으로 친히 하나님이 화목제물이 되심으로 온 세상 영혼들을 품을 수 있는 구원의 방주가 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 각자 자신과 가정, 그리고 우리 동교센터 신앙공동체를 축복해주시고 예수님처럼 이시대의 작은 노아의 방주로 귀하게 사용하여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1,323건 23 페이지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