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019 부활절특강(요11:1-44)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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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부활절 특강
말씀 | 요한복음 11:1-44
요절 | 요한복음 11:25,26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우리는 찬란한 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죽었던 나무들에 새싹이 돋아나는 생명의 부활을 보면서 그 신비에 환희를 보냅니다. 생명은 태어나고 자라고 열매를 맺고 쇠하고 죽습니다. 우리는 이런 변화 속에서 영원한 생명을 사모합니다. 창세기 5장에 보면 아담에서 노아까지 살았던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912세였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다 죽었습니다. 천년을 사나 백년을 사나 죽습니다. 그러나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고 엘리야도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했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인 나사로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의 부활은 예수님의 부활의 예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몸, 신령하고 강한 몸으로 다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사모하며 이 땅에서 죽음의 세력을 정복하며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위해서 부활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은 어떻게 부활 신앙을 심어주십니까?
첫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병(1-16)
나사로와 두 자매는 부모님을 잃고 오순도순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는 제자들과 함께 들러서 말씀도 공부하고 맛있는 음식도 나누어 드셨습니다. 나사로의 가정은 이웃 사람들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역사에 충성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고 충성하는 가정에도 환난이 찾아옵니다. 어떤 집이나 죽는 사람이 있고 병든 사람이 있고 문제가 있습니다. 누구나 매를 맞으면 아프듯이 환난을 당하게 되면 마음이 아프고 슬프고 우울해집니다. 누구나 이를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통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습니다. 나사로의 누이들이 예수님께 사람을 보냈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오늘날 같으면 카톡이나 메신저를 보내면 금방 소식이 가지만 당시는 사람이 달려가서 전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은 세례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를 주던 곳이니 베다니에서 이틀 길이었습니다(10:40). 소식을 전하는 자에게서 들으시고 예수님은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분명히 나사로는 죽어가고 있는데 예수님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게 하려는 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사자들은 숨이 넘어가는 오빠를 보면서 애간장을 태우고 있는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문제와 환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앞으로 제자들이 많은 환난을 겪을 것인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신자는 먹든지 마시든지 어려운 일이든지 기쁜 일이든지 모든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드림으로 하나님을 더욱 영광스럽게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겪는 모든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를 자기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고 해결해 나가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의 존재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셨습니까? 5,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예수님은 당장 병든 나사로에게 달려가시지 않았습니다. 소식을 전하는 자는 몰랐지만 예수님은 나사로가 이미 죽은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이틀을 더 머무시면서 기도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물으셨습니다. 장례가 다 끝날 때까지 이틀을 더 머무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요구에 민감하셨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움직이셨습니다. 그는 매우 신중하고 깊이 생각하시며 분별력 있게 행동하셨습니다. 때로 우리는 이렇게 행동하시는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난 뒤에 다시 생각해 보면 예수님께서 가장 적절한 시간에 일하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제자들을 위하여 기뻐하셨습니다. 이 기회에 제자들에게 부활 신앙을 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기회가 되는대로 제자들에게 믿음을 갖도록 돕고자 힘을 쓰셨습니다. 광풍 훈련을 통해서 죽음의 위협 가운데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야이로의 딸을 고칠 때도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병에서 나음을 받아도 결국은 죽습니다. 그러나 부활 신앙이 있으면 죽어도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 바로 살려 주셨습니다. 나인 성에서는 과부의 아들을 장사지내러 가는 도중에 청년아 일어나라 말씀하심으로 살리셨습니다. 이제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썩는 냄새가 나는 가운데 있지만 살리심으로 더 큰 믿음을 갖도록 하십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문제들 속에서 믿음이 흔들리고 하나님을 불신하고 원망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위기는 위험한 기회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상황을 직면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찾고 믿음을 더 견고히 하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임사무엘 선교사님은 심장병으로 인해서 죽을 위기에 있었지만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병이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받으시고 7억 원이나 드는 큰 수술을 천 원 한 장 안 내고 받게 하셨습니다. 그는 오늘 이전보다 더 건강한 몸으로 우리에게 나타나 선교보고를 하게 되었습니다. 정베드로 목자님은 회계사로서 세무조사를 받고 회사에 큰 손해를 끼치고 감봉까지 받았지만 믿음으로 항소하여 승리하였습니다. 물어냈던 돈을 다 돌려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감사하여 다다음 주에 동역자들에게 점심 식사를 내고자 합니다. 우리가 심각한 문제를 만날 때 믿음을 배우고자 방향을 잡고 긍정적으로 대처하기를 기도합니다.
그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유대로 다시 가자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말했습니다. “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제자들은 나사로가 병들어 죽어가고 있는데 유대인들이 던지는 짱돌에 죽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사명을 마치는 날까지는 우리의 생명을 거두어 가지 않습니다. 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봄으로 실족하지 아니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빛이십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니 제자들은 실족하지 아니하고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밤이 되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합니다. 우리는 생사를 초월해서 살아야 합니다. 죽어도 하나님께 영광이요 살아도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를 위하고 주님은 우리를 위하십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후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을 심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어 기뻐하셨습니다. 우리가 문제를 만날 때 당황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찾고 기도에 힘쓰는 가운데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하기를 기도합니다.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혁명투사 같은 말을 했습니다. 그는 의심이 많은 사람인데 죽는다는 것만큼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비장한 태도로 말을 했지만 마음 속에 있는 두려움은 어찌하지 못했습니다. 형제들은 대개 큰소리를 잘 치지만 두려움이 많습니다. 이런 도마가 나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는 제자들의 말을 의심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요 20:25).” 이런 그를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와서 “네 손가락을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마는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후에 그는 인도 케랄라 지역에 가서 선교하다가 순교하였습니다. 지금도 인도의 그 지역은 놀라운 복음화율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도 어려운 환난이나 문제를 통해서 믿음을 배우고 양들이나 자녀들에게 믿음을 심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17-26).
예수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었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습니다. 유대인들은 장례식에서 애곡하는 기간이 7일간이었기 때문에 나사로를 매장한 지 나흘이 지났지만 사람들이 와서 조문을 하였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였지만 마리아는 집에 앉아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서럽게 울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21).” 예수님께 원망과 불평을 쏟아낸 후에는 미안했던지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뜨뜻미지근한 믿음을 싫어하십니다. 마르다의 믿음은 미래지향적입니다. 지금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마르다에게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단언하셨습니다. 그래도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믿음이 있는 체 하였습니다. 이런 믿음은 힘이 없고 상황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믿음은 능력입니다. 믿음은 지금 내가 부딪치는 일 속에서 발휘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믿지 못하는 니고데모에게 요한복음 3:16 말씀을 주신 것처럼 믿기를 주저하는 마르다에게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25,2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은 현재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그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시지만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십니다. 이로써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임을 나타내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생명의 수여자이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우리의 죄와 죽음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두 아이가 독성이 강한 뱀에게 물렸습니다. 그런데 먼저 물린 아이는 죽었지만 두 번째 물린 아이는 살았습니다. 뱀의 독이 첫 번째 문 아이에게 모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죄와 죽음의 독을 다 받으셨기 때문에 더 이상 죽음의 권세가 믿는 우리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그 순간에 영원한 생명이 주어집니다.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게 됩니다.
부활이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죽음 같은 상황, 한계적인 상황에서도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면 예수님이 일어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은 오뚝이 같은 인생을 살게 됩니다. 사도들의 주된 메시지는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부활 신앙이 없는 사람은 현세가 전부이기 때문에 먹고 마시며 인생을 즐깁니다. 부활을 믿지 않으면 이 땅에서 부와 영광을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주와 복음을 위해서 날마다 죽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이는 우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알기 때문입니다(고전15:58). 우리가 주와 복음을 위해서 수고하면 수고한 만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내가 이 땅에서 상급을 얻지 못하면 자손이 복을 받고 하나님 나라에서 상급을 받습니다. 부활 신앙이 있을 때 하나님 나라에 산 소망을 갖게 되고 날마다 죽지만 날마다 부활의 능력을 덧입고 기쁨과 활력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사는 것이 황홀하고 즐겁습니다. 부활 신앙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더 이상 허무에 시달리지 않습니다. 운명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한계와 절망에 굴복당하지 않고 도전하고 개척하여 역사를 창조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힘있게 고백했습니다.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27).”
셋째,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28-44)
마르다가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고 전하였습니다.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예수님은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맞이했던 곳에 그대로 계셨습니다.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나섰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울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식사 하실 때는 빨리 오시더니 정작 도움이 필요할 때는 왜 그리 빨리 오시지 않았느냐는 불평이었습니다. 그리고 서럽게 울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그를 어디 두었느냐” 물으셨습니다. 그들이 “주여 와서 보옵소서”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 그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 권세 앞에 우는 그들을 보고 불쌍히 여겨 우셨습니다. 죽음 앞에 무력한 인간의 모습, 죽음의 권세가 인간을 얼마나 고통스럽게 하는가를 체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슬픔과 고통에 동참하사 함께 우십니다. 그런데 이때 초를 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맹인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은 메시야의 표적입니다. 이 말을 듣고 예수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집에 들르지 않고 바로 무덤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앞에서는 이틀을 머물며 지체하셨지만 오셔서는 무덤으로 바로 가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움직이십니다.
무덤 앞에서 예수님은 무슨 명령을 하셨습니까? “돌을 옮겨 놓으라.” 이는 망자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 앞에 어떤 예의를 차리지 않고 돌을 옮겨 놓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예수님을 말리며 말했습니다.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마르다는 시체 썩는 냄새가 나는 현실 앞에 믿음으로 행동하기를 주저주저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도전하십니다. 40절을 다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예수님을 믿을 때 죽은 자도 살리는 부활의 능력, 창조의 능력,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어려운 현실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투쟁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놀라운 기적을 행하십니다. 그들이 돌을 옮겨 놓자 예수님은 감사기도를 하십니다. 41,42절을 보십시오.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실 것을 믿음으로 감사기도를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본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마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셨습니다. 그러자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통통거리며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이신 예수님이 명령하시면 나사로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무덤에서 살아납니다. 생명이신 예수님이 명령하시면 죽었던 자가 살아납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5:25).”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8,29).”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신 것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통한 부활은 미래의 일이자 현재의 역사입니다.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 앞에 당한 여러 문제 속에서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 지금도 살아서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믿고 기도해야겠습니다. 기도할 때 주님의 응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기도할 때 문제가 해결됩니다. 믿고 기도할 때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 받음으로 기쁨과 감사가 충만하게 됩니다. 우리가 부활 신앙을 가짐으로 더욱 힘써 주의 일에 힘쓰고 밝고 희망차고 도전적인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요한복음 11:1-44
요절 | 요한복음 11:25,26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우리는 찬란한 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죽었던 나무들에 새싹이 돋아나는 생명의 부활을 보면서 그 신비에 환희를 보냅니다. 생명은 태어나고 자라고 열매를 맺고 쇠하고 죽습니다. 우리는 이런 변화 속에서 영원한 생명을 사모합니다. 창세기 5장에 보면 아담에서 노아까지 살았던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912세였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다 죽었습니다. 천년을 사나 백년을 사나 죽습니다. 그러나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고 엘리야도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했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인 나사로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의 부활은 예수님의 부활의 예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몸, 신령하고 강한 몸으로 다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사모하며 이 땅에서 죽음의 세력을 정복하며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위해서 부활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은 어떻게 부활 신앙을 심어주십니까?
첫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병(1-16)
나사로와 두 자매는 부모님을 잃고 오순도순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는 제자들과 함께 들러서 말씀도 공부하고 맛있는 음식도 나누어 드셨습니다. 나사로의 가정은 이웃 사람들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역사에 충성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고 충성하는 가정에도 환난이 찾아옵니다. 어떤 집이나 죽는 사람이 있고 병든 사람이 있고 문제가 있습니다. 누구나 매를 맞으면 아프듯이 환난을 당하게 되면 마음이 아프고 슬프고 우울해집니다. 누구나 이를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통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습니다. 나사로의 누이들이 예수님께 사람을 보냈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오늘날 같으면 카톡이나 메신저를 보내면 금방 소식이 가지만 당시는 사람이 달려가서 전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은 세례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를 주던 곳이니 베다니에서 이틀 길이었습니다(10:40). 소식을 전하는 자에게서 들으시고 예수님은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분명히 나사로는 죽어가고 있는데 예수님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게 하려는 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사자들은 숨이 넘어가는 오빠를 보면서 애간장을 태우고 있는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문제와 환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앞으로 제자들이 많은 환난을 겪을 것인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신자는 먹든지 마시든지 어려운 일이든지 기쁜 일이든지 모든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드림으로 하나님을 더욱 영광스럽게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겪는 모든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를 자기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고 해결해 나가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의 존재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셨습니까? 5,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예수님은 당장 병든 나사로에게 달려가시지 않았습니다. 소식을 전하는 자는 몰랐지만 예수님은 나사로가 이미 죽은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이틀을 더 머무시면서 기도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물으셨습니다. 장례가 다 끝날 때까지 이틀을 더 머무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요구에 민감하셨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움직이셨습니다. 그는 매우 신중하고 깊이 생각하시며 분별력 있게 행동하셨습니다. 때로 우리는 이렇게 행동하시는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난 뒤에 다시 생각해 보면 예수님께서 가장 적절한 시간에 일하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제자들을 위하여 기뻐하셨습니다. 이 기회에 제자들에게 부활 신앙을 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기회가 되는대로 제자들에게 믿음을 갖도록 돕고자 힘을 쓰셨습니다. 광풍 훈련을 통해서 죽음의 위협 가운데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야이로의 딸을 고칠 때도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병에서 나음을 받아도 결국은 죽습니다. 그러나 부활 신앙이 있으면 죽어도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 바로 살려 주셨습니다. 나인 성에서는 과부의 아들을 장사지내러 가는 도중에 청년아 일어나라 말씀하심으로 살리셨습니다. 이제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썩는 냄새가 나는 가운데 있지만 살리심으로 더 큰 믿음을 갖도록 하십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문제들 속에서 믿음이 흔들리고 하나님을 불신하고 원망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위기는 위험한 기회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상황을 직면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찾고 믿음을 더 견고히 하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임사무엘 선교사님은 심장병으로 인해서 죽을 위기에 있었지만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병이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받으시고 7억 원이나 드는 큰 수술을 천 원 한 장 안 내고 받게 하셨습니다. 그는 오늘 이전보다 더 건강한 몸으로 우리에게 나타나 선교보고를 하게 되었습니다. 정베드로 목자님은 회계사로서 세무조사를 받고 회사에 큰 손해를 끼치고 감봉까지 받았지만 믿음으로 항소하여 승리하였습니다. 물어냈던 돈을 다 돌려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감사하여 다다음 주에 동역자들에게 점심 식사를 내고자 합니다. 우리가 심각한 문제를 만날 때 믿음을 배우고자 방향을 잡고 긍정적으로 대처하기를 기도합니다.
그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유대로 다시 가자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말했습니다. “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제자들은 나사로가 병들어 죽어가고 있는데 유대인들이 던지는 짱돌에 죽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사명을 마치는 날까지는 우리의 생명을 거두어 가지 않습니다. 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봄으로 실족하지 아니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빛이십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니 제자들은 실족하지 아니하고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밤이 되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합니다. 우리는 생사를 초월해서 살아야 합니다. 죽어도 하나님께 영광이요 살아도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를 위하고 주님은 우리를 위하십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후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을 심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어 기뻐하셨습니다. 우리가 문제를 만날 때 당황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찾고 기도에 힘쓰는 가운데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하기를 기도합니다.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혁명투사 같은 말을 했습니다. 그는 의심이 많은 사람인데 죽는다는 것만큼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비장한 태도로 말을 했지만 마음 속에 있는 두려움은 어찌하지 못했습니다. 형제들은 대개 큰소리를 잘 치지만 두려움이 많습니다. 이런 도마가 나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는 제자들의 말을 의심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요 20:25).” 이런 그를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와서 “네 손가락을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마는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후에 그는 인도 케랄라 지역에 가서 선교하다가 순교하였습니다. 지금도 인도의 그 지역은 놀라운 복음화율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도 어려운 환난이나 문제를 통해서 믿음을 배우고 양들이나 자녀들에게 믿음을 심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17-26).
예수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었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습니다. 유대인들은 장례식에서 애곡하는 기간이 7일간이었기 때문에 나사로를 매장한 지 나흘이 지났지만 사람들이 와서 조문을 하였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였지만 마리아는 집에 앉아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서럽게 울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21).” 예수님께 원망과 불평을 쏟아낸 후에는 미안했던지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뜨뜻미지근한 믿음을 싫어하십니다. 마르다의 믿음은 미래지향적입니다. 지금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마르다에게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단언하셨습니다. 그래도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믿음이 있는 체 하였습니다. 이런 믿음은 힘이 없고 상황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믿음은 능력입니다. 믿음은 지금 내가 부딪치는 일 속에서 발휘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믿지 못하는 니고데모에게 요한복음 3:16 말씀을 주신 것처럼 믿기를 주저하는 마르다에게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25,2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은 현재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그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시지만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십니다. 이로써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임을 나타내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생명의 수여자이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우리의 죄와 죽음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두 아이가 독성이 강한 뱀에게 물렸습니다. 그런데 먼저 물린 아이는 죽었지만 두 번째 물린 아이는 살았습니다. 뱀의 독이 첫 번째 문 아이에게 모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죄와 죽음의 독을 다 받으셨기 때문에 더 이상 죽음의 권세가 믿는 우리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그 순간에 영원한 생명이 주어집니다.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게 됩니다.
부활이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죽음 같은 상황, 한계적인 상황에서도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면 예수님이 일어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은 오뚝이 같은 인생을 살게 됩니다. 사도들의 주된 메시지는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부활 신앙이 없는 사람은 현세가 전부이기 때문에 먹고 마시며 인생을 즐깁니다. 부활을 믿지 않으면 이 땅에서 부와 영광을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주와 복음을 위해서 날마다 죽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이는 우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알기 때문입니다(고전15:58). 우리가 주와 복음을 위해서 수고하면 수고한 만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내가 이 땅에서 상급을 얻지 못하면 자손이 복을 받고 하나님 나라에서 상급을 받습니다. 부활 신앙이 있을 때 하나님 나라에 산 소망을 갖게 되고 날마다 죽지만 날마다 부활의 능력을 덧입고 기쁨과 활력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사는 것이 황홀하고 즐겁습니다. 부활 신앙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더 이상 허무에 시달리지 않습니다. 운명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한계와 절망에 굴복당하지 않고 도전하고 개척하여 역사를 창조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힘있게 고백했습니다.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27).”
셋째,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28-44)
마르다가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고 전하였습니다.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예수님은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맞이했던 곳에 그대로 계셨습니다.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나섰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울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식사 하실 때는 빨리 오시더니 정작 도움이 필요할 때는 왜 그리 빨리 오시지 않았느냐는 불평이었습니다. 그리고 서럽게 울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그를 어디 두었느냐” 물으셨습니다. 그들이 “주여 와서 보옵소서”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 그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 권세 앞에 우는 그들을 보고 불쌍히 여겨 우셨습니다. 죽음 앞에 무력한 인간의 모습, 죽음의 권세가 인간을 얼마나 고통스럽게 하는가를 체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슬픔과 고통에 동참하사 함께 우십니다. 그런데 이때 초를 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맹인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은 메시야의 표적입니다. 이 말을 듣고 예수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집에 들르지 않고 바로 무덤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앞에서는 이틀을 머물며 지체하셨지만 오셔서는 무덤으로 바로 가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움직이십니다.
무덤 앞에서 예수님은 무슨 명령을 하셨습니까? “돌을 옮겨 놓으라.” 이는 망자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 앞에 어떤 예의를 차리지 않고 돌을 옮겨 놓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예수님을 말리며 말했습니다.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마르다는 시체 썩는 냄새가 나는 현실 앞에 믿음으로 행동하기를 주저주저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도전하십니다. 40절을 다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예수님을 믿을 때 죽은 자도 살리는 부활의 능력, 창조의 능력,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어려운 현실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투쟁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놀라운 기적을 행하십니다. 그들이 돌을 옮겨 놓자 예수님은 감사기도를 하십니다. 41,42절을 보십시오.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실 것을 믿음으로 감사기도를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본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마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셨습니다. 그러자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통통거리며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이신 예수님이 명령하시면 나사로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무덤에서 살아납니다. 생명이신 예수님이 명령하시면 죽었던 자가 살아납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5:25).”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8,29).”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신 것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통한 부활은 미래의 일이자 현재의 역사입니다.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 앞에 당한 여러 문제 속에서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 지금도 살아서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믿고 기도해야겠습니다. 기도할 때 주님의 응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기도할 때 문제가 해결됩니다. 믿고 기도할 때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 받음으로 기쁨과 감사가 충만하게 됩니다. 우리가 부활 신앙을 가짐으로 더욱 힘써 주의 일에 힘쓰고 밝고 희망차고 도전적인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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