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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019년 창16강(24:1-67) 이삭의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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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심마태
댓글 0건 조회 104회 작성일 19-07-08 22:17

본문

2019 창세기 제16강
말씀 / 창세기 24:1-67
요절 / 창세기 24:7
이삭의 결혼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고향 땅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실지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지니라” 

24장은 이삭과 리브가의 결혼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삭의 결혼이 어떤 의미가 있기에 24장 전체가 그 일을 다루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이삭의 결혼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의 계승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언약대로 이삭의 결혼을 친히 준비하시고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을 깊이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믿음의 결혼에 대해서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1장. 이삭의 아내(1-9)

  1절 말씀에 아브라함이 나이 많아 늙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늙었다는 말은 단지 나이만 많아진 것이 아니라 육의 가치관이 낡아지고 영의 가치관으로 새롭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영의 눈으로 모든 것을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이것이야말로 범사에 복을 받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고후4:16절은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 말씀합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신앙은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드린 사건으로 확정적으로 드러났습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 이레’를 통해 범사가 하나님의 언약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24장의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아내를 구하기 위해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을 파견합니다. 이 종은 15장에서 언급된 다메섹 엘리에셀로 추정됩니다. 엘리에셀은 아브라함이 자식이 없을 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상속자로 내세울 만큼 신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종에게 자신의 허벅지 밑에 손을 넣으라고 하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거주하고 있는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이삭의 아내를 택하지 말고 아브라함의 고향으로 가서 이삭의 아내를 택하라고 지시합니다.

  왜 가나안 족속의 딸들 중 믿음이 있는 자는 안되는 것입니까?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아브라함이 어떻게 믿음의 조상이 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은 아브라함이 원래부터 믿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부르시고 믿음의 훈련을 통하여 믿음의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이처럼 이제 그 언약에 들어오는 자들도 아브라함 같은 과정을 통과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에서 불러내신 것처럼 이제 자신이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자격으로 그들을 불러내어 하나님의 언약에 참여시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5절을 보면 “종이 이르되 여자가 나를 따라 이 땅으로 오려고 하지 아니하거든 내가 주인의 아들을 주인이 나오신 땅으로 인도하여 돌아 가리이까”라고 말합니다. 결혼이 성사되기 위해서는 종이 이삭의 아내 될 여인을 구한 후에 이삭이 그 땅으로 가서 여인을 만난 후 서로 마음이 통하여 다음에 부모가 만나 양가의 결혼을 허락하는 것이 일반적 절차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지금과 결혼 풍습이 다르다고 할 수 있겠지만 어쨌든 결혼 당사자들이 서로 만나든, 아니면 양가 부모의 허락이 있든 어떤 절차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내 아들을 그리로 데리고 돌아가지 아니하도록 하라”(6)고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 땅을 떠나 아브라함이 있는 곳으로 오지 않으려고 한다면 이삭의 아내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어떤 여인이 종의 말만 듣고 얼굴 한번 보지 못한 남자와 결혼하기 위해 집과 고향을 떠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런 여인을 이삭의 아내로 구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7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고향 땅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실지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지니라”(7절)

  하나님의 언약을 지금까지 이루어 오신 그 하나님이 너의 앞서서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어 준비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평생을 통하여 만들어 내신 믿음인 것입니다. 이제 세상 그 무엇이 방해한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이루어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고 하신 하나님께서 자기의 언약을 이루어 내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사자를 종보다 앞서 보내셔서 이삭의 아내 될 여자를 종과 만나게 하실 것이니 데려오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의 아내를 구하는 일의 중심은 하나님의 약속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자가 아브라함이 있는 곳으로 오지 않을 때 이삭을 데리고 가지 말라는 것은 아브라함 자신이 나온 땅이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한 약속의 땅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자신을 고향 땅에서 불러내신 것처럼 이삭의 아내 역시 불러내실 것을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고향 땅에서 불러냄을 받아야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이런 여자를 이삭의 아내로 주십시오’라고 하지 않습니다. 약속을 주시고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이 이삭의 아내를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라면 우리는 되어진 모든 일을 하나님이 하신 일로 받아들이며 순종하게 될 것입니다. 무슨 일에서든 나의 조건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만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의 믿음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제2장. 하나님의 앞서 일하심(10-49)

  아브라함의 종이 드디어 먼 길을 여행하여 아브라함의 고향에 왔습니다. 그리고서 기도합니다. “그가 이르되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오늘 나에게 순조롭게 만나게 하사 내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성 중 사람의 딸들이 물 길으러 나오겠사오니 내가 우물 곁에 서 있다가 한 소녀에게 이르기를 청하건대 너는 물동이를 기울여 나로 마시게 하라 하리니 그의 대답이 마시라 내가 당신의 낙타에게도 마시게 하리라 하면 그는 주께서 주의 종 이삭을 위하여 정하신 자라 이로 말미암아 주께서 내 주인에게 은혜 베푸심을 내가 알겠나이다”(12-14) 아브라함의 종은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하며 기도를 시작합니다. 이 말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여”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의 이 기도는 이삭의 아내 될 사람의 내면성, 즉 사람뿐 아니라 말 못하는 짐승에게까지도 긍휼을 베풀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조건을 내세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를 자신이 알아볼 수 있는 조건으로서 표적을 내세운 것입니다. 만일 아브라함의 종이 표적으로 다른 조건을 내세웠다면 리브가의 반응도 역시 그러했을 것입니다.

  15절을 보면 기도를 마치기도 전에 한 처녀가 물동이를 어깨에 메고 나오니 바로 리브가입니다. 그리고 기도한 대로 물을 줄 뿐 아니라 낙타에게도 물을 길어 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여호와께서 평탄한 길을 주신 여부를 알고자 그를 묵묵히 주목하여 보았습니다. 그리고 “네가 누구의 딸이냐?” 물어 보니 그 주인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집인 것입니다. 그러자 이종이 어떻게 합니까? 7절에서 아브라함이 말한대로 자신보다 앞서가사 예비하시고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이에 그 사람이 머리를 숙여 여호와께 경배하고 이르되 나의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나이다 나의 주인에게 주의 사랑과 성실을 그치지 아니하셨사오며 여호와께서 길에서 나를 인도하사 내 주인의 동생 집에 이르게 하셨나이다 하니라”(26,27)

  이제 24:1-27절까지만 말하고 그 다음은 그래서 리브가가 따라 왔다고 하면서 결혼 이야기를 종결하여도 우리에게는 충분히 은혜가 됩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의 종이 리브가를 만난 과정을 리브가의 가족에게 또다시 상세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 48절까지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를 통하여 하나님이 앞서 일하심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 주는 동시에 하나님이 이 결혼을 친히 주관하고 계심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33절을 보면 아브라함의 종은 그 앞에 음식이 베풀어졌음에도 “내가 내 일을 진술하기 전에는 먹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사명을 완수하기까지는 크게 3가지 관문이 있습니다. 첫째는 순조롭게 만날 것인가? 둘째는 부모가 허락할 것인가? 셋째는 여인이 따라나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관문은 통과했으나 두, 세 번째가 남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하나님의 하실 일을 속히 확인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는 사명을 감당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분명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과 하나님을 알게 된 기쁨이 아브라함의 종의 내면에 충만했을 것입니다. 사실 24장에서 가장 기쁜 자는 아브라함의 종일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각자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명심해야 할 것은 사명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명을 주신 이유는 사명을 통해 하나님을 배우는 것이 목적입니다. 때로 우리 자신을 돌아볼 때 삶 자체가 의미가 없는 것 같고, 자신이 역사의 주인이 아닌 것 같아 소외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전 인생을 통해 하나님을 배운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무대에서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고, 설령 교회에서도 주목받지 못해도 하나님은 나를 아시고 나의 인생을 통해 하나님을 알도록 인도해 가십니다. 그런 면에서 성경을 알고 하나님을 아는 것이 가장 큰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우리 인생에 즐거움도 있고 어려움과 아픔도 있지만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인생의 목적임을 깨달을 때 인생을 보는 눈이 달라지게 됩니다. 우리가 언약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을 힘써 알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3장.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50-67)

  아브라함의 종은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시고 일하셨는지를 증거하고 나서 49절에서 당신들이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라고 묻습니다. 이에 라반과 브두엘은 “이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 우리는 가부를 말할 수 없노라”(50)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리브가가 당신 앞에 있으니 데리고 가서 여호와의 명령대로 그를 당신의 주인의 아들의 아내가 되게 하라”(51)고 말합니다. 그러자 종은 또다시 여호와께 경배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홀로 행하시는 그 일이 우리에게는 복으로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리브가를 이삭의 아내로 택하여 보내시면서 아브라함이나 이삭의 의사를 묻지 않았습니다. 그처럼 예수님을 메시아로 보내실 때도 인간의 의사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어떤 메시아를 보내줄까?’라고 물으셨다면 인간은 자신들을 구원할 영웅적인 인물을 원했을 것입니다. 그처럼 인간이 원하는 메시아가 따로 존재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거부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의사와 상관없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로 인해 구원이 있게 된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의 의사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일하시는 모든 일에 대해 신뢰하고 믿는 것이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믿음에 의해 신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삶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게 되는 것이고 어려움과 고통의 현실이라고 해도 자신을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신뢰하고 낙심하기보다는 인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복되고 자유함이 있는 신앙생활이며 이러한 믿음으로 감사와 찬송이 가능하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라반과 브두엘의 고백은 우리의 신앙의 방향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알게 합니다. 지금 살아가고 있는 현재가 나의 마음에 흡족한 상태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 인지상정이지만 바로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께로 말미암지 않는 불신앙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가 믿음으로 사는 것처럼 보여도 실상은 하나님에 대해 소경으로 살아갑니다. 소경이면서도 본다고 하는 교만에 붙들려 있는 것입니다. 라반과 브두엘의 한마디 말에서 우리가 처한 믿음의 실상부터 제대로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54절을 봅시다. 아브라함의 종이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나를 보내어 내 주인에게로 돌아가게 하소서” 말합니다. 리브가의 가족이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그렇지만 아브라함의 종의 강경한 태도에 리브가를 불러 “네가 이 사람과 함께 가려느냐?”(58) 물었을 때 리브가는 “가겠나이다”(58)라고 대답합니다. 리브가는 당사자로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과정을 통해 이 결혼이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어가시는 것임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랬을 때 “가겠나이다”라는 믿음의 결단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리브가를 라반이 축복을 합니다.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머니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 문을 얻게 할지어다”(60) 이삭이 모리아 산에서 받은 내용과 같은 내용입니다. 그 원수의 성 문을 얻는 것, 이것이 아브라함의 씨 이삭의 씨가 할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누이여’라고 말한 것을 보면 라반이 리브가를 축복하는 말은 분명한데 라반의 축복에는 리브가가 편한 인생을 누리기를 원하는 것은 없고 오직 하나님이 이루실 일만 담겨 있습니다. 라반의 축복은 창 22:17절의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라반의 축복은 리브가의 씨, 즉 여자의 후손으로 인해 원수를 이기고 승리하게 하시는 언약의 성취를 바라보는 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의 결혼입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자신의 유익만 생각했다면 얼마든지 가나안 여인 중에서 이삭의 아내를 택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약속에 기초하여 결혼역사를 섬기고 있습니다. 리브가도 남편 될 이삭이 어떻게 생겼는지, 성격이 어떤지, 키가 큰지 작은지 몰랐지만 한 가지 분명히 아는 것은 이 결혼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았다는 것입니다. 리브가는 하나님을 믿고 자신의 인생을 전폭적으로 맡겼습니다. 하나님을 믿었기에 자신의 장래에 대해서 조금도 불안해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믿음의 결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위대한 믿음의 여인으로 쓰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신자의 결혼이 자기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라반이 리브가를 보내면서 축복한 것은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머니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 문을 얻게 할지어다”라는 것입니다. 천만인의 어미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통이 따르게 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하나님이 친히 결혼의 주관자가 되셔서 이루어 가십니다. 함께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자로서 함께 하나님이 누구신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지?를 하나님의 영적인 자녀들을 낳고 키우므로 배워가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결론입니다. 여러분이 누구인가를 생각하시고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십시오. 현재적인 것들은 흘러가면서 사라질 것들이지만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은 비록 현재에는 감추어져 있지만 영원한 것입니다. 그 영광에 참여할 자로 우리를 부르셨고 참여한 자가 되도록 일하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염려하고 걱정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은 든든하고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시고 우리를 부르시고 죄를 알게 하시고 용서하신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의 모든 삶에 위로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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