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9년 창15(22:1-23:20)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하나님(나에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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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창 15강 나에녹
말씀/ 창세기 22:1-23:20
요절/ 창세기 22:12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하나님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오늘은 아브라함이 시험을 보는 역사적인 날입니다. 하나님은 그동안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키워 오셨고, 드디어 때가 되어서 최종시험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시험결과는 ‘합격’ 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이 시간 말씀을 통해서 세 가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시험이 무엇인가? 둘째,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어떤 존재인가? 셋째, 하나님을 경외하는 아브라함 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시험이 무엇인가?
1절을 보십시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고자 부르셨습니다. 여러분 ‘시험’이 뭐죠? 시험은 제대로 ‘알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 입니다. 학생은 배운 것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확인하고자 시험을 봅니다. 회사에서는 제품을 얼마나 잘 만들었는지 확인하고자 시험합니다.
저는 마찰 재료설계 엔지니어입니다. 설계대로 브레이크가 만들어져서 성능을 제대로 하는지 시험평가를 합니다. 최종시험을 하기 전에 내부에서 정말 허구헌 날 시험을 밥 먹듯이 하고, 그중에 괜찮다고 평가된 제품을 가지고 최종 Final 시험을 합니다. 최종 시험은 KTX영업이 끝난 자정 이후부터 새벽 5시까지 경부/호남 고속철도노선에서 합니다. KTX고속철도가 시속 300km로 달리다가 136개의 브레이크가 일시에 브레이크를 잡습니다. 이때 열차가 3.3km 이내 에서 정지해야 합니다. 만약 열차가 밀리거나 브레이크가 너무 잘 들어 열차바퀴나 레일에 상처가 나면 ‘불합격’ 판정을 받습니다. 최종시험을 통과하지 않은 제품은 버려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동안 가르치고 알려준 것이 있다’ 는 것을 의미 합니다. 아브라함이 시험에서 합격하지 못하면 아브라함은 버려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75세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12:1-3)” 아담의 범죄이후 하나님의 저주는 계속되었고 하나님은 그 누구에게도 (이와 같은) 약속의 말씀, 축복의 말씀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이었습니다. 허물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아내 사라에게 허물이 컸습니다. 아브라함의 나이가 몇 개인데 두 번씩이나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하여 사라를 빼앗기고 눈물로 베개 잎을 적셔야 했습니다. 남자의 자존심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때마다 아브라함의 허물을 감쪽같이 뒷감당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지 10년이 지난 어느 날 아브라함은 상속자 문제로 힘들어져서 드러눕고 말았습니다. 아브라함이 말했습니다.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창15:3)’ 하나님은 이런 아브라함을 일으켜 세우시고 그의 손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15:5)”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고도 무려 15년 동안 아브라함에게 아들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늙고, 사라는 생리가 끊어져 임신을 할 수가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런 사정을 너무나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와 말씀하셨습니다.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18:11)” 이 말을 들은 사라가 속으로 웃고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어^^떻^^게~~ 아^들^을 낳^^는^^다^^ 말~~이~~요~~(창18:13)’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대로 말씀하신 때에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주셨고 이삭이 자라 13살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과 상속자 문제를 통해서 ‘하나님’ 에 대해 가르쳐 주셨고 하나님이 주신 상속자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어떤 존재인가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이삭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지 확인하고자 시험하셨습니다.
둘째,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어떤 존재인가?
시험문제가 무엇입니까? 2절을 보십시오. 다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하나님께서 ‘네 아들 이삭’ 을 번제로 드리라 고 출제하면 될 일을 ‘네 아들, 네 사랑하는 아들, 네 하나밖에 없는 아들, 이삭’ 을 번제로 드리라고 출제하셨습니다. 문제에 상당한 함정이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깊이 이해해 주는 것처럼 하면서 아브라함의 멘탈을 흔들어 이삭에게 매이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아브라함에게 이삭의 존재는 ‘네 아들, 네 사랑하는 아들, 네 하나밖에 없는 아들 이삭’입니다. (누가 볼 때라고 했죠? 하나님이 보실 때) 아브라함에게 있어 이삭은 사랑하는 독자입니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런 이삭을 아브라함이 번제물로 드릴 수 (있다? 없다?) 없습니다. 어떻게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릴 수 있습니까? 불가능한 것입니다. 여기 계신 어떤 목자님이 사랑하는 자녀를 번제물로 드릴 수 있습니까?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시험에 아브라함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가지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알려 준 곳으로 갔습니다. 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멀리 모리아 산을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말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아브라함은 번제에 쓸 나무를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길을 나섰습니다. 한참 길을 가고 있는데 이삭이 볼 때 아무래도 이상했습니다. 그래서 이삭이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내 아버지여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7)’
아브라함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8절을 다함께 읽어봅시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아브라함의 대답 속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어떤 존재로 생각하고 있는가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여기에서 아브라함은 이삭을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한 번제할 어린 양’ 으로 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생각을 알 때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 앞에 정말 이상하리만큼 담담한 그의 행동이 이해가 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 이라고 하셨지만 아브라함은 이삭을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한 번제할 어린양’ 으로 생각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출제자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시험을 치르고 있습니다.
그럼 아브라함이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아브라함이 백세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얼마나 좋겠습니까?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을 것입니다. 어느 누가 부럽겠습니까?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나도 이제 아들 있어 하며 아브라함이 아들 하나 얻은 것으로 만족하며 살았을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단순 아들 하나 얻고자 살아온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아브라함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약속의 땅’, ‘여호와신앙’, ‘하나님의 약속’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고민한 것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들을 상속해야 하는데 상속하지 못하고 끝나 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문제의식이 있었습니다. 아들을 낳을 수 없는데 이삭을 낳게 되었을 때 아브라함은 이삭이 하나님 앞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삭의 역할과 존재의미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옹알이를 하고 있는 이삭에게 다가가 아브라함은 묻습니다. ‘이삭 도대체 너는 누구냐?’ 13년 동안 이 질문이 계속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통해서 하고자 하실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존재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한 번제할 어린 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였을 때 아브라함은 이삭을 기꺼이 번제로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럼 왜? 하나님은 자기를 위하여 친히 번제할 어린 양을 준비할 필요가 있었는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아브라함을 시험하고자 하는 뜻도 있지만 아브라함을 축복하고, 땅의 모든 것을 축복하고자 하는 뜻이 있습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땅은 저주 아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저주를 끊고 축복으로 바꾸고자 하셨고 그래서 희생양으로 이삭이 필요했습니다.
셋째, 하나님을 경외하는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알려 주신 곳에 도착하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였습니다. 이 때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급히 아브라함을 불러 세우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다 함께 1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12:12)”
여기서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느니라’ 는 말은 네 독자를 나로부터 ‘움켜쥐지 않았다’ , ‘가로채려고 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왜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이삭을 움켜쥐지 않았을까요? 아브라함은 이삭이 자신의 소유가 아니고 하나님의 소유이고, 하나님이 이삭의 주인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삭을 ‘내놔!’ 하였을 때, 내 것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 내놓은 것입니다. 주인이 자신의 소유에 대해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이삭을 움켜쥔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이삭을 가져갈 것이고, 자칫 잘못하다가는 ‘그래 못내 논다고 그럼 이삭 가져, 나는 다른 사람을 알아볼께’ 하시면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모든 축복도 거두어 갈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에게도 각자 ‘이삭’ 있습니다. 우리 학생들에게는 ‘학교성적’이 이삭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고 ‘여친, 남친’이 이삭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부모님들에게는 ‘내 딸과 아들’ 이 목자님들에게는 ‘양’이 이삭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물질’이 ‘성공적인 미래’가 이삭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이삭을 내 소유로 움켜쥐고자 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준 축복을 거두어 가실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이 하나님께 속했고 하나님이 이삭의 주인이다 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브라함에게 ‘합격’ 통보를 하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여기서 ‘경외한다’는 말은 ‘두려워한다’는 말입니다. ‘두려워한다’는 말이 어떤 뜻입니까?
하경이가 아빠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항시 아빠 앞에서 당당합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면 ‘알았어♬ 알았어♬’ 하거나 ‘이응♬ 이응♬’ 하며 입막음을 먼저 하고 말을 못하게 합니다. 왜 하경이가 아빠를 두려워하지 않을까요? 아빠가 내 인생의 주인이고 내 생명을 쥐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대신 하경이는 ‘하나님을 경외하라’ 는 자신의 이름처럼 하경이의 진정한 주인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저는 하경이가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섬기고자 하는 귀한 증거들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하경이의 아름다운 신앙을 인하여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이 힘이 있고 자신을 해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가진 모든 것을 빼앗아 갈수도 있고 축복으로 모든 것을 주실 수도 있고, 아브라함을 죽일 수 있고 살릴 수도 있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죽일 수 없다고 생각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뱀이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서 먹어도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말합니다. 하와가 왜 선악과를 따먹습니까? 죽지 않는다고 해서 따먹었습니다. 그전에는 죽는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선악과를 따 먹지 않았습니다. 죽지 않는다고 하니 하나님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이 말은 아담이 한 일을 아브라함이 제자리로 되돌려놓은 것입니다.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이 말씀은 아담의 실패를 만회하는 함과 동시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축복의 역사를 다시 시작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15-18절을 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라는 말은 ‘하나님이 축복한다’ 는 말입니다. 오늘날을 ‘각자도생’ 즉 각자가 스스로 제 살 길을 찾기 위해 발버둥을 쳐야 하는 불안정한 시대라고 합니다. 이런 시대가운데 하나님이 축복하신다는 것은 광풍 속에서 평안을 주시기도 하고, 살 길을 열어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시겠다는 것은 아담의 범죄 이후 지속된 저주를 이제는 끊고 축복의 역사로 대전환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사람 아브라함을 통해 축복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시험을 쳐보니 결과는 ‘합격’ 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이제까지 가르치고자 한 것을 제대로 알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하나님이 친히 자기를 위하여 준비하신 어린 양’으로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하나님의 소유이고 이삭의 주인은 하나님으로 알았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은 아들을 대신하여 숫양으로 번제를 드렸고 종들에게 말했듯이 이삭과 함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종들에게로 돌아갔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드림으로 믿음의 조상답게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저주의 끊고 축복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하여 축복의 역사를 이루고자 하십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어떤 우리입니까? 아브라함처럼 내가 사랑하는 것, 내게 하나뿐인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알고 드리는 우리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드릴 때 아깝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시고, 우리를 통해 다른 사람을 축복하십니다. 지금 나는 무엇을 드리고 있습니까? 만일 내가 내 사랑하는 것을 움켜쥐면 그것을 지킬 수는 있을지 모르나 하나님의 축복은 멀어질 것입니다. 드리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길이요. 원수를 이기는 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할 렐 루 야
말씀/ 창세기 22:1-23:20
요절/ 창세기 22:12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하나님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오늘은 아브라함이 시험을 보는 역사적인 날입니다. 하나님은 그동안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키워 오셨고, 드디어 때가 되어서 최종시험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시험결과는 ‘합격’ 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이 시간 말씀을 통해서 세 가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시험이 무엇인가? 둘째,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어떤 존재인가? 셋째, 하나님을 경외하는 아브라함 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시험이 무엇인가?
1절을 보십시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고자 부르셨습니다. 여러분 ‘시험’이 뭐죠? 시험은 제대로 ‘알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 입니다. 학생은 배운 것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확인하고자 시험을 봅니다. 회사에서는 제품을 얼마나 잘 만들었는지 확인하고자 시험합니다.
저는 마찰 재료설계 엔지니어입니다. 설계대로 브레이크가 만들어져서 성능을 제대로 하는지 시험평가를 합니다. 최종시험을 하기 전에 내부에서 정말 허구헌 날 시험을 밥 먹듯이 하고, 그중에 괜찮다고 평가된 제품을 가지고 최종 Final 시험을 합니다. 최종 시험은 KTX영업이 끝난 자정 이후부터 새벽 5시까지 경부/호남 고속철도노선에서 합니다. KTX고속철도가 시속 300km로 달리다가 136개의 브레이크가 일시에 브레이크를 잡습니다. 이때 열차가 3.3km 이내 에서 정지해야 합니다. 만약 열차가 밀리거나 브레이크가 너무 잘 들어 열차바퀴나 레일에 상처가 나면 ‘불합격’ 판정을 받습니다. 최종시험을 통과하지 않은 제품은 버려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동안 가르치고 알려준 것이 있다’ 는 것을 의미 합니다. 아브라함이 시험에서 합격하지 못하면 아브라함은 버려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75세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12:1-3)” 아담의 범죄이후 하나님의 저주는 계속되었고 하나님은 그 누구에게도 (이와 같은) 약속의 말씀, 축복의 말씀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이었습니다. 허물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아내 사라에게 허물이 컸습니다. 아브라함의 나이가 몇 개인데 두 번씩이나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하여 사라를 빼앗기고 눈물로 베개 잎을 적셔야 했습니다. 남자의 자존심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때마다 아브라함의 허물을 감쪽같이 뒷감당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지 10년이 지난 어느 날 아브라함은 상속자 문제로 힘들어져서 드러눕고 말았습니다. 아브라함이 말했습니다.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창15:3)’ 하나님은 이런 아브라함을 일으켜 세우시고 그의 손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15:5)”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고도 무려 15년 동안 아브라함에게 아들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늙고, 사라는 생리가 끊어져 임신을 할 수가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런 사정을 너무나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와 말씀하셨습니다.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18:11)” 이 말을 들은 사라가 속으로 웃고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어^^떻^^게~~ 아^들^을 낳^^는^^다^^ 말~~이~~요~~(창18:13)’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대로 말씀하신 때에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주셨고 이삭이 자라 13살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과 상속자 문제를 통해서 ‘하나님’ 에 대해 가르쳐 주셨고 하나님이 주신 상속자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어떤 존재인가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이삭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지 확인하고자 시험하셨습니다.
둘째,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어떤 존재인가?
시험문제가 무엇입니까? 2절을 보십시오. 다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하나님께서 ‘네 아들 이삭’ 을 번제로 드리라 고 출제하면 될 일을 ‘네 아들, 네 사랑하는 아들, 네 하나밖에 없는 아들, 이삭’ 을 번제로 드리라고 출제하셨습니다. 문제에 상당한 함정이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깊이 이해해 주는 것처럼 하면서 아브라함의 멘탈을 흔들어 이삭에게 매이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아브라함에게 이삭의 존재는 ‘네 아들, 네 사랑하는 아들, 네 하나밖에 없는 아들 이삭’입니다. (누가 볼 때라고 했죠? 하나님이 보실 때) 아브라함에게 있어 이삭은 사랑하는 독자입니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런 이삭을 아브라함이 번제물로 드릴 수 (있다? 없다?) 없습니다. 어떻게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릴 수 있습니까? 불가능한 것입니다. 여기 계신 어떤 목자님이 사랑하는 자녀를 번제물로 드릴 수 있습니까?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시험에 아브라함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가지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알려 준 곳으로 갔습니다. 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멀리 모리아 산을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말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아브라함은 번제에 쓸 나무를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길을 나섰습니다. 한참 길을 가고 있는데 이삭이 볼 때 아무래도 이상했습니다. 그래서 이삭이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내 아버지여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7)’
아브라함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8절을 다함께 읽어봅시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아브라함의 대답 속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어떤 존재로 생각하고 있는가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여기에서 아브라함은 이삭을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한 번제할 어린 양’ 으로 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생각을 알 때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 앞에 정말 이상하리만큼 담담한 그의 행동이 이해가 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 이라고 하셨지만 아브라함은 이삭을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한 번제할 어린양’ 으로 생각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출제자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시험을 치르고 있습니다.
그럼 아브라함이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아브라함이 백세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얼마나 좋겠습니까?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을 것입니다. 어느 누가 부럽겠습니까?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나도 이제 아들 있어 하며 아브라함이 아들 하나 얻은 것으로 만족하며 살았을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단순 아들 하나 얻고자 살아온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아브라함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약속의 땅’, ‘여호와신앙’, ‘하나님의 약속’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고민한 것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들을 상속해야 하는데 상속하지 못하고 끝나 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문제의식이 있었습니다. 아들을 낳을 수 없는데 이삭을 낳게 되었을 때 아브라함은 이삭이 하나님 앞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삭의 역할과 존재의미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옹알이를 하고 있는 이삭에게 다가가 아브라함은 묻습니다. ‘이삭 도대체 너는 누구냐?’ 13년 동안 이 질문이 계속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통해서 하고자 하실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존재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한 번제할 어린 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였을 때 아브라함은 이삭을 기꺼이 번제로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럼 왜? 하나님은 자기를 위하여 친히 번제할 어린 양을 준비할 필요가 있었는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아브라함을 시험하고자 하는 뜻도 있지만 아브라함을 축복하고, 땅의 모든 것을 축복하고자 하는 뜻이 있습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땅은 저주 아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저주를 끊고 축복으로 바꾸고자 하셨고 그래서 희생양으로 이삭이 필요했습니다.
셋째, 하나님을 경외하는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알려 주신 곳에 도착하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였습니다. 이 때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급히 아브라함을 불러 세우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다 함께 1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12:12)”
여기서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느니라’ 는 말은 네 독자를 나로부터 ‘움켜쥐지 않았다’ , ‘가로채려고 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왜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이삭을 움켜쥐지 않았을까요? 아브라함은 이삭이 자신의 소유가 아니고 하나님의 소유이고, 하나님이 이삭의 주인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삭을 ‘내놔!’ 하였을 때, 내 것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 내놓은 것입니다. 주인이 자신의 소유에 대해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이삭을 움켜쥔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이삭을 가져갈 것이고, 자칫 잘못하다가는 ‘그래 못내 논다고 그럼 이삭 가져, 나는 다른 사람을 알아볼께’ 하시면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모든 축복도 거두어 갈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에게도 각자 ‘이삭’ 있습니다. 우리 학생들에게는 ‘학교성적’이 이삭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고 ‘여친, 남친’이 이삭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부모님들에게는 ‘내 딸과 아들’ 이 목자님들에게는 ‘양’이 이삭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물질’이 ‘성공적인 미래’가 이삭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이삭을 내 소유로 움켜쥐고자 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준 축복을 거두어 가실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이 하나님께 속했고 하나님이 이삭의 주인이다 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브라함에게 ‘합격’ 통보를 하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여기서 ‘경외한다’는 말은 ‘두려워한다’는 말입니다. ‘두려워한다’는 말이 어떤 뜻입니까?
하경이가 아빠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항시 아빠 앞에서 당당합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면 ‘알았어♬ 알았어♬’ 하거나 ‘이응♬ 이응♬’ 하며 입막음을 먼저 하고 말을 못하게 합니다. 왜 하경이가 아빠를 두려워하지 않을까요? 아빠가 내 인생의 주인이고 내 생명을 쥐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대신 하경이는 ‘하나님을 경외하라’ 는 자신의 이름처럼 하경이의 진정한 주인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저는 하경이가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섬기고자 하는 귀한 증거들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하경이의 아름다운 신앙을 인하여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이 힘이 있고 자신을 해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가진 모든 것을 빼앗아 갈수도 있고 축복으로 모든 것을 주실 수도 있고, 아브라함을 죽일 수 있고 살릴 수도 있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죽일 수 없다고 생각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뱀이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서 먹어도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말합니다. 하와가 왜 선악과를 따먹습니까? 죽지 않는다고 해서 따먹었습니다. 그전에는 죽는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선악과를 따 먹지 않았습니다. 죽지 않는다고 하니 하나님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이 말은 아담이 한 일을 아브라함이 제자리로 되돌려놓은 것입니다.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이 말씀은 아담의 실패를 만회하는 함과 동시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축복의 역사를 다시 시작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15-18절을 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라는 말은 ‘하나님이 축복한다’ 는 말입니다. 오늘날을 ‘각자도생’ 즉 각자가 스스로 제 살 길을 찾기 위해 발버둥을 쳐야 하는 불안정한 시대라고 합니다. 이런 시대가운데 하나님이 축복하신다는 것은 광풍 속에서 평안을 주시기도 하고, 살 길을 열어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시겠다는 것은 아담의 범죄 이후 지속된 저주를 이제는 끊고 축복의 역사로 대전환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사람 아브라함을 통해 축복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시험을 쳐보니 결과는 ‘합격’ 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이제까지 가르치고자 한 것을 제대로 알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하나님이 친히 자기를 위하여 준비하신 어린 양’으로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하나님의 소유이고 이삭의 주인은 하나님으로 알았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은 아들을 대신하여 숫양으로 번제를 드렸고 종들에게 말했듯이 이삭과 함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종들에게로 돌아갔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드림으로 믿음의 조상답게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저주의 끊고 축복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하여 축복의 역사를 이루고자 하십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어떤 우리입니까? 아브라함처럼 내가 사랑하는 것, 내게 하나뿐인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알고 드리는 우리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드릴 때 아깝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시고, 우리를 통해 다른 사람을 축복하십니다. 지금 나는 무엇을 드리고 있습니까? 만일 내가 내 사랑하는 것을 움켜쥐면 그것을 지킬 수는 있을지 모르나 하나님의 축복은 멀어질 것입니다. 드리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길이요. 원수를 이기는 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할 렐 루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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