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9년 창14강(20:1-21:34) 약속대로 이삭을 주신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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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창세기 제 14 강
말씀 | 창세기 20:1-21:34
요절 | 창세기 21:1,2
약속대로 이삭을 주신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사람은 신실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그 약속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우리의 미덥지 못한 마음을 참으시고 그 약속을 이루기까지 믿음을 심으시고 인도하십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의 말씀을 받고 믿음 생활을 시작했지만 허물과 실수가 많고 자기 생각대로 행할 때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가 완전히 바닥에 이르기까지 기다리셨습니다. 그가 인간적으로 믿을 것이 하나도 없어질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하나님만 절대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아브라함을 키우셨습니다. 우리도 이 하나님을 믿고 은혜로 살아갑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노력이나 선행이나 의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기를 원합니다.
첫째, 아브라함의 연약함을 감당해 주시는 하나님(20장)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 이후 주변은 완전히 폐허가 되었습니다. 목양을 하는 아브라함은 좋은 목초지를 찾아 이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네게브 즉 남방으로 옮겨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거류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모여들자 아브라함은 두려웠습니다. 강포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는 아내를 자기 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비멜렉은 사라를 데려다가 후궁으로 삼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졸지에 아내를 잃고 홀아비 신세가 되었습니다. 사라가 아비멜렉의 씨를 잉태하게 되면 하나님의 역사는 큰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데려간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으리니 그는 남편이 있는 여자임이라.” 그는 선지자이니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아비멜렉이 그 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모든 종들을 불러 그 모든 일을 말하여 들려주니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였습니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책망하자 아브라함이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다 고백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무소부재 하신 하나님 즉 어디에나 계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브라함을 어떻게 대하십니까? 신앙생활 한지 25년씩이나 되는데 아직까지 두려워서 거짓말이나 한다 생각하고 실망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허물과 연약함을 감당해 주시고 그의 편에 서서 도와주십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의 연약함과 허물을 감당해 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 공격을 받을 때 변호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배반하고 도망갔지만 다시 찾아오셔서 사랑의 관계성을 회복하십니다. 하나님은 큰 품 안에서 아브라함을 키우십니다.
아비멜렉이 양과 소와 종들을 아브라함에게 주고 그의 아내 사라도 돌려보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출산하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기도 낳지 못하는데 그가 기도하면 다른 사람이 아기도 낳게 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선지자로 세우셔서 세상 사람들에게 복을 주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그들을 위해서 중보기도 하는 선지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도 이 시대의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통해서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고린도전서 4:1에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라고 했습니다. 특히 우리는 이 시대 영혼들의 목자요 선교사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부족하고 실수를 할지라도 우리 편이 되셔서 보호하시고 지켜주십니다. 우리가 전하는 말씀을 통해서 양들이 변화가 일어나고 우리가 드리는 기도를 받으시고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 권위를 가지고 담대하게 세상 사람들을 돕고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 말씀대로 이삭을 낳게 하신 하나님(21:1-7)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았습니다. 1,2절에 ‘말씀하신 대로’라는 말씀이 반복되어 강조됩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약속의 자녀를 주셨지만 ‘말씀하신 시기가 되었을 때’에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때에 약속이 성취된 것입니다. 약속대로 이루시는 것도 중요하지만 때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때는 아브라함에게 두신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성취되었을 때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좋은 때에 자신의 일을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달복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때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불신하거나 나름대로 일을 꾸미고 일이 잘 못되면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때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이루시기 때문에 끝까지 믿고 인내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에게 ‘그 때’는 100세가 되었을 때입니다. 그 기간 동안 아브라함은 얼마나 많은 마음고생을 했습니까? 자식을 주시려면 좀 일찍 주시지 왜 이렇게 오랫동안 기다리도록 하셨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있었지만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는 조카 롯을 그의 상속자로 생각했고, 롯이 욕심을 따라서 떠난 후에는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생각했습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한 지 10년이 지난 후에는 조급함 때문에 애굽 여종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은 후에는 이스마엘을 상속자로 생각하고 그가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원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적으로 볼 때 사라는 90세가 되어 태가 말라서 자식을 낳을 수 없었고 자신도 늙었기 때문입니다. 도저히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때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온전한 믿음을 갖도록 도와주십니다. 불가능한 가운데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도록 도우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을 때, 하나님은 비로소 약속의 자녀 이삭을 주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나 약속하신 말씀대로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알려주셨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100% 믿고 순종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약속대로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오랫동안 기다리게 하신 것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모든 관심은 자식을 얻어서 상속자로 삼는 것이었지만 하나님은 자식 문제를 통해서 아브라함의 마음에 믿음을 심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아브라함 한 사람을 믿음의 조상으로 키워서, 그를 통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하늘의 뭇별 같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루고자 하셨습니다. 이런 원대한 뜻과 소망을 가지고 아브라함 한 사람을 25년 동안이나 키우신 것입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원하던 때에 자식을 주셨다면 아브라함은 결코 믿음의 거목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25년 동안 신앙생활하면서 점차 불완전한 믿음이 완전한 믿음으로 바뀌게 되고 믿음의 표상이 되었습니다. 그의 믿음이 깊어졌을 뿐만 아니라 마음도 여러 민족을 품고 섬길 수 있는 큰 품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동역할 수 있는 선지자요 하나님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한 순간에 믿음이 성장한 것이 아니라 인생의 문제 속에서 단계적으로 믿음이 성장하여 영적인 거목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 한 사람을 믿음의 조상으로 키우시기 위해서 25년 동안 훈련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소망 가운데 우리도 돌보고 키우십니다. 우리도 멀리 보고 크게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깊이 새기고 따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브라함이 그에게 태어난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이삭이라 하였고 그 아들 이삭이 난 지 팔 일 만에 그가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아브라함 백세에 그의 아들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사라는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사라가 자식들을 젖먹이겠다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마는 아브라함의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 하며 마음껏 웃었습니다. 슬픈 사라가 행복한 사라가 되었습니다. “이삭아!” “웃음아!” 불신의 웃음, 쓴 웃음이 변하여 기쁨의 웃음을 웃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웃음을 주는 분이십니다. 마음에 슬픔과 염려, 걱정, 불안, 패배 등 장래에 대해서 생각하면 어두운 생각을 갖기 쉽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우리를 웃게 하십니다. 과정 과정은 어렵지만 결국은 기쁨을 주십니다. 환난의 과정 속에서 우리를 연단하시고 끝까지 믿음으로 살면 결국은 웃게 하십니다. 환난 중에서도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셋째,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음(8-21)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이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고 있었습니다. 이삭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이스마엘은 상속권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이삭이 태어나기 전에는 아브라함의 사랑을 독차지 했는데 이삭이 태어난 후에는 찬밥 신세가 되었습니다. 17살의 이스마엘이 세 살 밖에 안 된 이삭에 대한 미움과 시기심과 자신의 비참한 운명에 불만을 품고 고의적으로 동생을 희롱하고 박해한 것입니다. 여기서 ‘놀린다’는 것은 단순히 장난치는 것이 아니라 악의를 가지고 행동으로 못살게 구는 것입니다. 이를 본 사라는 큰 위협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고 하였습니다. ‘내쫓으라’는 것은 ‘이혼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레2:17; 민22:13). 법적 절차를 밟으라고 요구하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스마엘의 상속권을 박탈하여 그가 유산을 분배받지 못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그 일이 매우 근심이 되었습니다. 자기가 뿌린 씨로 인해서 이런 예기치 못한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한 동안 이스마엘을 상속자로 여기고 애지중지하였습니다. 이런 이스마엘을 내어 쫓으라니 이는 인간으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이삭과 함께 키우자니 이삭이 이스마엘의 기운에 눌려서 성장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12,13).” 하나님은 분명하게 이삭이 상속자가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는 큰 민족이 이삭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선포하십니다. 하나님의 영원불변한 축복은 오직 약속의 사람들에게만 주어집니다(17:7,19; 히11:17-19).
오늘날 복음주의의 가장 큰 원수는 인본주의 신자들입니다. 이들은 복음적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비웃고 조롱합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을 어리석게 생각합니다.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사는 것이 지혜롭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의 말은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이들을 따라가면 아무런 신앙적인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자유주의 신학노선을 따른 교회는 성장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인본적인 요소를 쫓아내고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혈육의 정에 약합니다. 우리는 부모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불신자들보다 훨씬 더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성령의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자식의 도리를 다하지 못할 때도 가끔씩 있습니다. 그러나 사명인으로서 이런 아픔도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불신 친구와 하나님 사이에서 양단간에 결단을 내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마음에 돋아나는 죄의 소욕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 중심의 복음신앙의 싹이 자라기 위해서는 율법적인 생각과 태도를 버리고 약속의 말씀을 믿고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할 때 신앙적인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아침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갈과 이스마엘이 광야에서 방황할 때에 만나주시고 돌보아 주셨습니다. 이스마엘은 광야에 거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고 애굽 땅에서 아내를 얻어 열 두 민족을 이루었습니다.
그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했습니다.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 되이 행하지 아니하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 너도 나와 네가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22,23).”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무슨 일이든지 형통한 사람이기 때문에 어떤 권세자도 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함께 하심으로 점점 창성해 가는 것을 보고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상호불가침 조약을 맺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기념수로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의 믿음이 영원하신 하나님께 뿌리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인식이 그만큼 깊어졌습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장소에 따라 믿음이 강해지기도 하고 약해지기도 하는 나약한 사람이 아니라 그 어디에나 계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믿고 어떤 환경 가운데서고 담대한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말씀대로 이루심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기다리는 가운데 약속의 성취를 체험하고 웃음이 가득하길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하시고 최후 승자가 되게 하십니다. 우리들이 더욱 경건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축복하사 쓰시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창세기 20:1-21:34
요절 | 창세기 21:1,2
약속대로 이삭을 주신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사람은 신실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그 약속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우리의 미덥지 못한 마음을 참으시고 그 약속을 이루기까지 믿음을 심으시고 인도하십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의 말씀을 받고 믿음 생활을 시작했지만 허물과 실수가 많고 자기 생각대로 행할 때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가 완전히 바닥에 이르기까지 기다리셨습니다. 그가 인간적으로 믿을 것이 하나도 없어질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하나님만 절대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아브라함을 키우셨습니다. 우리도 이 하나님을 믿고 은혜로 살아갑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노력이나 선행이나 의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기를 원합니다.
첫째, 아브라함의 연약함을 감당해 주시는 하나님(20장)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 이후 주변은 완전히 폐허가 되었습니다. 목양을 하는 아브라함은 좋은 목초지를 찾아 이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네게브 즉 남방으로 옮겨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거류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모여들자 아브라함은 두려웠습니다. 강포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는 아내를 자기 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비멜렉은 사라를 데려다가 후궁으로 삼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졸지에 아내를 잃고 홀아비 신세가 되었습니다. 사라가 아비멜렉의 씨를 잉태하게 되면 하나님의 역사는 큰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데려간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으리니 그는 남편이 있는 여자임이라.” 그는 선지자이니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아비멜렉이 그 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모든 종들을 불러 그 모든 일을 말하여 들려주니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였습니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책망하자 아브라함이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다 고백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무소부재 하신 하나님 즉 어디에나 계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브라함을 어떻게 대하십니까? 신앙생활 한지 25년씩이나 되는데 아직까지 두려워서 거짓말이나 한다 생각하고 실망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허물과 연약함을 감당해 주시고 그의 편에 서서 도와주십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의 연약함과 허물을 감당해 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 공격을 받을 때 변호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배반하고 도망갔지만 다시 찾아오셔서 사랑의 관계성을 회복하십니다. 하나님은 큰 품 안에서 아브라함을 키우십니다.
아비멜렉이 양과 소와 종들을 아브라함에게 주고 그의 아내 사라도 돌려보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출산하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기도 낳지 못하는데 그가 기도하면 다른 사람이 아기도 낳게 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선지자로 세우셔서 세상 사람들에게 복을 주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그들을 위해서 중보기도 하는 선지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도 이 시대의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통해서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고린도전서 4:1에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라고 했습니다. 특히 우리는 이 시대 영혼들의 목자요 선교사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부족하고 실수를 할지라도 우리 편이 되셔서 보호하시고 지켜주십니다. 우리가 전하는 말씀을 통해서 양들이 변화가 일어나고 우리가 드리는 기도를 받으시고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 권위를 가지고 담대하게 세상 사람들을 돕고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 말씀대로 이삭을 낳게 하신 하나님(21:1-7)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았습니다. 1,2절에 ‘말씀하신 대로’라는 말씀이 반복되어 강조됩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약속의 자녀를 주셨지만 ‘말씀하신 시기가 되었을 때’에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때에 약속이 성취된 것입니다. 약속대로 이루시는 것도 중요하지만 때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때는 아브라함에게 두신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성취되었을 때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좋은 때에 자신의 일을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달복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때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불신하거나 나름대로 일을 꾸미고 일이 잘 못되면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때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이루시기 때문에 끝까지 믿고 인내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에게 ‘그 때’는 100세가 되었을 때입니다. 그 기간 동안 아브라함은 얼마나 많은 마음고생을 했습니까? 자식을 주시려면 좀 일찍 주시지 왜 이렇게 오랫동안 기다리도록 하셨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있었지만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는 조카 롯을 그의 상속자로 생각했고, 롯이 욕심을 따라서 떠난 후에는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생각했습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한 지 10년이 지난 후에는 조급함 때문에 애굽 여종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은 후에는 이스마엘을 상속자로 생각하고 그가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원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적으로 볼 때 사라는 90세가 되어 태가 말라서 자식을 낳을 수 없었고 자신도 늙었기 때문입니다. 도저히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때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온전한 믿음을 갖도록 도와주십니다. 불가능한 가운데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도록 도우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을 때, 하나님은 비로소 약속의 자녀 이삭을 주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나 약속하신 말씀대로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알려주셨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100% 믿고 순종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약속대로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오랫동안 기다리게 하신 것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모든 관심은 자식을 얻어서 상속자로 삼는 것이었지만 하나님은 자식 문제를 통해서 아브라함의 마음에 믿음을 심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아브라함 한 사람을 믿음의 조상으로 키워서, 그를 통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하늘의 뭇별 같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루고자 하셨습니다. 이런 원대한 뜻과 소망을 가지고 아브라함 한 사람을 25년 동안이나 키우신 것입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원하던 때에 자식을 주셨다면 아브라함은 결코 믿음의 거목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25년 동안 신앙생활하면서 점차 불완전한 믿음이 완전한 믿음으로 바뀌게 되고 믿음의 표상이 되었습니다. 그의 믿음이 깊어졌을 뿐만 아니라 마음도 여러 민족을 품고 섬길 수 있는 큰 품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동역할 수 있는 선지자요 하나님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한 순간에 믿음이 성장한 것이 아니라 인생의 문제 속에서 단계적으로 믿음이 성장하여 영적인 거목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 한 사람을 믿음의 조상으로 키우시기 위해서 25년 동안 훈련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소망 가운데 우리도 돌보고 키우십니다. 우리도 멀리 보고 크게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깊이 새기고 따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브라함이 그에게 태어난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이삭이라 하였고 그 아들 이삭이 난 지 팔 일 만에 그가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아브라함 백세에 그의 아들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사라는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사라가 자식들을 젖먹이겠다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마는 아브라함의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 하며 마음껏 웃었습니다. 슬픈 사라가 행복한 사라가 되었습니다. “이삭아!” “웃음아!” 불신의 웃음, 쓴 웃음이 변하여 기쁨의 웃음을 웃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웃음을 주는 분이십니다. 마음에 슬픔과 염려, 걱정, 불안, 패배 등 장래에 대해서 생각하면 어두운 생각을 갖기 쉽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우리를 웃게 하십니다. 과정 과정은 어렵지만 결국은 기쁨을 주십니다. 환난의 과정 속에서 우리를 연단하시고 끝까지 믿음으로 살면 결국은 웃게 하십니다. 환난 중에서도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셋째,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음(8-21)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이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고 있었습니다. 이삭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이스마엘은 상속권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이삭이 태어나기 전에는 아브라함의 사랑을 독차지 했는데 이삭이 태어난 후에는 찬밥 신세가 되었습니다. 17살의 이스마엘이 세 살 밖에 안 된 이삭에 대한 미움과 시기심과 자신의 비참한 운명에 불만을 품고 고의적으로 동생을 희롱하고 박해한 것입니다. 여기서 ‘놀린다’는 것은 단순히 장난치는 것이 아니라 악의를 가지고 행동으로 못살게 구는 것입니다. 이를 본 사라는 큰 위협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고 하였습니다. ‘내쫓으라’는 것은 ‘이혼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레2:17; 민22:13). 법적 절차를 밟으라고 요구하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스마엘의 상속권을 박탈하여 그가 유산을 분배받지 못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그 일이 매우 근심이 되었습니다. 자기가 뿌린 씨로 인해서 이런 예기치 못한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한 동안 이스마엘을 상속자로 여기고 애지중지하였습니다. 이런 이스마엘을 내어 쫓으라니 이는 인간으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이삭과 함께 키우자니 이삭이 이스마엘의 기운에 눌려서 성장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12,13).” 하나님은 분명하게 이삭이 상속자가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는 큰 민족이 이삭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선포하십니다. 하나님의 영원불변한 축복은 오직 약속의 사람들에게만 주어집니다(17:7,19; 히11:17-19).
오늘날 복음주의의 가장 큰 원수는 인본주의 신자들입니다. 이들은 복음적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비웃고 조롱합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을 어리석게 생각합니다.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사는 것이 지혜롭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의 말은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이들을 따라가면 아무런 신앙적인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자유주의 신학노선을 따른 교회는 성장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인본적인 요소를 쫓아내고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혈육의 정에 약합니다. 우리는 부모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불신자들보다 훨씬 더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성령의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자식의 도리를 다하지 못할 때도 가끔씩 있습니다. 그러나 사명인으로서 이런 아픔도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불신 친구와 하나님 사이에서 양단간에 결단을 내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마음에 돋아나는 죄의 소욕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 중심의 복음신앙의 싹이 자라기 위해서는 율법적인 생각과 태도를 버리고 약속의 말씀을 믿고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할 때 신앙적인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아침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갈과 이스마엘이 광야에서 방황할 때에 만나주시고 돌보아 주셨습니다. 이스마엘은 광야에 거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고 애굽 땅에서 아내를 얻어 열 두 민족을 이루었습니다.
그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했습니다.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 되이 행하지 아니하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 너도 나와 네가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22,23).”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무슨 일이든지 형통한 사람이기 때문에 어떤 권세자도 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함께 하심으로 점점 창성해 가는 것을 보고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상호불가침 조약을 맺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기념수로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의 믿음이 영원하신 하나님께 뿌리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인식이 그만큼 깊어졌습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장소에 따라 믿음이 강해지기도 하고 약해지기도 하는 나약한 사람이 아니라 그 어디에나 계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믿고 어떤 환경 가운데서고 담대한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말씀대로 이루심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기다리는 가운데 약속의 성취를 체험하고 웃음이 가득하길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하시고 최후 승자가 되게 하십니다. 우리들이 더욱 경건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축복하사 쓰시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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