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9년 창12강(17:1-27) 여러 민족의 아버지 아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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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창세기 제 12 강
말씀 | 창세기 17:1-27
요절 | 창세기 17:5
여러 민족의 아버지 아브라함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우리 가운데 한 분은 게바라는 이름을 받고 자기 이름을 내는 데서 교회의 반석이 되고자 소원을 갖게 되었습니다. 또 한 분은 ‘순종’이라는 훈련명을 받고 순종을 배우고자 투쟁하고 있습니다. 이디모데 목자님은 이전에 ‘고난’이라는 훈련명을 받았는데 그 이름을 매우 사랑하였습니다. 그는 고난을 통해서 연약함을 극복하고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름은 그 사람의 정체성을 나타냅니다.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존재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그 이름 속에는 그가 어떤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가 하는 부모나 목자의 소원이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각자 자신의 이름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아브람이 99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아브람이 팔십 육세에 이스마엘을 낳은 후에 13년이 지났습니다. 그 기간에 대한 기록이 성경에는 없습니다. 별로 의미없는 시간이었기에 기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스마엘이 태어난 후에 아브람은 그 아들로 인해 자족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스마엘과 함께 공놀이도 하고 씨름도 하면서 고상한 아버지로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전에 맛보지 못했던 잔재미와 안정감이 생겼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대로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현재의 삶에 만족해하였습니다. 이스마엘을 후계자로 생각을 굳히고 살고 있었는데 그는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참고 계시다가 이제 때가 되어 구십 구세 때에 나타나셨습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한 분이십니다. 사래의 마른 태를 열어서 새 생명을 탄생시킬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무 것도 없는데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홍해를 갈라서 길을 내고 반석에서 샘물이 나게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도 살리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이런 전능하신 하나님을 100% 믿고 자신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너는 내 앞에 행하여 완전하라.” 이 말씀은 “너는 내 앞에서 걸어가라. 그리고 흠이 없게 하라”는 명령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걸어가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삶을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완전한(타밈)’은 흠 없는 제물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단어인데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삶을 살라는 뜻입니다. 아브람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하고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내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홍갈렙 선교사님은 독일 하이델베르그 대학을 개척했습니다. 양들을 초청하였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거절을 당했습니다. 그의 마음은 위축되었습니다. 학생들의 얼굴을 보며 그들의 표정을 살피며 눈치 보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떻게 그리 야무지고 자기 생각이 강한지 그리고 그들이 형성한 하나님 없는 그 세계관이 어떻게 그토록 견고한지 그야말로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이었습니다. 그들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은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는 말씀을 다시 공부하면서 숨을 멎게 했습니다. 자신의 최종적인 삶의 동기가 자기 목숨을 구원코자 하는 것임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것을 따르는 삶이 바로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임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는 복음역사를 위해서 얼마나 많이 자신의 시간, 물질, 수고를 희생하는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위해서 그 모든 것을 했는가 하는 근본적인 동기를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얻기 위해서 자신의 시간을 잃어버리고 물질을 잃어버리고 또 그 무엇을 잃어버리고자 결단했습니다. 그때 그는 자유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라이너 목자를 만나 성경을 공부하고 제자로 세울 수 있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이렇게 말씀으로 섬기자 그들이 예수님을 닮은 사람들로 변화되었습니다.
우리도 믿음으로 살지만 한계에 부딪히고 적당히 살기 쉽습니다. 오랜 신앙생활을 하면서 모든 것이 굳어지고 형식적이 되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손에 잡히는 열매도 없고 나이가 들어 존재의미가 약해지면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도 즐기면서 살고 싶습니다. 사람이 현실이 어려우면 현실과 타협하며 살기 쉽습니다. 학생 때는 말씀을 공부하면서 사명중심의 삶을 살고 비전의 삶을 살게 되는데, 결혼하면 현실적이 되고 가정 중심적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에게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비전을 새롭게 하여 여러 민족을 낳고 키우는 목자의 인생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생명을 주는 말씀을 깊이 받고 마음에 빛을 받아 하나님의 크신 뜻을 따라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과 언약을 세우시고 그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4-6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세우신 언약은 그에게서 여러 민족과 왕들이 나오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12:2에서는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하셨는데 여기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고상한 아버지라는 아브람에서 여러 민족의 아버지란 뜻의 아브라함으로 바꾸어주셨습니다. 이름을 바꾸어주심으로서 그가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는 비전을 품고 믿음으로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려면 마음을 태평양처럼 크게 넓혀야 합니다. 다양한 사람들을 품고 섬겨야 합니다. 그의 마음이 사랑과 진리에서 깊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대대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과 그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이 말씀 속에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무너진 창조의 질서를 바로 잡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소원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로부터 창조주로서의 대접을 받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십니다(고전15:28).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치도 아니합니다(롬1:21). 하나님은 이런 세상을 불쌍히 여기시고 아브라함을 통해 세상에 영적 질서를 세우시고, 만유를 회복하고자 하십니다. 즉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하십니다.
8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손과 함께 땅을 주십니다. 백성과 함께 땅이 있어야 나라를 이룰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 생전에는 약속하신 땅을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죽을 때까지 가나안에서 아브라함의 소유지는 브엘세바의 우물과 막벨라 굴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생전에는 약속의 땅을 다 소유하지는 못했지만 약속의 땅을 소유한 것처럼 믿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이 대대로 그 언약을 지키며 살라고 하십니다.
이 언약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라고 하십니까? 그들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아브라함과 그 후손 사이에 지킬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그들이 포피를 벰으로 이것이 하나님과 그들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 됩니다. 그들은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그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으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할례를 행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할례는 남성의 생식기의 표피를 자름으로서 영원한 언약의 지울 수 없는 표징을 남성의 몸에 새기는 것입니다. 이로써 할례는 대대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아브라함의 신앙을 고백하는 방법이 됩니다. 로마서 4장 11절을 보면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확실하게 도장을 찍는 것입니다. 또한 남자의 생식기는 생명을 잉태하는 곳입니다. 이곳에 언약의 표징을 새김으로서 태어나는 자식은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약속의 자녀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자식을 낳아서 키워야 합니다. 또 할례는 순결과 성별의 뜻이 있습니다. 육신의 죄와 더러움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성별된 자가 된다는 표입니다. 믿음으로 할례를 행함으로서 성결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육체적인 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의 할례가 중요합니다. 마음의 할례는 마음으로부터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신30:6). 즉 할례는 자기 뜻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순종의 표시입니다. 할례를 받은 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세워진 언약공동체 속에 포함됩니다. 이 언약공동체는 아브라함의 후손뿐만 아니라 할례를 받은 모든 이방인들도 포함합니다. 반대로 할례를 받지 않는 것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언약 백성에서 끊어지는 것입니다. 할례는 신약 시대에 세례로 대체되었습니다. 세례는 한 사람이 그리스도 교회로 입문하는고백이요 상징입니다. 세례는 신자가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살겠다는 고백이요 죄 씻음에 대한 상징입니다. 우리는 할례를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 아브라함의 자녀가 됩니다(롬4:11; 16-17). 우리도 그 믿음을 확증하기 위해서 교리문답을 공부하고 나서 세례를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할례를 말씀하신 후에 사라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하십니다. 할례는 남자들에게 요구되는 하나님의 표징입니다. 만약에 아브라함과 사라에 대한 예언을 연달아 기록하고 나서 할례를 선포했다면 어떻게 될까요? 할례는 아브라함에게만 해당되기 때문에 중간에 끼어 있는 사라는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에서 보조적인 역할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의도적으로 이야기의 순서를 아브라함의 예언→ 할례의 선포→ 사라의 예언으로 잡았습니다. 이로써 아브라함과 사라가 동일한 지위를 갖는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할례는 남자인 아브라함이 감당할 표징이지만 아브라함과 사라가 낳게 될 약속의 자녀는 아브라함의 씨인 동시에 사라의 씨이기도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여러 민족의 아버지 어머니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하나님은 ‘나의 공주’라는 사래의 이름도 ‘여주인’이라는 뜻의 사라로 바꾸어주셨습니다. 사래는 남편의 사랑을 받으며 우아한 삶을 사는 이미지가 강합니다. 한 마디로 자기만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라는 민족을 품고 많은 믿음의 용사들을 키우는 어머니의 이미지입니다. 남편의 사랑이나 받으면서 공주처럼 살아가는 인생에서 하나님의 크신 뜻을 품고 섬기는 여러 민족의 어머니로서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어머니는 여성이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고난을 감당하며 한 생명을 양육하고 번성하게 합니다. 어머니는 끊임없는 자기희생을 통해서 생명을 얻고 살립니다. 아브라함이 여러 민족의 아버지로 살고자 하기에 사라도 여러 민족의 어머니로 삶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엎드려 웃으며 마음 속으로 말했습니다.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그는 자기의 형편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는 생각을 품었지만 생각만 하고 내 뱉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이를 직역하면 “이스마엘이 하나님의 얼굴 앞에 있으면 좋겠습니다”입니다. 이것은 그동안 하나님이 이스마엘에게는 얼굴을 비치지 않으셨다는 반증이 됩니다. 아브라함은 그 동안 하나님이 이스마엘을 적자로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스마엘이 자라는 13년 내내 그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하나님의 침묵을 본능적으로 느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큰 아들 이스마엘을 후계자로 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하십니다. 1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하나님은 이스마엘에 대해서 분명한 태도를 가지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요청을 “아니라” 하시며 단번에 잘라버리셨습니다. 이것은 아무리 아브라함이라도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에 관여하는 것은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이스마엘이 아니라 사라가 낳을 ‘이삭’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마엘에게도 육적인 축복은 허락하십니다. 그에게도 복을 주어 그를 매우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할 것입니다. 그가 열 두령을 낳으리니 하나님이 그를 큰 나라가 되게 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언약은 내년 이 시기에 사라가 낳은 이삭과 세우리라 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그를 떠나 올라가셨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 날에 그 아들 이스마엘과 집에서 태어난 모든 자와 돈으로 산 모든 남자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데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항상 힘들어하다가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단순하게 믿고 순종하였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위대한 점입니다. 18장부터 아브라함의 내면이 확 달라지게 됩니다. 믿음을 갖게 되면 삶이 달라지게 됩니다. 마음에 약속의 말씀을 영접하고 믿음이 생기면 스피릿이 생기고 행동이 달라지고 인생이 달라지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혈통이 아니라 언약을 믿음으로 받습니다. 하나님이 왕이십니다. 하나님이 주권자이십니다. 우리는 ‘내가 보는 이스마엘에게 하나님의 눈이 있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이 있는 곳에 내 눈이 있기를 원합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어 주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갖도록 도우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심하거나 내 생각과 다르다고 반대편에 서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 생각보다 높고 크시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연약할 뿐이지 계속 성장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큰 계획 안에서 믿음이 계속 자라고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지 말고 그 말씀대로 믿음으로 믿음의 사람으로 계속해서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한계를 뛰어넘는 믿음의 사람, 기도의 사람으로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언약의 말씀을 받고 생명을 얻으며 여러 민족을 품고 섬기는 목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창세기 17:1-27
요절 | 창세기 17:5
여러 민족의 아버지 아브라함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우리 가운데 한 분은 게바라는 이름을 받고 자기 이름을 내는 데서 교회의 반석이 되고자 소원을 갖게 되었습니다. 또 한 분은 ‘순종’이라는 훈련명을 받고 순종을 배우고자 투쟁하고 있습니다. 이디모데 목자님은 이전에 ‘고난’이라는 훈련명을 받았는데 그 이름을 매우 사랑하였습니다. 그는 고난을 통해서 연약함을 극복하고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름은 그 사람의 정체성을 나타냅니다.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존재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그 이름 속에는 그가 어떤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가 하는 부모나 목자의 소원이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각자 자신의 이름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아브람이 99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아브람이 팔십 육세에 이스마엘을 낳은 후에 13년이 지났습니다. 그 기간에 대한 기록이 성경에는 없습니다. 별로 의미없는 시간이었기에 기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스마엘이 태어난 후에 아브람은 그 아들로 인해 자족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스마엘과 함께 공놀이도 하고 씨름도 하면서 고상한 아버지로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전에 맛보지 못했던 잔재미와 안정감이 생겼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대로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현재의 삶에 만족해하였습니다. 이스마엘을 후계자로 생각을 굳히고 살고 있었는데 그는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참고 계시다가 이제 때가 되어 구십 구세 때에 나타나셨습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한 분이십니다. 사래의 마른 태를 열어서 새 생명을 탄생시킬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무 것도 없는데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홍해를 갈라서 길을 내고 반석에서 샘물이 나게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도 살리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이런 전능하신 하나님을 100% 믿고 자신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너는 내 앞에 행하여 완전하라.” 이 말씀은 “너는 내 앞에서 걸어가라. 그리고 흠이 없게 하라”는 명령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걸어가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삶을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완전한(타밈)’은 흠 없는 제물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단어인데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삶을 살라는 뜻입니다. 아브람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하고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내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홍갈렙 선교사님은 독일 하이델베르그 대학을 개척했습니다. 양들을 초청하였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거절을 당했습니다. 그의 마음은 위축되었습니다. 학생들의 얼굴을 보며 그들의 표정을 살피며 눈치 보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떻게 그리 야무지고 자기 생각이 강한지 그리고 그들이 형성한 하나님 없는 그 세계관이 어떻게 그토록 견고한지 그야말로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이었습니다. 그들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은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는 말씀을 다시 공부하면서 숨을 멎게 했습니다. 자신의 최종적인 삶의 동기가 자기 목숨을 구원코자 하는 것임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것을 따르는 삶이 바로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임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는 복음역사를 위해서 얼마나 많이 자신의 시간, 물질, 수고를 희생하는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위해서 그 모든 것을 했는가 하는 근본적인 동기를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얻기 위해서 자신의 시간을 잃어버리고 물질을 잃어버리고 또 그 무엇을 잃어버리고자 결단했습니다. 그때 그는 자유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라이너 목자를 만나 성경을 공부하고 제자로 세울 수 있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이렇게 말씀으로 섬기자 그들이 예수님을 닮은 사람들로 변화되었습니다.
우리도 믿음으로 살지만 한계에 부딪히고 적당히 살기 쉽습니다. 오랜 신앙생활을 하면서 모든 것이 굳어지고 형식적이 되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손에 잡히는 열매도 없고 나이가 들어 존재의미가 약해지면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도 즐기면서 살고 싶습니다. 사람이 현실이 어려우면 현실과 타협하며 살기 쉽습니다. 학생 때는 말씀을 공부하면서 사명중심의 삶을 살고 비전의 삶을 살게 되는데, 결혼하면 현실적이 되고 가정 중심적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에게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비전을 새롭게 하여 여러 민족을 낳고 키우는 목자의 인생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생명을 주는 말씀을 깊이 받고 마음에 빛을 받아 하나님의 크신 뜻을 따라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과 언약을 세우시고 그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4-6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세우신 언약은 그에게서 여러 민족과 왕들이 나오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12:2에서는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하셨는데 여기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고상한 아버지라는 아브람에서 여러 민족의 아버지란 뜻의 아브라함으로 바꾸어주셨습니다. 이름을 바꾸어주심으로서 그가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는 비전을 품고 믿음으로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려면 마음을 태평양처럼 크게 넓혀야 합니다. 다양한 사람들을 품고 섬겨야 합니다. 그의 마음이 사랑과 진리에서 깊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대대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과 그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이 말씀 속에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무너진 창조의 질서를 바로 잡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소원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로부터 창조주로서의 대접을 받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십니다(고전15:28).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치도 아니합니다(롬1:21). 하나님은 이런 세상을 불쌍히 여기시고 아브라함을 통해 세상에 영적 질서를 세우시고, 만유를 회복하고자 하십니다. 즉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하십니다.
8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손과 함께 땅을 주십니다. 백성과 함께 땅이 있어야 나라를 이룰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 생전에는 약속하신 땅을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죽을 때까지 가나안에서 아브라함의 소유지는 브엘세바의 우물과 막벨라 굴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생전에는 약속의 땅을 다 소유하지는 못했지만 약속의 땅을 소유한 것처럼 믿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이 대대로 그 언약을 지키며 살라고 하십니다.
이 언약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라고 하십니까? 그들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아브라함과 그 후손 사이에 지킬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그들이 포피를 벰으로 이것이 하나님과 그들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 됩니다. 그들은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그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으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할례를 행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할례는 남성의 생식기의 표피를 자름으로서 영원한 언약의 지울 수 없는 표징을 남성의 몸에 새기는 것입니다. 이로써 할례는 대대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아브라함의 신앙을 고백하는 방법이 됩니다. 로마서 4장 11절을 보면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확실하게 도장을 찍는 것입니다. 또한 남자의 생식기는 생명을 잉태하는 곳입니다. 이곳에 언약의 표징을 새김으로서 태어나는 자식은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약속의 자녀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자식을 낳아서 키워야 합니다. 또 할례는 순결과 성별의 뜻이 있습니다. 육신의 죄와 더러움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성별된 자가 된다는 표입니다. 믿음으로 할례를 행함으로서 성결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육체적인 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의 할례가 중요합니다. 마음의 할례는 마음으로부터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신30:6). 즉 할례는 자기 뜻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순종의 표시입니다. 할례를 받은 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세워진 언약공동체 속에 포함됩니다. 이 언약공동체는 아브라함의 후손뿐만 아니라 할례를 받은 모든 이방인들도 포함합니다. 반대로 할례를 받지 않는 것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언약 백성에서 끊어지는 것입니다. 할례는 신약 시대에 세례로 대체되었습니다. 세례는 한 사람이 그리스도 교회로 입문하는고백이요 상징입니다. 세례는 신자가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살겠다는 고백이요 죄 씻음에 대한 상징입니다. 우리는 할례를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 아브라함의 자녀가 됩니다(롬4:11; 16-17). 우리도 그 믿음을 확증하기 위해서 교리문답을 공부하고 나서 세례를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할례를 말씀하신 후에 사라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하십니다. 할례는 남자들에게 요구되는 하나님의 표징입니다. 만약에 아브라함과 사라에 대한 예언을 연달아 기록하고 나서 할례를 선포했다면 어떻게 될까요? 할례는 아브라함에게만 해당되기 때문에 중간에 끼어 있는 사라는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에서 보조적인 역할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의도적으로 이야기의 순서를 아브라함의 예언→ 할례의 선포→ 사라의 예언으로 잡았습니다. 이로써 아브라함과 사라가 동일한 지위를 갖는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할례는 남자인 아브라함이 감당할 표징이지만 아브라함과 사라가 낳게 될 약속의 자녀는 아브라함의 씨인 동시에 사라의 씨이기도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여러 민족의 아버지 어머니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하나님은 ‘나의 공주’라는 사래의 이름도 ‘여주인’이라는 뜻의 사라로 바꾸어주셨습니다. 사래는 남편의 사랑을 받으며 우아한 삶을 사는 이미지가 강합니다. 한 마디로 자기만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라는 민족을 품고 많은 믿음의 용사들을 키우는 어머니의 이미지입니다. 남편의 사랑이나 받으면서 공주처럼 살아가는 인생에서 하나님의 크신 뜻을 품고 섬기는 여러 민족의 어머니로서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어머니는 여성이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고난을 감당하며 한 생명을 양육하고 번성하게 합니다. 어머니는 끊임없는 자기희생을 통해서 생명을 얻고 살립니다. 아브라함이 여러 민족의 아버지로 살고자 하기에 사라도 여러 민족의 어머니로 삶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엎드려 웃으며 마음 속으로 말했습니다.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그는 자기의 형편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는 생각을 품었지만 생각만 하고 내 뱉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이를 직역하면 “이스마엘이 하나님의 얼굴 앞에 있으면 좋겠습니다”입니다. 이것은 그동안 하나님이 이스마엘에게는 얼굴을 비치지 않으셨다는 반증이 됩니다. 아브라함은 그 동안 하나님이 이스마엘을 적자로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스마엘이 자라는 13년 내내 그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하나님의 침묵을 본능적으로 느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큰 아들 이스마엘을 후계자로 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하십니다. 1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하나님은 이스마엘에 대해서 분명한 태도를 가지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요청을 “아니라” 하시며 단번에 잘라버리셨습니다. 이것은 아무리 아브라함이라도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에 관여하는 것은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이스마엘이 아니라 사라가 낳을 ‘이삭’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마엘에게도 육적인 축복은 허락하십니다. 그에게도 복을 주어 그를 매우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할 것입니다. 그가 열 두령을 낳으리니 하나님이 그를 큰 나라가 되게 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언약은 내년 이 시기에 사라가 낳은 이삭과 세우리라 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그를 떠나 올라가셨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 날에 그 아들 이스마엘과 집에서 태어난 모든 자와 돈으로 산 모든 남자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데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항상 힘들어하다가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단순하게 믿고 순종하였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위대한 점입니다. 18장부터 아브라함의 내면이 확 달라지게 됩니다. 믿음을 갖게 되면 삶이 달라지게 됩니다. 마음에 약속의 말씀을 영접하고 믿음이 생기면 스피릿이 생기고 행동이 달라지고 인생이 달라지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혈통이 아니라 언약을 믿음으로 받습니다. 하나님이 왕이십니다. 하나님이 주권자이십니다. 우리는 ‘내가 보는 이스마엘에게 하나님의 눈이 있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이 있는 곳에 내 눈이 있기를 원합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어 주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갖도록 도우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심하거나 내 생각과 다르다고 반대편에 서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 생각보다 높고 크시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연약할 뿐이지 계속 성장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큰 계획 안에서 믿음이 계속 자라고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지 말고 그 말씀대로 믿음으로 믿음의 사람으로 계속해서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한계를 뛰어넘는 믿음의 사람, 기도의 사람으로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언약의 말씀을 받고 생명을 얻으며 여러 민족을 품고 섬기는 목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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