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2020년 신년1강(막10:32-45) 인자가 온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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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신년 제 1 강
말씀 | 마가복음 10:32-45
요절 | 마가복음 10:45
인자가 온 것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2020년 새 해를 맞이하면서 예수님의 섬김의 도를 배울 수 있게 되어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진정으로 위대한 자는 어떤 사람인가 배우고 자기 목숨을 주기까지 섬기신 예수님을 본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했습니다. 예수님의 비장한 자세로 인해서 얼마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서 두려웠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죽으러 가시는 예수님이 조금도 위축되거나 머뭇거리지 않으시는 것은, 적극적으로 고난을 감당하고자 결심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어떤 고난이라도 감당하고자 작정하면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어떤 상황이 발생해도 놀라지 않고 담대히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놀라는 제자들에게 자기가 당할 일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33,34).” 예수님은 자신이 당할 일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심으로 제자들의 마음을 준비시키셨습니다. 그들이 고난에 직면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종교지도자들에게 넘겨지고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에게 넘겨줄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자기생각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세상의 권력을 잡고, 누리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하였습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을 비난하면서도 그 자리에 앉아 임의로 주관하고 권세를 부리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허황된 기대를 바꾸고자 세 번씩 반복해서 자신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반드시 시험에 들어 넘어지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아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는 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반드시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를 영접해야 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지만, 어떤 그리스도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군사적 메시아가 세상을 정복하고 승리한 후 세상을 통치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그들의 마음에는 세상 영광과 욕심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것을 두려워하고 싫어했습니다. 이처럼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깨닫지 못하고 반발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서 예수님이 그 길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반드시 십자가를 통해서 부활의 영광에 이르러야 하고 그 길만이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제자들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이런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받아들일 때까지 반복해서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당장은 깨닫지 못하더라도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시면 깨달게 될 것을 믿으시고 계속해서 가르치십니다.
제자들을 돕는 예수님을 통해서 양들을 어떻게 도와야하는지 배우게 됩니다. 양을 칠 때 사랑을 많이 베풀고 풍성한 말씀과 기도와 음식으로 섬기는 것이 필요합니다. 양들은 목자의 사랑의 수고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고 성장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고난 받으시는 예수님을 배우고 동참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자기의 계획과 꿈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 일은 쉽지 않습니다. 사람은 본성상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럴지라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쓸모없는 사람이 됩니다. 영적 어린아이 상태로 머물러 있게 됩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나아와 담대히 요구했습니다.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35).” 예수님이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다시 물으시자 그들은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요구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국무총리, 부총리 자리를 달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 앉기를 원합니다. 자리가 있어야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의 뜻을 펼치기 위해서 권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3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제자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구하는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영광을 받기 전에 고난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받으시는 잔은 고난이고 세례는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영광은 고난을 통과해야 받을 수 있습니다. 고난이 없다면 영광도 없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용감했습니다. 그들은 “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영광을 위해서라면 능히 고난도 받겠다고 말했습니다. 영광을 받는다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들겠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가련하고 불쌍한 인생들입니다. 죽음을 향해서 나아가는 예수님이 보실 때 야심에 사로잡혀서 좌우편을 구하는 두 제자들이 답답하기 그지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의 때는 십자가에 달리실 때입니다. 요한복음은 이를 더욱 명백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좌우편에는 강도 둘이 매달릴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적으로 꽉 막혀 있는 제자들을 볼 때 답답하셨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받고자 하는 그들의 마음을 가상하게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야고보와 요한은 주와 복음 역사를 위해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야고보는 열두 제자 중 첫 번째 순교자가 됩니다(행12:2). 요한은 가장 오랫동안 살아남아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섬기게 됩니다. 마지막에는 밧모 섬에 유배되어 고난을 당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좌우편에 앉는 것은 그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40). 영광 중에 앉는 것은 누구를 위해서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일입니다. 제자들은 자리를 주는 것이 예수님의 권한에 속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속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도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지만 그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셨습니다. 예수님은 겸손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우리도 맡은 일을 다 한 다음에 “나는 무익한 종이라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열 제자는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청탁하는 말을 듣고 화가 났습니다. 그들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두 제자가 선수를 쳤다고 생각했습니다. 조용하게 있던 바롤로매도 “가만히 있다고 누구를 핫바지로 생각하는 겨!” 하며 화를 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높은 자리에 앉고 싶어 하는 권력 의지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나 섬김을 받고 싶어 하고 누구나 인정을 받고 싶고 누구나 권력을 마음껏 휘두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제자들에게 세상의 통치자들이 지배하는 방식과는 다른 원리가 하나님의 통치 영역에서 일어남을 가르쳐 주십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42-44).” 세상의 집권자들이 임의로 주관한다는 것은 억압적 권력을 사용한다는 뜻입니다. 대부분 폭력적인 정복을 가리킵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처음에는 개혁을 부르짖습니다. 좋은 일을 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갑질을 하고 자기들의 유익을 위해서 모든 것을 뜯어고치고자 합니다. 사람들이 왜 자리를 차지하고자 할까요? 권세를 부리고 싶어서입니다. 권력을 부리는 쾌락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로마의 집권자들을 비방하면서도 그런 자리를 구했습니다. 범죄한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것처럼 사람들은 한없이 높아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경고하십니다. 35,36절을 볼 때 더 크고자 하는 자,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바로 예수님의 좌우편 권좌를 차지하기를 소망한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야고보와 요한에게 어떻게 하면 권좌를 차지할 수 있는지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추구할 성질의 것이 아님을 말씀하십니다(40). 그러므로 43,44절 말씀은 야고보와 요한에게 그리고 이들 못지않게 권좌에 앉기를 원하는 제자들에게 권력을 탐하지 말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어떻게 하면 권력을 얻을 수 있는지 가르친 말씀이 아닙니다. 권력을 탐하면 오히려 낮은 자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권력을 추구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를 하신 후에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45절을 보십시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다니엘서에 나온 대로 인자는 하나님으로부터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습니다(단 7:14). 예수님은 그 본체가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인생들로부터 찬송과 경배와 섬김을 받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권력자인 인자도 세상에 종처럼 섬기러 왔다고 하십니다. 인자되신 예수님을 따르며 제자의 길을 간다고 하면서 섬기러 오신 예수님을 배우지 않고, 예수님께서 구원하신 새 이스라엘 공동체 속에서 권력의 길을 추구하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을 수 있지만 이를 부인하고 도리어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낮아져서 종의 형체를 취하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모든 인생들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대속제물이 되셨습니다. 여기서 다른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대신 지불하는 것은 노예해방을 위한 속전이라기보다는 대신 형벌을 당하는 대속입니다(사 53:10).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가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받으시고 욕을 먹으시고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그의 섬김은 자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십자가에 내어놓으시기까지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크기 위해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삶 자체가 위대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섬기는 삶은 누구나 다 할 수 있기 때문에 누구나 다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위대성의 척도는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품고 섬길만한 깊고 넓은 내면성을 가졌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섬기는 자는 자기 마음을 다스리고 이기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겸손과 온유, 인내와 사랑에 있어서 비범한 사람입니다. 종처럼 낮아져서 다른 사람을 섬기려면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비범한 내면성을 소유해야 합니다. 자기중심성을 극복하고 자기감정과 혈기를 제어하고 다른 사람을 품고 섬기려면 성숙한 내면성이 필요합니다. 늘 성령의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깊이 영접하고 섬기는 종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고전 9:19,20).” 바울은 학자요,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통해 죄 사함을 받았고,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받고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어 그들을 섬겼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을 깊이 깨닫고 이를 전해주었습니다. 핍박을 받으면서도 인내와 눈물과 훈계로 사람들을 섬겼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자기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어 주고자 할 정도로 좋은 동역자가 되었습니다(롬 16:4). 어떤 사람들은 눈이 좋지 않은 그를 위해서 눈이라도 빼어 주고자 했습니다. 바울이 가는 곳마다 많은 동역자들을 얻은 것은 그가 인간적인 능력이 많아서나, 리더십이 강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바울이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섬김으로 각 사람과 깊은 사랑의 관계성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남을 위해서 섬기는 삶을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많은 형제자매들이 목자님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영원히 양으로 남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받기만하고 주지 않는 사람은 썩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복의 근원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받는 것보다 주는 자가 더 복된 자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 목자님들에게 사랑을 받은 우리가 시간이 지나면서 인생 문제로 고통하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의 필요를 알고 돕는데서 자라야 합니다. 병든 사람을 치료할 수 있는 백신을 가지고 있는데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 될까요? 죄로 인해서 혼자 고민하며 울부짖은 사람들에게 죄사함의 복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 될까요? 외롭고 힘든 사람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우리가 주님의 섬김을 받고, 복된 하나님의 말씀을 체험하였으니 양들을 섬기며 성장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섬기는 사람은 자신만이 아는 기쁨과 하나님이 주시는 더 풍성한 복을 체험하게 됩니다. 섬기는 사람의 영향력은 확대가 되고 진정한 리더가 될 수 있습니다.
또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더 오래 살기 위해서 운동을 하고 음식을 조절하고 스트레스를 받지 않기 위해서 애를 많이 씁니다. 그러나 무조건 오래 산다고 해서 의미가 있고 열매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내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을 내려놓고 양들과 후배들과 자녀들을 위해서 거름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죽을 때 죽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병들어 죽거나 열매 없이 죽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건강하고 힘이 있을 때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섬기며 자신을 희생하고 죽을 때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문제 많은 사람들을 품고 섬길 때 나 자신도 변화되고 양들도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2020년 한 해 동안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주와 복음 역사를 섬겨야 할까요? 가정에서 자녀들과 동역자를, 센터에서는 양들을, 이웃들을,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어떻게 섬길 것인가? 우리가 도움이 필요한 한 사람이라도 찾아서 구체적으로 섬기는 삶을 실천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마가복음 10:32-45
요절 | 마가복음 10:45
인자가 온 것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2020년 새 해를 맞이하면서 예수님의 섬김의 도를 배울 수 있게 되어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진정으로 위대한 자는 어떤 사람인가 배우고 자기 목숨을 주기까지 섬기신 예수님을 본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했습니다. 예수님의 비장한 자세로 인해서 얼마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서 두려웠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죽으러 가시는 예수님이 조금도 위축되거나 머뭇거리지 않으시는 것은, 적극적으로 고난을 감당하고자 결심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어떤 고난이라도 감당하고자 작정하면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어떤 상황이 발생해도 놀라지 않고 담대히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놀라는 제자들에게 자기가 당할 일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33,34).” 예수님은 자신이 당할 일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심으로 제자들의 마음을 준비시키셨습니다. 그들이 고난에 직면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종교지도자들에게 넘겨지고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에게 넘겨줄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자기생각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세상의 권력을 잡고, 누리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하였습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을 비난하면서도 그 자리에 앉아 임의로 주관하고 권세를 부리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허황된 기대를 바꾸고자 세 번씩 반복해서 자신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반드시 시험에 들어 넘어지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아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는 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반드시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를 영접해야 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지만, 어떤 그리스도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군사적 메시아가 세상을 정복하고 승리한 후 세상을 통치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그들의 마음에는 세상 영광과 욕심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것을 두려워하고 싫어했습니다. 이처럼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깨닫지 못하고 반발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서 예수님이 그 길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반드시 십자가를 통해서 부활의 영광에 이르러야 하고 그 길만이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제자들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이런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받아들일 때까지 반복해서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당장은 깨닫지 못하더라도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시면 깨달게 될 것을 믿으시고 계속해서 가르치십니다.
제자들을 돕는 예수님을 통해서 양들을 어떻게 도와야하는지 배우게 됩니다. 양을 칠 때 사랑을 많이 베풀고 풍성한 말씀과 기도와 음식으로 섬기는 것이 필요합니다. 양들은 목자의 사랑의 수고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고 성장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고난 받으시는 예수님을 배우고 동참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자기의 계획과 꿈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 일은 쉽지 않습니다. 사람은 본성상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럴지라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쓸모없는 사람이 됩니다. 영적 어린아이 상태로 머물러 있게 됩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나아와 담대히 요구했습니다.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35).” 예수님이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다시 물으시자 그들은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요구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국무총리, 부총리 자리를 달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 앉기를 원합니다. 자리가 있어야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의 뜻을 펼치기 위해서 권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3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제자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구하는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영광을 받기 전에 고난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받으시는 잔은 고난이고 세례는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영광은 고난을 통과해야 받을 수 있습니다. 고난이 없다면 영광도 없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용감했습니다. 그들은 “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영광을 위해서라면 능히 고난도 받겠다고 말했습니다. 영광을 받는다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들겠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가련하고 불쌍한 인생들입니다. 죽음을 향해서 나아가는 예수님이 보실 때 야심에 사로잡혀서 좌우편을 구하는 두 제자들이 답답하기 그지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의 때는 십자가에 달리실 때입니다. 요한복음은 이를 더욱 명백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좌우편에는 강도 둘이 매달릴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적으로 꽉 막혀 있는 제자들을 볼 때 답답하셨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받고자 하는 그들의 마음을 가상하게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야고보와 요한은 주와 복음 역사를 위해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야고보는 열두 제자 중 첫 번째 순교자가 됩니다(행12:2). 요한은 가장 오랫동안 살아남아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섬기게 됩니다. 마지막에는 밧모 섬에 유배되어 고난을 당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좌우편에 앉는 것은 그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40). 영광 중에 앉는 것은 누구를 위해서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일입니다. 제자들은 자리를 주는 것이 예수님의 권한에 속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속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도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지만 그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셨습니다. 예수님은 겸손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우리도 맡은 일을 다 한 다음에 “나는 무익한 종이라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열 제자는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청탁하는 말을 듣고 화가 났습니다. 그들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두 제자가 선수를 쳤다고 생각했습니다. 조용하게 있던 바롤로매도 “가만히 있다고 누구를 핫바지로 생각하는 겨!” 하며 화를 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높은 자리에 앉고 싶어 하는 권력 의지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나 섬김을 받고 싶어 하고 누구나 인정을 받고 싶고 누구나 권력을 마음껏 휘두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제자들에게 세상의 통치자들이 지배하는 방식과는 다른 원리가 하나님의 통치 영역에서 일어남을 가르쳐 주십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42-44).” 세상의 집권자들이 임의로 주관한다는 것은 억압적 권력을 사용한다는 뜻입니다. 대부분 폭력적인 정복을 가리킵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처음에는 개혁을 부르짖습니다. 좋은 일을 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갑질을 하고 자기들의 유익을 위해서 모든 것을 뜯어고치고자 합니다. 사람들이 왜 자리를 차지하고자 할까요? 권세를 부리고 싶어서입니다. 권력을 부리는 쾌락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로마의 집권자들을 비방하면서도 그런 자리를 구했습니다. 범죄한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것처럼 사람들은 한없이 높아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경고하십니다. 35,36절을 볼 때 더 크고자 하는 자,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바로 예수님의 좌우편 권좌를 차지하기를 소망한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야고보와 요한에게 어떻게 하면 권좌를 차지할 수 있는지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추구할 성질의 것이 아님을 말씀하십니다(40). 그러므로 43,44절 말씀은 야고보와 요한에게 그리고 이들 못지않게 권좌에 앉기를 원하는 제자들에게 권력을 탐하지 말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어떻게 하면 권력을 얻을 수 있는지 가르친 말씀이 아닙니다. 권력을 탐하면 오히려 낮은 자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권력을 추구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를 하신 후에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45절을 보십시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다니엘서에 나온 대로 인자는 하나님으로부터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습니다(단 7:14). 예수님은 그 본체가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인생들로부터 찬송과 경배와 섬김을 받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권력자인 인자도 세상에 종처럼 섬기러 왔다고 하십니다. 인자되신 예수님을 따르며 제자의 길을 간다고 하면서 섬기러 오신 예수님을 배우지 않고, 예수님께서 구원하신 새 이스라엘 공동체 속에서 권력의 길을 추구하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을 수 있지만 이를 부인하고 도리어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낮아져서 종의 형체를 취하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모든 인생들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대속제물이 되셨습니다. 여기서 다른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대신 지불하는 것은 노예해방을 위한 속전이라기보다는 대신 형벌을 당하는 대속입니다(사 53:10).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가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받으시고 욕을 먹으시고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그의 섬김은 자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십자가에 내어놓으시기까지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크기 위해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삶 자체가 위대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섬기는 삶은 누구나 다 할 수 있기 때문에 누구나 다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위대성의 척도는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품고 섬길만한 깊고 넓은 내면성을 가졌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섬기는 자는 자기 마음을 다스리고 이기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겸손과 온유, 인내와 사랑에 있어서 비범한 사람입니다. 종처럼 낮아져서 다른 사람을 섬기려면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비범한 내면성을 소유해야 합니다. 자기중심성을 극복하고 자기감정과 혈기를 제어하고 다른 사람을 품고 섬기려면 성숙한 내면성이 필요합니다. 늘 성령의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깊이 영접하고 섬기는 종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고전 9:19,20).” 바울은 학자요,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통해 죄 사함을 받았고,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받고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어 그들을 섬겼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을 깊이 깨닫고 이를 전해주었습니다. 핍박을 받으면서도 인내와 눈물과 훈계로 사람들을 섬겼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자기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어 주고자 할 정도로 좋은 동역자가 되었습니다(롬 16:4). 어떤 사람들은 눈이 좋지 않은 그를 위해서 눈이라도 빼어 주고자 했습니다. 바울이 가는 곳마다 많은 동역자들을 얻은 것은 그가 인간적인 능력이 많아서나, 리더십이 강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바울이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섬김으로 각 사람과 깊은 사랑의 관계성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남을 위해서 섬기는 삶을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많은 형제자매들이 목자님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영원히 양으로 남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받기만하고 주지 않는 사람은 썩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복의 근원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받는 것보다 주는 자가 더 복된 자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 목자님들에게 사랑을 받은 우리가 시간이 지나면서 인생 문제로 고통하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의 필요를 알고 돕는데서 자라야 합니다. 병든 사람을 치료할 수 있는 백신을 가지고 있는데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 될까요? 죄로 인해서 혼자 고민하며 울부짖은 사람들에게 죄사함의 복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 될까요? 외롭고 힘든 사람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우리가 주님의 섬김을 받고, 복된 하나님의 말씀을 체험하였으니 양들을 섬기며 성장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섬기는 사람은 자신만이 아는 기쁨과 하나님이 주시는 더 풍성한 복을 체험하게 됩니다. 섬기는 사람의 영향력은 확대가 되고 진정한 리더가 될 수 있습니다.
또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더 오래 살기 위해서 운동을 하고 음식을 조절하고 스트레스를 받지 않기 위해서 애를 많이 씁니다. 그러나 무조건 오래 산다고 해서 의미가 있고 열매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내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을 내려놓고 양들과 후배들과 자녀들을 위해서 거름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죽을 때 죽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병들어 죽거나 열매 없이 죽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건강하고 힘이 있을 때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섬기며 자신을 희생하고 죽을 때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문제 많은 사람들을 품고 섬길 때 나 자신도 변화되고 양들도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2020년 한 해 동안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주와 복음 역사를 섬겨야 할까요? 가정에서 자녀들과 동역자를, 센터에서는 양들을, 이웃들을,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어떻게 섬길 것인가? 우리가 도움이 필요한 한 사람이라도 찾아서 구체적으로 섬기는 삶을 실천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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