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2019년 롬6강(4:1-25) 아브라함의 믿음의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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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로마서 제 6 강
말씀 | 로마서 4:1-25
요절 | 로마서 4:13
아브라함의 믿음의 의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우리는 지난 주 예수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았음을 배웠습니다. 오늘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아브라함과 죄사함의 복을 누린 다윗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떠했는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의 믿음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큰 본이 됩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까? 육신으로 유대인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행위는 선한 일이나 성실한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행위들을 가리킵니다. 아브라함이 율법을 받기 전에 의롭다 함을 얻었기 때문에 율법의 행위들을 지켜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이나 그 자손들인 유대인들은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들이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롯을 떠나보내고 힘들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는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라고 볼멘 소리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라 네 상속자라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도 장막에 드러누워 있자 하나님께서 그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서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늘을 보고 우주 안에 영롱하게 빛나는 별들을 보았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보자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신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여겼다는 말은 상업적인 용어로서 계산해주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후에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질 의를 아브라함의 의로 계산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우리 주님께서 이루신 의를 다 그의 것으로 계산해 주셨습니다. 죄로 인하여 예수님께서 당하신 십자가의 고통, 십자가 위에서 당하신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 십자가에서 치르신 죄의 댓가 등 그 모든 것을 아브라함이 당한 것으로 계산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믿었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신 의를 다 그의 것으로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이 진리를 믿음이냐 행위냐 하는 이원론적 방법으로 접근해서는 안 됩니다. 창세기 본문은 믿음과 행위를 이분화시키지 않고 도리어 믿음과 불신을 대립시킵니다.
그런데 성경에 이를 기록한 것은 아브라함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24절에 있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우리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자를 의롭다 여기십니다. 즉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나의 구주로 영접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를 모두 나의 것으로 계산해 주십니다. 나는 나의 죄를 감당하기 위해서 고통당한 것이 전혀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 죄를 감당하기 위해서 당하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내가 당한 것으로 계산해 주십니다. 나는 나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겪은 적이 하나도 없지만, 하나님은 죄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받으신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내가 받은 것으로 계산해 주십니다. 내가 내 죄 때문에 하나님에게 맞은 적이 없지만, 하나님은 예수님께서 우리 죄 때문에 채찍에 맞으시고 살과 몸을 찢기신 것을 내가 당한 것으로 계산해 주십니다. 이 때문에 나는 아무 한 것이 없다 할지라도 값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십자가의 모든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아무 한 것이 없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는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아무 한 것이 없지만 모든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는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아무 한 것이 없지만 천박하기 짝이 없는 내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놀랍기만 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취직한 사람이 일을 하고 월급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사원이 사장에게 월급을 받았다고, 무슨 특별한 은혜를 받은 양 감지덕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장이 월급을 주지 않으면 사장을 고발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여기서 일은 율법의 행위들을 가리키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는 이방인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의로 여긴다’는 것은 단지 법률적으로 죄인을 의인인 것처럼(as if) 인정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아니면 용서받은 죄인에게 실제로 의를 부여하는 것을 가리킬까요? ‘의’를 ‘여긴다’는 동사의 직접목적어로 사용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용서함을 받는 죄인들에게 실제로 의를 수여하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이 의롭다 함을 받는다 것은 하나님께서 의를 그에게 전가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칭의는 단순히 법률적인 선언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죄인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의 새 생명으로 부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를 새로운 피조물로 새롭게 창조하는 것을 말합니다(고후 5:17, 21).
우리는 일을 하지 아니하여 경건치 아니하다 할지라도, 그런 자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기초로 생활합니다. 우리는 죄악 되고 불경건하여서 하나님께 내세울 것이 없지만, 이런 자신을 의롭다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삽니다. 우리가 주님께 헌신하는 것은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의를 나의 것으로 여겨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간증에 깊이 공감을 합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 :10).”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좀 희생적인 삶을 살았다고 자랑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여 사명을 감당하였다고 자기 의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다가 엄청난 업적을 이루었다고 사람들의 인정이나 칭찬을 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였지만 열매가 없다고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은혜라고 설렁설렁 대충대충 사는 것이 옳은 것일까요? 믿음이란 성실과 충성, 순종이라는 말과 결코 떨어질 수 없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칭의를 죄용서의 관점에서 묘사하면서 다윗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6-8절을 보십시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다윗은 왕이요 장군이요 시인이요 목자요 음악가였습니다. 그는 인간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요나단과 같은 친구도 있었습니다. 그는 왕으로서 엄청난 물질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것들로 영혼의 만족을 누릴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바라고 고백합니다.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시16:2).” 그가 진정한 행복을 느끼게 된 것은 죄사함을 받았을 때입니다. 다윗은 인간의 행복에 대하여 할 말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다할지라도 구원을 얻지 못하면 말짱 헛고생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것은 인간의 노력이나 행위에 근거하지 않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는 밧세바와 정욕죄를 짓고 우리아를 살인 교사한 죄인입니다. 그는 이 죄로 인해서 밤마다 눈물로 침상을 적시고 뼈가 쇠하는 고통을 맛보았습니다. 그의 가슴에는 맷돌을 얹어놓은 것처럼 답답했습니다. 마음이 불안과 두려움으로 식욕을 잃었습니다. 그는 종일 신음하였습니다. 그의 심령은 메말라서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나단 선지자의 메시지를 듣고 회개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죄를 가리워주셨습니다. 가리운다는 것은 덮어준다. 인정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참된 행복이 무엇입니까? 다윗은 말하였습니다.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사람은 복이 있고,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이 말씀은 다윗이 충신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취한 죄를 회개한 후 쓴 시편입니다(시편 32편). 그런데 시편 51편을 보면 다윗은 이런 자신에 대해 “제가 충신 우리야의 아내를 빼앗은 파렴치한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고 하였습니다(시편 51:5). 그는 밧세바 사건을 통해서 자신이 얼마나 뼈 속 깊이 죄악에 찌든 자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밧세바 사건을 통해서 자신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라는 사실을 심령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참된 행복은 이런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는데 있음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래서 노래합니다. “복되어라!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여. 복되어라!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이여.”
바울은 유대인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가장 위대한 왕 다윗을 들어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진리를 증거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족보에도 가장 먼저 나오는 사람이 아브라함과 다윗입니다. 그만큼 아브라함과 다윗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증거했으니 더 이상 논쟁은 헛된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유대인들의 입을 막아버렸습니다.
그러면 이방인들은 어떻게 됩니까? 9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기졌다 하노라.” 하나님께서는 할례를 의로 여긴 것이 아니라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은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입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86세이고 할례를 받은 것은 99세이니 의롭다함을 받은 지 14년만에 할례를 행한 것입니다. 즉 아브라함을 의로 여기신 것은 그의 순종의 행위나 제사를 드린 사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아브라함의 온전한 믿음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할례를 받아야만 의롭게 될 수 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결국 바울은 아브라함의 예를 통하여 의롭게 되는 일은 할례와 같은 외적인 형식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믿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 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할례의 표는 유대인들이 반드시 받아야 했던 표였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이후에 이러한 할례의 표징은 전혀 무익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이후에도 할례를 중시하여 계속 행하였는데 이는 구속사적인 시각의 결여와 그리스도에 대한 전적인 믿음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믿음으로 된 의는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보여주는 핵심된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아들을 하나님께 드린 아브라함의 행위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아브라함의 전적인 믿음이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할례란 이 믿음을 인친 것입니다. ‘인’은 마치 도장을 찍는 것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인을 친다는 것은 모든 일의 마지막에 확증한다는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다. 즉 내용이 있어야 그것을 확증하는 도장을 찍는 것이지 내용이 없으면 아무리 도장을 찍어도 그것의 의미는 상실됩니다. 우리도 세례를 받습니다. 그런데 이 세례도 성령으로 거듭나야 세례가 의미가 있는 것이지 새 생명을 얻지도 못했는데 세례 받는 것은 머리에 물만 적시는 것이요 쓸데없이 물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13-25절 까지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본질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는가 배우고 우리가 그 만한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여기서 세상의 후사란 세상을 상속받는 자, 세상의 주인이요 지배자, 우주(코스모스)의 상속자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 즉 하나님의 사람들이 세상의 주인이 될 것입니다. 이 말 속에는 하나님의 비전과 함께 사도 바울의 비전이 들어 있습니다. 믿는 자들이 세상에 엄청나게 많아질 것입니다. 복음(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자들이 세상을 이길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때부터 이 비전을 가지셨습니다. 바울 시대에 신자들은 극소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들이 세상을 상속받게 될 것이라는 비전을 가졌습니다. 세상의 후사가 되는 것은 약속을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승리자가 되려면 돈이 있어야 되고 권력이 있어야 되고 정보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믿음입니까? 17절을 보십시오.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우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십니다. 한마디로 그에게는 부활신앙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역설적인 믿음입니다.
첫째, 그의 믿음은 절망 중에서 희망을 가진 믿음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었을 때에 그의 몸은 죽은 것 같았습니다. 사라의 태도 죽은 것 같았습니다. 그들은 아무 것도 바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절망 중에서 아브라함은 희망으로 불타올랐습니다. 사람들은 현실을 보고 절망에 빠지게 되면 무기력해지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그런데 살아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고난 속에서, 절망 속에서 도리어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가 절망으로 심령이 어두울 때 하나님을 바라보면 희망이 생깁니다. 어두움을 몰아내고 빛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둘째, 그는 믿음이 약하여 질 때 도리어 믿음이 견고하여지고 확신에 넘치는 삶을 살았습니다. 믿음이 약하여지면 약속의 말씀이 의심스럽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그에게 의로 여기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은 이러한 믿음입니다. 특히 우리가 캠퍼스 복음화를 위해서 일할 때 이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여러 환경을 볼 때 복음 전파와 제자 양성에 어려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이 있을 때 모든 역경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일을 해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믿기 위해서는 우리 내면 가운데 역사하는 불신과 싸워야 합니다. 아무리 회개해도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 같은 자신으로 절망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다짐했건만, 또 다시 정욕의 죄에 빠지는 자신을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야 합니다. 자녀들을 겸손과 사랑과 인내로 섬기고자 하는데, 오히려 화를 내며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 자신에 대한 절망에서 믿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봐야 합니다. 세상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자 하지만, 이기심에 사로잡혀 엉뚱한 짓을 행하는 자신에 대한 절망에서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믿을 때,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의로 여겨 주십니다.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의를 누리게 하십니다. 십자가에서 이루신 은혜를 누리게 하십니다. 십자가 안에 있는 구속의 은혜와 십자가의 피의 은혜를 누리게 하십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의롭다 여김을 받은 것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23,24절을 보십시오. “그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우리는 여기서 아브라함의 믿음과 우리의 믿음의 원리가 같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는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같이 우리도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살리신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살리십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이것은 우리가 가진 부활 신앙이요 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의로 여기십니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의를 누려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누려야 하겠습니다. 그 은혜에 힘입어 헌신하고 충성하기를 기도합니다. 믿음은 말씀에 대한 순종과 성실과 충성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말씀 | 로마서 4:1-25
요절 | 로마서 4:13
아브라함의 믿음의 의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우리는 지난 주 예수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았음을 배웠습니다. 오늘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아브라함과 죄사함의 복을 누린 다윗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떠했는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의 믿음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큰 본이 됩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까? 육신으로 유대인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행위는 선한 일이나 성실한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행위들을 가리킵니다. 아브라함이 율법을 받기 전에 의롭다 함을 얻었기 때문에 율법의 행위들을 지켜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이나 그 자손들인 유대인들은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들이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롯을 떠나보내고 힘들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는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라고 볼멘 소리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라 네 상속자라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도 장막에 드러누워 있자 하나님께서 그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서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늘을 보고 우주 안에 영롱하게 빛나는 별들을 보았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보자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신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여겼다는 말은 상업적인 용어로서 계산해주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후에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질 의를 아브라함의 의로 계산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우리 주님께서 이루신 의를 다 그의 것으로 계산해 주셨습니다. 죄로 인하여 예수님께서 당하신 십자가의 고통, 십자가 위에서 당하신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 십자가에서 치르신 죄의 댓가 등 그 모든 것을 아브라함이 당한 것으로 계산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믿었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신 의를 다 그의 것으로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이 진리를 믿음이냐 행위냐 하는 이원론적 방법으로 접근해서는 안 됩니다. 창세기 본문은 믿음과 행위를 이분화시키지 않고 도리어 믿음과 불신을 대립시킵니다.
그런데 성경에 이를 기록한 것은 아브라함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24절에 있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우리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자를 의롭다 여기십니다. 즉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나의 구주로 영접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를 모두 나의 것으로 계산해 주십니다. 나는 나의 죄를 감당하기 위해서 고통당한 것이 전혀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 죄를 감당하기 위해서 당하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내가 당한 것으로 계산해 주십니다. 나는 나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겪은 적이 하나도 없지만, 하나님은 죄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받으신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내가 받은 것으로 계산해 주십니다. 내가 내 죄 때문에 하나님에게 맞은 적이 없지만, 하나님은 예수님께서 우리 죄 때문에 채찍에 맞으시고 살과 몸을 찢기신 것을 내가 당한 것으로 계산해 주십니다. 이 때문에 나는 아무 한 것이 없다 할지라도 값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십자가의 모든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아무 한 것이 없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는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아무 한 것이 없지만 모든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는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아무 한 것이 없지만 천박하기 짝이 없는 내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놀랍기만 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취직한 사람이 일을 하고 월급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사원이 사장에게 월급을 받았다고, 무슨 특별한 은혜를 받은 양 감지덕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장이 월급을 주지 않으면 사장을 고발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여기서 일은 율법의 행위들을 가리키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는 이방인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의로 여긴다’는 것은 단지 법률적으로 죄인을 의인인 것처럼(as if) 인정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아니면 용서받은 죄인에게 실제로 의를 부여하는 것을 가리킬까요? ‘의’를 ‘여긴다’는 동사의 직접목적어로 사용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용서함을 받는 죄인들에게 실제로 의를 수여하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이 의롭다 함을 받는다 것은 하나님께서 의를 그에게 전가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칭의는 단순히 법률적인 선언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죄인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의 새 생명으로 부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를 새로운 피조물로 새롭게 창조하는 것을 말합니다(고후 5:17, 21).
우리는 일을 하지 아니하여 경건치 아니하다 할지라도, 그런 자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기초로 생활합니다. 우리는 죄악 되고 불경건하여서 하나님께 내세울 것이 없지만, 이런 자신을 의롭다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삽니다. 우리가 주님께 헌신하는 것은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의를 나의 것으로 여겨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간증에 깊이 공감을 합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 :10).”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좀 희생적인 삶을 살았다고 자랑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여 사명을 감당하였다고 자기 의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다가 엄청난 업적을 이루었다고 사람들의 인정이나 칭찬을 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였지만 열매가 없다고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은혜라고 설렁설렁 대충대충 사는 것이 옳은 것일까요? 믿음이란 성실과 충성, 순종이라는 말과 결코 떨어질 수 없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칭의를 죄용서의 관점에서 묘사하면서 다윗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6-8절을 보십시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다윗은 왕이요 장군이요 시인이요 목자요 음악가였습니다. 그는 인간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요나단과 같은 친구도 있었습니다. 그는 왕으로서 엄청난 물질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것들로 영혼의 만족을 누릴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바라고 고백합니다.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시16:2).” 그가 진정한 행복을 느끼게 된 것은 죄사함을 받았을 때입니다. 다윗은 인간의 행복에 대하여 할 말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다할지라도 구원을 얻지 못하면 말짱 헛고생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것은 인간의 노력이나 행위에 근거하지 않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는 밧세바와 정욕죄를 짓고 우리아를 살인 교사한 죄인입니다. 그는 이 죄로 인해서 밤마다 눈물로 침상을 적시고 뼈가 쇠하는 고통을 맛보았습니다. 그의 가슴에는 맷돌을 얹어놓은 것처럼 답답했습니다. 마음이 불안과 두려움으로 식욕을 잃었습니다. 그는 종일 신음하였습니다. 그의 심령은 메말라서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나단 선지자의 메시지를 듣고 회개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죄를 가리워주셨습니다. 가리운다는 것은 덮어준다. 인정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참된 행복이 무엇입니까? 다윗은 말하였습니다.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사람은 복이 있고,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이 말씀은 다윗이 충신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취한 죄를 회개한 후 쓴 시편입니다(시편 32편). 그런데 시편 51편을 보면 다윗은 이런 자신에 대해 “제가 충신 우리야의 아내를 빼앗은 파렴치한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고 하였습니다(시편 51:5). 그는 밧세바 사건을 통해서 자신이 얼마나 뼈 속 깊이 죄악에 찌든 자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밧세바 사건을 통해서 자신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라는 사실을 심령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참된 행복은 이런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는데 있음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래서 노래합니다. “복되어라!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여. 복되어라!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이여.”
바울은 유대인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가장 위대한 왕 다윗을 들어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진리를 증거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족보에도 가장 먼저 나오는 사람이 아브라함과 다윗입니다. 그만큼 아브라함과 다윗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증거했으니 더 이상 논쟁은 헛된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유대인들의 입을 막아버렸습니다.
그러면 이방인들은 어떻게 됩니까? 9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기졌다 하노라.” 하나님께서는 할례를 의로 여긴 것이 아니라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은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입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86세이고 할례를 받은 것은 99세이니 의롭다함을 받은 지 14년만에 할례를 행한 것입니다. 즉 아브라함을 의로 여기신 것은 그의 순종의 행위나 제사를 드린 사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아브라함의 온전한 믿음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할례를 받아야만 의롭게 될 수 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결국 바울은 아브라함의 예를 통하여 의롭게 되는 일은 할례와 같은 외적인 형식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믿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 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할례의 표는 유대인들이 반드시 받아야 했던 표였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이후에 이러한 할례의 표징은 전혀 무익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이후에도 할례를 중시하여 계속 행하였는데 이는 구속사적인 시각의 결여와 그리스도에 대한 전적인 믿음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믿음으로 된 의는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보여주는 핵심된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아들을 하나님께 드린 아브라함의 행위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아브라함의 전적인 믿음이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할례란 이 믿음을 인친 것입니다. ‘인’은 마치 도장을 찍는 것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인을 친다는 것은 모든 일의 마지막에 확증한다는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다. 즉 내용이 있어야 그것을 확증하는 도장을 찍는 것이지 내용이 없으면 아무리 도장을 찍어도 그것의 의미는 상실됩니다. 우리도 세례를 받습니다. 그런데 이 세례도 성령으로 거듭나야 세례가 의미가 있는 것이지 새 생명을 얻지도 못했는데 세례 받는 것은 머리에 물만 적시는 것이요 쓸데없이 물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13-25절 까지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본질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는가 배우고 우리가 그 만한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여기서 세상의 후사란 세상을 상속받는 자, 세상의 주인이요 지배자, 우주(코스모스)의 상속자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 즉 하나님의 사람들이 세상의 주인이 될 것입니다. 이 말 속에는 하나님의 비전과 함께 사도 바울의 비전이 들어 있습니다. 믿는 자들이 세상에 엄청나게 많아질 것입니다. 복음(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자들이 세상을 이길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때부터 이 비전을 가지셨습니다. 바울 시대에 신자들은 극소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들이 세상을 상속받게 될 것이라는 비전을 가졌습니다. 세상의 후사가 되는 것은 약속을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승리자가 되려면 돈이 있어야 되고 권력이 있어야 되고 정보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믿음입니까? 17절을 보십시오.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우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십니다. 한마디로 그에게는 부활신앙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역설적인 믿음입니다.
첫째, 그의 믿음은 절망 중에서 희망을 가진 믿음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었을 때에 그의 몸은 죽은 것 같았습니다. 사라의 태도 죽은 것 같았습니다. 그들은 아무 것도 바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절망 중에서 아브라함은 희망으로 불타올랐습니다. 사람들은 현실을 보고 절망에 빠지게 되면 무기력해지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그런데 살아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고난 속에서, 절망 속에서 도리어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가 절망으로 심령이 어두울 때 하나님을 바라보면 희망이 생깁니다. 어두움을 몰아내고 빛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둘째, 그는 믿음이 약하여 질 때 도리어 믿음이 견고하여지고 확신에 넘치는 삶을 살았습니다. 믿음이 약하여지면 약속의 말씀이 의심스럽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그에게 의로 여기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은 이러한 믿음입니다. 특히 우리가 캠퍼스 복음화를 위해서 일할 때 이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여러 환경을 볼 때 복음 전파와 제자 양성에 어려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이 있을 때 모든 역경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일을 해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믿기 위해서는 우리 내면 가운데 역사하는 불신과 싸워야 합니다. 아무리 회개해도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 같은 자신으로 절망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다짐했건만, 또 다시 정욕의 죄에 빠지는 자신을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야 합니다. 자녀들을 겸손과 사랑과 인내로 섬기고자 하는데, 오히려 화를 내며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 자신에 대한 절망에서 믿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봐야 합니다. 세상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자 하지만, 이기심에 사로잡혀 엉뚱한 짓을 행하는 자신에 대한 절망에서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믿을 때,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의로 여겨 주십니다.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의를 누리게 하십니다. 십자가에서 이루신 은혜를 누리게 하십니다. 십자가 안에 있는 구속의 은혜와 십자가의 피의 은혜를 누리게 하십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의롭다 여김을 받은 것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23,24절을 보십시오. “그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우리는 여기서 아브라함의 믿음과 우리의 믿음의 원리가 같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는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같이 우리도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살리신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살리십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이것은 우리가 가진 부활 신앙이요 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의로 여기십니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의를 누려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누려야 하겠습니다. 그 은혜에 힘입어 헌신하고 충성하기를 기도합니다. 믿음은 말씀에 대한 순종과 성실과 충성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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