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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2019년롬5강(3:21-31)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한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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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94회 작성일 19-12-01 13:38

본문

2019년 로마서 제 5 강
말씀 | 로마서 3:21-31
요절 | 로마서 3:21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한 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오늘 본문은 복음의 핵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루터는 성경을 반지에 비유한다면 로마서를 반지의 보석이라고 했습니다. 그 보석 중에서도 가장 빛을 발하는 부분이 바로 오늘 본문에 해당이 됩니다. 우리가 복음의 진수인 이 말씀을 깊이 이해하고 은혜받기를 기도합니다. 

  기독교 이외의 모든 종교는 다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에 이르고자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노력으로는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노력하면 할수록 자신이 비참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더 깊은 절망에 빠져듭니다.

  21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이 말씀은 하나의 큰 전환을 말해 줍니다. 바울은 이때까지 율법 아래 있는 인간의 절망적인 상황을 논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놀라운 희망이 전개됩니다. 율법의 세계에서는 죄의 인식과 판단과 정죄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구원의 은총이 있습니다. 이 전환은 율법의 세계에서 은혜의 세계로, 어둠의 세계에서 빛의 세계로, 죽음의 세계에서 생명의 세계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율법을 통해 의를 얻는 방법이 제시되었다면, 이제는 율법 외에 새로운 방법을 통한 의가 나타났습니다. ‘율법 외에’라는 말은 율법과 상관없이, 율법의 행위 없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입니다. 율법은 의인이 되는 길을 가르치고, 항상 전부 다 행하면 의인이 됩니다. 그러나 율법을 항상 다 빠짐없이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의 죄성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다른 의가 필요한데 바로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신 하나님의 한 의입니다. 

  22절을 보십시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 되신 예수님을 받아들임으로서 의롭다함을 받습니다. 여기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유대인, 이방인, 학벌, 남녀, 빈부귀천, 지역, 민족, 도덕성 등 차별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똑같이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을 받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시는 특별한 은총입니다.
 
  대부분의 종교가 율법의 의를 강조합니다. 불교, 힌두교, 이슬람은 모두 인간의 노력으로 의에 이르고자 합니다. 이슬람은 성지 순례를 해야 하고 하루 5번씩 기도를 해야 하고 선행과 구제를 해야 합니다. 라마단 기간에는 금식을 행합니다. 그러나 이런 노력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수준에 이를 수  없습니다. 노력하면 할수록 자신이 비참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더 깊은 절망에 빠집니다. 정통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은 탐심의 문제를 극복할 수 없어 탄식했습니다. 자기를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런 자신을 구원해주신 은혜에 감동되어서 빚진 자의 심정을 가지고 헌신적으로 복음 역사를 섬겼습니다. 그런데도 자기 의를 조금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했습니다.

  23,24절을 보십시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짐승과 달리 도덕적, 영적으로 높은 수준을 지닌 고귀한 존재요, 하나님과 교제하며 경배하는 영광스러운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타락하였습니다. 육체가 되었습니다(창6:3).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인간은 정욕의 노예, 욕심의 노예, 이기심의 노예, 시기심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정욕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도 원치 않게 정욕에 무릎을 꿇고 맙니다. 토기장이가 기준에 맞지 않으면 토기를 깨뜨려버리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기준에 미달되어 깨뜨려짐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죄를 보시면 심판하십니다.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 참예하는 두 번째 심판이 있습니다(히9:27; 계21:8). 이런 심판 가운데 있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구원자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 속량이란 노예를 해방하기 위해서 값을 지불하고 풀어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는 고엘 제도가 있는데 형제나 친척이 노예가 되었을 때 그의 빚을 지불하고 기업을 되찾게 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대신 십자가에 못 박아 피 흘리며 죽게 하심으로 값비싼 댓가를 치루셨습니다. 하나님 자신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이런 희생이 필요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었습니다. ‘의롭다함’(Being justified)은 로마의 법정 용어로서 ‘죄 없다 함을 인정받음’, ‘형벌에서 사면 받는다’는 뜻입니다. 즉 심판장이신 하나님이 사형수에게 죄 없다, 무죄선고를 하시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속하셔서 하나님의 소유요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신 것과 같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권세를 주셨습니다. 또한 ‘의롭다함’(Being justified)은 현재 분사로서 ‘언제나’, ‘항상’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은혜는 항상 계속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믿음으로 산다고 하지만, 변화되지 않은 죄악 된 내면으로 육신의 소욕을 이기지 못하여 죄에 빠지기도 합니다. 때로는 유혹을 이기고 기쁨에 넘치지만, 때로는 유혹에 져서 비통에 처하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죄를 짓지 않고자 굳게 결심하지만 작심삼일입니다. 어느새 결심이 허물어지고 반복해서 죄를 짓기도 합니다. 이때 연약함과 나약함으로 절망하게 되죠? 하나님께 염치가 없습니다. 반복해서 짓는 죄로 인해 용서해 주시지 않을 것 같은 불신과 회의에 빠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반복해서 죄를 지을지라도 다만 보혈의 은혜를 의지하고 믿음으로 나가기만 하면 언제나 새롭게 의롭다 해주십니다(요한1서1:9).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해서 우리가 한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은혜로, 공짜로,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의롭다 함을 얻음으로 우리는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된 우리를 사랑하사 먹이시고 입히시고 교육하시고 훈련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다 들어주십니다. 구원을 받은 우리는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고 담대해졌습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사는 것이 기쁘고 생명력이 넘치게 됩니다. 믿음의 법은 우리를 겸손하게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자랑하게 합니다. 십자가만을 자랑하게 합니다.

  “지옥의 7인(Uncommon valor, 흔치 않는 용기)”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의 주인공은 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였던 제이슨 대령입니다. 그런데 그의 아들이 월남전에 참전했다가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이때 그 아버지 제이슨 대령은 포로가 된 아들을 구출하기 위해서 백방으로 노력하지만 수포로 돌아갑니다. 마침내 이 사람 저 사람 찾아다니며 후원을 받고 사재를 털어서 7명의 특공대를 조직합니다. 자기 아들이 포로로 잡혀 있는 포로수용소와 똑같은 지형지물을 만들어 놓고 몇 달 동안 훈련을 합니다. 단지 7명의 특공대가 투입이 되어서 수많은 적들을 물리치고 아들을 구출해야 하기 때문에 일 분 일 초를 다투는 피나는 훈련을 합니다. 마침내 훈련을 마치고 포로수용소에 잠입을 합니다. 삼엄한 경계를 뚫고 포로들이 수용되어 있는 감옥에 들어가서 한 사람 한 사람 확인합니다. 자기 아들이 어디 있는지,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애타게 찾습니다. 마침내 작전 마감 시간이 임박해 왔습니다. 작전을 수행하는 동안에 7명의 특공대들 중에 몇 사람이 희생됩니다. 아버지도 다칩니다. 그러나 끝내 아들은 찾지 못합니다. 단지 아들의 친구들 몇 사람만 구출해서 헬리콥터에 태우고 적진을 빠져 나옵니다. 헬리콥터 속에서 한 젊은이가 말해줍니다. “당신의 아들은 수용소에서 병들어 죽었습니다. 그 아이는 정말 훌륭한 친구였습니다.” 그때 그 아버지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안타까운 사랑을 토로합니다. 포로로 잡혀 있는 아들을 구출하기 위해서 어떤 희생도 마다 않고 지불하는 아버지의 사랑에 감동을 받습니다. 아버지는 포로로 잡혀 있는 아들을 살려 낼 수만 있다면 어떤 희생도 마다 않고, 전 재산을 드려서, 아니 자신의 생명을 걸고 적진에 뛰어 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이 이와 같습니다. 죄로 인해 사탄의 포로가 되어 있는 우리를 구출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까지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고 죄의 포로에서 자유케 되었습니다. 그 영화의 끝에 포로상태에서 구출된 청년들이 멋있는 군복을 입고 훈장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들은 국민영웅이 되었습니다. 사실 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 나온 것이 아닙니다. 친구의 아버지가 구출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친구 아버지의 도움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값없이 구원을 받고, 국민영웅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데 예수님 때문에 값없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오직 은혜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25,26절을 보십시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인간이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해서는 피가 필요합니다. 생명은 피에 있습니다. 그래서 피 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습니다. 레위기에는 여러 제사법이 나오는데 소제를 제외하고 양이나 염소나 소나 비둘기의 피를 뿌려야 합니다. 레위기 17:11에는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히브리서 9:22은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짐승의 피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셨습니다. 2000년 전에 죄 없으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심으로 속죄제물이 되셨습니다. 히브리서 9:12-15절은 말씀합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1:18,19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인간의 창조주이십니다. 아버지의 심정을 가지고 계십니다. 문제는 공의와 사랑을 어떻게 조화시키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인생들의 모든 죄를 다 뒤집어 씌우셨습니다. 인생들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공의와 사랑을 모순 없이 조화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인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시공간 안에 임하신 인간이시면서 동시에 영(성령)으로서 하늘과 땅에 편만한 분이십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로써 하나님 자신도 의롭게 될 수 있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의롭게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었다고 해서 자랑할 수 없습니다. 27,28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의 법 즉 믿음의 원리로 되는 것이기 때문에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타락한 자신의 의를 나타내고자 헛된 투쟁을 하는 어리석은 자가 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피로 용서받은 의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날마다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 받도록 살아야 합니다. 

  31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 신자들은 율법을 행함으로 거룩함에서 자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해서 율법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려야 할까요? 바울은 결코 그럴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오히려 믿음의 법이 율법을 굳게 세우는 것입니다. 율법을 굳게 세운다는 것은 율법의 근본정신인 사랑을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믿음의 법이 율법을 굳게 세울까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서 죄의 삯인 사망이라는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켰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신자는 성령을 받게 되고 성령을 통해서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행하게 하십니다. 롬8:4은 말씀합니다.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가 성령의 다스림을 받고 그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순종할 때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또한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주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도록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날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고 계속해서 하나님과 이웃을 믿음으로 사랑하고 믿음으로 거룩하게 살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기쁨으로 헌신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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