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2019년롬4강(2:17-3:20) 의인은 하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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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로마서 제 4 강
말씀 | 로마서 2:17-3:20
요절 | 로마서 3:10
의인은 하나도 없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인간론에 대해서 많은 설이 있습니다. 순자는 성악설을, 맹자는 성선설을 주장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온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고 선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서 자아를 발견하고 회개하도록 도우시길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값진 선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의에 이르며 거룩한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자랑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가르침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할 줄 압니다. 그들은 스스로 눈먼 사람의 안내자요,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는 그들이 율법의 지식과 진리의 교훈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문제는 다른 사람을 가르치면서 자기 자신은 가르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본을 보임으로 가르쳐야 하는데 행동은 따르지 아니하고 말로만 하니 가르침이 힘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권위가 있었던 것은 그가 가르친대로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가르친대로 행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말이 있듯이 자기를 잘 가르쳐야 가정을 다스리고 나라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자기를 발견하고 자기를 정복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가지고 있어서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면서 자신은 도둑질을 했습니다. 그들은 우상을 가증히 여기면서 신전 물건을 도둑질 했습니다. 말라기에 보면 그들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을 사용하지 않음으로 귀한 재능과 기회를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또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사람이 도둑질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돌려야 할 감사를 사람이 차지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다 보이지 않는 도둑질입니다. 우리는 양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께 감사와 사랑과 신뢰를 드리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들은 간음하지 말라고 말하면서 간음했습니다. 예수님은 여자를 보고 마음에 음욕을 품으면
그것은 이미 간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음란한 동영상, 사진, 그런 이야기로 인해서 우리의 마음이 더러워집니다. 또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우상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은 영적인 간음입니다. 우리가 십계명 중에서 두 가지 계명만 살펴보았지만 열 가지를 다 자세히 묵상해 보면 걸리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율법을 자랑하는 유대인들이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습니다.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습니다. 이 말씀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나라에 많은 교회와 성도가 있지만 동시에 욕도 많이 먹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서 우리는 한숨을 쉬고 복음 전파의 길이 닫히는 것이 아닌가 염려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남에게 가르친 후에 자신이 버림을 받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자기 몸을 쳐서 말씀에 복종시킨다고 고백했습니다.
유대인이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지만 만일 율법을 범하면 그 할례를 무할례가 됩니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행함으로 선민이라는 자부심이 강했습니다. 할례는 언약을 자기 몸에 새기는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다는 각오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율법을 범하면 그 할례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28,29절을 보십시오.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할례는 마음에 해야 합니다. 할례는 오늘날 세례에 해당합니다. 세례는 구원을 받은 자라는 공적인 선포입니다. 세례는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에게 공적 표현으로 머리에 물을 묻힌 손으로 안수하던지, 침례를 행합니다. 진실한 회개를 할 때 성령께서 내면에 있는 모든 죄를 태우고 깨끗하게 하십니다. 생명을 주시며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을 주십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내주하셔서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게 역사하십니다.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거듭난 사람은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눈초리를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세례를 받았다는 것보다 세례를 받고 나서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입니까? 할례의 유익은 무엇입니까?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씨와 같아서 말씀을 받을 때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선한 일을 하도록 온전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의 양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진리를 알게 되고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할 때 물댄 동산 같이 늘 푸르고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순종하며 사는 사람들은 지금도 가정 성공적이고 열매가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범할지라도 신자의 나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거룩하게 살고자 애를 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부르심을 받았고 그 은혜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 의를 추구하고 죄를 짓고 나서 변명하고 합리화를 합니다. 선악과는 자기의 판단대로 선과 악을 정하는 것입니다. 각자 자기가 옳다고 하니 무질서하고 사탄의 놀림감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궤변가들은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내가 죄를 지으면 은혜가 더 풍성하게 되지 않겠느냐는 말과 같습니다. 7,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그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유대인들은 자기 의를 내려놓지 않고자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예수님의 피로 값없이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그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신자들이 자기 의를 내려놓고 겸손하게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어떤 상태에 있다고 선언했습니까? 9절을 보십시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모든 사람이 다 죄 아래에 있습니다. ‘죄 아래 있다’는 말씀은 죄의 능력 아래 갇혀서 죄의 영향력 안에 있으며,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에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도 죄의 권세에 사로잡혀 있고, 이방인들도 죄의 권세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모두 동일한 죄인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죽는 것입니다. 아무도 예외가 없습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11-18).”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바울의 선언은 인간의 실존을 그대로 드러내 줍니다. 우리는 한경직 목사님을 한국교회가 낳은 성자로 생각합니다. 그는 템플턴상도 탔습니다. 어느 날 한경직 목사님을 대적하는 몇몇 사람들이 찾아와서 한 목사님의 결점 15가지를 지적하며 물러나라고 했습니다. 그때 한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것 밖에 없습니까? 저는 그 보다 결점이 훨씬 더 많은 사람입니다. 일제 강점기 때 신사참배도 한 죄인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시자 반대하던 자들이 고개를 숙이고 물러갔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를 썼습니다. 그는 죽으면서 자신을 위해서 기념비나 비석을 세우지 말라고 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솔로몬도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다고 말했습니다(전7:20).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을 알만한 것들을 나타내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보이셨습니다. 또 역사를 연구하면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이 역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두움 속에 있어서 깨닫지 못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찾지도 않습니다. 항상 하나님을 구하고 그 분의 뜻을 구하게 되면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하나님의 말씀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찾고 찾으면 만나리라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 것만을 추구합니다. 사람들의 인정을 구하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고 자기의 뜻을 이루기를 원합니다. 그러면서 죄를 짓습니다.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목구멍(13) - 혀(13) - 입술 (13) - 입 (14) - 발 (15) - 길(16) - 눈 (18) 등 인간의 죄에 대한 묘사가 인간의 내부에서 밖으로 이동합니다. 목구멍은 열린 무덤입니다. 혀는 속임을 일삼습니다.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습니다. 우리의 언어생활을 살펴보십시오. 얼마나 욕을 많이 하고 불평을 하고 원망을 하고 시기하고 판단하고 죽입니까? 말로 짓는 죄가 정말 많습니다. 우리는 죽이는 말, 저주의 말, 비난의 말을 얼마나 많이 하고 있는지요?
발은 피 흘리는데 빠릅니다. 생각에서 말로 말에서 행동으로 죄가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얼마나 성급하게 판단하고 행동하는지 살펴보십시오. 성급한 행동으로 실수하고 죄를 짓고 남을 해칩니다.
눈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흘기는 눈, 겁박하는 눈, 눈을 뜨고 살지만 하나님을 보지 못하니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소경인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없기에 나오는 대로 말하고 판단하고 행동하고 죄를 짓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5:11에서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안에서 밖에까지 신체 모든 부위가 죄에 물들어 있습니다. 마음이 죄로 병들어서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마음이 병드니 신체도 면력기능이 떨어져 각종 병에 시달립니다. 뇌와 몸의 에너지가 불안정해져서 잘못된 판단을 합니다. 목구멍과 혀와 입술과 마음에 쌓은 악에서 독을 발하고 행동으로는 사람을 파괴시킵니다. 그러면서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합니다. 이처럼 죄는 인간의 지성과 감성과 의지와 행동을 포함한 모든 부분에 영향을 미칩니다.
아히히만을 평생 추적한 유대인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아르헨티나에서 늙은 아히히만을 드디어 발견했습니다. 그가 발견한 노인은 아히히만이 분명한데, 손자를 보고 있는 인자한 노인처럼 보였습니다. “저 사람이 수백만 명을 가스실에서 처형한 아이히만인가?”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히히만이 겉으로는 선하게 보이고 때로는 선한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본성의 뿌리에 무서운 살인마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비단 아히히만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다 전적으로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있고 이 본성이 여러 가지로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전적 부패, 타락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율법이 말하는 바’란 10-18절까지 구약 성경에서 인용된 구절을 가리킵니다. 이 말씀들은 모든 사람들을 정죄하지만 특별히 율법 아래 있는 유대인들을 정죄합니다. 결론적으로 20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는 것이지 의롭게 할 수가 없습니다. 율법의 첫째 기능은 죄를 깨닫고 절망하게 하며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에 관한 지식’(knowleage of sin)을 주기 위해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우리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고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오게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되고 복음을 영접하게 합니다. 또한 율법은 구원 받은 백성에게는 앞으로 살아갈 방향을 제시합니다.
바울은 1:18-3:20을 통해서 모든 인류는 죄의 세력 아래에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도덕적으로 훌륭한 이방인이든, 율법을 가진 유대인이든,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두 죄의 세력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말씀을 통해서 인간의 실체를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사람에 대해서 너무 높은 수준을 요구하기에 낙담하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사람을 측은히 여기게 됩니다. 죄인이 죄를 짓는 것을 이상하게 여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병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듯이 죄인에게 구주가 필요함을 아시고 이 세상에 낮아져 오셨습니다.예수님은 자신을 낮추시고 성육신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죄인 중의 하나와 같이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사람들 속에서 죄를 볼 때 판단하고 비난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필요한 사람인 것을 깨닫고 그에게 인도해야 합니다. 또한 나 자신의 죄를 발견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죄 가운데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죄인에게는 복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복음을 통하지 않고는 죄의 세력에서 벗어날 수 없고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또한 죄인으로서 자아인식이 없는 사람은 은혜의 깊은 세계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할 때 복음을 영접하고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든지, 도덕적으로 훌륭한 사람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점은 ‘죄’의 개념입니다. 로마서에서 말하는 죄는 도덕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죄의 개념은 영역이요, 거대한 세력입니다. 에베소서 2:1에서 바울은 인간을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선언했습니다. 죄인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새 생명을 얻고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빛이 있으라 하신 그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비추어 주시고 다시 살리셔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성령께서 죄인의 마음에 역사하셔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깨닫게 해주시도록 먼저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우리 마음을 환하게 비추어 모든 더럽고 추한 죄가 생각나게 하십니다. 그때 자신에게 절망하고 예수님께 두 손 들고 나오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죽음의 세계에서 생명의 세계로, 죄가 지배하는 영역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이 통치하는 영역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우리는 입으로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하고 감사하며, 죄인들을 볼 때 불쌍히 여기고 생명을 살리는 말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발은 복된 소식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로, 우리의 눈은 하나님을 바라보며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고 충성하지만 무익한 종의 자세로 살며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로마서 2:17-3:20
요절 | 로마서 3:10
의인은 하나도 없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인간론에 대해서 많은 설이 있습니다. 순자는 성악설을, 맹자는 성선설을 주장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온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고 선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서 자아를 발견하고 회개하도록 도우시길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값진 선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의에 이르며 거룩한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자랑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가르침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할 줄 압니다. 그들은 스스로 눈먼 사람의 안내자요,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는 그들이 율법의 지식과 진리의 교훈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문제는 다른 사람을 가르치면서 자기 자신은 가르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본을 보임으로 가르쳐야 하는데 행동은 따르지 아니하고 말로만 하니 가르침이 힘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권위가 있었던 것은 그가 가르친대로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가르친대로 행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말이 있듯이 자기를 잘 가르쳐야 가정을 다스리고 나라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자기를 발견하고 자기를 정복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가지고 있어서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면서 자신은 도둑질을 했습니다. 그들은 우상을 가증히 여기면서 신전 물건을 도둑질 했습니다. 말라기에 보면 그들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을 사용하지 않음으로 귀한 재능과 기회를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또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사람이 도둑질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돌려야 할 감사를 사람이 차지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다 보이지 않는 도둑질입니다. 우리는 양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께 감사와 사랑과 신뢰를 드리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들은 간음하지 말라고 말하면서 간음했습니다. 예수님은 여자를 보고 마음에 음욕을 품으면
그것은 이미 간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음란한 동영상, 사진, 그런 이야기로 인해서 우리의 마음이 더러워집니다. 또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우상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은 영적인 간음입니다. 우리가 십계명 중에서 두 가지 계명만 살펴보았지만 열 가지를 다 자세히 묵상해 보면 걸리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율법을 자랑하는 유대인들이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습니다.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습니다. 이 말씀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나라에 많은 교회와 성도가 있지만 동시에 욕도 많이 먹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서 우리는 한숨을 쉬고 복음 전파의 길이 닫히는 것이 아닌가 염려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남에게 가르친 후에 자신이 버림을 받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자기 몸을 쳐서 말씀에 복종시킨다고 고백했습니다.
유대인이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지만 만일 율법을 범하면 그 할례를 무할례가 됩니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행함으로 선민이라는 자부심이 강했습니다. 할례는 언약을 자기 몸에 새기는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다는 각오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율법을 범하면 그 할례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28,29절을 보십시오.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할례는 마음에 해야 합니다. 할례는 오늘날 세례에 해당합니다. 세례는 구원을 받은 자라는 공적인 선포입니다. 세례는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에게 공적 표현으로 머리에 물을 묻힌 손으로 안수하던지, 침례를 행합니다. 진실한 회개를 할 때 성령께서 내면에 있는 모든 죄를 태우고 깨끗하게 하십니다. 생명을 주시며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을 주십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내주하셔서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게 역사하십니다.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거듭난 사람은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눈초리를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세례를 받았다는 것보다 세례를 받고 나서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입니까? 할례의 유익은 무엇입니까?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씨와 같아서 말씀을 받을 때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선한 일을 하도록 온전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의 양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진리를 알게 되고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할 때 물댄 동산 같이 늘 푸르고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순종하며 사는 사람들은 지금도 가정 성공적이고 열매가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범할지라도 신자의 나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거룩하게 살고자 애를 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부르심을 받았고 그 은혜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 의를 추구하고 죄를 짓고 나서 변명하고 합리화를 합니다. 선악과는 자기의 판단대로 선과 악을 정하는 것입니다. 각자 자기가 옳다고 하니 무질서하고 사탄의 놀림감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궤변가들은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내가 죄를 지으면 은혜가 더 풍성하게 되지 않겠느냐는 말과 같습니다. 7,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그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유대인들은 자기 의를 내려놓지 않고자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예수님의 피로 값없이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그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신자들이 자기 의를 내려놓고 겸손하게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어떤 상태에 있다고 선언했습니까? 9절을 보십시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모든 사람이 다 죄 아래에 있습니다. ‘죄 아래 있다’는 말씀은 죄의 능력 아래 갇혀서 죄의 영향력 안에 있으며,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에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도 죄의 권세에 사로잡혀 있고, 이방인들도 죄의 권세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모두 동일한 죄인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죽는 것입니다. 아무도 예외가 없습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11-18).”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바울의 선언은 인간의 실존을 그대로 드러내 줍니다. 우리는 한경직 목사님을 한국교회가 낳은 성자로 생각합니다. 그는 템플턴상도 탔습니다. 어느 날 한경직 목사님을 대적하는 몇몇 사람들이 찾아와서 한 목사님의 결점 15가지를 지적하며 물러나라고 했습니다. 그때 한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것 밖에 없습니까? 저는 그 보다 결점이 훨씬 더 많은 사람입니다. 일제 강점기 때 신사참배도 한 죄인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시자 반대하던 자들이 고개를 숙이고 물러갔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를 썼습니다. 그는 죽으면서 자신을 위해서 기념비나 비석을 세우지 말라고 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솔로몬도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다고 말했습니다(전7:20).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을 알만한 것들을 나타내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보이셨습니다. 또 역사를 연구하면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이 역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두움 속에 있어서 깨닫지 못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찾지도 않습니다. 항상 하나님을 구하고 그 분의 뜻을 구하게 되면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하나님의 말씀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찾고 찾으면 만나리라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 것만을 추구합니다. 사람들의 인정을 구하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고 자기의 뜻을 이루기를 원합니다. 그러면서 죄를 짓습니다.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목구멍(13) - 혀(13) - 입술 (13) - 입 (14) - 발 (15) - 길(16) - 눈 (18) 등 인간의 죄에 대한 묘사가 인간의 내부에서 밖으로 이동합니다. 목구멍은 열린 무덤입니다. 혀는 속임을 일삼습니다.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습니다. 우리의 언어생활을 살펴보십시오. 얼마나 욕을 많이 하고 불평을 하고 원망을 하고 시기하고 판단하고 죽입니까? 말로 짓는 죄가 정말 많습니다. 우리는 죽이는 말, 저주의 말, 비난의 말을 얼마나 많이 하고 있는지요?
발은 피 흘리는데 빠릅니다. 생각에서 말로 말에서 행동으로 죄가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얼마나 성급하게 판단하고 행동하는지 살펴보십시오. 성급한 행동으로 실수하고 죄를 짓고 남을 해칩니다.
눈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흘기는 눈, 겁박하는 눈, 눈을 뜨고 살지만 하나님을 보지 못하니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소경인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없기에 나오는 대로 말하고 판단하고 행동하고 죄를 짓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5:11에서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안에서 밖에까지 신체 모든 부위가 죄에 물들어 있습니다. 마음이 죄로 병들어서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마음이 병드니 신체도 면력기능이 떨어져 각종 병에 시달립니다. 뇌와 몸의 에너지가 불안정해져서 잘못된 판단을 합니다. 목구멍과 혀와 입술과 마음에 쌓은 악에서 독을 발하고 행동으로는 사람을 파괴시킵니다. 그러면서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합니다. 이처럼 죄는 인간의 지성과 감성과 의지와 행동을 포함한 모든 부분에 영향을 미칩니다.
아히히만을 평생 추적한 유대인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아르헨티나에서 늙은 아히히만을 드디어 발견했습니다. 그가 발견한 노인은 아히히만이 분명한데, 손자를 보고 있는 인자한 노인처럼 보였습니다. “저 사람이 수백만 명을 가스실에서 처형한 아이히만인가?”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히히만이 겉으로는 선하게 보이고 때로는 선한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본성의 뿌리에 무서운 살인마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비단 아히히만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다 전적으로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있고 이 본성이 여러 가지로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전적 부패, 타락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율법이 말하는 바’란 10-18절까지 구약 성경에서 인용된 구절을 가리킵니다. 이 말씀들은 모든 사람들을 정죄하지만 특별히 율법 아래 있는 유대인들을 정죄합니다. 결론적으로 20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는 것이지 의롭게 할 수가 없습니다. 율법의 첫째 기능은 죄를 깨닫고 절망하게 하며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에 관한 지식’(knowleage of sin)을 주기 위해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우리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고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오게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되고 복음을 영접하게 합니다. 또한 율법은 구원 받은 백성에게는 앞으로 살아갈 방향을 제시합니다.
바울은 1:18-3:20을 통해서 모든 인류는 죄의 세력 아래에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도덕적으로 훌륭한 이방인이든, 율법을 가진 유대인이든,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두 죄의 세력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말씀을 통해서 인간의 실체를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사람에 대해서 너무 높은 수준을 요구하기에 낙담하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사람을 측은히 여기게 됩니다. 죄인이 죄를 짓는 것을 이상하게 여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병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듯이 죄인에게 구주가 필요함을 아시고 이 세상에 낮아져 오셨습니다.예수님은 자신을 낮추시고 성육신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죄인 중의 하나와 같이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사람들 속에서 죄를 볼 때 판단하고 비난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필요한 사람인 것을 깨닫고 그에게 인도해야 합니다. 또한 나 자신의 죄를 발견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죄 가운데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죄인에게는 복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복음을 통하지 않고는 죄의 세력에서 벗어날 수 없고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또한 죄인으로서 자아인식이 없는 사람은 은혜의 깊은 세계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할 때 복음을 영접하고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든지, 도덕적으로 훌륭한 사람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점은 ‘죄’의 개념입니다. 로마서에서 말하는 죄는 도덕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죄의 개념은 영역이요, 거대한 세력입니다. 에베소서 2:1에서 바울은 인간을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선언했습니다. 죄인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새 생명을 얻고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빛이 있으라 하신 그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비추어 주시고 다시 살리셔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성령께서 죄인의 마음에 역사하셔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깨닫게 해주시도록 먼저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우리 마음을 환하게 비추어 모든 더럽고 추한 죄가 생각나게 하십니다. 그때 자신에게 절망하고 예수님께 두 손 들고 나오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죽음의 세계에서 생명의 세계로, 죄가 지배하는 영역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이 통치하는 영역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우리는 입으로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하고 감사하며, 죄인들을 볼 때 불쌍히 여기고 생명을 살리는 말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발은 복된 소식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로, 우리의 눈은 하나님을 바라보며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고 충성하지만 무익한 종의 자세로 살며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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