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2019년 롬3강(2:1-16) 행한 대로 갚으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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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로마서 제 3 강
말씀 | 로마서 2:1-16
요절 | 로마서 2:6
행한 대로 갚으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이 세상에는 엄청나게 많은 위인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회고록이나 고백록을 보면 죄에 대한 깊은 회개가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요 하나님의 벗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은 거짓말을 하고 불신에 빠져 하나님을 슬프시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도 살인죄를 짓고 광야로 도피했고 그 백성들에게 화를 내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요셉, 다니엘, 노아가 성경에 나오는 의인들이지만 그들도 다 용서 받은 의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이 있어서 이를 지키고자 애를 썼지만 그들과 함께 살다 온 선교사님의 말을 들어 보면 너무 지독한 이기주의자들이라 꼴도 보기가 싫다고 합니다. 같은 이웃이지만 정나미가 떨어진다고 합니다. 본문은 유대인들과 도덕주의자들의 실제 생활을 파헤침으로서 그들도 다 할 말 없는 죄인들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들을 때 “이 말씀은 누구에게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자신은 피해 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이렇게 생각하는 너는 누구냐”라고 묻고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 의로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사람은 모두가 다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기준을 따라서 사람을 심판하십니까?
첫째, 진리를 따라 심판하시는 하나님. 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여기서 판단은 재판관의 자리에서 죄를 살펴서 정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재판관들이 다 무죄할까요? 오늘날 억울한 옥살이를 하다가 풀려난 사람들의 사례를 들라면 끝이 없습니다. 강압적인 수사와 허위자백으로 수십년간 옥살이를 하다가 풀려난 사람들이 정말로 많습니다. 화성연쇄살인 사건의 진범이 밝혀지자 억울하게 옥살이 한 사람들이 다시 재판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본문에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네, 율법을 가진 사람들, 도덕주의자들, 자기 의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율법이나 자신의 도덕성을 기초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했습니다. 그들은 남을 판단함으로서 사회를 정화하는데 기여 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가르치는 사람들이나 법을 다루는 사람들, 기자들이 그런 마음을 갖기 쉽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가르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가르친 대로 다 행하지는 못합니다. 같은 죄인이면서 남을 판단할 때는 매우 날카롭습니다. 그러나 남을 판단하기 전에 자신을 돌아보면 함부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판단을 하더라도 긍휼의 마음을 갖고 그의 형편을 이해하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우리가 때때로 당황스럽게 경험하는 것이지만 남을 판단하는 것이 부메랑이 되어 자기에게 돌아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유대인들이라고 율법으로 하고 이방인이라고 다른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진리대로 심판하십니다. 진리는 보편성이 있고, 정확하고, 영원불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조금 더 좁히면 율법이 진리입니다. 진리이신 하나님의 심판은 공정하고 평등합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바리새인들이 끌고 나왔습니다. 그들은 이 여인을 돌로 쳐 죽여야 한다며 핏대를 세우며 정죄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8:7).” 그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은 모든 사람들이 어른으로 시작하여 하나씩 돌을 내려놓고 다 돌아갔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앞에 자신을 비추어 보면 가슴을 치며 회개할 일뿐입니다.
남을 판단하면서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은 어떤 죄를 짓게 됩니까? 3,4절을 보십시오.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남을 판단하면서도 같은 죄를 짓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남을 판단하기를 잘하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자신도 율법 앞에서 똑같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잘 깨닫지 못합니다. 한마디로 자아발견이 덜 된 사람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죄인인가를 깊이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큰 소리를 치는 것입니다. 반대로 날카로운 말로 자기 자신을 자책하면서 괴로워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께 나아가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에게 주님의 긍휼이 임하길 기도합니다. 죄는 상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할 성질이 아닙니다. 내가 남보다 조금 더 깨끗하게 살았다고 해서 죄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남보다 선한 일을 조금 더 많이 했다고 해서 의로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기준에서 보면 크게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죄를 조금 덜 짓고 어떤 사람은 죄를 조금 더 지은 차이 밖에 없습니다. 한마디로 도토리 키 재기요, 오십 보 백 보요, 내로남불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죄를 조금 덜 지었다고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보다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통회하는 사람을 더욱 의롭게 여기십니다. 누가복음 18장에는 바리새인과 세리가 성전에서 기도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의롭게 생각하고 하나님께 자랑을 했습니다. 하지만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하늘을 쳐다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저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하나님은 누구의 기도를 기쁘게 받으셨을까요? 예수님은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가 의롭다 함을 받고 집으로 내려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사람들이 자기 죄를 깨닫고 회개하기를 기다리십니다. 오래 참으십니다. 때로는 그들의 죄를 용납하십니다. 그러나 이를 깨닫지 못하고 계속 죄를 짓게 되면 갑자기 망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더 큰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자신에게 쌓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인들을 당장 심판하지 않으시고 길이 참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오래 참으시는데 이를 알지 못하고 자신의 죄에 대해서 심판을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면 크게 오해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교만하여 자신을 속이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아십니다. 우리는 남의 허물을 보고 판단하기에 앞서서 먼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내가 판단하고 가르치면서도 똑같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닌지 되돌아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도덕주의자나 율법주의자도 결국에는 죄인들이요 복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바울은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둘째, 행한 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십니다.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십니다. 여기서 선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것은 의인의 특권이요 구원받은 참된 신자의 특징입니다. 믿음으로 살고 하나님 앞에서 살고자 하는데도 어려움을 당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참고 선을 행할 때 하나님께서 영광과 존귀함을 얻게 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큰 상급을 받게 되고 영생을 주십니다.
반면에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것은 악인의 특징입니다. 악인은 ‘다툼이나 당쟁을 일삼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자에게는 환난과 곤고가 따릅니다. 환난은 외적인 고난이요 곤고는 내적인 고통입니다. 악한 사람의 인생길이 가시 밭 길을 걷는 것과 같습니다.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9)” 악을 행하는 것이 겉으로 보기에는 자유로운 것 같지만 그 마음은 두렵고 불안하고 어둡습니다. 평안과 기쁨이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진노와 분노를 받을 사람들은 당을 지은 사람들입니다. ‘당을 짓는다’는 말은 헬라어로 ‘에리데이아’로서 개인의 이익을 취한다(NIV self-seeking)는 의미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 자기 유익을 추구하는 사람, 자기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을 뜻합니다.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않고 자기 집단의 영광과 유익을 구합니다. 당을 지음으로 자기 유익이 더 심화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진리의 말씀을 알아도 따르지 않습니다. 진리의 말씀보다는 자신의 욕심, 육체의 본성, 당론을 따라서 행합니다.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자신이나 인간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구하는 것(seek)’입니다. 이는 마음의 경향을 나타냅니다. 마음 속에서 무엇을 소원하며 추구하며 살아가는가가 심판의 기준이 됩니다. 인생 목적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사는 차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크게 벌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십니다. 외모는 겉모습뿐만 아니라 학력이나 재산이나 사회적인 지위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많이 배우고 돈이 많고 지위가 높다고 하나님은 봐주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행동의 동기를 보십니다.
사실 행위로 심판한다면 의롭다고 인정받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가 의롭게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행한 대로 보응한다’는 것은 심판의 날에 하나님이 각 사람의 행한 것을 보시되, 단지 겉으로 드러난 행위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과 생각까지 살피신다는 뜻입니다. 여기에는 그 마음속에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이 말씀은 행위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깊이 인정합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해서 흘리신 보혈을 통해서만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그 믿음에 기초해서 구원받은 것을 확신하고 늘 구원받은 은혜에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믿음으로 구원 받았다고 행위를 무시하면 안 됩니다. 믿음은 순종으로, 선한 행실로 열매를 맺습니다. 구원받은 은혜에 기초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합니다. 야고보 선생님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진정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기를 기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기를 소원합니다. 마태복음 7장 16절에서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고 했습니다. 말로는 사람을 속일 수 있지만 삶에서 나타나는 열매는 속일 수 없습니다.
셋째,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유대인들은 율법이 있고, 도덕주의자들은 나름대로 기준이 있습니다. 그러면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은 어떤 기준으로 판단하시고 정죄하십니까? 14,15절을 보십시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양심은 우리 속에 내장된 율법입니다.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은 양심의 법으로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 비록 인간이 타락했지만 여전히 인간의 마음에는 양심이 있습니다. 양심 안에 하나님의 법을 새겨놓으셨습니다. 양심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것을 낭비하고 상실한 후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양심은 절대기준이 아니라 최소기준입니다. 십계명 중에 5계명부터 10계명은 인간 상호간에 대한 계명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 하지 말라.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이런 계명은 모든 인간의 양심 속에도 있습니다.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라도 이런 계명을 범하면 죄를 지었다는 것을 알고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물론 사람마다 똑같은 양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청결한 양심을 가지고 있어서 죄를 지을 때마다 예민하게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작은 죄에도 부끄러워하고 고통스러워합니다. 이런 사람들의 믿음은 급속히 성장합니다. 하지만 무뎌진 양심을 가진 사람은 죄에 대해서 덜 민감합니다. 양심에 화인 맞은 것처럼 무감각한 사람도 있습니다. 무딘 양심으로 인해서 믿음 생활을 하지만 삶의 변화가 더딥니다.
14절 말씀은 이방인들의 구원과 자기 양심에 따라서 심판한다고 합니다. 복음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전에 죽은 우리 조상들의 구원은 어떻게 되는가? 만일, 만일, 만일, 만일, 만일, 만일, 만일, 만일, 만일, 만일,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들을 구원하셔서 천국에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그보다 죄인된 내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더욱 놀라운 일입니다. 이 말씀으로 이방인들을 행위에 기준하여 하나님이 구원한다는 근거를 찾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문맥은 칭의가 아니라 심판을 다루는 문맥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심판의 보편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양심을 통해서 구원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은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에 최종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이 친히 심판장이 되신다는 것은 그가 주권적으로 심판하신다는 뜻입니다. 그 심판의 때에 예수님은 사람들의 모든 은밀한 죄를 다 드러내십니다. 마음에 동기까지도 다 드러내십니다. 그 날에 우리는 벌거벗은 몸으로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우리가 엑스레이나 공항에서 검색대를 통과하면 우리 속에 있는 것들이 다 드러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의 속을 다 들여다보고 심판하십니다. 이 때 율법대로 산 유대인과 양심대로 산 이방인들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을 주십니다. 그러나 율법대로 살지 못한 유대인이나 양심대로 살지 못한 이방인들에게는 진노와 분노를 나타내십니다. 하지만 율법대로 완전하게 산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양심에 따라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이 산 사람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의인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3:10). 행위대로 심판을 받는다면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복음을 통해서만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비록 율법대로 살지 못했더라도, 양심대로 살지 못했더라도,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회개하고 복음을 영접하고 그에 합당한 삶을 살면, 심판장 되신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고 의롭다고 인정하십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살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특별한 대우를 해주십니다. 그러나 끝까지 고집을 피우고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진노의 심판을 내리십니다.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서 마귀와 함께 살면서 영원토록 고통당할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자신을 구주로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것으로 최후의 심판을 내리실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자의 심판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야 합니다. 신자들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며 오직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은 목적은 거룩함과 선행을 위한 것입니다(엡2:10). 하나님의 심판은 구원과 함께 구원받은 상태에 따르는 열매를 반드시 고려하십니다. 믿음의 증거인 열매를 살펴보십니다. 저는 오늘날 우리 가운데 회개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교회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욕을 많이 먹습니다. 억울한 면도 있지만 그동안 신앙인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함부로 살았습니다. 믿음에서 행위를 분리시키면 안 됩니다. 믿음의 순종이 없는 신앙생활은 죽은 믿음입니다. 마지막 심판의 날에 우리가 믿음의 순종의 삶을 살았는지, 아닌지 하는 것이 다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이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의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은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믿음으로 살면서 그가 행한 일로 인해서 상급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지만 아직 몸의 구속은 받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거룩한 삶을 추구하고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완전한 구원에 이르러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도덕주의자나 율법을 가진 유대인이나 죄인임을 배웠습니다. 그들은 이방인과 같은 죄에다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죄를 더 보탰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남을 판단하기보다 자신을 가르치기를 힘쓰며 겸손하게 주님을 따르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풍성한 자비를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로마서 2:1-16
요절 | 로마서 2:6
행한 대로 갚으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이 세상에는 엄청나게 많은 위인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회고록이나 고백록을 보면 죄에 대한 깊은 회개가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요 하나님의 벗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은 거짓말을 하고 불신에 빠져 하나님을 슬프시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도 살인죄를 짓고 광야로 도피했고 그 백성들에게 화를 내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요셉, 다니엘, 노아가 성경에 나오는 의인들이지만 그들도 다 용서 받은 의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이 있어서 이를 지키고자 애를 썼지만 그들과 함께 살다 온 선교사님의 말을 들어 보면 너무 지독한 이기주의자들이라 꼴도 보기가 싫다고 합니다. 같은 이웃이지만 정나미가 떨어진다고 합니다. 본문은 유대인들과 도덕주의자들의 실제 생활을 파헤침으로서 그들도 다 할 말 없는 죄인들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들을 때 “이 말씀은 누구에게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자신은 피해 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이렇게 생각하는 너는 누구냐”라고 묻고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 의로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사람은 모두가 다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기준을 따라서 사람을 심판하십니까?
첫째, 진리를 따라 심판하시는 하나님. 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여기서 판단은 재판관의 자리에서 죄를 살펴서 정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재판관들이 다 무죄할까요? 오늘날 억울한 옥살이를 하다가 풀려난 사람들의 사례를 들라면 끝이 없습니다. 강압적인 수사와 허위자백으로 수십년간 옥살이를 하다가 풀려난 사람들이 정말로 많습니다. 화성연쇄살인 사건의 진범이 밝혀지자 억울하게 옥살이 한 사람들이 다시 재판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본문에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네, 율법을 가진 사람들, 도덕주의자들, 자기 의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율법이나 자신의 도덕성을 기초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했습니다. 그들은 남을 판단함으로서 사회를 정화하는데 기여 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가르치는 사람들이나 법을 다루는 사람들, 기자들이 그런 마음을 갖기 쉽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가르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가르친 대로 다 행하지는 못합니다. 같은 죄인이면서 남을 판단할 때는 매우 날카롭습니다. 그러나 남을 판단하기 전에 자신을 돌아보면 함부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판단을 하더라도 긍휼의 마음을 갖고 그의 형편을 이해하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우리가 때때로 당황스럽게 경험하는 것이지만 남을 판단하는 것이 부메랑이 되어 자기에게 돌아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유대인들이라고 율법으로 하고 이방인이라고 다른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진리대로 심판하십니다. 진리는 보편성이 있고, 정확하고, 영원불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조금 더 좁히면 율법이 진리입니다. 진리이신 하나님의 심판은 공정하고 평등합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바리새인들이 끌고 나왔습니다. 그들은 이 여인을 돌로 쳐 죽여야 한다며 핏대를 세우며 정죄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8:7).” 그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은 모든 사람들이 어른으로 시작하여 하나씩 돌을 내려놓고 다 돌아갔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앞에 자신을 비추어 보면 가슴을 치며 회개할 일뿐입니다.
남을 판단하면서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은 어떤 죄를 짓게 됩니까? 3,4절을 보십시오.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남을 판단하면서도 같은 죄를 짓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남을 판단하기를 잘하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자신도 율법 앞에서 똑같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잘 깨닫지 못합니다. 한마디로 자아발견이 덜 된 사람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죄인인가를 깊이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큰 소리를 치는 것입니다. 반대로 날카로운 말로 자기 자신을 자책하면서 괴로워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께 나아가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에게 주님의 긍휼이 임하길 기도합니다. 죄는 상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할 성질이 아닙니다. 내가 남보다 조금 더 깨끗하게 살았다고 해서 죄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남보다 선한 일을 조금 더 많이 했다고 해서 의로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기준에서 보면 크게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죄를 조금 덜 짓고 어떤 사람은 죄를 조금 더 지은 차이 밖에 없습니다. 한마디로 도토리 키 재기요, 오십 보 백 보요, 내로남불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죄를 조금 덜 지었다고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보다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통회하는 사람을 더욱 의롭게 여기십니다. 누가복음 18장에는 바리새인과 세리가 성전에서 기도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의롭게 생각하고 하나님께 자랑을 했습니다. 하지만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하늘을 쳐다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저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하나님은 누구의 기도를 기쁘게 받으셨을까요? 예수님은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가 의롭다 함을 받고 집으로 내려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사람들이 자기 죄를 깨닫고 회개하기를 기다리십니다. 오래 참으십니다. 때로는 그들의 죄를 용납하십니다. 그러나 이를 깨닫지 못하고 계속 죄를 짓게 되면 갑자기 망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더 큰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자신에게 쌓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인들을 당장 심판하지 않으시고 길이 참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오래 참으시는데 이를 알지 못하고 자신의 죄에 대해서 심판을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면 크게 오해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교만하여 자신을 속이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아십니다. 우리는 남의 허물을 보고 판단하기에 앞서서 먼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내가 판단하고 가르치면서도 똑같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닌지 되돌아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도덕주의자나 율법주의자도 결국에는 죄인들이요 복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바울은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둘째, 행한 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십니다.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십니다. 여기서 선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것은 의인의 특권이요 구원받은 참된 신자의 특징입니다. 믿음으로 살고 하나님 앞에서 살고자 하는데도 어려움을 당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참고 선을 행할 때 하나님께서 영광과 존귀함을 얻게 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큰 상급을 받게 되고 영생을 주십니다.
반면에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것은 악인의 특징입니다. 악인은 ‘다툼이나 당쟁을 일삼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자에게는 환난과 곤고가 따릅니다. 환난은 외적인 고난이요 곤고는 내적인 고통입니다. 악한 사람의 인생길이 가시 밭 길을 걷는 것과 같습니다.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9)” 악을 행하는 것이 겉으로 보기에는 자유로운 것 같지만 그 마음은 두렵고 불안하고 어둡습니다. 평안과 기쁨이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진노와 분노를 받을 사람들은 당을 지은 사람들입니다. ‘당을 짓는다’는 말은 헬라어로 ‘에리데이아’로서 개인의 이익을 취한다(NIV self-seeking)는 의미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 자기 유익을 추구하는 사람, 자기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을 뜻합니다.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않고 자기 집단의 영광과 유익을 구합니다. 당을 지음으로 자기 유익이 더 심화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진리의 말씀을 알아도 따르지 않습니다. 진리의 말씀보다는 자신의 욕심, 육체의 본성, 당론을 따라서 행합니다.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자신이나 인간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구하는 것(seek)’입니다. 이는 마음의 경향을 나타냅니다. 마음 속에서 무엇을 소원하며 추구하며 살아가는가가 심판의 기준이 됩니다. 인생 목적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사는 차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크게 벌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십니다. 외모는 겉모습뿐만 아니라 학력이나 재산이나 사회적인 지위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많이 배우고 돈이 많고 지위가 높다고 하나님은 봐주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행동의 동기를 보십니다.
사실 행위로 심판한다면 의롭다고 인정받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가 의롭게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행한 대로 보응한다’는 것은 심판의 날에 하나님이 각 사람의 행한 것을 보시되, 단지 겉으로 드러난 행위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과 생각까지 살피신다는 뜻입니다. 여기에는 그 마음속에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이 말씀은 행위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깊이 인정합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해서 흘리신 보혈을 통해서만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그 믿음에 기초해서 구원받은 것을 확신하고 늘 구원받은 은혜에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믿음으로 구원 받았다고 행위를 무시하면 안 됩니다. 믿음은 순종으로, 선한 행실로 열매를 맺습니다. 구원받은 은혜에 기초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합니다. 야고보 선생님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진정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기를 기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기를 소원합니다. 마태복음 7장 16절에서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고 했습니다. 말로는 사람을 속일 수 있지만 삶에서 나타나는 열매는 속일 수 없습니다.
셋째,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유대인들은 율법이 있고, 도덕주의자들은 나름대로 기준이 있습니다. 그러면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은 어떤 기준으로 판단하시고 정죄하십니까? 14,15절을 보십시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양심은 우리 속에 내장된 율법입니다.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은 양심의 법으로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 비록 인간이 타락했지만 여전히 인간의 마음에는 양심이 있습니다. 양심 안에 하나님의 법을 새겨놓으셨습니다. 양심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것을 낭비하고 상실한 후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양심은 절대기준이 아니라 최소기준입니다. 십계명 중에 5계명부터 10계명은 인간 상호간에 대한 계명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 하지 말라.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이런 계명은 모든 인간의 양심 속에도 있습니다.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라도 이런 계명을 범하면 죄를 지었다는 것을 알고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물론 사람마다 똑같은 양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청결한 양심을 가지고 있어서 죄를 지을 때마다 예민하게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작은 죄에도 부끄러워하고 고통스러워합니다. 이런 사람들의 믿음은 급속히 성장합니다. 하지만 무뎌진 양심을 가진 사람은 죄에 대해서 덜 민감합니다. 양심에 화인 맞은 것처럼 무감각한 사람도 있습니다. 무딘 양심으로 인해서 믿음 생활을 하지만 삶의 변화가 더딥니다.
14절 말씀은 이방인들의 구원과 자기 양심에 따라서 심판한다고 합니다. 복음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전에 죽은 우리 조상들의 구원은 어떻게 되는가? 만일, 만일, 만일, 만일, 만일, 만일, 만일, 만일, 만일, 만일,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들을 구원하셔서 천국에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그보다 죄인된 내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더욱 놀라운 일입니다. 이 말씀으로 이방인들을 행위에 기준하여 하나님이 구원한다는 근거를 찾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문맥은 칭의가 아니라 심판을 다루는 문맥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심판의 보편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양심을 통해서 구원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은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에 최종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이 친히 심판장이 되신다는 것은 그가 주권적으로 심판하신다는 뜻입니다. 그 심판의 때에 예수님은 사람들의 모든 은밀한 죄를 다 드러내십니다. 마음에 동기까지도 다 드러내십니다. 그 날에 우리는 벌거벗은 몸으로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우리가 엑스레이나 공항에서 검색대를 통과하면 우리 속에 있는 것들이 다 드러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의 속을 다 들여다보고 심판하십니다. 이 때 율법대로 산 유대인과 양심대로 산 이방인들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을 주십니다. 그러나 율법대로 살지 못한 유대인이나 양심대로 살지 못한 이방인들에게는 진노와 분노를 나타내십니다. 하지만 율법대로 완전하게 산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양심에 따라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이 산 사람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의인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3:10). 행위대로 심판을 받는다면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복음을 통해서만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비록 율법대로 살지 못했더라도, 양심대로 살지 못했더라도,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회개하고 복음을 영접하고 그에 합당한 삶을 살면, 심판장 되신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고 의롭다고 인정하십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살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특별한 대우를 해주십니다. 그러나 끝까지 고집을 피우고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진노의 심판을 내리십니다.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서 마귀와 함께 살면서 영원토록 고통당할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자신을 구주로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것으로 최후의 심판을 내리실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자의 심판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야 합니다. 신자들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며 오직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은 목적은 거룩함과 선행을 위한 것입니다(엡2:10). 하나님의 심판은 구원과 함께 구원받은 상태에 따르는 열매를 반드시 고려하십니다. 믿음의 증거인 열매를 살펴보십니다. 저는 오늘날 우리 가운데 회개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교회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욕을 많이 먹습니다. 억울한 면도 있지만 그동안 신앙인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함부로 살았습니다. 믿음에서 행위를 분리시키면 안 됩니다. 믿음의 순종이 없는 신앙생활은 죽은 믿음입니다. 마지막 심판의 날에 우리가 믿음의 순종의 삶을 살았는지, 아닌지 하는 것이 다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이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의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은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믿음으로 살면서 그가 행한 일로 인해서 상급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지만 아직 몸의 구속은 받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거룩한 삶을 추구하고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완전한 구원에 이르러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도덕주의자나 율법을 가진 유대인이나 죄인임을 배웠습니다. 그들은 이방인과 같은 죄에다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죄를 더 보탰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남을 판단하기보다 자신을 가르치기를 힘쓰며 겸손하게 주님을 따르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풍성한 자비를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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