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Document
주일말씀 성경별메시지 심포지엄 성경 검색
문제지 성경별문제지

로마서 2020년 롬 8강(6:1-23) 의의 종으로 거룩함에 이르라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99회 작성일 20-01-26 12:57

본문

2020년 로마서 제 8 강
말씀 | 로마서 6:1-23
요절 | 로마서 6:19

의의 종으로 거룩함에 이르라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오늘 말씀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이 어떻게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지 알려 줍니다.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할 때 죄가 가장 큰 걸림돌이 됩니다. 2월 10일부터 13일까지 용인에서 전국 학생수양회를 하는데 수양회 주제가 일곱가지 대죄(교만, 시기, 분노, 나태, 탐욕, 정욕)를 다스리고 깨끗한 그릇으로 준비되는 것입니다. 이번 학생 수양회에 모든 학생들이 참석해서 영적으로 한 단계씩 성장하여 올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과 연합하며 의의 종으로서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죄에 대해서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로 여겨야 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여기서 산 자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라고 말씀합니다.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의미는 죄와 상관이 없다, 죄와 결별했다, 죄에 대해서 손을 끊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했던 시절에 우리는 죄에 대해 무방비 상태로 살았습니다. 죄가 시키는 대로 끌려 다니며 비참하게 살았습니다. 죄가 내 생각과 내 삶에 왕 노릇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죄에 대해서 우리는 죽은 자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언제 죄에 대해서 죽었다고 말씀합니까? 3,4절을 보십시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것을 믿고 세례를 받을 때 우리는 죄에 대해서 죽은 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믿고 예수님의 죽음이 곧 나의 죽음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20은 말씀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4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과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난 우리는 예수님이 주시는 새 생명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이 생명은 하늘에 속한 생명입니다. 과거의 죄악된 습관을 버리고 새 인생을 살도록 해 주는 생명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삶을 살도록 해 주시는 생명입니다.

  8,9절을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40일 후에 승천하셨습니다. 지금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만물을 통치하고 계십니다.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우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겨야 합니다(10,11). 여기서 ‘여긴다’는 것은 ‘계산하다, 헤아린다’는 뜻입니다. 즉 이론과 현실의 괴리로 인해서 혼란스러울 때 계산을 해 보라는 것입니다. 행동은 생각에서 나오기 때문에 먼저 생각이 복음화되어야 합니다. 나는 인간이기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죄를 쉽게 용납하고, 넘어지고, 즐깁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요 죄없는 존재로 다시 태어났다고 생각하면 죄와 싸울 수 있습니다.

  둘째, 우리의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12,13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죄에 대해서는 더 이상 자신의 몸을 내 주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자신을 드려야 합니다. 우리 지체는 불의의 무기가 될 수도 있고 의의 무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지체를 무기로 표현했습니다. 우리의 삶은 영적인 싸움입니다. 죄는 자꾸 왕 노릇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기에 죄가 우리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14). 한 목자님은 군대에서 하사가 상관이었는데 제대하고 나서도 그를 지배하려고 하자 정색을 하고 말했습니다. “당신이 누구인데 사회에서도 내 상관이 되려고 합니까?” 목자님이 옛 군대 상관에게 이런 말을 했더니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경어를 쓰더라고 했습니다. 군대를 제대하고 자유인이 되었으니 이제는 옛 상관의 지시를 받을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죄와 사탄과 사망의 세계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과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생명의 세계, 은혜의 세계로 옮겨졌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죄가 우리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과거에는 죄의 종이었기 때문에 죄에 대해서 대항할 힘이 없었습니다. 죄가 요구하는 대로 순종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죄에 대해서 죽었고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죄에 대해서 저항할 수 있고 싸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유인들은 자기들을 지배하려고 침략하는 자들과 피 흘리며 싸웁니다. 패트릭 헨리는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쳤습니다. 자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귀한 선물입니다. 우리는 그 자유로 죄를 짓는데 쓸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살리는데 써야 합니다. 우리는 죄가 자신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영적인 싸움을 싸우고 의의 병기로 드려야 합니다.

  <반지의 제왕>이라는 영화를 보면, 싸우론(죄)이 어떻게 사욕을 이용해 사람들이 빈지를 끼고 싶어 하게 만드는지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반지를 끼면 완벽한 힘을 가지고 자기 몸을 완전히 숨길 수 있는 능력자가 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 반지를 보면 끌리게 됩니다. 한 번 껴보고 싶어서 그 사욕(desire)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가 됩니다. 그런데 그 반지는 가지고 있는 주인을 완전히 파괴합니다. 그래서 그 반지를 사모하던 자는 골룸이라는 괴물로 날마다 변해갑니다. 마지막에 그 반지를 불구덩이에 집어넣음으로 악의 세력이 끝나는 것처럼 주님이 오셔서 심판하심으로 모든 것이 끝날 것입니다. 그 전까지 우리는 거룩한 싸움을 해야 합니다. 신자는 죄보다 강력한 은혜의 통치 아래 있기 때문에 죄가 주관하지 못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기만 하면 죄의 유혹을 이기고 거룩함에 이를 수 있습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우리가 은혜 아래 있다고 죄를 지을 수 없는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유인이지만 자신의 지체를 죄에게 자꾸 내어주면 죄의 종이 되고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순종한다는 동사는 현재 능동태입니다. 즉 적극적으로 계속해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형벌에서 면제를 받았지만 오염의 가능성이 열려 있습니다. 우리의 신분은 변하지 않지만 상태는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술을 마시면 처음에는 자기가 마시지만 나중에는 술이 술을 마시게 됩니다. 술에 취한 후에는 자신도 모르게 망령된 행실을 하죠. 이처럼 자신을 죄에게 자꾸 내어주면 또 다시 죄의 종으로 전락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로 죄에게 자신을 내어주어서는 안 됩니다. 죄를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기에 힘써야 합니다.

  17,18을 보십시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우리가 본래 죄의 종이었는데 이제는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19절을 보십시오.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우리가 죄에게 자신을 자꾸 내어주면 더욱 악하게 되고, 부끄러운 열매를 맺게 됩니다. 결국에는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인생을 살다가 복음을 듣고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구원받은 이후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 지체를 적극적으로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는 것입니다. ‘거룩하다’라는 의미를 국어 사전에서 찾아보면 ‘누구도 함부로 대하기 어려울만큼 성스럽고 위대하다’로 나옵니다. ‘거룩’이 히브리어로는 ‘카도쉬’인데 근본 개념은 탈퇴, 그리고 헌신의 의미입니다. 즉 세속적인 것이나 부정한 것으로부터의 탈퇴, 신성하고 성스럽고 순수한 것에 대한 헌신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창조물로부터 구별되시며 초월하여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권능과 주권과 위엄에 있어 우리와 구별되는 거룩한 분이십니다. 또한 윤리적으로 흠이 없는 분이십니다. 기물과 제도가 거룩하다고 할 때는 그 자체가 ‘거룩’한 것이 아니고 일반적인 사용에서 벗어나서 사용되므로 그런 단어를 사용합니다. 하나님께 봉사하기 위해서 바쳐질 때 비로소 거룩한 것입니다. 사람이 거룩하다고 할 때는 하나님께 헌신할 때, 도덕적으로 흠이 없을 때 거룩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특히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신자들을 성도 즉 거룩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성령의 내재하심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자들은 거룩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계속해서 짓고자 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3에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거룩한 자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우리가 의의 종이 되는 것은 하나님께 헌신할 때입니다. 이 헌신이 지향하는 것은 마음과 생활의 거룩함입니다. 이 거룩함이 없이는 하나님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히12:14; 살전4:3-7). 예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레위기 19:1에서 “나 하나님 여호와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에베소서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거룩하라는 것은 간단히 말하면 이 세상과 구별되라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거룩함에 이르는 것’은 성품이 변화되어서 예수님을 닮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곧 성화에 이르는 것입니다. 성화는 자연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적극적으로 우리의 지체를 의의 도구로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갈 때 성화가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지체를 의의 도구로 하나님께 드리지 않으면 신앙성장이 멈추고 퇴보합니다.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 때 점차로 성숙해져서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구원을 받는 데만 관심을 갖고 거룩함에 이르는 것에는 관심이 적을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지만 적당히 자기를 사랑하고 이 세상을 즐기면서 살아가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하나님처럼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룩한 삶을 살 때 아름다운 향기를 풍기게 됩니다. 사람들이 이런 거룩한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 나아오게 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신 목적은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7,8에서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라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해가 갈수록 예수님을 점점 닮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을 하는 중요한 내적 목적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해갈수록 점점 더 영적으로 성숙하고 예수님을 닮아가고 거룩함에 이르고 있습니까? 

  우리가 죄의 종이었을 때에는 의에 대해서 자유로웠습니다. 마음대로 죄를 짓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부끄러운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 마지막은 사망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 마지막은 영생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입니다. 죄를 섬겨서 마지막 받는 삯은 영원한 죽음입니다. 삯은 행한 일에 대해서 반드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겨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삯이 아니라 선물입니다. 이 선물은 그리스도 예수 주 안에 있는 영생입니다. 영생은 사람이 하나님과 친밀하게 지내며 하나님과 풍성한 교제를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기쁨, 의로운 삶으로 인한 담대함과 넘치는 생명력, 세상이 줄 수 없는 깊은 평안함, 자유롭고 주님이 주신 은사를 마음껏 발휘하여 보람있고 의미가 충만한 삶입니다. 이 생명은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더 이상 죄의 종노릇하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하나님에 대해서 살아있는 자로 자신을 여겨야 합니다. 죄에 대해서 등을 돌리고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인생의 목적과 방향을 하나님께 두고 우리의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적극적으로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의의 종으로서 의를 섬기고, 의를 드러내고, 의를 증거하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거룩함에 이르고, 예수님의 성품을 닮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끊임없이 성장할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1,323건 20 페이지
주일메시지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1038 로마서 이엘리야 107 03-08
1037 로마서 이엘리야 110 03-01
1036 로마서 이엘리야 143 02-23
1035 로마서 이엘리야 97 02-23
1034 로마서 이엘리야 116 02-16
1033 로마서 이엘리야 121 02-16
1032 로마서 이엘리야 113 02-09
1031 로마서 이엘리야 91 02-09
1030 로마서 이엘리야 58 02-02
1029 로마서 이엘리야 95 02-02
열람중 로마서 이엘리야 100 01-26
1027 로마서 이엘리야 107 01-19
1026 로마서 이엘리야 71 01-19
1025 디모데서 이엘리야 83 01-12
1024 디모데서 이엘리야 98 01-12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