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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2020롬7강(5:1-21)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의 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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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107회 작성일 20-01-19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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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로마서 제 7 강
말씀 | 로마서 5:1-21
요절 | 로마서 5:1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의 복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로마서 1-4장까지 유대인이나 비유대인이나 모두가 다 죄인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됨을 배웠습니다. 오늘 배울 5장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가 누리게 되는 복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5:1-11절은 이신칭의에 기초해서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었음을 말씀합니다. 믿고 의롭게 되었다고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되었으니 그와 화평을 누려야 합니다. 12-21절은 우리가 죄와 죽음과 사탄의 영역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역으로 옮겨졌음을 말씀합니다. 이신칭의만 강조하면 믿고 땡, 즉 구원받은 이후의 삶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와 사탄의 영역에서 그리스도와 생명의 영역으로 들어왔으니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두 가지 개념을 가지고 구원을 이해해야 신자로서 바르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누리게 된 복이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습니다. 5장에 ‘말미암아’라는 단어가 16번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로 말미암아, 그의 피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등 12번이 예수님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다시 맺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세상의 아버지와 다릅니다. 권위적이고 죄로 병들고 무능력한 아버지가 아니라 인자하시고 지혜로우시고 전능하시며 영원한 분이십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었습니다. 심판에 대한 두려움으로 떨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었습니다. 시 107:10,11은 말씀합니다.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죄 아래 있는 사람들은 겉으로는 평온한 것 같지만 그 내면은 어둡고 무기력하고 사는 게 무의미하고, 환란과 곤고가 가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내 대신 죄의 형벌과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대신 죄 값을 치루심으로 죄의 형벌이 없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자까지 내어주신 사랑으로 나와 다시 언약관계를 맺으셨습니다. 잠언 16:7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와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그를 기쁘시게 하면 원수라도 화목하게 하십니다.  화목한 사람과는 속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위로하고 사랑하며 도와주고 서로 배우고 좋은 것을 나누게 됩니다. 화목한 관계가 되면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게 되고 자유함을 누리고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2절을 보십시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이 은혜는 구원을 말합니다. 구원을 얻은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하나님의 현현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누립니다. 이 땅에서 구원의 은혜를 누릴 뿐만 아니라 장차 천국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입니다. 이는 신자의 궁극적인 희망으로서 가장 영광스러운 희망입니다(히 2:10, 벧전 5:4).

  사람들은 이 땅에서 여러 가지 희망을 붙들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 희망을 성취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희망은 성취된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참 행복과 즐거움을 주지 못합니다. 이 세상에서 그 소망을 성취하고 나면 허망함에 빠집니다. 또한 그 소망은 죽음과 함께 물거품과 같이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나 천국에 대한 희망은 참된 희망이요 영원한 희망입니다. 이 희망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산 희망입니다(벧전 1:3). 신자들에게는 이러한 영광스러운 희망이 있기 때문에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즐거워한다는 것은 최고로 기뻐하고 자랑하고 뽐내는 것입니다. 이 희망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둘째, 환난 중에서 즐거워합니다. 3,4절을 보십시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환난을 당합니다. 특히 신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까지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잘 나가는 사람들은 시기 질투로 인해서 환난을 당하고, 하나님을 믿고 의롭게 살고자 하는데 죄악된 사람들이 이를 싫어하니 미움을 받고 핍박을 받습니다.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수많은 인간 갈등을 겪습니다. 심각한 질병과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과 그로 인한 슬픔을 겪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환난 속에서도 즐거워할 수 있을까요? 내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미 의롭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환난을 당할 때 나의 죄로 인한 형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형벌은 이미 예수님이 내 대신 다 받으셨습니다. 그러니 내가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또 내가 환난을 해석할 수 있으면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환난의 의미를 알게 될 때 담담히 이를 받아들이고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가 환난을 능히 이기게 합니다(고후 1:5). 또한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환난, 기근, 위험 중에도 넉넉히 이길 수 있기에 즐거워합니다(8:37). 욥은 고난 가운데서도 자신을 알고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즐거워했습니다.

  우리는 환난을 통해서 인내하고 강해질 수 있습니다. 또 인내는 연단을 낳습니다. 연단은 품격으로 성숙한 인격을 뜻합니다. 우리는 환란을 통해서 나의 모난 부분들이 깎여 나갑니다. 불 같은 환난을 통해서 더러운 것들이 녹고 떨어져 나갑니다. 환난을 통해서 자기 발견을 깊이 하게 되고 성숙해집니다.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마음으로 동정하고 이해하게 됩니다. 자기만 알던 사람이 남의 고통에 관심을 갖고 사랑하게 됩니다. 환난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조각되어 성숙한 인격의 소유자가 됩니다. 연단은 궁극적으로 소망을 이루게 됩니다. 이 소망은 부활의 소망을 말합니다. 환란을 통해서 세상의 더럽고 썩고 쇠하는 일시적인 소망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의 참된 소망을 갖게 됩니다.

  셋째,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됩니다. 5절을 보십시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하나님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들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십니다. 성령은 각 사람의 심령 안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6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연약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해도 살 수 없는 무능한 상태를 뜻합니다. 그때 우리는 죄의 종이 되어서 죄가 이끄는 대로 살았습니다. 또한 경건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하지 않고 감사하지도 않았습니다. 본성을 따라서 각종 죄를 짓던 죄인들이요, 하나님의 원수였습니다. 이런 우리는 사랑스럽지 않았고 사랑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7,8절을 보십시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의인을 위해서 죽는 경우는 좀처럼 없습니다. 의인에게는 존경이 따르고 선인에게는 사랑이 따릅니다. 선인은 남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 흔연히 희생하는 자입니다.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를 위하여 생명까지 바치려고 합니다. 그런데 죄인을 위하여 죽는 자는 없습니다. 누가 미쳤다고 죄인을 위해서 죽겠습니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나같은 죄인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사람으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미친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더 이상 표현할 수 없는 최고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나 같은 사람을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로, 귀한 존재로 여기시는지 나 같은 사람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내가 고난을 당하고 고통을 겪을 때 고통 자체도 어려운 것이지만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은 고통을 겪을 때 나 자신이 무시 받는 존재요, 버려진 존재로 여겨진다는 것이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 때는 나도 나를 형편없는 존재로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런 나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하나님의 포기하지 않는 사랑, 끝까지 사랑하시는 그 사랑이 우리를 붙잡아 주고 환난을 이기게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이 말씀은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지만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또 죽기 전까지 많은 죄를 짓습니다. 그런 죄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나를 용서하시고 죄 없다고 선언하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으니 마지막 심판에서도 정죄를 받지 않고 무죄임을 선고받고 심판을 통과하게 됩니다.

  10,11절을 보십시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이 말씀은 구원의 확실성에 관한 내용입니다. 한 번 결정된 구원은 어떤 경우에도 취소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 하는 동안 연약해서 반복해서 넘어진다고 해도 구원은 취소되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언제나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찌 즐거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이렇게만 말하면 구원을 받고 개판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12-21절은 구원을 다른 각도에서 설명합니다. 우리가 죄와 사탄과 사망의 영역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과 하나님의 영역으로 옮겨졌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습니다.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습니다. 예를 들어 태평양과 같이 큰 바다가 오물로 더럽혀져 있습니다. 거기서 아무리 깨끗하게 살려고 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율법이 있기 전에도 죄가 세상에 있었고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죄의 결과 죽음에 이르렀고 죽음이 왕노릇하였습니다.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입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이제 바울은 아담과 두 번째 아담 되신 그리스도를 비교합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죄가 들어오고 모든 사람이 죽음의 지배를 받는 상태에 빠졌는데, 두 번째 아담 되신 예수님이 오신 다음에는 생명과 은혜가 그 전에 있던 죄와 사망보다 더 강력하게 나타납니다. 아담의 범죄와 그리스도의 선물 중에 어느 것이 더 능력이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은혜의 능력이 죄의 능력보다 더욱 강력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영역으로 옮겨진 사람들은 누가 왕 노릇 합니까? 예,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은 신자들이 왕 노릇하는 것입니다. ‘왕 노릇 한다’는 것은 ‘통치한다’, ‘지배한다’, ‘다스린다’는 의미입니다. 신자들이 죄를 다스리고, 사탄의 계교를 이기고,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합니다. 마음껏 선한 일을 하고, 의를 행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마음껏 발휘하고 자유롭게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들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고 거침없이 하나님을 위해서 위대한 일을 시도하고 성취하게 됩니다. 우리는 성령의 권능을 덧입고 서울에서부터 일본, 태국, 말레이시아, 우즈벡, 프랑스, 영국, 독일, 미국, 캐나다, 중국, 러시아,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땅 끝까지 복음을 들고 나아가서 구원하고 제자를 양성합니다. 또한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도록 힘을 씁니다.

  20,21절을 보십시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율법을 통해서 이것도 죄, 저것도 죄임을 깨닫게 되지만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게 됩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죄인인가 발견할수록 그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지 알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죄와 사망의 능력을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생명과 은혜의 능력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힘써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었고 은혜의 세계 속에 살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합니다. 심지어 환난 가운데서도 즐거워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됩니다. 우리가 매일 하나님과 교제함으로 화평을 누리고 하나님의 사람답게 거룩함과 사랑과 선한 열매를 풍성히 맺어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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