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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서 2025년 신년3강(벧전 5:1-14) 양 무리의 본이 되라(조게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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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137회 작성일 25-01-16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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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신년말씀 3강(조게바)

양 무리의 본이 되라

말씀 / 베드로전서 5:1-14
요절 / 베드로전서 5:3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말씀에 앞서 5장이 베드로 전서 마지막장이기 때문에 앞선 내용들을 한번 다루고 시작하고자 합니다. 베드로 전서 1장부터 4장까지는 소아시아와 흑해 연안으로 흩어진 나그네들, 일반 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고난 가운데 있는 교회에 주는 권면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1장에서 베드로는 먼저 소망의 문제를 말씀했습니다. 고난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소망을 품을 것을 권면하였죠. 2장에서는 성도들의 정체성을 강조하면서, 그들이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으로서 어떤 존재인지 기억하게 합니다. 3장과 4장에서는 고난에 담긴 영적 의미와 유익을 깊이 다룹니다. 고난은 단순히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유익을 발견해야 하는 과정임을 말씀하였습니다. 그리고 5장에 이르러, 베드로는 고난받는 하나님의 집을 돌보는 지도자들, 양무리를 돌보는 목자들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양 무리의 본이 되라’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들 중에서도 교회의 리더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는 목자들에게 이 고난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지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양 무리를 돌보는 일을 어떤 자세로 감당해야 하는지 또 나의 거룩한 사명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베드로는 내외적으로 고난을 겪고 있는 장로들에게 말씀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로 시작합니다. 장로는 일반 성도들과 비교해 나이가 많고 신앙 경력도 긴 사람입니다. 교회가 세워지고 성장하는데 가장 많이 헌신하고 수고하였습니다. 자연스럽게 교회의 지도자로서 권위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어른이고 존경의 대상입니다. 베드로는 이러한 장로들에게 권면하고 싶은 말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먼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세 가지로 소개합니다. 첫 번째로 ‘함께 장로된 자’라고 말합니다. NIV성경에 ‘fellow elder(동료 장로)’라는 말로 표현됩니다. 동등한 처지에 있는 장로라는 것입니다. 장로들과 똑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란 거죠. 나이도 있고 권위도 있는 장로들에게 권면하려면 그들보다 더 큰 권위를 드러내야 할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너희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사도 중에서도 사도라’ 라고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저 ‘함께 장로 된 자’라고 말합니다. 인격대 인격으로 권하고 있습니다.

두번째로 ‘그리스도 고난의 증인이요’라고 소개합니다. ‘그리스도 고난의 증인’이라는 말은 ‘그리스도 십자가 고난을 옆에서 지켜본 목격자’라는 말도 됩니다, 그러나 이보다는 ‘지금도 그리스도가 받은 고난을 삶으로 생생히 겪고 있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베드로가 4장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즐거워하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본인이 지금 즐겁게 고난의 삶을 살아내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동료 장로이지만 권면할 수 있는 것은, 지금도 누구보다 앞장서서 고난을 즐겁게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로 자기를 소개합니다. 곧 반드시 나타날, 나타나고야말 영광에 동참하는 자라는 말입니다. 앞선 1장에서 그가 얘기 한 것처럼 영원하고 참된 소망이 그의 삶을 ‘꽉’ 채우고 있습니다.

이런 그가 장로들에게 양 무리를 섬기는 데 있어서 세 가지를 권면합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첫째, 억지로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5장 2절 ‘자원함으로 하며’까지 다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교회에서 장로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1장 15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어린 양들은 평소에도 잘 넘어지고 쉽게 방황합니다. 이런 양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잘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가만 놔두면 절벽에 떨어지거나 늑대의 밥이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양은 목자의 소유물이 아니라 목자의 돌봄을 필요로 하는 대상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시고 돌보도록 교회의 목자들에게 위임하신 영혼들입니다.

처음부터 장로들이 하나님의 양 무리를 억지로 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받은 은혜가 넘쳐서 자원해서 했습니다. 부끄럽지만 저도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가 기억이 납니다. 나를 억누르던 중압감에서 벗어나서 너무 기뻐했습니다. 자발적으로 새벽기도와 예배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몇시간을 말씀을 가지고 목자님과 싸웠었는데, 어느덧 말씀공부가 막 기다려졌습니다. 컴퓨터를 부숴버리고 장막에 입소하였습니다. 열악한 환경에서 자다 일어나면 새벽에 얼어있는 주전자도 보고, 화장실을 들락날락하는 쥐들과 함께 동고동락도 하였습니다. 기쁨으로 장막형제들과 전도하고 예수님을 배우던 행복한 기억이 떠오릅니다. 본문에 나오는 장로들도 예수님을 처음 만나고 뜨거웠던 시절이 있었을 것입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게 좋고 행복해서 했습니다. 어느덧 교회 공동체는 성장하고 구성원들이 늘어났습니다. 어느 순간 교회에 조직이 구성됬습니다. 그 안에서 영향력이 생기면서 수면 아래에 있던 문제들이 위로 올라왔습니다. 시스템과 행정이 필요해 집니다. 효과와 효율성을 따집니다. 내가 준비되지 않아도 교회는 굴러갑니다. 장로로서 뒤에서 물러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앞장서야 할 책임이 있음에도 점점 부담이 커져가는 현실을 마주합니다. 고립되고 끔찍한 방법으로 처형되는 로마의 핍박까지 더해지면서 ‘어이구야’ 숨이 턱하니 막혔습니다.

본문에서 초대 교회가 오해받고 핍박을 받았던 대표적인 두 가지 요인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성찬식’이 잘못 알려져서 인육을 하고 사람의 피를 마시는 사이비 집단으로 취급받은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수많은 신들을 믿지 않고 하나의 신만 믿는, 그래서 황제 숭배도 인정하지 않는 미개한 자들의 집합소로 취급받은 것입니다. 반국가적이고 사회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비춰진 것이죠. 그들이 당한 치욕과 비방과 고난은 아마 이런 점에서 연유했던 것 같습니다. 고난이 닥치면 리더들이 앞장서서 총대를 메야 하기에 더 힘들었겠죠.

그러다 보니 그들은 당위성으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의무감으로 가정생활하고 교회 생활하면 어떻게 됩니까? 반드시 번아웃이 찾아옵니다. 우울증도 찾아옵니다. 열심히 일하는데 행복이 없습니다. 장로가 될수록 그게 심해집니다. 공동체 안에선 그런 모습들을 감출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홀로 있을 때 본인은 압니다. 행복하게 신앙생활하고 있는지 아닌지, 억지로 신앙생활하고 있는지 자원해서 하는지 말입니다.

베드로는 장로로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지금도 받고 있다고 말하면서 억지로 신앙생활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의무감만으로 어쩔 수 없이 양 무리를 치는 일을 ‘멈춰!’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하면 어떻습니까? 양들은 다 알아봅니다. 목자가 억지로 자기를 섬기는지 자원해서 하는지, 목자가 행복한지 아닌지, 나도 저렇게 살아야 할지 말지 다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조용히 사라지거나 결단하고 목자가 되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시련의 때에는 나도 힘들기 때문에 양들에게 관심 갖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내 문제 다 해결된 뒤에 양을 돕고자 하면 평생 기회가 오지 않습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내가 여유가 있든지 없든지, 항상 양들을 도울 때 역사가 일어납니다. 어딘가에 목자의 도움을 간절히 기다리는 양이 있습니다. 외로움에 떨고 있습니다. 장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죄 가운데 괴로워하며 무기력하게 살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들을 우리가 돕기 원하십니다.

우리 동교교회에도 양들을 자발적으로 섬겨주시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바쁜 직장 생활 가운데서도 양들의 소리를 깊이 들어주고 말씀으로 섬세히 섬겨주십니다. 때로는 음식으로, 상담으로, 그림그리기로 양들을 섬겨주십니다. 어떤 목자님은 사람을 대하고 섬기는데 어려움이 있으시지만 자신을 찢어넓혀 섬기고 계십니다. 형편이 녹록치 않지만 물질을 지원해 주시기도 하십니다. 힘들고 어려운 때에도 움츠려 들지 않고 양들을 도울 때, 나도 살고 양도 살 수 있습니다.

둘째로, 계산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베드로는 장로들에게 더러운 이득을 위해 양을 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냥 이득이라고 해도 되겠는데 더러운 이득이라고 말하실까요? 한 사람을 살리는 사역에 있어서 이득이 개입되는 것을 더럽다고 말함으로 어떤 이득도 계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득이 있어서 열심히 양을 친다면 그것은 자기 사업을 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유명 랩퍼가 ‘비지니스가 있어야 가족이 있는거야’ 라고 했는데 나에게 이득이 되어야 가족이 된단 그런 의미죠. 그러나 교회안에서 계산하고 비지니스를 위해 한다면, 비지니스가 있어야 교회공동체가 이루어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양을 도울 때 왜 계산하게 될까요? 억지로 억지로 섬기는데 보상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들로부터 섬김과 존경과 대접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양 무리가 섬겨주고 대접해주고 높여주는 것을 통해 끊임없이 내 존재감을 확인받고자 한다면 그것은 더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렇게 하지 말고 기꺼이 하라고 말합니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기업, 영광의 면류관이 하늘에 간직되어 있습니다. 이 큰 상급이 있는데 양들을 통해 또 다른 이득을 얻고자 한다면 이 얼마나 탐욕스러운 일입니까?

셋째로, 주장하지 말고 본이 되라 하십니다. 3절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맡은 자들이란 원어로 ‘할당된 나의 몫, 유산’이라는 의미입니다. ‘내가 책임지도록 내게 할당된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이들은 양 무리일 수도 있고 5절에서 나오는 젊은 자들, 곧 젊은 장로일 수도 있습니다. 맡은 자들은 교회의 후배들, 동역자들이라고 볼 수도 있고, 그중에는 역사를 계승하는 계승자의 입장인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왜 주장하는 자세를 보이게 될까요? 온갖 박해와 비방 속에서 치욕을 극복하고 교회를 지켜왔는데 다음 세대를 보니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이 없어 보입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조언을 합니다. 그러다 조언이 잔소리가 되고 간섭이 되고 주장이 됩니다.

본문에서 주장한다는 말은 그들의 주인 노릇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어느 틈엔가 맡은 자들 위에서 주인 행세를 하는 것입니다.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 목자도 실은 예수님 한 분이십니다. 장로들이 교회를 살리고 견고하게 하고자 했던 열심은 좋습니다. 그런데 그 열심이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주장하는 것은 겉으로는 ‘맡은 자들’에 대한 신뢰가 없어서 그런 것 같지만, 실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라도 나서지 않으면 교회가 망할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극심한 핍박에서도 교회를 세우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지금 베드로가 있는 로마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가 가지 않고 흩어진 자들 이 ‘디아스포라’들을 통해 세워진 로마교회가 1세기 안디옥과 함께 가장 큰 교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죠. 하나님이 시대마다 자기 백성을 부르시고, 세우셔서, 역사를 섬기도록 하십니다. 지금까지 장로들을 쓰신 것처럼 앞으로 젊은 장로들을, 또 다음 세대를 쓰실 것을 믿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시대마다 상황이 다르고 접근 방식도 변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내가 하던 방식, 내가 효과를 봤던 방법대로 하라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한 하나님이시지만 그들을 섬긴 하나님의 방법은 어떠했습니까? 각 사람에 따라 다 달랐습니다.

베드로는 장로들에게 간절하고 안타까운 마음은 알겠지만, 주장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권면합니다. 전도하라고 윽박지르지 말고 조용히 네가 가서 전도하라는 것입니다. 기도 안 한다고 뭐라고 하지 말고 네가 가서 은밀히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4복음서 어디에서나 예수님은 주장하시기보다 주장하는 자들을 받아주셨습니다. 오히려 이런 그들을 보호해주셨습니다. 병자를 고쳐주실 때도 “네게 무엇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인격적으로 대하셨습니다. 체포되기 직전까지 잠만 자는 제자들을 윽박지르기보다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육신이 약하도다. 이제는 자고 쉬라’ 말씀하셨습니다. 가장 어려울 때 본인이 제자들의 방패가 되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본인이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이 아니라 ‘대신 죽는’ 그 삶이 예수라는 이름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존귀하게 만들었습니다.
또 예수님은 주님이시면서도 주장하기보다 본을 보이셨습니다.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일일이 씻어 주심으로서 섬김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나병환자의 환부에 손을 대시며 병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비난을 무릎 쓰고 안식일에 한 손 마른 자의 손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1절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예수님은 삶을 통해서 선한 목자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우고자 하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본이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나이와 경험과 열매로 주장하기 쉬운 장로들에게 베드로는 말합니다.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이 말씀이 주님이 하시는 말씀으로 믿어지기를 기도합니다.

5절을 다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젊은 자들아 이와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5절에서 젊은 자들에 대해 언급합니다. 여기서 젊은 자들은 나이 많은 장로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나이가 젊은 장로들을 말합니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라” ‘이와 같이’라는 말은 앞에서 말한 교훈이 너희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그들도 곧 나이 든 장로들이 될 것입니다. 그들도 후배들이 서운하고 못마땅한 생각이 들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해결책은 결국 본을 보이는 삶을 통해, 보여주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그들은 특히 나이든 장로들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한다는 것은 원어를 고려해볼 때. 그 뜻은 싫어도 따라준다는 의미입니다. 나이든 장로가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고 본이 안 된다고 생각되더라도 못 이기는 척 받아주고,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리더로 산다는 것이 장로들도 힘들고, 젊은 자들도 힘듭니다. 외부에서 오는 고난은 그러려니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젊은 장로와 나이든 장로 사이의 갈등과 대립은 얼마나 힘들고, 그것을 지켜보는 양 무리들은 또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힘들지만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겸손해야 함께 살 수 있습니다. 아무리 올바르고 앞선 생각을 지니고 있어도 교만하면 하나님은 그를 대적하십니다. 좀 부족하고 허점이 있더라도 겸손하면,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나이든 장로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겸손해야 하고, 젊은 장로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겸손해야 합니다. 이렇게 서로 겸손으로 살면 하나님이 그들을 높이십니다. 교회를 높이시고 견고히 세우십니다.

겸손과 순종함으로 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깊은 염려가 찾아오죠. 시련의 때에 더욱 그러합니다. 이게 맞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 망할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이런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고 말합니다. 이런 염려를 다 주께 맡기고 겸손으로 허리띠를 동여매야 합니다. 고난 앞에서 겸손이 무엇입니까? 주어진 고난의 의미를 알고 그 고난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감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친히 돌보십니다. 내가 염려하지 않아도 각각의 인생들을 훈련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그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염려하기보다 각 사람을 연단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믿음을 굳건하게 해야합니다.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이는 그들만 당하는 어려움이 아니거든요. 다른 지역에 있는 교회 형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을 부르신 하나님이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기에 앞서, 잠깐 당하는 이 고난을 통해 그들을 정금과 같이 온전하게 하십니다. 강건하게 하십니다.
베드로는 이 모든 것을 신실한 형제 실루아노를 통해 대필했다고 말합니다. 당시 바벨론과 같았던 로마땅에서 마가와 함께 문안한다고 전합니다. 수신자인 그들도 서로 사랑의 입맞춤으로 문안하도록 당부하며 서신을 마치고 있습니다.

저는 지난 2018년 결혼하면서 동교 센터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보통은 형제가 있는 교회로 자매가 가기 때문에 가까운 목자님들 빼고는 저의 결정을 잘 이해해 주시지 못했습니다. 역사에 한 사람, 한 가정이 중요한데 본인의 결혼을 위해 대릴 사위처럼 팔려가는듯 이야기 하시는 분도 있었습니다. 모든 소리들과 송구한 마음들, 모든 것을 뒤로하였습니다. 저는 당시 믿음을 새롭게 재정비해야 하는 상황이였고, 어디에 소속되어 있던지 한 영혼을 돕는 목자로 살 수 있다면 상관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동교로 왔습니다. 정말 마음을 다해 동역하고자 방향을 잡았습니다. 막 대학생이 되는 2세 형제 자매들이 많았습니다. 동교 2세들이 얼마나 훌륭하게 성장했는지 감탄하면서 학생팀에 소속되어 감사함으로 동역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귀한 정모세 형제를 섬기게 되었습니다. 일대일 말씀공부를 한지 2년정도 되었을 때 모세가 신천지에서 공부한지 6개월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언제 한번 말씀을 공부할 때 ‘설마 아니겠지?’ 물어보았을 때 ‘에이 제가 목자님께 배운게 있는게 어떻게 그러겠어요’ 대답하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면서 정말 많은 죄책감과 좌절을 맛보았습니다. 목자로서 죽은 것과 같이 되었습니다. 나의 심정 없음이, 나의 부족한 말씀공부와 섬김이, 관성적으로 하던 모든 것이 만든 결과로 여겨져 마음이 미어졌었습니다. 지난 풀타임 시절 팀목자로 섬기던 한 형제가 신천지에 다니고 있다는 것을 알게되면서 그를 도왔던 과거가 있었습니다. 일련의 사건은 굉장한 문제의식이 들게했습니다. 저를 영적으로 드러눕게 만들었습니다. 새롭게 나다니엘 형제와 말씀공부를 하게 되었을 때 다니엘을 정말 마음을 다해 돕고 싶은 마음과 동시에 두려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더 조심스럽게 더 세심하게 대해야 된다는 마음이 오히려 관계를 어색하고 불편하게 만드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숙한 다니엘 덕분에 저의 과거의 트라우마와 저의 억지로 억지로 하던 마음이 조금씩 걷어지고 건강해졌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저는 자기 사람만 챙기고 그 바운더리가 넘어가면 마음을 한치도 주지 않는 차가운 사람입니다. 끊임 없는 장래에 대한 염려와 현재의 고난 속에서 절로 움츠려집니다. 2025년 교회 역사에 있어서도 걱정이 앞섭니다. 홍대 동아리방 지키는 것 조차도 버거워 보입니다. 외롭고 우울하고 장래염려로 마음속으로 울고있는 캠퍼스 영혼들에게 제가 무슨 할말이 있겠습니까? 다만 목자의 삶을 기뻐하고 이 가운데 주시는 천국을 맛보며 즐거워하는 본이 되어야 함을 깊이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 땅에서 사람이 살 수 있는 가장 가치 있고 영광스러운 인생은 양무리들의 본이 되는 목자생활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지난 과거를 교훈 삼아 기쁨으로 한 사람을 돕는 귀한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어쩔 수 없이 하고, 억지로 하던 데에서 벗어나 목자의 삶을 기뻐하고 감사하며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누구나 한 번뿐인 인생을 살아갑니다. 힘들수록 주님이 맡기신 어린양들을 먹이는데 힘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마귀를 대적하고 근신하고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억지로 하지 말고, 이득을 위해 하지 말고 자원하여 기쁨으로 목자 생활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시들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을 받기에 합당한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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