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서 2025년 신년2강(벧전 4:1-19)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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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신년 말씀 2강
말씀 | 베드로전서 4:1-19
요절 | 베드로전서 4:12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즐거움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사도 베드로는 고난 받는 신자들에게 편지하면서 그들의 정체성에 대해서 일깨워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정체성에 합당한 삶의 방식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이 선을 위해서 고난을 받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이 받는 고난의 영적인 의미를 가르치면서 고난에 대한 적극적인 자세를 갖도록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이 고난 속에서도 즐거워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의 은혜를 맡은 청지기(1-11). 신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죽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리스도께서 육체의 고난을 받으신 것과 같은 마음으로 무장을 해야 합니다. 육신으로 고난을 받은 사람은 이미 죄와 인연을 끊은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육신으로 살아갈 남은 때를 인간의 욕정대로 살지 말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 사람들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지나간 때로 충분합니다. 우리가 세상 친구들과 함께 극한 방탕에 달음질 하지 않는 것을 그들이 이상히 여겨 비방합니다. 왜 술을 마시지 않느냐? 왜 우리와 함께 죄를 즐기지 않느냐고 핀잔을 주고 핍박을 합니다. 설이나 추석에 차례를 지내지 않는다고 상놈이라는 욕을 먹기도 합니다. 함께 죄를 즐기면서 친구가 되었는데 예수님을 믿고 경건한 삶을 살게 되자 따돌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로 예비하신 이에게 사실대로 직고할 것입니다.
6절은 난해한 구절입니다.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 ‘죽은 자들’은 복음을 영접하고 죽은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성경에는 지옥에서 회개할 수 있다고 말씀하는 구절이 하나도 없습니다. 본문에서 죽은 사람들은 복음 때문에 이 땅에서 고난을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의 육체가 사람들에게 심판을 받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기준으로 신자들을 심판했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도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아 거의 죽을 뻔 하였습니다(행14:19). 실제로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을 받아서 순교한 성도들이 많습니다. 20세기에는 19세기까지 순교한 사람들보다 더 많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조선말기와 6.25 전쟁을 거치면서 엄청난 순교자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영은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살아났습니다. 여기서 볼 때 땅에서 사람들의 판단이 전부가 아니라 죽음 이후에 하나님의 심판이 더 무섭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영접해야 하는 이유는 최후의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요구하는 기준대로만 살면 안 되고, 마지막 심판 때 적용되는 하나님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세상의 정욕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이 땅에서 고난 받고 죽었다고 해서 헛되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 땅에서 손해만 보고 살았다고 생각해도 안 됩니다. 그들이야말로 정말 잘 산 것입니다. 하늘에서 상급이 클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심판을 충실하게 준비했고, 그들의 영은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은 이 땅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먼저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예수님은 자신이 도둑같이 예기치 않은 날에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다는 말은 언제나 절박성과 시급성을 동반합니다. 그래서 정신 차리고 근신해야 합니다. ‘근신’은 ‘잘 균형 잡힌’ 혹은 ‘절제된’ 상태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미쳐가는 것 같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말세는 무엇에 취하거나 미칠 수 있는 시대입니다. 절제가 안 되니 극단으로 가는 것입니다. 정치적인 견해가 유튜브의 알고리즘에 의해서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보게 되고 다른 견해는 들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은 다 원수로 여깁니다.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절제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신자들이 가장 건강하고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있을 때는 기도할 때입니다. 아마도 이 말은 베드로 자신의 체험으로부터 나왔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이 때 베드로를 비롯한 세 제자에게도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감정적이 되어 칼을 휘두르기도 하고(막14:47),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며 쓰디쓴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기를 힘쓰는 가운데 시대를 올바로 분별하고 고난의 시기를 통과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습니다(눅22:43). 우리가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지혜와 힘을 덧입을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서로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8-10절을 보십시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말세는 고난이 많이 때문에 사랑이 식어지고 자기중심적이고 쾌락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공동체 안에 미움과 갈등이 커지고 모이기는 더욱 힘들어 집니다. 어려운 때일수록 신자들은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할 때 허다한 죄를 덮을 수 있습니다.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잠 10:12). 죄를 덮어준다고 해서 죄를 쉬쉬하거나 모르는 체 넘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폭로하거나 비난하는 대신 감당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일일이 지적하신다면 이 땅은 지옥으로 변하고 우리는 살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에 대해서 오래 참으시고 감당해 주신 것처럼 우리도 형제의 죄에 대해서 그런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심판 때 각 사람이 행한대로 보응하십니다(롬2:6). 신자라고 해서 이 땅에서 죄를 안 짓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 공동체 안에도 ‘허다한 죄’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서로 뜨겁게 사랑하는 것이 마지막 심판을 준비하는 최선의 길입니다.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으로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가정교회였습니다. 그들은 순회전도자들을 가정에 영접하고 식사와 숙소를 제공했습니다. 또 신자들의 모임도 가정에서 주로 모였습니다. 불신자들도 신자들의 가정에서 함께 식사하고 말씀을 나누는 가운데 전도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조게바, 한나목자님과 같이 가정을 오픈해서 섬길 수 있고, 교회에서, 까페에서 사랑의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 사랑을 전할 수 있는 많은 통로가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주십니다. 여러 환난이 있지만 그 사랑으로 우리는 넉넉히 이기게 됩니다. 우리가 이렇게 사랑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11절을 보십시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우리의 사랑과 섬김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은사대로 섬겨서 요회 모임과 교회 공동체를 건강하게 하고 풍성하게 할 수 있습니다. 각자가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로 섬기는 것이 사랑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을까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작은 예수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신자들의 조건 없는 사랑과 섬기는 모습, 말씀을 전하고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애쓰는 삶을 보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됩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12-19). 12,13절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는 고난이 비정상적인 것도,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일도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고난은 신자들을 성숙하게 하는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직장에서 처음에는 많은 지적질을 당하고 잔소리를 듣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잘 받아들일 때 능숙한 프로가 됩니다. 이런 훈련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훈련의 시간이 더 길어집니다. 신자들은 세상에서 겪는 시련을 통해서 불로 연단해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한 정금같은 믿음이 됩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썩고, 더러워지고, 시들어버리는 세상의 영광에 대한 욕심을 녹이고 순수한 믿음만 남겨서 그들을 금보다 더 가치 있는 인생이 되게 하십니다.
여러분은 어떤 고난을 받고 있습니까? 직장에서 동료들로 인한 어려움, 자녀로 인한 고난, 경제적인 어려움, 사역에 따른 어려움, 가족 안에서 관계의 어려움, 자신의 변화가 잘 되지 않는 것으로 인한 고난 등이 있습니다. 고난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지도자들만 겪는 고난이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고전 4:9-13).”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이런 고난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왜 고난을 즐거워해야 합니까?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하십니다. 신자들이 겪는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고난을 많이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를 위해 참혹하게 고난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그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예수님은 사울에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행 9:4). ‘참여한다’는 것은 몫을 공유한다는 의미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빌립보서 3장 10절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베드로는 그리스도가 나무에 달려 우리 죄를 담당하심으로 우리가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셨다고 말하였습니다. 신자들이 겪는 고난은 그리스도의 은혜에 실제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우리는 어떤 유익을 얻습니까?
14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받는 사람 위에 있습니다. 고난을 당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아주 강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로 치욕을 받으면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저도 예수님을 믿기 시작할 때에 고향에 가니 친척들이 상놈이라고 무시하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는구나 라고 생각하니 자부심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고난 받는 신자들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고 고난 받는 신자들을 장차 영광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고난의 때가 사실은 은혜의 때입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을 풍성히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에 복음을 배척하고 눈치를 주는 사람들로 인해서 치욕적인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대부분 복음을 전하기 어려운 이유가 두려움 때문입니다. 어쩌다가 복음을 전하고자 어렵게 말을 꺼냈는데 싸늘한 반응을 접하게 되면 마음에 상처를 입기 쉽습니다. 이와 반대로 요즈음 홍대 거리에서 마이크를 잡고 복음을 전하는 분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이들이 전하는 복음이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는 둘째 치고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습니다. 만일 우리에게 먼저 심판이 진행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해야 합니다.
우리가 죄를 지음으로 고난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신자들이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에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겠습니까? 말씀을 많이 배우고 또 도덕적인 우월의식 때문에 과도하게 다른 사람의 일에 개입하다가 욕을 먹을 수 있습니다. 선무당이 사람을 잡는다고 했습니다. 쬐끔 아는 지식을 가지고 남을 돕겠다고 깝쭉대다가 욕을 먹기 십상입니다. 자기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자기 앞가림을 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의 일에 개입한다면 주체파악을 해야 합니다. 겸손하게 자기를 돌아보고 가르치기를 힘써야 합니다.
한편 모든 것이 풍족하고 평안할 때가 고난 속에 있는 것보다 영적으로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다윗과 솔로몬은 승리한 후에 모든 것이 평화로운 때에 죄를 지었습니다. 우리는 섰다고 생각할 때에 넘어질까 조심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이루고 완성했을 때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그때 넘어지기 쉽습니다. 신자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끊임없이 세상 사람들의 요구에 맞춰서 혹은 그들의 압력에 타협하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그렇게 살면 고난도 없습니다. 고난과 훈련이 없는 삶은 사생자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듭난 자녀들을 사랑으로 훈련하십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신자들을 훈련하셔서 연약함과 세상 유혹으로부터 강하게 하십니다. 사람들이 요구하는 기준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기준을 따라 살도록 연단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으면 이는 하나님 나라에서 상급을 받을 일입니다. 신자의 고난은 하나님의 뜻(will)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려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고난의 때 걱정하고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맡겨야 합니다. 2장 23절에 보면, 예수님은 부당하게 욕과 고난을 당하셨지만 오직 공의롭게 심판하시는 분에게 자신을 맡기셨습니다(눅23:46). 우리는 고난을 받으면서도 계속 선을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준행하며 가르치는 일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이 있습니다. 죄와 타협하지 않고 의롭게 사는 것입니다. 근신하고 기도하는 생활, 뜨겁게 서로 사랑하는 생활, 고난을 받으면서도 즐거워하는 생활을 하게 되면 사람들은 우리의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물을 것입니다. 이때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신자들의 비범한 생활이 불신자들에게 호기심을 일으키고 복음을 전할 기회를 가져다줍니다. 고난 때문에 선을 중단한다면, 상급과 복음 전파의 기회를 둘 다 놓쳐버릴 것입니다. 정약용 선생은 귀양살이를 하면서 500권의 책을 썼고, 베토벤은 음악가로서 귀가 먹었지만 운명 교향곡을 썼습니다. 고난을 딛고 환희로 나아간 것입니다.
베드로는 고난 받는 신자들에게 고난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의미를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 정상적인 일입니다.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라 복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 받는 자들을 위로할 뿐 아니라 고난을 즐거워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고난 속에서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며 담대하게 한 해를 출발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베드로전서 4:1-19
요절 | 베드로전서 4:12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즐거움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사도 베드로는 고난 받는 신자들에게 편지하면서 그들의 정체성에 대해서 일깨워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정체성에 합당한 삶의 방식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이 선을 위해서 고난을 받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이 받는 고난의 영적인 의미를 가르치면서 고난에 대한 적극적인 자세를 갖도록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이 고난 속에서도 즐거워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의 은혜를 맡은 청지기(1-11). 신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죽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리스도께서 육체의 고난을 받으신 것과 같은 마음으로 무장을 해야 합니다. 육신으로 고난을 받은 사람은 이미 죄와 인연을 끊은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육신으로 살아갈 남은 때를 인간의 욕정대로 살지 말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 사람들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지나간 때로 충분합니다. 우리가 세상 친구들과 함께 극한 방탕에 달음질 하지 않는 것을 그들이 이상히 여겨 비방합니다. 왜 술을 마시지 않느냐? 왜 우리와 함께 죄를 즐기지 않느냐고 핀잔을 주고 핍박을 합니다. 설이나 추석에 차례를 지내지 않는다고 상놈이라는 욕을 먹기도 합니다. 함께 죄를 즐기면서 친구가 되었는데 예수님을 믿고 경건한 삶을 살게 되자 따돌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로 예비하신 이에게 사실대로 직고할 것입니다.
6절은 난해한 구절입니다.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 ‘죽은 자들’은 복음을 영접하고 죽은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성경에는 지옥에서 회개할 수 있다고 말씀하는 구절이 하나도 없습니다. 본문에서 죽은 사람들은 복음 때문에 이 땅에서 고난을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의 육체가 사람들에게 심판을 받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기준으로 신자들을 심판했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도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아 거의 죽을 뻔 하였습니다(행14:19). 실제로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을 받아서 순교한 성도들이 많습니다. 20세기에는 19세기까지 순교한 사람들보다 더 많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조선말기와 6.25 전쟁을 거치면서 엄청난 순교자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영은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살아났습니다. 여기서 볼 때 땅에서 사람들의 판단이 전부가 아니라 죽음 이후에 하나님의 심판이 더 무섭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영접해야 하는 이유는 최후의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요구하는 기준대로만 살면 안 되고, 마지막 심판 때 적용되는 하나님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세상의 정욕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이 땅에서 고난 받고 죽었다고 해서 헛되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 땅에서 손해만 보고 살았다고 생각해도 안 됩니다. 그들이야말로 정말 잘 산 것입니다. 하늘에서 상급이 클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심판을 충실하게 준비했고, 그들의 영은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은 이 땅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먼저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예수님은 자신이 도둑같이 예기치 않은 날에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다는 말은 언제나 절박성과 시급성을 동반합니다. 그래서 정신 차리고 근신해야 합니다. ‘근신’은 ‘잘 균형 잡힌’ 혹은 ‘절제된’ 상태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미쳐가는 것 같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말세는 무엇에 취하거나 미칠 수 있는 시대입니다. 절제가 안 되니 극단으로 가는 것입니다. 정치적인 견해가 유튜브의 알고리즘에 의해서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보게 되고 다른 견해는 들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은 다 원수로 여깁니다.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절제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신자들이 가장 건강하고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있을 때는 기도할 때입니다. 아마도 이 말은 베드로 자신의 체험으로부터 나왔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이 때 베드로를 비롯한 세 제자에게도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감정적이 되어 칼을 휘두르기도 하고(막14:47),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며 쓰디쓴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기를 힘쓰는 가운데 시대를 올바로 분별하고 고난의 시기를 통과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습니다(눅22:43). 우리가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지혜와 힘을 덧입을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서로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8-10절을 보십시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말세는 고난이 많이 때문에 사랑이 식어지고 자기중심적이고 쾌락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공동체 안에 미움과 갈등이 커지고 모이기는 더욱 힘들어 집니다. 어려운 때일수록 신자들은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할 때 허다한 죄를 덮을 수 있습니다.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잠 10:12). 죄를 덮어준다고 해서 죄를 쉬쉬하거나 모르는 체 넘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폭로하거나 비난하는 대신 감당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일일이 지적하신다면 이 땅은 지옥으로 변하고 우리는 살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에 대해서 오래 참으시고 감당해 주신 것처럼 우리도 형제의 죄에 대해서 그런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심판 때 각 사람이 행한대로 보응하십니다(롬2:6). 신자라고 해서 이 땅에서 죄를 안 짓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 공동체 안에도 ‘허다한 죄’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서로 뜨겁게 사랑하는 것이 마지막 심판을 준비하는 최선의 길입니다.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으로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가정교회였습니다. 그들은 순회전도자들을 가정에 영접하고 식사와 숙소를 제공했습니다. 또 신자들의 모임도 가정에서 주로 모였습니다. 불신자들도 신자들의 가정에서 함께 식사하고 말씀을 나누는 가운데 전도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조게바, 한나목자님과 같이 가정을 오픈해서 섬길 수 있고, 교회에서, 까페에서 사랑의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 사랑을 전할 수 있는 많은 통로가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주십니다. 여러 환난이 있지만 그 사랑으로 우리는 넉넉히 이기게 됩니다. 우리가 이렇게 사랑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11절을 보십시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우리의 사랑과 섬김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은사대로 섬겨서 요회 모임과 교회 공동체를 건강하게 하고 풍성하게 할 수 있습니다. 각자가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로 섬기는 것이 사랑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을까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작은 예수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신자들의 조건 없는 사랑과 섬기는 모습, 말씀을 전하고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애쓰는 삶을 보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됩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12-19). 12,13절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는 고난이 비정상적인 것도,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일도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고난은 신자들을 성숙하게 하는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직장에서 처음에는 많은 지적질을 당하고 잔소리를 듣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잘 받아들일 때 능숙한 프로가 됩니다. 이런 훈련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훈련의 시간이 더 길어집니다. 신자들은 세상에서 겪는 시련을 통해서 불로 연단해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한 정금같은 믿음이 됩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썩고, 더러워지고, 시들어버리는 세상의 영광에 대한 욕심을 녹이고 순수한 믿음만 남겨서 그들을 금보다 더 가치 있는 인생이 되게 하십니다.
여러분은 어떤 고난을 받고 있습니까? 직장에서 동료들로 인한 어려움, 자녀로 인한 고난, 경제적인 어려움, 사역에 따른 어려움, 가족 안에서 관계의 어려움, 자신의 변화가 잘 되지 않는 것으로 인한 고난 등이 있습니다. 고난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지도자들만 겪는 고난이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고전 4:9-13).”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이런 고난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왜 고난을 즐거워해야 합니까?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하십니다. 신자들이 겪는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고난을 많이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를 위해 참혹하게 고난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그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예수님은 사울에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행 9:4). ‘참여한다’는 것은 몫을 공유한다는 의미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빌립보서 3장 10절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베드로는 그리스도가 나무에 달려 우리 죄를 담당하심으로 우리가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셨다고 말하였습니다. 신자들이 겪는 고난은 그리스도의 은혜에 실제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우리는 어떤 유익을 얻습니까?
14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받는 사람 위에 있습니다. 고난을 당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아주 강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로 치욕을 받으면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저도 예수님을 믿기 시작할 때에 고향에 가니 친척들이 상놈이라고 무시하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는구나 라고 생각하니 자부심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고난 받는 신자들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고 고난 받는 신자들을 장차 영광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고난의 때가 사실은 은혜의 때입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을 풍성히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에 복음을 배척하고 눈치를 주는 사람들로 인해서 치욕적인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대부분 복음을 전하기 어려운 이유가 두려움 때문입니다. 어쩌다가 복음을 전하고자 어렵게 말을 꺼냈는데 싸늘한 반응을 접하게 되면 마음에 상처를 입기 쉽습니다. 이와 반대로 요즈음 홍대 거리에서 마이크를 잡고 복음을 전하는 분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이들이 전하는 복음이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는 둘째 치고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습니다. 만일 우리에게 먼저 심판이 진행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해야 합니다.
우리가 죄를 지음으로 고난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신자들이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에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겠습니까? 말씀을 많이 배우고 또 도덕적인 우월의식 때문에 과도하게 다른 사람의 일에 개입하다가 욕을 먹을 수 있습니다. 선무당이 사람을 잡는다고 했습니다. 쬐끔 아는 지식을 가지고 남을 돕겠다고 깝쭉대다가 욕을 먹기 십상입니다. 자기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자기 앞가림을 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의 일에 개입한다면 주체파악을 해야 합니다. 겸손하게 자기를 돌아보고 가르치기를 힘써야 합니다.
한편 모든 것이 풍족하고 평안할 때가 고난 속에 있는 것보다 영적으로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다윗과 솔로몬은 승리한 후에 모든 것이 평화로운 때에 죄를 지었습니다. 우리는 섰다고 생각할 때에 넘어질까 조심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이루고 완성했을 때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그때 넘어지기 쉽습니다. 신자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끊임없이 세상 사람들의 요구에 맞춰서 혹은 그들의 압력에 타협하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그렇게 살면 고난도 없습니다. 고난과 훈련이 없는 삶은 사생자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듭난 자녀들을 사랑으로 훈련하십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신자들을 훈련하셔서 연약함과 세상 유혹으로부터 강하게 하십니다. 사람들이 요구하는 기준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기준을 따라 살도록 연단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으면 이는 하나님 나라에서 상급을 받을 일입니다. 신자의 고난은 하나님의 뜻(will)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려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고난의 때 걱정하고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맡겨야 합니다. 2장 23절에 보면, 예수님은 부당하게 욕과 고난을 당하셨지만 오직 공의롭게 심판하시는 분에게 자신을 맡기셨습니다(눅23:46). 우리는 고난을 받으면서도 계속 선을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준행하며 가르치는 일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이 있습니다. 죄와 타협하지 않고 의롭게 사는 것입니다. 근신하고 기도하는 생활, 뜨겁게 서로 사랑하는 생활, 고난을 받으면서도 즐거워하는 생활을 하게 되면 사람들은 우리의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물을 것입니다. 이때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신자들의 비범한 생활이 불신자들에게 호기심을 일으키고 복음을 전할 기회를 가져다줍니다. 고난 때문에 선을 중단한다면, 상급과 복음 전파의 기회를 둘 다 놓쳐버릴 것입니다. 정약용 선생은 귀양살이를 하면서 500권의 책을 썼고, 베토벤은 음악가로서 귀가 먹었지만 운명 교향곡을 썼습니다. 고난을 딛고 환희로 나아간 것입니다.
베드로는 고난 받는 신자들에게 고난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의미를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 정상적인 일입니다.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라 복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 받는 자들을 위로할 뿐 아니라 고난을 즐거워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고난 속에서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며 담대하게 한 해를 출발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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