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24년 성탄2강(1:1-25)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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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성탄 2강
말씀 | 마태복음 1:1-25
요절 | 마태복음 1:23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본문은 세리였던 마태가 전하는 성탄 메시지입니다. 마태는 세리로서 공인된 죄인이요 민족의 배반자요 로마의 개라는 욕을 들으면서 살았습니다. 이런 자신을 제자로 택하시고 함께 하시며 긍휼을 베풀어 주신 예수님의 사랑이 그가 기록한 마태복음에 절절이 흐릅니다. 이는 마치 하나님께서 흑암이 깊고 혼돈스러운 가운데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듯이 예수님을 통한 새 창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자신이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났고, 교회라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인 공동체를 만드셨습니다. 마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에 우리가 어떤 은혜를 누리게 되는가를 전하고 있습니다.
첫째, 교회는 병원과 같습니다(1-17). 마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소개합니다(1).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요, 다윗은 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땅과 자손을 복으로 약속하셨습니다. 다윗에게는 그의 왕위가 영원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란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정통성을 입증해줍니다. 예수님의 계보에 특별히 다말,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정말 멋진 여인들입니다. 역사를 기록할 때는 이것을 읽는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교훈을 주려는 것입니다. 또한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인생이 달라집니다. 한 사람이 수능을 보다가 책상에서 연필이 떨어졌습니다. “에이, 재수없게. 연필이 떨어졌네.” 옆에 있던 친구가 말합니다. “뭘 그것 가지고 그래. 연필이 땅에 딱 붙었네.” 다말은 가나안 족속이고, 라합은 여리고 민족 출신이고, 룻은 모압 족속 출신입니다. 모두 이방 민족 출신이죠. 특히 다말은 시아버지와 관계를 맺은 막장 드라마의 주인공이고, 라합 역시 창녀입니다. 창녀가 그리스도의 계보에 등장한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랍습니까? 윤리적인 기준으로 따지면 불륜의 대명사들입니다. 모압 사람은 암몬 사람과 함께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모세가 못을 박아놓은 민족입니다(신23:3). 그러나 마태는 다르게 보고 있습니다. 마태는 사라와 리브가처럼 성경에서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여자들이 아닌 부도덕한 경력을 지녔거나 율법이 제외시킨 이방인 여자들을 의도적으로 언급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가 어떤 곳이며, 하나님이 구속역사에 쓰시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만의 구주가 아니라 이방인들의 구주시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에는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들이, 민족을 초월하여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이 참여합니다. 특히 도덕적인 윤리를 초월하여 사람들을 담게 됩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잇고자 하는 다말은 유다가 회개하도록 도왔습니다. 계보를 잇고자 하는 다말의 믿음은 대단합니다. 천상하지에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은 라합, 라합은 멸망 가운데 자신의 기족과 친지들을 구원했습니다. 끝까지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간 룻의 믿음과 충성심, 이들의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과 믿음은 탁월하였습니다. 마태 자신이 세리라는 직업 때문에 이방인 취급을 받고 도덕적인 비난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는 부르심에 즉각 순종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6)” 다윗은 솔로몬을 밧세바에게서 낳았다고 하면 적당히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야의 아내’라고 하니 의도적인 폭로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윗이 불륜과 거짓과 살인의 죄를 지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얼핏 보면 그리스도의 계보를 불륜으로 먹칠하는 기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저자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요? 그리스도의 계보가 결코 의인들의 계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형편없는 죄인들의 계보라는 것이죠. 이러한 사실은 그들을 구속역사에 쓰신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와 긍휼을 돋보이게 합니다. 다윗이 죄인이지만 그의 회개는 그를 훨씬 더 높은 단계의 성장에 이르게 했습니다. 실패나 실수를 성장의 동력으로 삼으려면 반드시 완전한 회개를 해야 합니다. 유다가 요셉을 애굽에 팔아버린 주동자이지만 그는 다말의 말을 듣고 회개했고, 아버지 야곱의 마음을 알고 책임성 있게 행동했습니다. 그는 애굽 총리 요셉 앞에 베냐민을 돌려보내고 자신이 종이 되겠다며 책임있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는 결국 장자가 되었습니다. 창세기 38장에 유다의 회개가 아름답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다윗 왕가와 메시아 계보의 첫 조상이 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하면서 첫 메시지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있느니라.”였습니다.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 9:12,13).” 예수님은 니고데모와 같은 교만한 죄인, 사마리아 여인과 같은 목마른 죄인, 중풍병자와 같은 무기력한 죄인, 삭개오와 같은 이기적인 죄인, 바울과 같은 종교적인 죄인, 나 같은 허무한 죄인 등 모든 종류의 죄인들을 불러 말씀을 주시고 죄를 깨닫게 하시고 회개할 때에 죄사함을 주십니다. 병든 사람이 병만 치료되면 건강하게 되듯이 죄인도 그 죄만 사함을 받으면 의로운 삶,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교회는 온갖 종류의 죄인들이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자신을 알고,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는 공동체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교회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고 죄악된 삶이 변화되고 죄성이 누그러지도록 돕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가도록 격려하고 지지해줍니다. 교회는 거룩해야 하지만 동시에 사랑이 충만해서 구원역사가 활발히 일어나야 합니다. 교회는 가정과 같습니다. 우리가 집에서 누가 아프다고 내쫓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병든 자녀를 치료하고 끝까지 감당하고 회복시키고자 합니다. 자녀의 잘못된 행동을 깨우쳐서 수정하고자 사랑하고 훈계하고 끝까지 기다려 줍니다. 이와 같이 교회는 죄인들이 예수님을 만나 죄사함을 받고 일생토록 거룩한 백성으로 성장하는 곳입니다.
다윗 왕국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솔로몬에서 정점을 찍고 그 이후 내리막길을 걷습니다. B.C722년에 북이스라엘이 먼저 앗수르에게 망하고 주민 혼합정책을 씁니다. B.C586년에는 남유다가 바벨론에게 망하고 포로로 잡혀가면서 다윗 왕국은 무너집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사로잡혀 간 후에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었습니까? 다윗 왕국은 무너졌지만 다윗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은 계속됩니다. 계약과 언약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계약은 이익을 공동으로 나누는 것이지만 언약은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언약, 새 언약을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하신 것처럼 사로잡혀 간 자들을 70년만에 돌아오게 하시고, 스룹바벨의 지도 아래 성전을 재건하게 하십니다. 이후 약 400년 동안 선지자를 통한 예언이 없는 중간기를 맞이합니다. 그러다가 마리아를 통해 그리스도가 나심으로 인간의 타락 직후에 예언하셨고(창3:15),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을 통해 보내겠다고 하신 그리스도 약속이 마침내 성취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구속 역사를 친히 이끌어 가십니다. 인간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 열정으로 구원 역사를 이루십니다. 이스라엘이 망했지만 하나님의 언약이 취소되거나 최소한 그 기간 동안 정지된 것이 아니라 계속되었습니다. 인간의 역사란 한마디로 하나님이 약속된 그리스도를 준비하시고 보내시는 과정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인간의 역사는 죄로 타락하고 부패하여 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인내하시며 긍휼과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계보가 끊어지지 않고 계속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보내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언약이 한 번도 취소된 적이 없으며,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 속에 언제나 개입하시고 함께 하셨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죄악된 인류의 역사의 열매라는 사실은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치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핀 것이나 원전으로 오염되었던 땅에서 다시 추수하게 된 것보다 더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악된 인간을 향한 자신의 인자하심을 보여 주고 계시며 앞으로도 완전하게 이루실 것입니다. 오점과 실패와 허물로 가득한 인간의 역사 속에 변함없이 개입하시고 함께 하시며 구원 역사를 이루어가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이후 하나님은 인간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구원 역사를 이끌어가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신자들 중에는 자신이 죄를 짓고 나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실 것이라 생각하고 신앙을 버리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착각입니다. 하나님은 한번 택하신 자를 결코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같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족보 속에서, 그리고 교회사 속에서 하나님이 언약의 하나님이시오 그는 결코 변치 않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끝까지 감당해주시는 분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을만한 분이십니다.
둘째,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18-25). 예수님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신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예수님은 모든 인간과 다른 방식으로 육신을 입으셨습니다.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한 상태였기 때문에 법적으로 결혼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두 사람이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되셨습니다. 따라서 ‘여자의 후손’이면서(창3:15) 법적으로 ‘다윗의 자손’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이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이 죄가 없는 분이기 때문에 인간의 대속제물이 되실 수 있습니다. 그가 죄가 없기에 하나님께서는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게 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였습니다.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요셉은 당연히 그녀가 간음의 죄를 범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일은 마리아와 정혼하여 이미 법적인 부부 관계에 있던 요셉에게는 굉장한 충격과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이 일로 그는 깊은 고뇌에 빠졌습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어서 모세의 율법을 잘 지켜왔습니다. 이 상황에서 요셉이 할 수 있는 행동은 무엇일까요? 먼저 마리아를 데려오는 것은 부정한 일이므로 요셉은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하였습니다(20). 이 일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어 자신의 파혼의 정당성을 확보하게 되면 율법대로 마리아에게 자신이 먼저 돌을 던져야 할 수도 있습니다(신17:7, 요8:7, 신22:22). 간음한 여자와 동거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고발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요셉은 마리아를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끊으려고 하였습니다. 아마도 율법에 따라 두 사람의 증인을 동원해서 비공개적인 이혼절차를 밟음으로써 마리아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를 열어주려고 하였던 것 같습니다.
이때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나타나 말씀해 주셨습니다. 20,21절을 보십시오.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요셉은 신중한 사람이었습니다. 주의 사자는 요셉에게 꿈을 통해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아마도 마리아는 요셉에게 얘기했겠지만 요셉은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사자의 말은 요셉에게 성령의 잉태에 대한 확신을 주었습니다. 주의 사자는 마리아가 낳을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고 짓도록 알려주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지시대명사 ‘αὐτός,아우토스’로, ‘그 분이 바로’ 이런 강조의 의미를 갖는다.
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기 때문입니다. 주의 사자의 말은 요셉에게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깊이 다가왔을 것입니다. ‘자기 백성’은 누구입니까?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은 구약에서 그들을 종종 ‘신부’로 말씀하셨습니다(사62:4,5;렘2:2). 그런데 그들이 간음을 행하고 언약을 깨뜨렸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고 심판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약을 깨뜨리지도, 그들을 버리지도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변함없이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비록 간음했어도 마리아의 생명을 살리고 새로운 삶의 기회를 주려고 한 것처럼, 죄를 범한 자기 백성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이 하신 일이 바로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주의 사자의 말을 들었을 때 요셉에게 그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이 심령 깊이 다가오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은 어떻게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까요? 요셉은 사람이 죄로부터 구원 받기 위해 흠 없는 대속제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기록하면서 집중적으로 ‘구원’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27:40,42,43,49). 구원은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외부로부터 보내온 구조의 손길을 말합니다. 사람의 선행이나 의로운 행동이나 율법준수로는 구원에 이를 자격이 되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으로서 자격미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을 위한 대속제물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나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려고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자기와 언약 맺은 백성을 살리기 위해 자기 목숨을 희생하신 것이죠.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 주의 사자가 전한 ‘죄로부터의 구원’이란 말에는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저자 마태는 이 모든 일들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이 주신 ‘임마누엘’의 약속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임마누엘 약속은 남유다의 아하스 왕이 북이스라엘과 아람의 침략으로 두려움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주신 약속입니다(사7:13,14). 하나님의 말씀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몸소 주신 약속입니다. 아브라함부터 시작된 계보를 볼 때, 하나님은 죄를 범한 백성들과 언제나 함께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죄로부터 구원하러 마리아에게서 출생하심으로 임마누엘 약속이 완벽하게 성취되었습니다. 구약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신 함께 하심을 예수님은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여기서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3인칭 복수로서(they shall call Immanuel) 예수님을 통해 사람들이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경험하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게 될 것을 말합니다. 제자들은 거스르는 물 위를 걸어오시고 바람을 그치게 하신 예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마14:24-33).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제자들 가운데 베드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마16:16).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과정을 지켜 본 로마의 백부장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였습니다(마27:54).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우리는 구원을 얻게 되고, 하나님은 우리가 구원을 얻을 때까지 함께 하실 것이며, 이 구원이 완성될 때까지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저자 마태는 본래 친구가 없었습니다. 아무도 그와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언약 공동체에서 일찌감치 제외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먼저 그에게 오셔서 “나를 따르라”고 하시며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마9:9). 사람들에게 많은 비난을 받으면서도 예수님은 변함없이 그와 함께 먹고 마시며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이 공생애 동안 자기와 함께 하심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 얼마나 감격적이고 감당할 수 없는 은혜인지 깊이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 사람은 본질적인 존재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또한 열매 맺지 못하고 심판의 도끼에 찍혀 불에 던져질 운명에서(마3:10) 열매 맺는 인생이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두세 명이 모여 기도할 때 그곳에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마18:19). 그들이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고 하셨습니다(마18:18-20).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위임 받아 행사합니다. 모든 민족에게 나아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 죄사함과 구원을 베푸는 일에 쓰임 받습니다. 세상 끝 날까지 예수님이 항상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마28:18-20). 이를 통해 우리는 이 세상을 변혁시키는 거룩한 백성이요 제사장 나라로 쓰임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수 있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나의 왕이요 구주로 영접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통해 언제나 자기 백성과 함께 하셨습니다. 우리가 지금 위중한 상황에 있습니다. 대통령의 탄핵과 경제의 어려움, 안보의 위험 등 위태위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 어려움에서 벗어날 때까지, 우리의 존재가 변화되어 하나님 나라에 이를 때까지, 다시 말해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성탄 연합 예배를 준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또 축복해 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부족한 것이 많이 있지만 일곱 개 센터가 합력하여 연합 예배를 준비하게 하시고 축복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를 통해서 많은 양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구원을 받도록 축복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새 해 방향을 잡고 한 해를 잘 마무리 하도록 도와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마태복음 1:1-25
요절 | 마태복음 1:23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본문은 세리였던 마태가 전하는 성탄 메시지입니다. 마태는 세리로서 공인된 죄인이요 민족의 배반자요 로마의 개라는 욕을 들으면서 살았습니다. 이런 자신을 제자로 택하시고 함께 하시며 긍휼을 베풀어 주신 예수님의 사랑이 그가 기록한 마태복음에 절절이 흐릅니다. 이는 마치 하나님께서 흑암이 깊고 혼돈스러운 가운데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듯이 예수님을 통한 새 창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자신이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났고, 교회라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인 공동체를 만드셨습니다. 마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에 우리가 어떤 은혜를 누리게 되는가를 전하고 있습니다.
첫째, 교회는 병원과 같습니다(1-17). 마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소개합니다(1).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요, 다윗은 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땅과 자손을 복으로 약속하셨습니다. 다윗에게는 그의 왕위가 영원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란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정통성을 입증해줍니다. 예수님의 계보에 특별히 다말,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정말 멋진 여인들입니다. 역사를 기록할 때는 이것을 읽는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교훈을 주려는 것입니다. 또한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인생이 달라집니다. 한 사람이 수능을 보다가 책상에서 연필이 떨어졌습니다. “에이, 재수없게. 연필이 떨어졌네.” 옆에 있던 친구가 말합니다. “뭘 그것 가지고 그래. 연필이 땅에 딱 붙었네.” 다말은 가나안 족속이고, 라합은 여리고 민족 출신이고, 룻은 모압 족속 출신입니다. 모두 이방 민족 출신이죠. 특히 다말은 시아버지와 관계를 맺은 막장 드라마의 주인공이고, 라합 역시 창녀입니다. 창녀가 그리스도의 계보에 등장한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랍습니까? 윤리적인 기준으로 따지면 불륜의 대명사들입니다. 모압 사람은 암몬 사람과 함께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모세가 못을 박아놓은 민족입니다(신23:3). 그러나 마태는 다르게 보고 있습니다. 마태는 사라와 리브가처럼 성경에서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여자들이 아닌 부도덕한 경력을 지녔거나 율법이 제외시킨 이방인 여자들을 의도적으로 언급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가 어떤 곳이며, 하나님이 구속역사에 쓰시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만의 구주가 아니라 이방인들의 구주시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에는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들이, 민족을 초월하여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이 참여합니다. 특히 도덕적인 윤리를 초월하여 사람들을 담게 됩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잇고자 하는 다말은 유다가 회개하도록 도왔습니다. 계보를 잇고자 하는 다말의 믿음은 대단합니다. 천상하지에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은 라합, 라합은 멸망 가운데 자신의 기족과 친지들을 구원했습니다. 끝까지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간 룻의 믿음과 충성심, 이들의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과 믿음은 탁월하였습니다. 마태 자신이 세리라는 직업 때문에 이방인 취급을 받고 도덕적인 비난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는 부르심에 즉각 순종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6)” 다윗은 솔로몬을 밧세바에게서 낳았다고 하면 적당히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야의 아내’라고 하니 의도적인 폭로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윗이 불륜과 거짓과 살인의 죄를 지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얼핏 보면 그리스도의 계보를 불륜으로 먹칠하는 기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저자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요? 그리스도의 계보가 결코 의인들의 계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형편없는 죄인들의 계보라는 것이죠. 이러한 사실은 그들을 구속역사에 쓰신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와 긍휼을 돋보이게 합니다. 다윗이 죄인이지만 그의 회개는 그를 훨씬 더 높은 단계의 성장에 이르게 했습니다. 실패나 실수를 성장의 동력으로 삼으려면 반드시 완전한 회개를 해야 합니다. 유다가 요셉을 애굽에 팔아버린 주동자이지만 그는 다말의 말을 듣고 회개했고, 아버지 야곱의 마음을 알고 책임성 있게 행동했습니다. 그는 애굽 총리 요셉 앞에 베냐민을 돌려보내고 자신이 종이 되겠다며 책임있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는 결국 장자가 되었습니다. 창세기 38장에 유다의 회개가 아름답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다윗 왕가와 메시아 계보의 첫 조상이 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하면서 첫 메시지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있느니라.”였습니다.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 9:12,13).” 예수님은 니고데모와 같은 교만한 죄인, 사마리아 여인과 같은 목마른 죄인, 중풍병자와 같은 무기력한 죄인, 삭개오와 같은 이기적인 죄인, 바울과 같은 종교적인 죄인, 나 같은 허무한 죄인 등 모든 종류의 죄인들을 불러 말씀을 주시고 죄를 깨닫게 하시고 회개할 때에 죄사함을 주십니다. 병든 사람이 병만 치료되면 건강하게 되듯이 죄인도 그 죄만 사함을 받으면 의로운 삶,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교회는 온갖 종류의 죄인들이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자신을 알고,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는 공동체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교회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고 죄악된 삶이 변화되고 죄성이 누그러지도록 돕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가도록 격려하고 지지해줍니다. 교회는 거룩해야 하지만 동시에 사랑이 충만해서 구원역사가 활발히 일어나야 합니다. 교회는 가정과 같습니다. 우리가 집에서 누가 아프다고 내쫓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병든 자녀를 치료하고 끝까지 감당하고 회복시키고자 합니다. 자녀의 잘못된 행동을 깨우쳐서 수정하고자 사랑하고 훈계하고 끝까지 기다려 줍니다. 이와 같이 교회는 죄인들이 예수님을 만나 죄사함을 받고 일생토록 거룩한 백성으로 성장하는 곳입니다.
다윗 왕국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솔로몬에서 정점을 찍고 그 이후 내리막길을 걷습니다. B.C722년에 북이스라엘이 먼저 앗수르에게 망하고 주민 혼합정책을 씁니다. B.C586년에는 남유다가 바벨론에게 망하고 포로로 잡혀가면서 다윗 왕국은 무너집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사로잡혀 간 후에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었습니까? 다윗 왕국은 무너졌지만 다윗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은 계속됩니다. 계약과 언약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계약은 이익을 공동으로 나누는 것이지만 언약은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언약, 새 언약을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하신 것처럼 사로잡혀 간 자들을 70년만에 돌아오게 하시고, 스룹바벨의 지도 아래 성전을 재건하게 하십니다. 이후 약 400년 동안 선지자를 통한 예언이 없는 중간기를 맞이합니다. 그러다가 마리아를 통해 그리스도가 나심으로 인간의 타락 직후에 예언하셨고(창3:15),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을 통해 보내겠다고 하신 그리스도 약속이 마침내 성취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구속 역사를 친히 이끌어 가십니다. 인간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 열정으로 구원 역사를 이루십니다. 이스라엘이 망했지만 하나님의 언약이 취소되거나 최소한 그 기간 동안 정지된 것이 아니라 계속되었습니다. 인간의 역사란 한마디로 하나님이 약속된 그리스도를 준비하시고 보내시는 과정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인간의 역사는 죄로 타락하고 부패하여 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인내하시며 긍휼과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계보가 끊어지지 않고 계속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보내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언약이 한 번도 취소된 적이 없으며,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 속에 언제나 개입하시고 함께 하셨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죄악된 인류의 역사의 열매라는 사실은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치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핀 것이나 원전으로 오염되었던 땅에서 다시 추수하게 된 것보다 더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악된 인간을 향한 자신의 인자하심을 보여 주고 계시며 앞으로도 완전하게 이루실 것입니다. 오점과 실패와 허물로 가득한 인간의 역사 속에 변함없이 개입하시고 함께 하시며 구원 역사를 이루어가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이후 하나님은 인간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구원 역사를 이끌어가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신자들 중에는 자신이 죄를 짓고 나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실 것이라 생각하고 신앙을 버리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착각입니다. 하나님은 한번 택하신 자를 결코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같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족보 속에서, 그리고 교회사 속에서 하나님이 언약의 하나님이시오 그는 결코 변치 않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끝까지 감당해주시는 분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을만한 분이십니다.
둘째,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18-25). 예수님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신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예수님은 모든 인간과 다른 방식으로 육신을 입으셨습니다.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한 상태였기 때문에 법적으로 결혼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두 사람이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되셨습니다. 따라서 ‘여자의 후손’이면서(창3:15) 법적으로 ‘다윗의 자손’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이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이 죄가 없는 분이기 때문에 인간의 대속제물이 되실 수 있습니다. 그가 죄가 없기에 하나님께서는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게 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였습니다.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요셉은 당연히 그녀가 간음의 죄를 범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일은 마리아와 정혼하여 이미 법적인 부부 관계에 있던 요셉에게는 굉장한 충격과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이 일로 그는 깊은 고뇌에 빠졌습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어서 모세의 율법을 잘 지켜왔습니다. 이 상황에서 요셉이 할 수 있는 행동은 무엇일까요? 먼저 마리아를 데려오는 것은 부정한 일이므로 요셉은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하였습니다(20). 이 일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어 자신의 파혼의 정당성을 확보하게 되면 율법대로 마리아에게 자신이 먼저 돌을 던져야 할 수도 있습니다(신17:7, 요8:7, 신22:22). 간음한 여자와 동거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고발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요셉은 마리아를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끊으려고 하였습니다. 아마도 율법에 따라 두 사람의 증인을 동원해서 비공개적인 이혼절차를 밟음으로써 마리아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를 열어주려고 하였던 것 같습니다.
이때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나타나 말씀해 주셨습니다. 20,21절을 보십시오.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요셉은 신중한 사람이었습니다. 주의 사자는 요셉에게 꿈을 통해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아마도 마리아는 요셉에게 얘기했겠지만 요셉은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사자의 말은 요셉에게 성령의 잉태에 대한 확신을 주었습니다. 주의 사자는 마리아가 낳을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고 짓도록 알려주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지시대명사 ‘αὐτός,아우토스’로, ‘그 분이 바로’ 이런 강조의 의미를 갖는다.
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기 때문입니다. 주의 사자의 말은 요셉에게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깊이 다가왔을 것입니다. ‘자기 백성’은 누구입니까?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은 구약에서 그들을 종종 ‘신부’로 말씀하셨습니다(사62:4,5;렘2:2). 그런데 그들이 간음을 행하고 언약을 깨뜨렸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고 심판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약을 깨뜨리지도, 그들을 버리지도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변함없이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비록 간음했어도 마리아의 생명을 살리고 새로운 삶의 기회를 주려고 한 것처럼, 죄를 범한 자기 백성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이 하신 일이 바로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주의 사자의 말을 들었을 때 요셉에게 그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이 심령 깊이 다가오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은 어떻게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까요? 요셉은 사람이 죄로부터 구원 받기 위해 흠 없는 대속제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기록하면서 집중적으로 ‘구원’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27:40,42,43,49). 구원은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외부로부터 보내온 구조의 손길을 말합니다. 사람의 선행이나 의로운 행동이나 율법준수로는 구원에 이를 자격이 되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으로서 자격미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을 위한 대속제물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나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려고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자기와 언약 맺은 백성을 살리기 위해 자기 목숨을 희생하신 것이죠.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 주의 사자가 전한 ‘죄로부터의 구원’이란 말에는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저자 마태는 이 모든 일들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이 주신 ‘임마누엘’의 약속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임마누엘 약속은 남유다의 아하스 왕이 북이스라엘과 아람의 침략으로 두려움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주신 약속입니다(사7:13,14). 하나님의 말씀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몸소 주신 약속입니다. 아브라함부터 시작된 계보를 볼 때, 하나님은 죄를 범한 백성들과 언제나 함께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죄로부터 구원하러 마리아에게서 출생하심으로 임마누엘 약속이 완벽하게 성취되었습니다. 구약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신 함께 하심을 예수님은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여기서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3인칭 복수로서(they shall call Immanuel) 예수님을 통해 사람들이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경험하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게 될 것을 말합니다. 제자들은 거스르는 물 위를 걸어오시고 바람을 그치게 하신 예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마14:24-33).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제자들 가운데 베드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마16:16).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과정을 지켜 본 로마의 백부장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였습니다(마27:54).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우리는 구원을 얻게 되고, 하나님은 우리가 구원을 얻을 때까지 함께 하실 것이며, 이 구원이 완성될 때까지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저자 마태는 본래 친구가 없었습니다. 아무도 그와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언약 공동체에서 일찌감치 제외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먼저 그에게 오셔서 “나를 따르라”고 하시며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마9:9). 사람들에게 많은 비난을 받으면서도 예수님은 변함없이 그와 함께 먹고 마시며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이 공생애 동안 자기와 함께 하심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 얼마나 감격적이고 감당할 수 없는 은혜인지 깊이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 사람은 본질적인 존재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또한 열매 맺지 못하고 심판의 도끼에 찍혀 불에 던져질 운명에서(마3:10) 열매 맺는 인생이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두세 명이 모여 기도할 때 그곳에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마18:19). 그들이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고 하셨습니다(마18:18-20).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위임 받아 행사합니다. 모든 민족에게 나아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 죄사함과 구원을 베푸는 일에 쓰임 받습니다. 세상 끝 날까지 예수님이 항상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마28:18-20). 이를 통해 우리는 이 세상을 변혁시키는 거룩한 백성이요 제사장 나라로 쓰임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수 있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나의 왕이요 구주로 영접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통해 언제나 자기 백성과 함께 하셨습니다. 우리가 지금 위중한 상황에 있습니다. 대통령의 탄핵과 경제의 어려움, 안보의 위험 등 위태위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 어려움에서 벗어날 때까지, 우리의 존재가 변화되어 하나님 나라에 이를 때까지, 다시 말해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성탄 연합 예배를 준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또 축복해 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부족한 것이 많이 있지만 일곱 개 센터가 합력하여 연합 예배를 준비하게 하시고 축복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를 통해서 많은 양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구원을 받도록 축복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새 해 방향을 잡고 한 해를 잘 마무리 하도록 도와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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