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20mt12(8:1-17)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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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마태복음 제 12 강
말씀 | 마태복음 8:1-17
요절 | 마태복음 8:17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우리는 지난 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 중요함을 배웠습니다. 성경을 눈으로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머리로 이해하고 행동으로 실천할 때 제대로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삶으로 읽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는 병든 자들을 치료해 주시는 예수님이 나옵니다. 나병환자, 이방인 중풍병자 하인, 열병을 앓는 베드로의 장모 등입니다. 이들은 사회적으로 무시받던 자들이요 연약한 자들입니다. 우리에게도 다 연약한 점이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연약함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를 찾아오셔서 그 연약함을 감당해 주시고 치료해 주십니다. 이 예수님의 긍휼과 은혜가 우리 각자에게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1-4).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전하신 산상수훈을 듣고 감동을 받은 사람들과 소문을 듣고 산에 오를 때보다 더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때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간구하였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이 나병환자는 온 몸에 병이 퍼져있어서 보기에도 흉측했습니다. 나병은 강한 전염성 때문에 유대 사회에서는 가장 위험한 질병으로 여겼습니다. 나병은 덥고 습한 지역에서 발생하는 무서운 피부병입니다. 나병은 피부뿐만 아니라 신경과 연골조직도 부식시켜서 심하면 손가락과 발가락이 떨어져나가고 코가 문드러집니다. 눈썹도 빠지고 눈도 멀게 됩니다. 나병은 신경세포를 파괴시켜서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못한 채 몸이 썩어 들어갑니다. 얼음을 만져도 찬 줄을 모르고 불을 만져도 뜨거움을 느끼지 못합니다.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고통을 느껴야 위험을 깨닫고 재난을 피할 수 있습니다.
나병은 이런 육체적 무감각보다 더욱 견디기 힘든 것은 정신적 고통입니다. 나병은 상처 난 부위를 통해서 전염되기 때문에 사람들과 격리되었습니다. 가족들과 생이별을 하고 어두운 동굴 같은 곳에서 홀로 생활해야 합니다. 율법은 나병을 부정한 병으로 규정했습니다(레13,14장). ‘부정한 병’이란 죄를 짓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생긴 병이란 뜻입니다. 구약성경에는 죄를 짓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나병환자가 된 사람들이 나옵니다. 나병에 걸리면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추방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갈 수 없고 하나님과 사회에서 버림을 받습니다. 그래서 나병에 걸린 사람은 옷을 찢고 머리를 풀어헤치고 길을 갈 때에는 입술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 소리쳐서 사람들이 자기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았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나병환자와 마주치는 것조차도 부정하게 여겨서 다가오지 못하게 돌을 던졌습니다. 무엇보다 나병은 불치의 병이라서 나을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낙심한 가운데 무감각하고, 무기력하게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나병환자는 예수님이 각종 병자들을 고쳐주신다는 소문을 듣고 희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자신도 예수님을 통해서 변화 받을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고 나와서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간구했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자신을 받아 치료해주실지, 아니면 이대로 사는 것이 좋은지 의문의 시간을 많이 보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여 원하시면”이라고 여쭈었습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는 생각이 있는데 예수님께서 믿음으로 나아온 자신을 원하시는지 묻고 있습니다. 또 온 몸에 생긴 나병으로 인하여 절망하였지만 예수님이 원하시면 깨끗이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보통 사람이 불치병에 걸리면 이를 부인합니다. 왜 나입니까? 자신이 병에 걸린 것을 인정하는데 시간이 걸립니다. 이후에 하나님을 원망하고 힘들어 하다가 병을 받아들입니다. 병을 고치기 위해서 다각도로 노력을 합니다. 그러다가 지치고 낙심하고 절망하게 됩니다. 사탄은 우리 마음에 끊임없이 낙심을 심습니다. 포기하도록 유혹합니다. 우리는 이런 사탄과 싸워야 합니다. 그는 이런 과정을 거쳤지만 예수님을 믿고 소망을 가졌습니다. 인생문제를 해결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해결 받고 싶은 간절한 소원과 믿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낙심을 극복하고 예수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할 때 주님은 역사해 주십니다.
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예수님은 말씀만 하셔도 나병환자를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그의 몸을 만지셨습니다.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는 것은 율법으로 금지되었습니다. 부정한 자에게 손을 대면 부정하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부정하게 된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사람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몸에 손을 대셨을 때 버림받았다는 생각과 상처들이 눈 녹듯이 사라졌습니다. 자신이 한 인간으로 대접을 받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자신이 비록 온 몸에 나병이 걸렸지만 존중받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그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나음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 반신반의하는 나병환자에게 깨끗함을 받고 건강한 인생을 살기를 진정으로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말씀하시자, 그 즉시 나병이 깨끗해졌습니다. 그의 몸이 어린아이의 피부와 같이 보드랍고 건강하게 변화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음과 영혼까지도 깨끗해졌습니다. 부정한 자에게 예수님이 손을 대시면 부정한 자가 정결하게 됩니다. 이는 예수님 안에 치유의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는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시니라.” 그는 자신의 변화된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이고 예수님을 선전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 은혜를 간직하며 살도록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만 제사장에게 가서 깨끗하게 된 몸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신분을 회복하고 이스라엘 공동체에 들어가도록 하셨습니다(레14장). 그의 뭉개진 자존감을 회복해 주시고 건강한 사회생활을 하도록 도우셨습니다.
나병은 죄와 비슷한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병이 신체를 문드러지게 하고 썩어서 냄새나게 하듯이 죄는 우리의 영혼을 문드러지게 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합니다. 죄를 지으면 지을수록 죄의식이 둔감해집니다. 죄는 사람에게서 아름다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추한 존재가 되게 합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의 저주를 받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죄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 죄를 담당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죄로 인해서 마음이 병들었다면,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용서해주십니다. 죄를 깨끗하게 한다는 것은 미움이 없어지고 사랑이 생기는 것이요, 이기적인 사람이 희생적인 사랑의 사람이 된다는 것이요, 교만한 사람이 겸손하게 되는 것이요, 세속적인 사람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겸손하고, 온유하고, 사랑이 자라고, 거룩하고, 진실하고, 의를 추구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십니다.
둘째, 백부장의 하인을 말씀만으로 고쳐주신 예수님(5-13).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였습니다.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백부장은 로마군인 백 명을 통솔하는 장교로서, 로마사회의 힘 있는 권력자였습니다. 당시 로마 군인들은 광포하기로 유명했습니다. 피지배민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압제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백부장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을 사랑했고 그들을 위해서 회당까지 지어주었습니다(눅7:5). 이런 그가 예수님께 나아와 자기 하인의 병을 고쳐달라고 간구했습니다. 당시 종들은 주인들이 마음대로 사고 팔 수 있는 재산의 일부였습니다. 종이 병들어서 쓸모가 없으면 버리든지, 돈을 주어서 알아서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통례였습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은 달랐습니다. 그는 종을 자식처럼 사랑했습니다. 종을 한 인격체로 대우했습니다. 하인은 이런 주인의 사랑에 감동해서 온 마음을 바쳐서 충성하다가 중풍 병에 걸렸을지 모릅니다. 중풍 병은 몸이 마비되어 간호하는 사람들을 지치게 합니다. 이제 하인은 쓸모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백부장은 병든 하인을 내버리지 않고 어찌하든지 그의 병을 고쳐주고자 했습니다. 백부장은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하인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간구를 들으시고 즉시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인간애가 있는 귀한 사람인 것을 아셨습니다. 백부장의 간구가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인 것도 놀라운 일인데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8,9절을 보십시오.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은 이방인으로서 하나님의 백성들과 교제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오, 자신은 비천한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은 백부장이지만 예수님은 질병과 귀신도 쫓아내실 수 있는 영적 세계의 권세자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집에 들어오는 것을 감당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집에 오시지 않고 말씀만 하셔도 종이 나을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를 절대적으로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만 하셔도 시공간을 뛰어넘어 하인의 병이 나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과 경외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외심이 있을 때, 말씀을 듣고 순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믿음이 생기고,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됩니다.
그는 군대 생활을 통해서 말의 권세를 배웠습니다. 군대는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사회입니다. 군사령관이 명령을 내리면 휘하장병들은 생명이 위태롭더라도 적군을 향해서 진격을 해야 합니다. 이 백부장은 군대에서 생활하면서 상관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했습니다. 백부장의 부하들도 그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영적인 총사령관으로 알아보았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이 귀신에게 명하여 쫓아낸 일들을 알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병에게 명령을 내리시면 하인의 병이 나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어떻게 칭찬하셨습니까? 1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보고 놀라셨습니다. 이스라엘 중에 아무에게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만한 믿음’이란 말씀만 하시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믿음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말씀의 권세자임을 알았습니다. 그는 이방인으로서 신앙생활도 제대로 하지 않았고 말씀도 체계적으로 배우지 못했지만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고 그가 어떤 분이신지 정확히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큰 믿음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구전으로 내려오다가 기록된 말씀으로 우리에게 전해졌습니다. 성령께서 말씀과 함께 역사하사 지금도 믿는 자들 안에 기적으로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배우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 말씀을 삶으로 읽어내야 합니다. 이때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며 말과 행동이 무게가 있고 형통한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고 선한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예수님은 로마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이방인 구원에 대한 비전을 보셨습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나님 나라는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되가 먼저 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동서로부터 많은 이방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교만한 유대인들은 불신으로 인해 바깥 어두운데서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혈통이나 인간적 조건으로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을 축복하셨습니다.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때 인생의 방황을 끝내고 사명과 삶의 목적을 발견하게됩니다. 무기력하고 자신감이 없던 사람이 비전의 사람, 열정의 사람이 됩니다. 자기 앞가림도 못하던 사람이 네 식구를 먹여 살리고 양을 치는 목자로 살게 됩니다.
셋째,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신 예수님(14-17).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누운 것을 보셨습니다. 베드로는 결혼해서 아내가 있었고 어부였지만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모든 것을 버리고 그를 따랐습니다. 베드로의 아내와 장모는 이런 베드로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베드로가 생업에 종사하지 않아 가정형편이 어려웠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장모가 열병에 걸리자 근심에 사로잡혔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베드로의 사정을 아시고 심방을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인생문제, 가정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도와주십니다.
15절을 보십시오.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예수님은 열병에 걸린 베드로의 장모의 손을 만지시며 그 병을 치료해주셨습니다. 베드로 장모는 병이 낫자 즉시 일어나서 음식을 만들어서 예수님과 제자들을 대접했습니다. 이는 감사의 표현입니다. 이후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잘 따르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했을 것입니다.
16,17절을 보십시오.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해가 저물고 안식일이 끝나자 사람들은 귀신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병든 자들을 치료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가 있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이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쳐주신 사건을 이사야 53장 4절 말씀을 성취하신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또한 귀신이 쫓겨나가고 문둥병이 깨끗하게 되는 사건은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우리의 연약함과 질병을 가져가셨습니다. 이로 인해 강건한 사명인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이사야 53장 5절은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은 강한 것 같지만 연약합니다. 연약해서 쉽게 질병에 걸립니다. 연약해서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폭발하기도 하고 우울증에 빠지기도 합니다. 연약하기 때문에 작심삼일입니다. 연약하기 때문에 죄의 유혹을 받아서 잘 넘어집니다. 연약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도 없고 선을 행할 힘도 상실했습니다. 연약한 사람은 쉽게 낙심합니다. 어려움이 닥치면 용기를 잃고 무기력한 생활을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이런 내면의 연약함과 질병에서 벗어나서 건강한 인생을 살 수 있을까요? 먼저 자신이 죄 때문에 연약하고 병든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깊이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다는 것을 마음으로 믿고 입술로 고백해야 합니다. 나병환자처럼 온전케 될 우리 모습을 그리며 주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백부장처럼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과 권세를 믿고 겸손히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연약함과 질병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2:9절에서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으로 인해 주님의 사랑과 능력이 내게 머물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기의 힘을 믿고 살기보다 자기의 연약함으로 인해 주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이 나의 연약함을 짊어지고 가실 때 그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해 주시고 그의 능력으로 살게 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말씀 | 마태복음 8:1-17
요절 | 마태복음 8:17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우리는 지난 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 중요함을 배웠습니다. 성경을 눈으로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머리로 이해하고 행동으로 실천할 때 제대로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삶으로 읽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는 병든 자들을 치료해 주시는 예수님이 나옵니다. 나병환자, 이방인 중풍병자 하인, 열병을 앓는 베드로의 장모 등입니다. 이들은 사회적으로 무시받던 자들이요 연약한 자들입니다. 우리에게도 다 연약한 점이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연약함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를 찾아오셔서 그 연약함을 감당해 주시고 치료해 주십니다. 이 예수님의 긍휼과 은혜가 우리 각자에게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1-4).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전하신 산상수훈을 듣고 감동을 받은 사람들과 소문을 듣고 산에 오를 때보다 더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때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간구하였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이 나병환자는 온 몸에 병이 퍼져있어서 보기에도 흉측했습니다. 나병은 강한 전염성 때문에 유대 사회에서는 가장 위험한 질병으로 여겼습니다. 나병은 덥고 습한 지역에서 발생하는 무서운 피부병입니다. 나병은 피부뿐만 아니라 신경과 연골조직도 부식시켜서 심하면 손가락과 발가락이 떨어져나가고 코가 문드러집니다. 눈썹도 빠지고 눈도 멀게 됩니다. 나병은 신경세포를 파괴시켜서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못한 채 몸이 썩어 들어갑니다. 얼음을 만져도 찬 줄을 모르고 불을 만져도 뜨거움을 느끼지 못합니다.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고통을 느껴야 위험을 깨닫고 재난을 피할 수 있습니다.
나병은 이런 육체적 무감각보다 더욱 견디기 힘든 것은 정신적 고통입니다. 나병은 상처 난 부위를 통해서 전염되기 때문에 사람들과 격리되었습니다. 가족들과 생이별을 하고 어두운 동굴 같은 곳에서 홀로 생활해야 합니다. 율법은 나병을 부정한 병으로 규정했습니다(레13,14장). ‘부정한 병’이란 죄를 짓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생긴 병이란 뜻입니다. 구약성경에는 죄를 짓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나병환자가 된 사람들이 나옵니다. 나병에 걸리면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추방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갈 수 없고 하나님과 사회에서 버림을 받습니다. 그래서 나병에 걸린 사람은 옷을 찢고 머리를 풀어헤치고 길을 갈 때에는 입술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 소리쳐서 사람들이 자기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았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나병환자와 마주치는 것조차도 부정하게 여겨서 다가오지 못하게 돌을 던졌습니다. 무엇보다 나병은 불치의 병이라서 나을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낙심한 가운데 무감각하고, 무기력하게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나병환자는 예수님이 각종 병자들을 고쳐주신다는 소문을 듣고 희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자신도 예수님을 통해서 변화 받을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고 나와서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간구했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자신을 받아 치료해주실지, 아니면 이대로 사는 것이 좋은지 의문의 시간을 많이 보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여 원하시면”이라고 여쭈었습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는 생각이 있는데 예수님께서 믿음으로 나아온 자신을 원하시는지 묻고 있습니다. 또 온 몸에 생긴 나병으로 인하여 절망하였지만 예수님이 원하시면 깨끗이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보통 사람이 불치병에 걸리면 이를 부인합니다. 왜 나입니까? 자신이 병에 걸린 것을 인정하는데 시간이 걸립니다. 이후에 하나님을 원망하고 힘들어 하다가 병을 받아들입니다. 병을 고치기 위해서 다각도로 노력을 합니다. 그러다가 지치고 낙심하고 절망하게 됩니다. 사탄은 우리 마음에 끊임없이 낙심을 심습니다. 포기하도록 유혹합니다. 우리는 이런 사탄과 싸워야 합니다. 그는 이런 과정을 거쳤지만 예수님을 믿고 소망을 가졌습니다. 인생문제를 해결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해결 받고 싶은 간절한 소원과 믿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낙심을 극복하고 예수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할 때 주님은 역사해 주십니다.
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예수님은 말씀만 하셔도 나병환자를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그의 몸을 만지셨습니다.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는 것은 율법으로 금지되었습니다. 부정한 자에게 손을 대면 부정하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부정하게 된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사람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몸에 손을 대셨을 때 버림받았다는 생각과 상처들이 눈 녹듯이 사라졌습니다. 자신이 한 인간으로 대접을 받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자신이 비록 온 몸에 나병이 걸렸지만 존중받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그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나음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 반신반의하는 나병환자에게 깨끗함을 받고 건강한 인생을 살기를 진정으로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말씀하시자, 그 즉시 나병이 깨끗해졌습니다. 그의 몸이 어린아이의 피부와 같이 보드랍고 건강하게 변화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음과 영혼까지도 깨끗해졌습니다. 부정한 자에게 예수님이 손을 대시면 부정한 자가 정결하게 됩니다. 이는 예수님 안에 치유의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는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시니라.” 그는 자신의 변화된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이고 예수님을 선전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 은혜를 간직하며 살도록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만 제사장에게 가서 깨끗하게 된 몸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신분을 회복하고 이스라엘 공동체에 들어가도록 하셨습니다(레14장). 그의 뭉개진 자존감을 회복해 주시고 건강한 사회생활을 하도록 도우셨습니다.
나병은 죄와 비슷한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병이 신체를 문드러지게 하고 썩어서 냄새나게 하듯이 죄는 우리의 영혼을 문드러지게 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합니다. 죄를 지으면 지을수록 죄의식이 둔감해집니다. 죄는 사람에게서 아름다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추한 존재가 되게 합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의 저주를 받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죄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 죄를 담당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죄로 인해서 마음이 병들었다면,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용서해주십니다. 죄를 깨끗하게 한다는 것은 미움이 없어지고 사랑이 생기는 것이요, 이기적인 사람이 희생적인 사랑의 사람이 된다는 것이요, 교만한 사람이 겸손하게 되는 것이요, 세속적인 사람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겸손하고, 온유하고, 사랑이 자라고, 거룩하고, 진실하고, 의를 추구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십니다.
둘째, 백부장의 하인을 말씀만으로 고쳐주신 예수님(5-13).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였습니다.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백부장은 로마군인 백 명을 통솔하는 장교로서, 로마사회의 힘 있는 권력자였습니다. 당시 로마 군인들은 광포하기로 유명했습니다. 피지배민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압제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백부장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을 사랑했고 그들을 위해서 회당까지 지어주었습니다(눅7:5). 이런 그가 예수님께 나아와 자기 하인의 병을 고쳐달라고 간구했습니다. 당시 종들은 주인들이 마음대로 사고 팔 수 있는 재산의 일부였습니다. 종이 병들어서 쓸모가 없으면 버리든지, 돈을 주어서 알아서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통례였습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은 달랐습니다. 그는 종을 자식처럼 사랑했습니다. 종을 한 인격체로 대우했습니다. 하인은 이런 주인의 사랑에 감동해서 온 마음을 바쳐서 충성하다가 중풍 병에 걸렸을지 모릅니다. 중풍 병은 몸이 마비되어 간호하는 사람들을 지치게 합니다. 이제 하인은 쓸모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백부장은 병든 하인을 내버리지 않고 어찌하든지 그의 병을 고쳐주고자 했습니다. 백부장은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하인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간구를 들으시고 즉시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인간애가 있는 귀한 사람인 것을 아셨습니다. 백부장의 간구가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인 것도 놀라운 일인데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8,9절을 보십시오.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은 이방인으로서 하나님의 백성들과 교제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오, 자신은 비천한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은 백부장이지만 예수님은 질병과 귀신도 쫓아내실 수 있는 영적 세계의 권세자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집에 들어오는 것을 감당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집에 오시지 않고 말씀만 하셔도 종이 나을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를 절대적으로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만 하셔도 시공간을 뛰어넘어 하인의 병이 나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과 경외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외심이 있을 때, 말씀을 듣고 순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믿음이 생기고,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됩니다.
그는 군대 생활을 통해서 말의 권세를 배웠습니다. 군대는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사회입니다. 군사령관이 명령을 내리면 휘하장병들은 생명이 위태롭더라도 적군을 향해서 진격을 해야 합니다. 이 백부장은 군대에서 생활하면서 상관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했습니다. 백부장의 부하들도 그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영적인 총사령관으로 알아보았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이 귀신에게 명하여 쫓아낸 일들을 알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병에게 명령을 내리시면 하인의 병이 나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어떻게 칭찬하셨습니까? 1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보고 놀라셨습니다. 이스라엘 중에 아무에게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만한 믿음’이란 말씀만 하시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믿음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말씀의 권세자임을 알았습니다. 그는 이방인으로서 신앙생활도 제대로 하지 않았고 말씀도 체계적으로 배우지 못했지만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고 그가 어떤 분이신지 정확히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큰 믿음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구전으로 내려오다가 기록된 말씀으로 우리에게 전해졌습니다. 성령께서 말씀과 함께 역사하사 지금도 믿는 자들 안에 기적으로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배우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 말씀을 삶으로 읽어내야 합니다. 이때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며 말과 행동이 무게가 있고 형통한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고 선한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예수님은 로마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이방인 구원에 대한 비전을 보셨습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나님 나라는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되가 먼저 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동서로부터 많은 이방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교만한 유대인들은 불신으로 인해 바깥 어두운데서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혈통이나 인간적 조건으로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을 축복하셨습니다.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때 인생의 방황을 끝내고 사명과 삶의 목적을 발견하게됩니다. 무기력하고 자신감이 없던 사람이 비전의 사람, 열정의 사람이 됩니다. 자기 앞가림도 못하던 사람이 네 식구를 먹여 살리고 양을 치는 목자로 살게 됩니다.
셋째,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신 예수님(14-17).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누운 것을 보셨습니다. 베드로는 결혼해서 아내가 있었고 어부였지만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모든 것을 버리고 그를 따랐습니다. 베드로의 아내와 장모는 이런 베드로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베드로가 생업에 종사하지 않아 가정형편이 어려웠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장모가 열병에 걸리자 근심에 사로잡혔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베드로의 사정을 아시고 심방을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인생문제, 가정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도와주십니다.
15절을 보십시오.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예수님은 열병에 걸린 베드로의 장모의 손을 만지시며 그 병을 치료해주셨습니다. 베드로 장모는 병이 낫자 즉시 일어나서 음식을 만들어서 예수님과 제자들을 대접했습니다. 이는 감사의 표현입니다. 이후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잘 따르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했을 것입니다.
16,17절을 보십시오.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해가 저물고 안식일이 끝나자 사람들은 귀신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병든 자들을 치료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가 있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이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쳐주신 사건을 이사야 53장 4절 말씀을 성취하신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또한 귀신이 쫓겨나가고 문둥병이 깨끗하게 되는 사건은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우리의 연약함과 질병을 가져가셨습니다. 이로 인해 강건한 사명인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이사야 53장 5절은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은 강한 것 같지만 연약합니다. 연약해서 쉽게 질병에 걸립니다. 연약해서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폭발하기도 하고 우울증에 빠지기도 합니다. 연약하기 때문에 작심삼일입니다. 연약하기 때문에 죄의 유혹을 받아서 잘 넘어집니다. 연약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도 없고 선을 행할 힘도 상실했습니다. 연약한 사람은 쉽게 낙심합니다. 어려움이 닥치면 용기를 잃고 무기력한 생활을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이런 내면의 연약함과 질병에서 벗어나서 건강한 인생을 살 수 있을까요? 먼저 자신이 죄 때문에 연약하고 병든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깊이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다는 것을 마음으로 믿고 입술로 고백해야 합니다. 나병환자처럼 온전케 될 우리 모습을 그리며 주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백부장처럼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과 권세를 믿고 겸손히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연약함과 질병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2:9절에서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으로 인해 주님의 사랑과 능력이 내게 머물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기의 힘을 믿고 살기보다 자기의 연약함으로 인해 주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이 나의 연약함을 짊어지고 가실 때 그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해 주시고 그의 능력으로 살게 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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