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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020mt11m(7:13-29)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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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98회 작성일 20-06-14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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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마태복음 제 11 강
말씀 | 마태복음 7:13-29
요절 | 마태복음 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오늘로써 예수님께서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주신 천국헌장인 산상수훈의 말씀이 끝납니다. 오늘 말씀은 세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좁은 길과 넓은 길, 좋은 열매와 나쁜 열매, 그리고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입니다. 이 비유들을 통해 보배와 같은 산상수훈을 우리 삶에 적용하고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알려줍니다. 아무리 좋은 약도 먹고 소화해야 내게 보약이 되는 것처럼 이제까지 배운 말씀을 한 가지라도 실천해서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듣고 지혜로운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14-16). 13,14절을 보십시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우리 앞에 좁은 문과 넓은 문이 있다면 대개는 넓은 문으로 들어가서 넓은 길로 편하게 가는 것을 택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산상수훈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에는 자신의 뜻을 이루고, 욕심대로 살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이런 자기의 뜻과 욕구를 부인하고,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씨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좁은 길로 가는 삶은 교만한 자아, 이기적인 자아를 끊임없이 회개해야 갈 수 있습니다. 물질 사랑, 세상 사랑, 쾌락 사랑 등 죄악 된 본성을 매일 회개해야 갈 수 있는 삶입니다. 좁은 길로 가는 삶은 예수님 한 분을 믿음으로 사는 삶입니다. 사람을 의지하고, 돈을 의지하고, 자기를 의지하며 사는 삶이 아니라 목자 예수님을 의지하며 사는 삶입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찾는 자가 적다고 했습니다. 소수만이 좁은 문으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왜 이렇게 자기부인을 하고 회개하며 좁은 문, 좁은 길을 가는 삶을 살아야 할까요? 이 길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구원으로 인도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넓은 길로 가는 삶을 살 때는 결코 맛 볼 수 없는 영혼의 자유와 만족, 참 기쁨을 얻을 수 있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게 되고,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누리며, 이웃을 사랑하게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 사이의 관계도 풍성해집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 때 하나님 나라가 내 안에 그리고 우리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넓은 문, 넓은 길로 가는 삶은 죄악된 육신의 본성대로 사는 삶입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추구하며 사는 삶입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삶입니다. 자기부인, 회개, 순종과는 거리가 먼 삶입니다. 당장은 참 편해 보이고 많은 사람이 이 길로 가기 때문에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다 이렇게 사는데 뭐”라고 생각하며 문제의식이 없이 살아갑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넓은 길로 가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유익한 말씀은 받아들이고 부담스러운 말씀은 배척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며 예수님의 말씀보다는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할 수 있습니다. 넓은 문으로 들어가면 그 길이 쉽고 편하지만 점차 연약해지고 부패하다가 결국은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장래를 생각하지 않고 당장 쉽고 편한 길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는 좁은 문으로 들어서서 지속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갑니다. 끊임없이 배우고 겸손하게 말씀에 순종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갈 것인지, 넓은 문으로 들어갈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모세는 바로의 왕궁에서 궁중의 법도를 배우며 선진 학문을 배우고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강대국 이집트 왕자로서의 삶을 거절했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좁은 길을 선택했습니다. 바로 공주의 아들로서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고, 이집트의 모든 보화를 즐기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을 받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더 큰 재물로 여겼습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의 상 주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히 11:24-26). 이러한 모세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구원 역사에 위대한 지도자로 쓰셨습니다. 또한 그는 하나님 나라의 크고 영원한 상급을 받았습니다.

  둘째, 좋은 열매와 나쁜 열매(15-23). 15,16절을 보십시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거짓 선지자들’은 넓은 문과 넓은 길로 가도록 유혹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가르치기만 하고 그 말씀대로 살지는 않습니다. 외식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삼가라’라고 하셨습니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판별하기 어렵습니다. 이들은 양들을 노략질하기 위해서 양의 옷을 입고 교회에 들어옵니다. 훌륭한 그리스도인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도둑질하기 위해서 듣기에 좋은 말만 합니다. 축복과 번영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부담스러운 회개의 메시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는 말씀은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무늬만 그리스도인들을 양산합니다.

  우리가 그들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요? 20절을 보면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말씀했습니다. 그 사람이 참 선지자인지 거짓 선지자인지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은 행실로서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겉모습이나 아름다운 말로 자신을 꾸미고 사람을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내면적 성품과 행실의 열매는 꾸밀 수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함께 하다보면 그 사람 자신의 본 모습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이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기 때문에 그 사람의 삶과 그의 가르침을 통해서 나타나는 열매는 거짓과 교만과 불순종과 허영심과 탐욕 등입니다. 반면에 참 선지자의 가르침을 통해서 나타나는 열매는 겸손과 순종과 헌신과 사랑 등 성령의 열매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양들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양들을 이용해서 자기의 배만 불리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말세가 될수록 이런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나타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24:11). 실제로 많은 이단들이 활개 치는 것을 보면 이 말씀이 맞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거짓 선지자들을 분별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나무와 열매의 관계가 어떠합니까? 17,18절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예수님은 우리 인생을 나무에 비유하셨습니다. 그 사람의 나무가 좋은 나무인지, 못된 나무인지 처음에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떤 나무는 크고 잎이 무성해서 좋은 나무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난 후에 보면 도무지 먹을 수 없는 나쁜 열매를 맺는 경우가 있습니다. 반면에 별로 크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은데 나중에 보니 아주 맛있고 건강에 좋은 열매를 맺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좋은 나무가 될 수 있을까요? 좋은 나무가 되려면 근본적으로 회개하고 성령으로 거듭나 새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거듭나 새 사람이 되면 죄짓기를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의 삶에서 선하고 아름다운 행실이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5장에서 열매 맺는 비결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말씀과 성령으로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 거합니다. 그 말씀 안에 거합니다. 그의 사랑 안에 거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좋은 영양분을 공급받아 겸손과 순종, 사랑과 화평,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온유와 절제와 기쁨과 같은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갈 5:22,23).
 
  반면에 예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자신의 욕심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못된 나무입니다. 못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습니다. 못된 열매는 교만과 탐욕과 거짓과 간음과 이기적인 삶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결국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집니다(19).
 
  거짓 선지자들의 모습이 어떠합니까? 21-23절을 보십시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거짓 선지자들도 주의 이름으로 말씀을 가르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에 주님은 그들을 모른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나의 구원자시오, 왕이시오, 내 삶의 주인이라는 고백입니다. 성령이 아니고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 또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씀했습니다(롬 10:13). 그런데 예수님은 말뿐인 신앙과 참된 제자도를 구분하라고 하십니다. 참된 믿음은 신실함과 충성으로 나타납니다. 믿음과 신실함은 따로 떼어 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방언의 은사, 예언의 은사, 신유의 은사 등을 체험하면 하나님을 더욱 분명히 잘 믿을 것 같습니다. 특히 인생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내면이 답답할 때 뭔가 신비한 체험을 해보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도원을 찾아다니며 어떤 기적을 체험하기를 원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인생 속에서 초자연적인 능력을 나타내시기도 합니다. 그로 인해서 인생문제가 해결되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비한 능력이나 초자연적인 기적이 신앙에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그 자체가 신앙의 본질은 아닙니다. 기적을 체험했다고 해서 신앙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빵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쫓아다녔던 무리들처럼,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신비한 능력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 분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인격적인 사랑과 신뢰의 관계성을 맺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의 규모가 크든 작든, 신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순종하는 공동체, 하나님을 경외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공동체로 자라기를 원합니다.

  셋째, 지혜로운 건축자와 어리석은 건축자(24-29).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와 행하지 않는 자에 대해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24-27절을 보십시오. 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이 말씀에서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건축자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건축자 두 부류가 있습니다. 언뜻 보면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건축자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많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왜 모래 위에 집을 지을까요? 집을 짓는 것이 쉽고 편하기 때문입니다. 땅을 깊이 파지 않아도 되고, 돈과 시간이 적게 들어갑니다. 사람들은 쉽고 빨리 지으려고 모래 위에 집을 짓습니다. 예수님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을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들은 현재만 생각하고 미래를 대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미래를 생각하며 집을 짓습니다. 당장은 힘들고 많은 시간과 돈이 들어가지만, 장차 올 홍수를 대비해서 땅을 깊이 파고 반석 위에 주추를 놓습니다. 이렇게 지은 집은 비가 오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사람은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습니다. 집을 반석 위에 지으려면 땅을 깊이 파야 합니다. 땅을 파는 것은 어렵고 돈이 많이 들어가고 시간도 많이 필요합니다. 건축을 할 때 지하 공사가 참 어렵습니다. 작업 속도가 느리고 돈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함으로 인생의 집을 짓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기초해서 인생의 목적과 방향을 잡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기초해서 인생관, 가치관, 사명관, 역사관, 결혼관, 물질관, 직업관 등을 정립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재료로 인생의 집을 지을 때 환란이 와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마귀의 시험이나 세상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반석 위에 지은 집은 창수와 바람에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결국 ‘어떤 집을 지었는가?’ 하는 것보다 ‘어디에 집을 지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래 위에 집을 지었는가, 아니면 반석 위에 집을 지었는가에 따라서 집이 무너지기도 하고 버티기도 합니다.
 
  심판의 날에 예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얼마나 성공했는가, 얼마나 많은 부를 소유하고 명예를 얻었는가를 보고 평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행했는가, 아니면 행하지 않았는가로 평가하십니다. 산상수훈 말씀을 듣고 행한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만, 듣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심판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의 말씀을 듣고 행하지만, 그 마음에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없는 사람은 그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면 말씀을 듣고도 순종하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성경을 많이 알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영생을 얻기 위해서 성경을 공부했지만 행함이 없을 때 깨달음이 없었습니다. 결국 영생도 얻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다시 오실 그 날을 생각하면서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말씀대로 행하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의 중요성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살리고 성장시킵니다. 그 말씀에 순종할 때 영적인 눈이 열립니다. 허무가 사라지고 생명력을 덧입고 살 수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행할 때 기쁨이 있고 인간관계가 풍성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공부할 때 인생을 보는 눈이 생기고 많은 고민들과 인생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목자로서 말을 많이 하고 행동은 적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을 적게 하고 행동을 더 많이 하는 실천적인 목자 생활을 하여 성품과 삶에서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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