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20mt10(7:1-12)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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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마태복음 제 10 강
말씀 | 마태복음 7:1-12
요절 | 마태복음 7:12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오늘 말씀은 인간관계에서 제자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가르쳐주십니다. 세상을 살아 갈 때 먼저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하고 그 다음은 사람과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성경 전체의 주제도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오늘 유명한 인간관계의 황금률이 나오는데 이 말씀을 배워서 우리가 인간 관계를 잘 맺고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며 행복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비판하지 말라(1-6). 1,2절을 보십시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여기서 비판은 헬라어로 ‘크리노’인데 ‘정죄하다’, ‘심판하다’라는 법정 용어입니다. 재판관이 죄수를 판결할 때 ‘당신은 이런 죄를 지었으니 10년 징역을 받아야 마땅합니다’라고 판결을 내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피차 다 죄인이라서 아무도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를 잊어버리고 자기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남을 판단하는 죄를 많이 짓습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비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비판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파괴시키고 공동체 내에 사탄이 역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랑이 결여되어 있는 비판은 깊은 상처를 주고 마침내는 실족하게 할 수 있습니다. 비판이 일상화되면 듣는 사람의 마음에 불신과 회의와 미움을 심게 됩니다. 그 결과 비판은 의욕을 꺾어 버리고 개인이나 공동체를 파괴할 수 있습니다. 또한 비판할 때 자기도 비판을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비판을 일삼게 되면 마음이 황폐해지고 말씀도 잘 안 들어오고 기도가 막힙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을 비판하는 악한 습관을 반드시 고쳐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3,4절을 보십시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예수님께서 목수이셨기 때문에 이 말씀은 매우 현실감이 있습니다. 우리는 내 눈 속에 들보가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들보는 내가 하나님께 지은 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고 자기발견을 할 때 악하고 교만한 자신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이 누구도 판단할 수 없는 악한 사람인 것을 인정하게 되고 겸손해집니다. 자신을 깊이 돌아보면 다른 사람에 대한 비판을 멈추게 됩니다. 그리고 죄악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신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이는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때 마음에 은혜가 충만해지고 자기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하여 판단하는 사람에 대한 긍휼을 덧입게 됩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해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보다 기도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고 신앙이 성숙해집니다. 우리가 남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쓰는 노력보다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기를 힘써야겠습니다.
예수님은 5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뺀 성숙한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허물과 죄를 지적하고 도와줄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1절은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 너를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제자는 남을 비판해서는 안 되지만 개와 돼지, 거룩한 것과 진주는 분별해야 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개는 거룩한 것을 주면 물어뜯습니다. 돼지는 진주를 보면 그 가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짓밟아버립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것과 진주는 그 가치를 알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에게 주어야 합니다. 여기서 ‘거룩한 것’과 ‘진주’는 사람을 살리는 지혜로운 충고, 사랑의 권면, 복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잠언 9장 7-9절 “거만한 자를 징계하는 자는 도리어 능욕을 받고 악인을 책망하는 자는 도리어 흠이 잡히느니라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지혜 있는 자를 책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 지혜 있는 자에게 교훈을 더하라 그가 더욱 지혜로워질 것이요 의로운 사람을 가르치라 그의 학식이 더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실수를 할 수 있고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상대방을 사랑하기 때문에 충고하고 책망하면 잘못을 깨닫고 돌이킬 수 있습니다. 친구의 책망을 달게 받는 사람은 지혜를 얻고 성숙해 집니다. 겸손한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충고를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이 말씀을 받는 사람이 겸손한가, 아니면 거만한가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복음을 전할 때 핍박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거부하고 도리어 공격하는 사람을 끝까지 붙들고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복음을 전하고 떠날 때 발의 먼지를 털어버려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공격하는 사람들에게서 도망을 다니기도 하였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분별력을 가져야 해를 당하지 않고 효과적으로 복음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둘째,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7-11). 내가 비판하지 않고 바뀌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또 비판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변화되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의 비판으로 다른 사람을 바꾼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바꾸어 주실 수 있습니다. 또 우리가 올바로 분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사람을 돕고자 할 때 어려움을 느낍니다. 한계를 느낍니다. 낙심이 되기도 합니다. 이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이때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7,8절을 보십시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원래 이 말씀은 고대 거지들이 문전박대를 당해도 물러서지 않고 끈질기게 구걸하면 결국에는 얻어먹을 것이라는 삶의 지혜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구해야 할까요? 내 눈에 있는 들보를 빼기 위해서 구해야 합니다. 나의 교만과 이기심과 변화되지 않는 습관을 고치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구해야 합니다. 내가 겸손하고 남을 이해하고 온유와 긍휼의 마음을 덧입기 위해서 구해야 합니다. 또한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과 보배로운 진주와 같은 지혜를 얻을 수 있도록 구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1:5은 말씀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이 모든 말씀은 현재 명령형입니다. 지금 현재적으로 계속해서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랑의 말로 교훈하는데 말씀이 먹히지 않을 때는 그 사람을 포기할 때가 아니라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그의 귀를 열어 주시도록, 그의 마음을 주장해 주시도록 기도할 때입니다. 영원히 개돼지인 사람이 없습니다. 성령이 역사하시고 우리의 귀가 열리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이는 구약성경에서 예배를 드릴 때 사용하던 표현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다는 뜻입니다(시27:8; 34:5; 사55:6; 65:1; 렘29:12-14).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을 때 만나주십니다. 구하는 것이 입으로 구하는 것이라면 찾는 것은 마음을 써서 찾고, 발로 찾아다니는 것입니다. 기도를 한다고 해서 가만히 있지만 말고 손발을 놀려서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이는 유대교에서 하나님의 자비의 문을 두드리라는 교훈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실 것임을 강조합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어떤 분이십니까? 9-11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구하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좋은 선물은 성령이십니다(눅11:13). 성령의 선물을 받게 되면 비판하기를 좋아하는 우리의 마음을 바꾸어주십니다. 냉소적인 마음에 사랑을 가득 부어주셔서 너그럽게 만드십니다.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지혜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장 좋은 선물인 성령을 부어주시도록 지속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서 역사할 때 원수를 위해서도 축복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지혜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의 선물을 주셔서 사람을 살리는 일에 귀히 쓰임 받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산상수훈의 결론은 이러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 말씀은 율법과 선지자 곧 구약성경의 결론이기도 합니다. 로마의 황제였던 알렉산더 세베루스는 이 말씀을 궁전의 벽에 금으로 새겨 놓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황금률(The Golden rule)이라고 불립니다. 이는 인간관계의 대원칙입니다. 인간관계를 잘 맺는 비결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 대접을 받고 싶은 대로 다른 사람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의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인간관계에 대한 집약으로 주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존경받고 싶어 합니다. 자매들은 공주님처럼 대접을 받고 싶어 하고 형제들은 왕자님처럼 대접을 받고 싶어 합니다. 어린아이나 노인, 남자나 여자, 의인이나 악인, 부자나 가난한 자나, 지혜 자나 어리석은 자 모두 똑같습니다. 악한 사람도 자기를 한 인간으로 귀하게 대접해 주기를 바랍니다.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우기는 것도 대접을 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서로 대접을 받고자만 하기 때문에 상처를 받고 원망합니다.
필로라는 랍비는 “네가 원치 않는 것은 그에게 하지 말라”고 하였고, 힐렐이라는 랍비는 “네 자신이 싫어하는 것은 이웃에게 행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논어》에서 공자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시키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 이것은 소극적인 것으로서 다분히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적극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을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먼저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인정과 사랑에 감복해서 행복해할 것입니다. 그리고 기회가 되면 자신이 받은 대로 되돌려줄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을 깊이 생각해 보면 그에게 상처 받은 기억이 있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기 때문에 보복의 악순환이 계속되고 비판이 계속됩니다. 악을 행한 사람은 심판을 받게 되고 선을 행한 사람은 상을 받습니다. 자신이 대접한대로 다른 사람도 자신을 대접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으로 섬기게 되면 다른 사람도 사랑으로 보답합니다. 다른 사람을 소중히 여긴 사람은 사람들로부터 소중히 여김을 받습니다. 결국에는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할 뿐만 아니라 자신도 행복하게 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무관심하고 인색하게 대하면 다른 사람 역시 이런 자신에게 무관심하고 인색하게 대합니다. 그래서 외롭고 고독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이치입니다. 우리는 나를 인정해 줄 사람을 찾아서 다니다가 마음에 상처를 받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을 인정해 줌으로써 마음에 참 기쁨과 행복을 누려야 합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비판하는 말을 멈추고 기도해야 함을 배웠습니다. 또한 형제의 연약함을 이해하고 감당해주어야 함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서로 섬기며 대접해야 합니다.
우리는 내가 대접 받고 싶은 대로 남에게 대접을 했는데 못 받으면 나만 손해가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롯에게 좋은 땅을 양보했습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고 양보했습니다. 그는 롯에게 좋은 땅을 양보하고 마음이 쓰렸을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창 13:14-17).”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남을 대접해야지 사람을 바라보고 대접하면 실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대로 아브라함을 넘치게 축복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본성이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어서 남을 섬기고 사랑해 준다는 것이 우리의 힘으로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과 그 말씀을 믿고 믿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마음을 품을 때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섬김 받기에 합당한 분이시지만 한없이 낮아지셔서 우리를 겸손하게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깊이 이해해 주시고 사랑해 주셨습니다. 마침내는 자기의 고귀한 생명을 내어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남을 비판하기보다 이해하고 사랑하고 섬김으로써 진정으로 복된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마태복음 7:1-12
요절 | 마태복음 7:12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오늘 말씀은 인간관계에서 제자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가르쳐주십니다. 세상을 살아 갈 때 먼저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하고 그 다음은 사람과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성경 전체의 주제도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오늘 유명한 인간관계의 황금률이 나오는데 이 말씀을 배워서 우리가 인간 관계를 잘 맺고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며 행복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비판하지 말라(1-6). 1,2절을 보십시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여기서 비판은 헬라어로 ‘크리노’인데 ‘정죄하다’, ‘심판하다’라는 법정 용어입니다. 재판관이 죄수를 판결할 때 ‘당신은 이런 죄를 지었으니 10년 징역을 받아야 마땅합니다’라고 판결을 내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피차 다 죄인이라서 아무도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를 잊어버리고 자기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남을 판단하는 죄를 많이 짓습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비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비판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파괴시키고 공동체 내에 사탄이 역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랑이 결여되어 있는 비판은 깊은 상처를 주고 마침내는 실족하게 할 수 있습니다. 비판이 일상화되면 듣는 사람의 마음에 불신과 회의와 미움을 심게 됩니다. 그 결과 비판은 의욕을 꺾어 버리고 개인이나 공동체를 파괴할 수 있습니다. 또한 비판할 때 자기도 비판을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비판을 일삼게 되면 마음이 황폐해지고 말씀도 잘 안 들어오고 기도가 막힙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을 비판하는 악한 습관을 반드시 고쳐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3,4절을 보십시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예수님께서 목수이셨기 때문에 이 말씀은 매우 현실감이 있습니다. 우리는 내 눈 속에 들보가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들보는 내가 하나님께 지은 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고 자기발견을 할 때 악하고 교만한 자신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이 누구도 판단할 수 없는 악한 사람인 것을 인정하게 되고 겸손해집니다. 자신을 깊이 돌아보면 다른 사람에 대한 비판을 멈추게 됩니다. 그리고 죄악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신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이는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때 마음에 은혜가 충만해지고 자기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하여 판단하는 사람에 대한 긍휼을 덧입게 됩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해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보다 기도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고 신앙이 성숙해집니다. 우리가 남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쓰는 노력보다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기를 힘써야겠습니다.
예수님은 5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뺀 성숙한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허물과 죄를 지적하고 도와줄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1절은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 너를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제자는 남을 비판해서는 안 되지만 개와 돼지, 거룩한 것과 진주는 분별해야 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개는 거룩한 것을 주면 물어뜯습니다. 돼지는 진주를 보면 그 가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짓밟아버립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것과 진주는 그 가치를 알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에게 주어야 합니다. 여기서 ‘거룩한 것’과 ‘진주’는 사람을 살리는 지혜로운 충고, 사랑의 권면, 복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잠언 9장 7-9절 “거만한 자를 징계하는 자는 도리어 능욕을 받고 악인을 책망하는 자는 도리어 흠이 잡히느니라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지혜 있는 자를 책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 지혜 있는 자에게 교훈을 더하라 그가 더욱 지혜로워질 것이요 의로운 사람을 가르치라 그의 학식이 더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실수를 할 수 있고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상대방을 사랑하기 때문에 충고하고 책망하면 잘못을 깨닫고 돌이킬 수 있습니다. 친구의 책망을 달게 받는 사람은 지혜를 얻고 성숙해 집니다. 겸손한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충고를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이 말씀을 받는 사람이 겸손한가, 아니면 거만한가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복음을 전할 때 핍박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거부하고 도리어 공격하는 사람을 끝까지 붙들고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복음을 전하고 떠날 때 발의 먼지를 털어버려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공격하는 사람들에게서 도망을 다니기도 하였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분별력을 가져야 해를 당하지 않고 효과적으로 복음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둘째,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7-11). 내가 비판하지 않고 바뀌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또 비판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변화되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의 비판으로 다른 사람을 바꾼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바꾸어 주실 수 있습니다. 또 우리가 올바로 분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사람을 돕고자 할 때 어려움을 느낍니다. 한계를 느낍니다. 낙심이 되기도 합니다. 이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이때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7,8절을 보십시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원래 이 말씀은 고대 거지들이 문전박대를 당해도 물러서지 않고 끈질기게 구걸하면 결국에는 얻어먹을 것이라는 삶의 지혜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구해야 할까요? 내 눈에 있는 들보를 빼기 위해서 구해야 합니다. 나의 교만과 이기심과 변화되지 않는 습관을 고치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구해야 합니다. 내가 겸손하고 남을 이해하고 온유와 긍휼의 마음을 덧입기 위해서 구해야 합니다. 또한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과 보배로운 진주와 같은 지혜를 얻을 수 있도록 구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1:5은 말씀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이 모든 말씀은 현재 명령형입니다. 지금 현재적으로 계속해서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랑의 말로 교훈하는데 말씀이 먹히지 않을 때는 그 사람을 포기할 때가 아니라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그의 귀를 열어 주시도록, 그의 마음을 주장해 주시도록 기도할 때입니다. 영원히 개돼지인 사람이 없습니다. 성령이 역사하시고 우리의 귀가 열리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이는 구약성경에서 예배를 드릴 때 사용하던 표현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다는 뜻입니다(시27:8; 34:5; 사55:6; 65:1; 렘29:12-14).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을 때 만나주십니다. 구하는 것이 입으로 구하는 것이라면 찾는 것은 마음을 써서 찾고, 발로 찾아다니는 것입니다. 기도를 한다고 해서 가만히 있지만 말고 손발을 놀려서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이는 유대교에서 하나님의 자비의 문을 두드리라는 교훈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실 것임을 강조합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어떤 분이십니까? 9-11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구하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좋은 선물은 성령이십니다(눅11:13). 성령의 선물을 받게 되면 비판하기를 좋아하는 우리의 마음을 바꾸어주십니다. 냉소적인 마음에 사랑을 가득 부어주셔서 너그럽게 만드십니다.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지혜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장 좋은 선물인 성령을 부어주시도록 지속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서 역사할 때 원수를 위해서도 축복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지혜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의 선물을 주셔서 사람을 살리는 일에 귀히 쓰임 받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산상수훈의 결론은 이러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 말씀은 율법과 선지자 곧 구약성경의 결론이기도 합니다. 로마의 황제였던 알렉산더 세베루스는 이 말씀을 궁전의 벽에 금으로 새겨 놓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황금률(The Golden rule)이라고 불립니다. 이는 인간관계의 대원칙입니다. 인간관계를 잘 맺는 비결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 대접을 받고 싶은 대로 다른 사람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의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인간관계에 대한 집약으로 주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존경받고 싶어 합니다. 자매들은 공주님처럼 대접을 받고 싶어 하고 형제들은 왕자님처럼 대접을 받고 싶어 합니다. 어린아이나 노인, 남자나 여자, 의인이나 악인, 부자나 가난한 자나, 지혜 자나 어리석은 자 모두 똑같습니다. 악한 사람도 자기를 한 인간으로 귀하게 대접해 주기를 바랍니다.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우기는 것도 대접을 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서로 대접을 받고자만 하기 때문에 상처를 받고 원망합니다.
필로라는 랍비는 “네가 원치 않는 것은 그에게 하지 말라”고 하였고, 힐렐이라는 랍비는 “네 자신이 싫어하는 것은 이웃에게 행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논어》에서 공자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시키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 이것은 소극적인 것으로서 다분히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적극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을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먼저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인정과 사랑에 감복해서 행복해할 것입니다. 그리고 기회가 되면 자신이 받은 대로 되돌려줄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을 깊이 생각해 보면 그에게 상처 받은 기억이 있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기 때문에 보복의 악순환이 계속되고 비판이 계속됩니다. 악을 행한 사람은 심판을 받게 되고 선을 행한 사람은 상을 받습니다. 자신이 대접한대로 다른 사람도 자신을 대접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으로 섬기게 되면 다른 사람도 사랑으로 보답합니다. 다른 사람을 소중히 여긴 사람은 사람들로부터 소중히 여김을 받습니다. 결국에는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할 뿐만 아니라 자신도 행복하게 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무관심하고 인색하게 대하면 다른 사람 역시 이런 자신에게 무관심하고 인색하게 대합니다. 그래서 외롭고 고독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이치입니다. 우리는 나를 인정해 줄 사람을 찾아서 다니다가 마음에 상처를 받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을 인정해 줌으로써 마음에 참 기쁨과 행복을 누려야 합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비판하는 말을 멈추고 기도해야 함을 배웠습니다. 또한 형제의 연약함을 이해하고 감당해주어야 함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서로 섬기며 대접해야 합니다.
우리는 내가 대접 받고 싶은 대로 남에게 대접을 했는데 못 받으면 나만 손해가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롯에게 좋은 땅을 양보했습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고 양보했습니다. 그는 롯에게 좋은 땅을 양보하고 마음이 쓰렸을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창 13:14-17).”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남을 대접해야지 사람을 바라보고 대접하면 실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대로 아브라함을 넘치게 축복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본성이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어서 남을 섬기고 사랑해 준다는 것이 우리의 힘으로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과 그 말씀을 믿고 믿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마음을 품을 때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섬김 받기에 합당한 분이시지만 한없이 낮아지셔서 우리를 겸손하게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깊이 이해해 주시고 사랑해 주셨습니다. 마침내는 자기의 고귀한 생명을 내어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남을 비판하기보다 이해하고 사랑하고 섬김으로써 진정으로 복된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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