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20마6강(5:1-16)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페이지 정보

본문
2020년 마태복음 제 6 강
말씀 | 마태복음 5:1-16
요절 | 마태복음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오늘은 팔복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복 받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복의 근원으로 부르셨습니다. 세상에서는 아기자기한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낳아 평안하게 양육하며 교육하고, 건강하게 오래 살고, 부자가 되는 것을 복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누려야 할 복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주신 이 복들이 수준이 너무 높아서 나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복은 예수님이 내 안에 사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내 안에 이루어진 천국을 날마다 체험하며 살 수 있도록 성령께서 역사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복을 추구하는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세상에 맛을 내고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복을 받은 자(1-12)
첫째,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산상수훈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말씀이 아닙니다. 천국 백성이 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산상수훈을 천국 시민의 헌장이라고 부릅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 나라가 임한 천국 백성들이 이 땅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이런 그들에게 어떤 축복이 주어지는가를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심령은 한자로 하면 마음과 영혼입니다. 심령은 인간의 이성적인 영으로서 힘과 애정과 감정과 욕망과 같은 결과를 가져오는 근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근거 없이 교만한 자신을 발견하고 한 없이 낮아질 때 마음이 가난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난’은 의지할 재산이 전혀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즉 부족함, 결핍으로 인해 곤고한 상태를 뜻합니다. 누가복음은 그냥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는 세리로서 돈을 많이 소유해본 적이 있습니다. 그는 많은 돈으로 인해서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구체화시켰습니다. 즉 자신의 부족함을 잘 아는 상태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살펴 보니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자신의 무능함을 절감해서 하나님과 다른 사람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아는 사람이 가난한 심령의 소유자입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목자로서 부족한 자신으로 인해서 괴로워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고, 하나님께 도와주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간절히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무릎을 꿇고 부르짖어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사람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영적인 굶주림으로 부르짖어 구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반대로 심령이 부요한 사람은 어떤 상태일까요? 의로운 심정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하나님을 찾지 않고 그의 은혜를 구하지 않습니다.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을 의롭게 생각하고 예수님께 나오지 않았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신들을 부자라고 생각했습니다.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염색업을 하여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주님은 이런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자신들의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은 상태에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한 목자님은 사모님과 매일 한 시간씩 성경 읽기를 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당한 시련으로 인해서 하나님 밖에 붙들 것이 없습니다. 다윗도 사울에게 쫓겨다니면서 광야 생활을 할 때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샘솟는 은혜를 주셔서 고난 가운데서 보석과 같은 시를 지었습니다. 한 목자님도 작년에 직장에서 엄청난 시련을 겪으면서 마음이 가난해졌습니다. 그는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시편을 묵상했는데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것 같은 감동과 풍성한 은혜를 간증했습니다. 우리가 코로나 19로 인해서 마음이 많이 가난해졌습니다. 물질적인 어려움을 겪으면서 하나님만을 바라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기 때문에 더욱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함으로 천국을 누리게 하십니다. 성 프란시스는 오랜 시간을 기도하였는데 그의 기도제목은 “하나님 아버지, 나는 누구입니까? 하나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였다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께 대한 갈급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는 큰 상인의 아들이었지만 이를 다 포기하고 탁발승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그를 따르던 제자들과 함께 프란시스코 수도회를 만들었는데 그 공동체는 가난하지만 기쁨이 충만하였습니다.
둘째,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애통한다는 것은 슬퍼하는 것입니다. “애통하는 것”이 헬라어로 “펜테오”인데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처절하게 우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큰 슬픔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죄문제로, 양들이나 자녀들 문제 때문에 절박한 마음으로 부르짖는 것입니다. 시대의 문제를 안고 심령을 찢고 울부짖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찔림을 받아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는 것은 귀한 것입니다. 영적으로 민감할 때, 깨어 있을 때 죄에 대한 감각이 예민해집니다. 그렇지 않다면 메마른 가슴, 완악한 자신의 마음을 볼 때 애통해 해야 합니다. 말씀을 들어도 무덤덤하고 회개가 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애통하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마음에 하나님의 위로가 있습니다.
다윗은 밧세바와 간음죄를 짓고 나서 하나님 앞에 통회자복하였습니다. 시편 51편에 그의 마음이 잘 나와 있습니다.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그는 17절에서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라고 노래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쓴 소리를 들을 때 애통하는 마음으로 회개하면 죄사함과 함께 하나님의 위로를 받습니다. 자신의 죄로 인해서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소감을 깊이 쓰면서 회개할 때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하게 됩니다.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였습니다. 그 백성들의 교만과 불순종과 우상숭배로 인해서 멸망당할 것을 알고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꾸 자꾸 딴 길로 갔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그의 슬픔을 노래합니다. “너희가 이를 듣지 아니하면 나의 심령이 너희 교만으로 말미암아 은밀한 곳에서 울 것이며 여호와의 양 떼가 사로잡힘으로 말미암아 눈물을 흘려 통곡하리라(렘 13:17).” 성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는 ‘눈물의 어머니’라고 불리웁니다. 어거스틴은 30세가 될 때까지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방탕과 주색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니카는 하나님께 나아가 그칠 줄 모르는 눈물을 흘리며 아들의 회심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어머니 모니카의 눈물의 기도를 받으시고 하나님은 어거스틴에게 역사하셨습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회개하여 위대한 학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기독교를 큰 혼란으로부터 구했습니다. 우리도 나의 죄와 연약함 때문에, 양들의 문제로 인해서 애통할 때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셋째, 온유한 자가 복이 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온유의 헬라어 원어는 프라우스입니다. 야생마를 길들이는 과정에서 쓰이는데, 처음에는 무척 사납지만 그 야생마가 이리저리 훈련을 받다보면 어느덧 주인에게 길들여져서 온순해집니다. 주인의 통제 안에 들어가게 되어 이제는 주인이 고삐를 끄는 대로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야생말이 주인의 명령에 잘 따르고 순종할 때 기분이 좋아서 “됐다”라고 할 때 프라우스란 단어를 썼습니다. 따라서 온유란 말은 모든 본능과 감정을 제어할 수 있는 훈련된 인격을 말합니다. 분노할 수밖에 없을 때에도 급히 분을 내지 않고 감정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진정으로 온유한 자란 ‘차고 넘치는 능력이 있으면서도 능력을 맘대로 쓰지 않고 가장 필요할 때에 쓸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온유한 성품을 가진 대표적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시지만 사람들이 그를 시험하고 조롱할 때에도 주님은 자신을 위해서,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화를 내신 일이 한 번도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성전이 강도의 굴처럼 되고 기도하는 집이 장사꾼들의 사업장이 되어 버린 것을 보고 가만히 계시지 않았습니다. 진짜 화를 내어야 할 때 화낼 줄 알고, 화내지 말아야 할 때 화내지 않을 수 있는 능력, 이것이 바로 온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온유를 배워야 합니다.
또 온유한 사람하면 모세를 빼 놓을 수 없습니다. 민수기 12:3에서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애굽의 왕자로 살았을 때는 혈기가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살인자로 낙인찍혀 미디안 광야에서 도망자로 40년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는 장인의 양을 치면서 목자 생활을 했습니다. 그 후에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출 4:10,13)”라고 말하며 겸손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을 시켜 광야 생활을 할 때에도 끊임없이 불평하고 원망하는 백성들을 온유하게 대하고 인도하였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귀히 쓰임 받았습니다.
‘온유함’은 천성적인 성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연단된 인격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을 믿을 때 억압 중에서도 분을 내지 않고 온유할 수 있습니다. 이런 온유함을 소유한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얻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의 온유함과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을 믿기 때문에 사람들과 싸우지 않고 온유하게 대할 수 있습니다.
넷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여기서 ‘의’는 이 세상의 의나 사람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성을 맺는 것이고, 천국의 통치 원리입니다. 의는 하나님의 속성이고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성을 맺고 싶은 갈망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고 싶은 목마름입니다. 사람들은 무엇에 주리고 목말라 합니까? 사람의 인정과 사랑에 목말라 하고, 돈에 주리고, 쾌락에 목이 타들어갑니다. 인터넷이나 스마트 폰에서 정보에 목이 마르고 게임에 주려 있습니다. 그러나 오로지 하나님의 ‘의’만이 주리고 목마른 우리의 영혼을 채워줄 수 있습니다(요6:35,계7:16,17).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 제자들은 더는 하나님의 의에 주리거나 목말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완전한 배부름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의 진정한 소망은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가 완전하게 실현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셔서 완전한 통치를 이루어주시는 것입니다.
다섯째,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그들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입니다. 긍휼이란 다른 사람의 아픔을 보고 같이 가슴 아파하고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를 보시고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마태는 세리로서 사람들의 욕을 먹고 멸시를 받고 살고 있는데 예수님이 자신을 긍휼히 여기시고 제자로 불러 주신 은혜가 너무나 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집으로 초청했습니다. 이때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함께 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를 보고 예수님과 제자들을 비난했습니다. 예수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셨습니다. 우리는 일만 달란트 탕감을 받은 죄인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고 용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복을 주십니다.
여섯째,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예례미야 17:9에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죄인의 마음은 너무나 부패해서 만일 사람의 마음이 겉으로 다 드러난다면 부끄러워서 살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만큼 사람의 마음이 병들고 추하고 더럽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음을 씻고 가꾸는 일에는 소홀히 합니다. 대신에 외모를 깨끗이 하고 꾸미는데 많은 시간과 물질과 에너지를 투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외모를 꾸미고 청결히 하는 데만 마음을 쓸 것이 아니라 마음을 청결히 하고 아름답게 하는데 힘써야 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만나는 축복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마음을 청결하게 할 수 있습니까?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신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겸손하게 나의 마음이 더러움을 인정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매일매일 나아가 씻음 받기를 기도합니다. 그때 하나님을 보는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며 그의 사랑을 누리는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일곱째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불화한 사람들을 돌이켜 화목하게 하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죄로 인해 죄의 종, 마귀의 종이 되어서 지옥의 고통을 맛보며 사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하나님과 화목하도록 하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희생하셨습니다. 십자가 고난을 감당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희생적인 사랑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고 천국을 소유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서 작은 예수로 하나님과 불화한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목하도록 하는 목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홍대 가운데 그리고 각자의 캠퍼스와 가정에서 화평하게 하는 복된 목자의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화평하게 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다투고 분쟁하는 세상에서 화평을 만들려면 자기희생이 따릅니다. 화평케 하는 사람은 상대방의 처지에서 생각하고 그 형편을 이해하고자 애를 씁니다. 말을 하더라도 덕을 세우는 말, 칭찬하는 말을 하며 어찌하든지 분쟁을 막고 화평을 이루고자 합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습니다.
여덟째,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천국의 원리대로 살아가는 사람과 세상의 원리로 살아가는 사람은 반드시 충돌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마음에 천국이 임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박해를 당합니다. 이는 소속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신앙 때문에 손해를 당하고 미움과 박해를 받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답게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고 있다면 그는 이미 천국에 속해 있고 그 마음에 천국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전하다가 욕을 먹고 어려움을 당해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위해 마련하신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Ⅱ. 세상의 빛과 소금(13-16)
천국을 소유한 복된 사람들은 세상에서 어떤 존재입니까? 13,14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소금은 음식의 맛을 냅니다. 소금은 음식이 부패하는 것을 방지합니다. 이처럼 팔복을 소유한 제자들은 세상의 맛을 내고 부패를 억제하는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을 소유한 사람들의 성품이 세상에 살맛을 내게 합니다. 우리가 가정과 캠퍼스와 직장에서 예수님의 제자다운 모습으로 살면 주위의 사람들은 이런 모습에 영향을 받습니다. 사람들은 제자들처럼 선한 삶을 살고자 소원하게 됩니다.
그런데 만일 소금이 맛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사람들은 맛을 잃은 소금을 길바닥에 버렸습니다. 이처럼 신자가 제자로서의 맛을 잃어버리면 아무런 쓸모가 없어 사람들에게 밟히게 됩니다. 신자로서 거룩성을 잃어버리고 세상 사람들처럼 살게 되면 하나님께도 버림을 받고 세상 사람들에게도 욕을 먹습니다. 우리가 성경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에 순종해서 살고 가르칠 때 생명력이 있는 모임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또 제자들은 세상의 빛입니다.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질 수 없는 것과 같이 제자들의 삶은 만천하에 다 드러납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칩니다. 이같이 우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믿음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선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려면 소금과 같이 자신이 녹아지고 태워지는 헌신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아픔이지만 그때 하늘의 신령한 복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고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나를 온전히 지배하도록 자신을 내어 드리고 그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과 함께 함으로 팔복을 누리며 이 땅에서부터 천국을 누리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마태복음 5:1-16
요절 | 마태복음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오늘은 팔복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복 받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복의 근원으로 부르셨습니다. 세상에서는 아기자기한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낳아 평안하게 양육하며 교육하고, 건강하게 오래 살고, 부자가 되는 것을 복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누려야 할 복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주신 이 복들이 수준이 너무 높아서 나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복은 예수님이 내 안에 사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내 안에 이루어진 천국을 날마다 체험하며 살 수 있도록 성령께서 역사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복을 추구하는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세상에 맛을 내고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복을 받은 자(1-12)
첫째,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산상수훈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말씀이 아닙니다. 천국 백성이 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산상수훈을 천국 시민의 헌장이라고 부릅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 나라가 임한 천국 백성들이 이 땅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이런 그들에게 어떤 축복이 주어지는가를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심령은 한자로 하면 마음과 영혼입니다. 심령은 인간의 이성적인 영으로서 힘과 애정과 감정과 욕망과 같은 결과를 가져오는 근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근거 없이 교만한 자신을 발견하고 한 없이 낮아질 때 마음이 가난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난’은 의지할 재산이 전혀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즉 부족함, 결핍으로 인해 곤고한 상태를 뜻합니다. 누가복음은 그냥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는 세리로서 돈을 많이 소유해본 적이 있습니다. 그는 많은 돈으로 인해서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구체화시켰습니다. 즉 자신의 부족함을 잘 아는 상태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살펴 보니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자신의 무능함을 절감해서 하나님과 다른 사람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아는 사람이 가난한 심령의 소유자입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목자로서 부족한 자신으로 인해서 괴로워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고, 하나님께 도와주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간절히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무릎을 꿇고 부르짖어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사람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영적인 굶주림으로 부르짖어 구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반대로 심령이 부요한 사람은 어떤 상태일까요? 의로운 심정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하나님을 찾지 않고 그의 은혜를 구하지 않습니다.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을 의롭게 생각하고 예수님께 나오지 않았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신들을 부자라고 생각했습니다.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염색업을 하여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주님은 이런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자신들의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은 상태에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한 목자님은 사모님과 매일 한 시간씩 성경 읽기를 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당한 시련으로 인해서 하나님 밖에 붙들 것이 없습니다. 다윗도 사울에게 쫓겨다니면서 광야 생활을 할 때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샘솟는 은혜를 주셔서 고난 가운데서 보석과 같은 시를 지었습니다. 한 목자님도 작년에 직장에서 엄청난 시련을 겪으면서 마음이 가난해졌습니다. 그는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시편을 묵상했는데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것 같은 감동과 풍성한 은혜를 간증했습니다. 우리가 코로나 19로 인해서 마음이 많이 가난해졌습니다. 물질적인 어려움을 겪으면서 하나님만을 바라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기 때문에 더욱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함으로 천국을 누리게 하십니다. 성 프란시스는 오랜 시간을 기도하였는데 그의 기도제목은 “하나님 아버지, 나는 누구입니까? 하나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였다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께 대한 갈급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는 큰 상인의 아들이었지만 이를 다 포기하고 탁발승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그를 따르던 제자들과 함께 프란시스코 수도회를 만들었는데 그 공동체는 가난하지만 기쁨이 충만하였습니다.
둘째,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애통한다는 것은 슬퍼하는 것입니다. “애통하는 것”이 헬라어로 “펜테오”인데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처절하게 우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큰 슬픔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죄문제로, 양들이나 자녀들 문제 때문에 절박한 마음으로 부르짖는 것입니다. 시대의 문제를 안고 심령을 찢고 울부짖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찔림을 받아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는 것은 귀한 것입니다. 영적으로 민감할 때, 깨어 있을 때 죄에 대한 감각이 예민해집니다. 그렇지 않다면 메마른 가슴, 완악한 자신의 마음을 볼 때 애통해 해야 합니다. 말씀을 들어도 무덤덤하고 회개가 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애통하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마음에 하나님의 위로가 있습니다.
다윗은 밧세바와 간음죄를 짓고 나서 하나님 앞에 통회자복하였습니다. 시편 51편에 그의 마음이 잘 나와 있습니다.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그는 17절에서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라고 노래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쓴 소리를 들을 때 애통하는 마음으로 회개하면 죄사함과 함께 하나님의 위로를 받습니다. 자신의 죄로 인해서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소감을 깊이 쓰면서 회개할 때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하게 됩니다.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였습니다. 그 백성들의 교만과 불순종과 우상숭배로 인해서 멸망당할 것을 알고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꾸 자꾸 딴 길로 갔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그의 슬픔을 노래합니다. “너희가 이를 듣지 아니하면 나의 심령이 너희 교만으로 말미암아 은밀한 곳에서 울 것이며 여호와의 양 떼가 사로잡힘으로 말미암아 눈물을 흘려 통곡하리라(렘 13:17).” 성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는 ‘눈물의 어머니’라고 불리웁니다. 어거스틴은 30세가 될 때까지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방탕과 주색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니카는 하나님께 나아가 그칠 줄 모르는 눈물을 흘리며 아들의 회심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어머니 모니카의 눈물의 기도를 받으시고 하나님은 어거스틴에게 역사하셨습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회개하여 위대한 학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기독교를 큰 혼란으로부터 구했습니다. 우리도 나의 죄와 연약함 때문에, 양들의 문제로 인해서 애통할 때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셋째, 온유한 자가 복이 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온유의 헬라어 원어는 프라우스입니다. 야생마를 길들이는 과정에서 쓰이는데, 처음에는 무척 사납지만 그 야생마가 이리저리 훈련을 받다보면 어느덧 주인에게 길들여져서 온순해집니다. 주인의 통제 안에 들어가게 되어 이제는 주인이 고삐를 끄는 대로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야생말이 주인의 명령에 잘 따르고 순종할 때 기분이 좋아서 “됐다”라고 할 때 프라우스란 단어를 썼습니다. 따라서 온유란 말은 모든 본능과 감정을 제어할 수 있는 훈련된 인격을 말합니다. 분노할 수밖에 없을 때에도 급히 분을 내지 않고 감정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진정으로 온유한 자란 ‘차고 넘치는 능력이 있으면서도 능력을 맘대로 쓰지 않고 가장 필요할 때에 쓸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온유한 성품을 가진 대표적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시지만 사람들이 그를 시험하고 조롱할 때에도 주님은 자신을 위해서,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화를 내신 일이 한 번도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성전이 강도의 굴처럼 되고 기도하는 집이 장사꾼들의 사업장이 되어 버린 것을 보고 가만히 계시지 않았습니다. 진짜 화를 내어야 할 때 화낼 줄 알고, 화내지 말아야 할 때 화내지 않을 수 있는 능력, 이것이 바로 온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온유를 배워야 합니다.
또 온유한 사람하면 모세를 빼 놓을 수 없습니다. 민수기 12:3에서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애굽의 왕자로 살았을 때는 혈기가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살인자로 낙인찍혀 미디안 광야에서 도망자로 40년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는 장인의 양을 치면서 목자 생활을 했습니다. 그 후에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출 4:10,13)”라고 말하며 겸손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을 시켜 광야 생활을 할 때에도 끊임없이 불평하고 원망하는 백성들을 온유하게 대하고 인도하였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귀히 쓰임 받았습니다.
‘온유함’은 천성적인 성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연단된 인격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을 믿을 때 억압 중에서도 분을 내지 않고 온유할 수 있습니다. 이런 온유함을 소유한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얻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의 온유함과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을 믿기 때문에 사람들과 싸우지 않고 온유하게 대할 수 있습니다.
넷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여기서 ‘의’는 이 세상의 의나 사람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성을 맺는 것이고, 천국의 통치 원리입니다. 의는 하나님의 속성이고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성을 맺고 싶은 갈망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고 싶은 목마름입니다. 사람들은 무엇에 주리고 목말라 합니까? 사람의 인정과 사랑에 목말라 하고, 돈에 주리고, 쾌락에 목이 타들어갑니다. 인터넷이나 스마트 폰에서 정보에 목이 마르고 게임에 주려 있습니다. 그러나 오로지 하나님의 ‘의’만이 주리고 목마른 우리의 영혼을 채워줄 수 있습니다(요6:35,계7:16,17).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 제자들은 더는 하나님의 의에 주리거나 목말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완전한 배부름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의 진정한 소망은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가 완전하게 실현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셔서 완전한 통치를 이루어주시는 것입니다.
다섯째,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그들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입니다. 긍휼이란 다른 사람의 아픔을 보고 같이 가슴 아파하고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를 보시고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마태는 세리로서 사람들의 욕을 먹고 멸시를 받고 살고 있는데 예수님이 자신을 긍휼히 여기시고 제자로 불러 주신 은혜가 너무나 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집으로 초청했습니다. 이때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함께 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를 보고 예수님과 제자들을 비난했습니다. 예수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셨습니다. 우리는 일만 달란트 탕감을 받은 죄인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고 용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복을 주십니다.
여섯째,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예례미야 17:9에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죄인의 마음은 너무나 부패해서 만일 사람의 마음이 겉으로 다 드러난다면 부끄러워서 살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만큼 사람의 마음이 병들고 추하고 더럽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음을 씻고 가꾸는 일에는 소홀히 합니다. 대신에 외모를 깨끗이 하고 꾸미는데 많은 시간과 물질과 에너지를 투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외모를 꾸미고 청결히 하는 데만 마음을 쓸 것이 아니라 마음을 청결히 하고 아름답게 하는데 힘써야 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만나는 축복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마음을 청결하게 할 수 있습니까?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신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겸손하게 나의 마음이 더러움을 인정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매일매일 나아가 씻음 받기를 기도합니다. 그때 하나님을 보는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며 그의 사랑을 누리는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일곱째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불화한 사람들을 돌이켜 화목하게 하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죄로 인해 죄의 종, 마귀의 종이 되어서 지옥의 고통을 맛보며 사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하나님과 화목하도록 하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희생하셨습니다. 십자가 고난을 감당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희생적인 사랑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고 천국을 소유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서 작은 예수로 하나님과 불화한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목하도록 하는 목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홍대 가운데 그리고 각자의 캠퍼스와 가정에서 화평하게 하는 복된 목자의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화평하게 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다투고 분쟁하는 세상에서 화평을 만들려면 자기희생이 따릅니다. 화평케 하는 사람은 상대방의 처지에서 생각하고 그 형편을 이해하고자 애를 씁니다. 말을 하더라도 덕을 세우는 말, 칭찬하는 말을 하며 어찌하든지 분쟁을 막고 화평을 이루고자 합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습니다.
여덟째,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천국의 원리대로 살아가는 사람과 세상의 원리로 살아가는 사람은 반드시 충돌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마음에 천국이 임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박해를 당합니다. 이는 소속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신앙 때문에 손해를 당하고 미움과 박해를 받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답게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고 있다면 그는 이미 천국에 속해 있고 그 마음에 천국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전하다가 욕을 먹고 어려움을 당해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위해 마련하신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Ⅱ. 세상의 빛과 소금(13-16)
천국을 소유한 복된 사람들은 세상에서 어떤 존재입니까? 13,14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소금은 음식의 맛을 냅니다. 소금은 음식이 부패하는 것을 방지합니다. 이처럼 팔복을 소유한 제자들은 세상의 맛을 내고 부패를 억제하는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을 소유한 사람들의 성품이 세상에 살맛을 내게 합니다. 우리가 가정과 캠퍼스와 직장에서 예수님의 제자다운 모습으로 살면 주위의 사람들은 이런 모습에 영향을 받습니다. 사람들은 제자들처럼 선한 삶을 살고자 소원하게 됩니다.
그런데 만일 소금이 맛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사람들은 맛을 잃은 소금을 길바닥에 버렸습니다. 이처럼 신자가 제자로서의 맛을 잃어버리면 아무런 쓸모가 없어 사람들에게 밟히게 됩니다. 신자로서 거룩성을 잃어버리고 세상 사람들처럼 살게 되면 하나님께도 버림을 받고 세상 사람들에게도 욕을 먹습니다. 우리가 성경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에 순종해서 살고 가르칠 때 생명력이 있는 모임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또 제자들은 세상의 빛입니다.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질 수 없는 것과 같이 제자들의 삶은 만천하에 다 드러납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칩니다. 이같이 우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믿음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선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려면 소금과 같이 자신이 녹아지고 태워지는 헌신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아픔이지만 그때 하늘의 신령한 복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고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나를 온전히 지배하도록 자신을 내어 드리고 그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과 함께 함으로 팔복을 누리며 이 땅에서부터 천국을 누리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첨부파일
-
2020마태복음-6m.hwp (48.0K)
0회 다운로드 | DATE : 2020-05-10 16:36:25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