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20mt19m(12:22-50)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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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마태복음 제 19 강
말씀 | 마태복음 12:22-50
요절 | 마태복음 12:29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우리는 각자 변화되지 않는 문제, 오래된 죄문제가 있습니다. 나쁜 습관이 있습니다. 자신도 힘들고, 곁에 있는 사람들도 힘들게 하는 연약함이 있습니다. 이런 우리의 모든 죄와 연약함 뒤에는 마귀의 세력이 있습니다. 오늘 제목처럼 마귀는 ‘강한 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귀 앞에 꼼짝 못하고 당하고 삽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귀보다 더 강하신 예수님을 의지하고 회개할 때 우리를 괴롭히고 우리를 비참하게 하는 마귀가 쫓겨나게 됩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더 강한 자’ 되신 예수님을 더욱 힘있게 붙들고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기를 기도합니다.
22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귀신 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며 보게 된지라.” 어떤 사람들이 귀신 들려 눈이 멀고 말을 못하는 사람을 예수님 앞으로 데려왔습니다. 아무 것도 볼 수 없고, 말도 못하니 이 사람은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 원인이 귀신의 짓이라는 것입니다. 귀신이 이 사람을 이렇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귀신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고귀한 인간을 파괴시키고, 비참하게 만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들과의 관계를 단절시켜 버립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고 귀신을 쫓아내어 주심으로 치료해 주셨습니다. 귀신이 나가자 그의 눈은 아름다운 세상을 보게 되었고, 큰 소리로 마음껏 말도 하고, 노래도 불렀습니다. 그는 얼마나 기쁘고 감사했을까요? 이를 본 많은 사람들은 놀라며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 즉 메시아이심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답답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무리가 다 놀라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라고 말하는데 바리새인들은 듣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바알세불은 사탄의 별명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사탄의 힘을 빌어서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고 사탄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들에 대해서 요한복음 8:44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예수님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몰아낸다는 바리새인들의 말이 어떤 점에서 모순되는지 말씀해주십니다. 25-2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만일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어떻게 그의 나라가 서겠느냐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되리라.” 분쟁하는 모임이나 가정은 설 수 없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하나가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2-3은 말씀합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반면에 사탄의 역사는 분열시키는 것입니다. 사탄은 자꾸 분란을 일으켜서 전쟁을 일으키고 모임을 깨뜨리고 가정을 파괴합니다. 서로 약점을 헐뜯고 비난하여 싸움을 하도록 부추깁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은 사탄의 왕국을 유지하고 확장하기 위해서 똘똘 뭉칩니다. 만일 귀신들이 서로 싸우면 마귀의 왕국은 저절로 무너지게 되겠지요?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되리라” 만일 예수님이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바리새인들의 제자들은 누구를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인가 반문하십니다. 고대 문헌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하면 당시 유대교에서 귀신을 쫓아낸 기록은 극히 드물다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귀신을 힘입어 귀신을 몰아낸다고 주장하면 마땅히 그 제자들이 비난하고 정죄할 것입니다.
2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예수님이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이미 그들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구체적인 증거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마음에 하나님 나라가 있습니다. 세상에 214개나 되는 나라들이 있지만 영적으로 보면 두 종류의 나라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사탄의 나라입니다. 사탄의 나라는 사탄이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우리는 죄와 사탄의 다스림을 받던 데서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로 옮겨졌습니다. 사탄의 지배를 받을 때 하나님께 반항하며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았습니다. 죄와 죽음의 권세에 사로잡혀서 항상 허무와 무의미와 정욕과 이기심을 따라 살았습니다. 교만했습니다. 귀신은 사람에게 붙어 있습니다. 심하면 사람 안에 들어와 그를 억압하고 끌고 다닙니다. 담배나 술 중독에 빠져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합니다. 거짓말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고 잘 합니다. 귀신에 사로잡히면 나중에는 우울해지고 죽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힙니다. 비정상적인 생각이나 행동을 하도록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귀신의 역사를 잘 분별하고 싸워야 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면 귀신이 나가고 힘을 쓰지 못합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죄사함을 받고 기쁨과 만족, 삶의 의미와 활력을 찾습니다. 그 후에는 예수님이 주신 멍에를 메고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을 배우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귀신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고 기쁨을 얻고 은혜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까? 29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이 비유에서 ‘사람’은 예수님을, ‘강한 자’는 사탄을, ‘세간’은 사탄에게 사로잡힌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사람이 어느 집에 들어가 세간을 강탈하려면 집 주인을 결박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사탄을 결박하시고 사람들 속에 있는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성령을 힘입어 사탄을 제압하시고 귀신들을 몰아내셨습니다. 또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사탄의 권세를 박살내시고 궁극적으로 승리하셨습니다. 사탄을 결박하신 예수님은 이제 사탄에게 속한 사람을 한 사람씩 구원해내고 계십니다. 그래서 천국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들에 의해 침노를 당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권세로 귀신을 쫓아내야 합니다.
에베소서 6장 11,12절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귀를 이기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사탄에 사로잡힌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영적인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말씀의 검으로 싸우면 사탄의 세력을 이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믿는 신자들에게 권세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구원 역사를 섬겨야 합니다.
30절을 보십시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싸움을 할 때 중간지대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반대하든지 그의 편이 되어 싸우던지 둘 중의 하나만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예수님 편에 서서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예수님께 모으고자 노력합니다. 사람들에게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심고 사랑을 베풀어서 예수님께 인도합니다. 반면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을 대적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비방하고 예수님께 모이지 못하도록 흩어버립니다. 당신은 어느 편에 서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님 편에 선 사람들로서 온 라인 수양회에도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모으기를 기도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사탄 편에 서서 사람들을 흩어버리는 일을 했습니다. 그들은 사사건건 예수님이 행하신 일에 태클을 걸고 비방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모이는 것을 훼방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무서운 경고의 말씀을 하십니다.
31,3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예수님은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또한 말로 예수님을 거역하는 자도 사하심을 얻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어떤 죄를 지었더라도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면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세상의 모든 죄는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있습니다. 그 죄는 성령을 모독하는 죄입니다. 고의적으로 성령을 거역하는 죄입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은 죄를 책망하고 회개 시키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이 찔림을 받고 감동을 받아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런데 이런 성령의 역사를 알고 느끼면서도 강퍅한 마음으로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용서를 받아들이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용서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성령의 역사를 모독하고 용서받기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들은 좋지 않은 나무들입니다. 34,35절을 보십시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사람은 자신이 하는 말로서 그의 됨됨이를 나타냅니다. 악한 말을 하는 사람은 마음에 악한 것이 가득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악한 말을 합니다. 선한 말을 하는 사람은 그 마음에 선한 것이 가득하기 때문에 무의식중에도 선한 말을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말을 할 때마다 독한 말을 했습니다. 말로 사람들의 마음에 의심과 회의를 심었습니다. 그들이 독한 말을 하는 것은 그들이 ‘독사의 자식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또 경고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36,37).” 말은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줍니다. 좋은 말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지만 나쁜 말은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죄에 빠뜨립니다. 악플로 인해서 자살한 연예인들과 체육인들이 많습니다. 고민정 선수는 배구를 하는 분인데 악플러가 “발로 해도 너보다 잘하겠다”는 말까지 들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결국 견디다 못해 목숨을 끊었습니다. 사람의 말이 중요한 것은 우리의 뇌가 그 말대로 행동하라고 지시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 그 사람이 말한 것을 토대로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말이 심판의 근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 날에는 적극적으로 행한 악한 말뿐만 아니라 생각 없이 지껄인 부주의한 말까지도 유죄 선고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의 말, 사랑의 말, 은혜의 말을 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진리를 알고 하나님을 알도록 해야 합니다. 위로와 용기를 주는 말을 해야 합니다. 골로새서 4장 6절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로 했습니다. 이런 말을 하려면 우리의 내면이 근본적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좋은 나무가 되어야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것처럼 우리가 거듭나 새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속사람이 예수님을 닮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듣고 변화를 받아서 소금으로 맛을 내는 것처럼 말을 하고, 말로서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38,39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예수님은 이제까지 많은 표적을 보여주셨습니다. 현장에서 놀라운 표적으로 보고서도 비난하던 그들이 또 다시 예수님께 표적을 보여 달라고 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상태를 악하고 음란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간음한 여인처럼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했습니다. 진리를 따르지 않고 욕심을 따라 행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요나의 표적 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요나의 표적은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 동안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동안 땅에 묻히셨다가 부활하신 사건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사건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표적입니다. 이 십자가와 부활은 우리에게 예수님이 메시아이신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정죄를 받게 될 것입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가 마지 못해 전하는 말을 듣고도 회개하였습니다. 남방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습니다. 솔로몬보다 더 크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정죄를 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 대해 또 경고하십니다. 43-45절을 보십시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 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마음을 질서있게 정리했습니다. 청소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마음을 이 상태로 두게 되면 악한 귀신 일곱이 들어가서 거함으로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깨끗함을 받은 후에 가만히 있으면 안 됩니다. 적극적으로 마음을 말씀으로 채우고 성령의 다스림을 받으면서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마음을 청소만하고 가만히 있으면 다시 마음이 허전해지고 죄의 소욕으로 충만해 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빈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야 합니다. 골로새서 3:16은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소생케 하는 영적 영양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뜨거워지고 힘이 솟구칩니다. 기도와 찬양을 통해서 주님과 교제에 힘써야 합니다. 그때 주님은 우리 마음에 소원을 주시고 비전을 주십니다. 열정을 주시고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들은 한 가족입니다. 예수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정으로 돌아와 가장 노릇을 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때 한 사람이 예수님께 여짜왔습니다.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그러자 예수님이 그 사람에게 이르셨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들을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로 모시고 그들과 함께 하나님의 일을 하십니다. 대적이 많은 세상에서 그들은 예수님의 위로요 기쁨이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함으로 힘을 얻고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셨습니다. 우리는 함께 하는 영적인 가족들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섬겨야 합니다. 어려움과 환난이 많은 세상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동역자들은 너무 사랑스럽고 소중합니다. 소망을 가질 수 없는 악한 세대 속에서 우리는 제자들로 인해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가족으로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가운데 이 시대의 소망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동역자들, 양들을 영적인 가족들로서 소중하게 여겨야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덧입고 일하신 예수님을 배웠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를 유혹하는 귀신의 세력과 싸우기를 원하십니다. 또 귀신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구원하는 역사에 쓰고자 하십니다. 이번 온라인 여름수양회에 양들을 초청하고 말씀이 강력하게 역사하도록 기도합시다. 하나님께서 말씀 강사님들에게 성령의 권능을 덧입혀 주셔서 말씀을 힘있게 전하며, 마귀의 권세에 시달리는 영혼들을 구원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마태복음 12:22-50
요절 | 마태복음 12:29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우리는 각자 변화되지 않는 문제, 오래된 죄문제가 있습니다. 나쁜 습관이 있습니다. 자신도 힘들고, 곁에 있는 사람들도 힘들게 하는 연약함이 있습니다. 이런 우리의 모든 죄와 연약함 뒤에는 마귀의 세력이 있습니다. 오늘 제목처럼 마귀는 ‘강한 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귀 앞에 꼼짝 못하고 당하고 삽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귀보다 더 강하신 예수님을 의지하고 회개할 때 우리를 괴롭히고 우리를 비참하게 하는 마귀가 쫓겨나게 됩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더 강한 자’ 되신 예수님을 더욱 힘있게 붙들고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기를 기도합니다.
22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귀신 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며 보게 된지라.” 어떤 사람들이 귀신 들려 눈이 멀고 말을 못하는 사람을 예수님 앞으로 데려왔습니다. 아무 것도 볼 수 없고, 말도 못하니 이 사람은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 원인이 귀신의 짓이라는 것입니다. 귀신이 이 사람을 이렇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귀신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고귀한 인간을 파괴시키고, 비참하게 만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들과의 관계를 단절시켜 버립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고 귀신을 쫓아내어 주심으로 치료해 주셨습니다. 귀신이 나가자 그의 눈은 아름다운 세상을 보게 되었고, 큰 소리로 마음껏 말도 하고, 노래도 불렀습니다. 그는 얼마나 기쁘고 감사했을까요? 이를 본 많은 사람들은 놀라며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 즉 메시아이심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답답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무리가 다 놀라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라고 말하는데 바리새인들은 듣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바알세불은 사탄의 별명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사탄의 힘을 빌어서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고 사탄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들에 대해서 요한복음 8:44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예수님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몰아낸다는 바리새인들의 말이 어떤 점에서 모순되는지 말씀해주십니다. 25-2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만일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어떻게 그의 나라가 서겠느냐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되리라.” 분쟁하는 모임이나 가정은 설 수 없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하나가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2-3은 말씀합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반면에 사탄의 역사는 분열시키는 것입니다. 사탄은 자꾸 분란을 일으켜서 전쟁을 일으키고 모임을 깨뜨리고 가정을 파괴합니다. 서로 약점을 헐뜯고 비난하여 싸움을 하도록 부추깁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은 사탄의 왕국을 유지하고 확장하기 위해서 똘똘 뭉칩니다. 만일 귀신들이 서로 싸우면 마귀의 왕국은 저절로 무너지게 되겠지요?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되리라” 만일 예수님이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바리새인들의 제자들은 누구를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인가 반문하십니다. 고대 문헌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하면 당시 유대교에서 귀신을 쫓아낸 기록은 극히 드물다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귀신을 힘입어 귀신을 몰아낸다고 주장하면 마땅히 그 제자들이 비난하고 정죄할 것입니다.
2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예수님이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이미 그들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구체적인 증거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마음에 하나님 나라가 있습니다. 세상에 214개나 되는 나라들이 있지만 영적으로 보면 두 종류의 나라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사탄의 나라입니다. 사탄의 나라는 사탄이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우리는 죄와 사탄의 다스림을 받던 데서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로 옮겨졌습니다. 사탄의 지배를 받을 때 하나님께 반항하며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았습니다. 죄와 죽음의 권세에 사로잡혀서 항상 허무와 무의미와 정욕과 이기심을 따라 살았습니다. 교만했습니다. 귀신은 사람에게 붙어 있습니다. 심하면 사람 안에 들어와 그를 억압하고 끌고 다닙니다. 담배나 술 중독에 빠져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합니다. 거짓말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고 잘 합니다. 귀신에 사로잡히면 나중에는 우울해지고 죽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힙니다. 비정상적인 생각이나 행동을 하도록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귀신의 역사를 잘 분별하고 싸워야 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면 귀신이 나가고 힘을 쓰지 못합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죄사함을 받고 기쁨과 만족, 삶의 의미와 활력을 찾습니다. 그 후에는 예수님이 주신 멍에를 메고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을 배우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귀신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고 기쁨을 얻고 은혜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까? 29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이 비유에서 ‘사람’은 예수님을, ‘강한 자’는 사탄을, ‘세간’은 사탄에게 사로잡힌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사람이 어느 집에 들어가 세간을 강탈하려면 집 주인을 결박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사탄을 결박하시고 사람들 속에 있는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성령을 힘입어 사탄을 제압하시고 귀신들을 몰아내셨습니다. 또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사탄의 권세를 박살내시고 궁극적으로 승리하셨습니다. 사탄을 결박하신 예수님은 이제 사탄에게 속한 사람을 한 사람씩 구원해내고 계십니다. 그래서 천국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들에 의해 침노를 당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권세로 귀신을 쫓아내야 합니다.
에베소서 6장 11,12절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귀를 이기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사탄에 사로잡힌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영적인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말씀의 검으로 싸우면 사탄의 세력을 이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믿는 신자들에게 권세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구원 역사를 섬겨야 합니다.
30절을 보십시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싸움을 할 때 중간지대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반대하든지 그의 편이 되어 싸우던지 둘 중의 하나만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예수님 편에 서서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예수님께 모으고자 노력합니다. 사람들에게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심고 사랑을 베풀어서 예수님께 인도합니다. 반면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을 대적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비방하고 예수님께 모이지 못하도록 흩어버립니다. 당신은 어느 편에 서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님 편에 선 사람들로서 온 라인 수양회에도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모으기를 기도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사탄 편에 서서 사람들을 흩어버리는 일을 했습니다. 그들은 사사건건 예수님이 행하신 일에 태클을 걸고 비방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모이는 것을 훼방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무서운 경고의 말씀을 하십니다.
31,3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예수님은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또한 말로 예수님을 거역하는 자도 사하심을 얻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어떤 죄를 지었더라도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면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세상의 모든 죄는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있습니다. 그 죄는 성령을 모독하는 죄입니다. 고의적으로 성령을 거역하는 죄입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은 죄를 책망하고 회개 시키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이 찔림을 받고 감동을 받아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런데 이런 성령의 역사를 알고 느끼면서도 강퍅한 마음으로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용서를 받아들이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용서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성령의 역사를 모독하고 용서받기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들은 좋지 않은 나무들입니다. 34,35절을 보십시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사람은 자신이 하는 말로서 그의 됨됨이를 나타냅니다. 악한 말을 하는 사람은 마음에 악한 것이 가득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악한 말을 합니다. 선한 말을 하는 사람은 그 마음에 선한 것이 가득하기 때문에 무의식중에도 선한 말을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말을 할 때마다 독한 말을 했습니다. 말로 사람들의 마음에 의심과 회의를 심었습니다. 그들이 독한 말을 하는 것은 그들이 ‘독사의 자식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또 경고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36,37).” 말은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줍니다. 좋은 말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지만 나쁜 말은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죄에 빠뜨립니다. 악플로 인해서 자살한 연예인들과 체육인들이 많습니다. 고민정 선수는 배구를 하는 분인데 악플러가 “발로 해도 너보다 잘하겠다”는 말까지 들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결국 견디다 못해 목숨을 끊었습니다. 사람의 말이 중요한 것은 우리의 뇌가 그 말대로 행동하라고 지시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 그 사람이 말한 것을 토대로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말이 심판의 근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 날에는 적극적으로 행한 악한 말뿐만 아니라 생각 없이 지껄인 부주의한 말까지도 유죄 선고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의 말, 사랑의 말, 은혜의 말을 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진리를 알고 하나님을 알도록 해야 합니다. 위로와 용기를 주는 말을 해야 합니다. 골로새서 4장 6절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로 했습니다. 이런 말을 하려면 우리의 내면이 근본적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좋은 나무가 되어야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것처럼 우리가 거듭나 새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속사람이 예수님을 닮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듣고 변화를 받아서 소금으로 맛을 내는 것처럼 말을 하고, 말로서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38,39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예수님은 이제까지 많은 표적을 보여주셨습니다. 현장에서 놀라운 표적으로 보고서도 비난하던 그들이 또 다시 예수님께 표적을 보여 달라고 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상태를 악하고 음란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간음한 여인처럼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했습니다. 진리를 따르지 않고 욕심을 따라 행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요나의 표적 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요나의 표적은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 동안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동안 땅에 묻히셨다가 부활하신 사건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사건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표적입니다. 이 십자가와 부활은 우리에게 예수님이 메시아이신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정죄를 받게 될 것입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가 마지 못해 전하는 말을 듣고도 회개하였습니다. 남방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습니다. 솔로몬보다 더 크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정죄를 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 대해 또 경고하십니다. 43-45절을 보십시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 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마음을 질서있게 정리했습니다. 청소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마음을 이 상태로 두게 되면 악한 귀신 일곱이 들어가서 거함으로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깨끗함을 받은 후에 가만히 있으면 안 됩니다. 적극적으로 마음을 말씀으로 채우고 성령의 다스림을 받으면서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마음을 청소만하고 가만히 있으면 다시 마음이 허전해지고 죄의 소욕으로 충만해 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빈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야 합니다. 골로새서 3:16은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소생케 하는 영적 영양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뜨거워지고 힘이 솟구칩니다. 기도와 찬양을 통해서 주님과 교제에 힘써야 합니다. 그때 주님은 우리 마음에 소원을 주시고 비전을 주십니다. 열정을 주시고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들은 한 가족입니다. 예수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정으로 돌아와 가장 노릇을 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때 한 사람이 예수님께 여짜왔습니다.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그러자 예수님이 그 사람에게 이르셨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들을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로 모시고 그들과 함께 하나님의 일을 하십니다. 대적이 많은 세상에서 그들은 예수님의 위로요 기쁨이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함으로 힘을 얻고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셨습니다. 우리는 함께 하는 영적인 가족들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섬겨야 합니다. 어려움과 환난이 많은 세상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동역자들은 너무 사랑스럽고 소중합니다. 소망을 가질 수 없는 악한 세대 속에서 우리는 제자들로 인해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가족으로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가운데 이 시대의 소망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동역자들, 양들을 영적인 가족들로서 소중하게 여겨야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덧입고 일하신 예수님을 배웠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를 유혹하는 귀신의 세력과 싸우기를 원하십니다. 또 귀신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구원하는 역사에 쓰고자 하십니다. 이번 온라인 여름수양회에 양들을 초청하고 말씀이 강력하게 역사하도록 기도합시다. 하나님께서 말씀 강사님들에게 성령의 권능을 덧입혀 주셔서 말씀을 힘있게 전하며, 마귀의 권세에 시달리는 영혼들을 구원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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