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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020mt18m(12:1-21)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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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65회 작성일 20-08-02 12:45

본문

2020년 마태복음 제 18 강
말씀 | 마태복음 12:1-21
요절 | 마태복음 12:20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 그는 안식일에 한 손 마른 자를 고쳐주십니다. 이로 인해 목숨의 위협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십니다. 상하고 꺼져가는 사람들에게 소망을 두고 도우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 체험한 사람들로서 연약하고 상한 사람들을 끝까지 감당하며 예수님을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제사보다 자비를 원하시는 하나님(1-8). 그 때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님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라고 항의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며 변호해 주셨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 한 자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었습니다.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성전보다 더 크십니다. 7,8절을 보십시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호세아 6장 6절을 인용하여 바리새인들의 잘못을 지적하십니다. 예수님이 진정으로 크신 이유는 제사보다 자비를 원하시고 베푸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헌신된 종교생활을 했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읽지 못했습니다. 수많은 제사를 드렸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비로운 마음은 없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었을 때 위선을 행하였습니다. 그들은 위선으로 인해 신앙생활을 무가치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연구하고 해석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존경을 받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들의 신앙생활이 형식화되고 굳어버렸습니다. 율법은 사랑을 실천하도록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자비’란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는 것입니다. 얽매여 있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기를 기뻐하십니다. 죄에 얽매이고 인생의 무거운 짐에 눌린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 주어서 참된 안식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제정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런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알고 예수님 안에서 주일을 보내면서 참된 자유와 평안을 누려야 합니다. 주일에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고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가르치며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섬기고 사랑해야 합니다. 제사보다 자비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곤경에 처한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주일을 보내야 합니다.

  둘째, 한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예수님(9-14). 예수님이 거기에서 떠나 그들의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고발하려 하여 물었습니다.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그들은 예수님이 한쪽 손 마른 사람을 고칠 줄을 알고 선수를 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반문하십니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그들은 안식일에 힘이 들 정도로 무거운 짐을 들지 못하도록 규정했지만 양이 구덩이에 빠지면 끌어내었습니다. 양을 들려면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자기 유익과 양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주저없이 양을 구덩이에서 건져내었습니다. 양이 그들에게 큰 재산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회당에서 한쪽 손 마른 사람을 안식일에 고쳐주는 것이 불법이라며 감시를 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양보다 훨씬 더 귀합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습니다. 예수님은 한쪽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셨습니다. “손을 내밀라.”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삐쩍 마른 손을 내민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누가 자신의 치부를 사람들 앞에 드러내놓고 싶겠습니까? 자의식과 열등감이 심한 사람일수록 더욱 내놓기 어렵습니다. 마음이 건강한 사람이라면 별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마른 손으로 인해서 놀림을 많이 받았을 것이고 상처가 있을 것입니다. 마음이 위축되고 어떤 소원도 열정도 말랐을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한 손 마른 사람의 이런 심정을 배려한다면, 몰래 고쳐주시는 것이 옳지 않을까요? 왜 많은 사람들이 보도록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예수님은 그의 마음에 자기 결정 능력을 회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또한 그의 마음에 낫고자 하는 강렬한 소원을 불러일으키고 그 마음을 치료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자애로운 얼굴과 그 말씀을 들을 때에 그의 마음이 살아났습니다. 용기가 생겼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치료하기 원한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는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고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사랑과 권능을 믿고 마른 손을 내밀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13b).” 사람에게는 누구나 한 가지씩 마른 손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록 마음 깊은 곳에 감추어 둔 치부가 있습니다. 이것을 언제까지나 감추고 있으면 고침을 받지 못합니다. 믿음으로 병든 손, 병든 마음을 주님께 내밀어야 합니다. 어두운 부분이 빛 가운데 드러나면 주님이 깨끗하게 고쳐주십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 주님은 죄사함을 주시고 자유함을 주십니다. 우리의 병든 곳을 내밀 때마다 치유되어서 건강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회복하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두 눈으로 기적의 현장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행동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거늘” 그들은 회개해야 마땅한데 도리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을 죽이고자 의논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셨습니다. 선한 목자의 사랑을 목격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병을 고치시고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일하셨습니다. 사람들의 인기나 영광에는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오직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을 잘 이룰 수 있을까 하는 것에만 관심을 두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 방법은 이사야 말씀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사 42:1-4). 18-21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메시아는 어떠합니까?

  첫째,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 사랑하는 자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물 위에 올라오실 때에도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셨고(3:17), 수제자들과 변화 산에 올라가셨을 때에도 똑같이 말씀하셨습니다(17:5). 예수님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으셨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이는 예수님도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사랑하셨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무슨 일이든지 임의로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일하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성령을 힘입어 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수많은 병자들을 치유하시고 귀신들린 자들을 온전케 하셨습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리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은 예수님 자신의 힘으로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지만 완전한 인간이 되셨기 때문에 성령의 능력을 덧입지 않고는 이런 일을 하실 수 없었습니다. 오직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서 하신 것입니다. 이를 잘 알았던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자신의 설득력 있는 지혜로 하지 않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일을 했습니다(고전2:4).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능력 있는 하나님의 종이 되려면,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 되려면 성결해야 하고, 어찌하든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소원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주님의 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셋째, 예수님은 들레지 않고, 소리 내지 않고 일하셨습니다.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19).” 예수님은 마음이 상한다고 사람들과 다투지 않으셨습니다. 감정대로 행동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조용히 일하셨습니다. 복음역사를 위해서는 대적들과 싸우셨지만, 그런 이유가 아니면 다투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받고자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셨습니다. 어찌하든지 자신은 감추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셨습니다. 인간의 부패한 마음에는 허영심이 있습니다. 조금 무언가를 하면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조용히 일하신 예수님, 다투거나 들레지 않으신 예수님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할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무익한 종으로 주님의 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넷째, 예수님은 상한 갈대라도 꺾지 않으셨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20)” ‘갈대’는 약함의 대명사입니다. 파스칼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말했습니다. 셰익스피어는 “여자, 그대 이름은 갈대”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은 갈대와 같이 연약한 형제들이 많습니다. 갈대는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이리저리 흔들립니다. 강풍이 불면 부러집니다. 하물며 상한 갈대는 그 연약함이 어떠하겠습니까? 상한 갈대는 꺾어버리는 것이 속편합니다. 오늘날 세계화와 함께 자본주의는 엄청난 경쟁을 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경쟁에서 패배하여 상한 갈대와 같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경쟁에서 이긴 사람은 위로 올라 갈수록 극소수에 불과하고 거의 대부분이 경쟁에서 패배하기 때문에 거의 모든 사람들이 상한 갈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인간은 죄로 인해 상한 갈대가 되었습니다. 농담에 상처를 받고 악플에 상처 받고 정치인들의 말에 상처를 받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말에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그러면 의욕을 잃고 무기력해집니다. 무엇을 해보고 싶은 소원을 상실하여 쓸모없게 되어 버립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회복될 수 없기 때문에 소망이 없습니다.

  마태는 상한 갈대처럼 인생이 부러져 있었습니다. 자책과 자괴감, 그리고 사람들의 비난과 욕설로 꺾였습니다. 무너지고 짓밟힌 삶을 살았습니다. 다시 일어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의 영혼은 삶의 소망을 잃고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를 제자로 받아주시고 그를 감당하여 성자마태가 되게 하셨습니다. 인류를 밝히는 등불이 되게 하셨습니다.

  ‘꺼져가는 심지’는 기름이 닳아서 더 이상 불꽃을 피울 수 없습니다. 메케한 그을음 냄새를 피우며 제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꺼져가는 심지는 빨리 꺼버리고 싶습니다. 심지가 꺼져가는 것은 기름이 없거나, 심지가 굳어버려서 기름이 올라오지 못할 때입니다. 인생을 지탱하고 밝혀줄 기름에 해당하는 것이 그 사람의 내면에 없습니다. 게다가 오래 불을 밝히다보니 생각이 굳어버리고 마음이 피곤해져서 딱딱해 버린 것입니다. 여기다가 시련의 바람이 불기까지 합니다. 이럴 때 그 영혼은 꺼지고 암흑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도와주십니까? 소망 없다고 훅 불어 꺼버리지 않으십니다. 바람을 막아주십니다. 그리고 성령의 기름을 부어주십니다. 성령의 기름은 삶의 이유와 동기와 힘을 줍니다. 굳어진 마음과 생각을 깨뜨려서 부드럽게 하십니다. 변화된 세상을 감당할 새 마음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성령의 역사를 받아들일 수 있는 부드러운 마음을 주십니다. 고난을 통해서 말씀에 순종하도록 역사하십니다. 그때 그는 다시 그 영혼이 빛을 발하고 활활 타올라 다른 사람들을 밝힐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나로 하여금 많은 인내와 기도를 하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나를 정말로 위대하게 만드는 고마운 존재입니다. 또 그는 틀림없이 대기만성의 위대한 사람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가장 감당하기 힘들었던 사람은 나의 십자가인 동시에 나의 자랑이며 면류관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빨리 변화된 이들로 인해서만 감사할 것이 아니라 천천히 변화되어가고 있는 이들로 인해서도 감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우리를 섬겨 변화시켜 주신 주님을 기억하면서 좀 더 인내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생각하며 배울 때 인내할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처럼 소망을 둘 수 없는 우리 각 사람에게도 소망을 두고 키우십니다. 어떤 경우에도 소망을 끊지 않으십니다. 작은 소망의 불길이 있으면 살려나가십니다. 천로역정에서 크리스천이 한 방에 들어갔습니다. 벽난로에 불이 활활 타고 있었고, 그 앞에서 한 사람이 불을 끄기 위해서 물을 끼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불은 꺼지지 않고 더 뜨겁게 타올랐습니다. 이상하게 여긴 크리스천은 벽 뒤쪽으로 갔습니다. 그곳에는 기름통을 들고 불이 꺼지지 않도록 계속해서 기름을 붓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불을 끄고자 물을 끼얹고 있는 사람은 사탄이고, 불이 꺼지지 않도록 기름을 붓고 있는 사람은 예수님이십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각 사람의 마음에 불신과 회의를 심어서 성령의 불을 끄고자 합니다. 영적 소원을 꺼버리고자 애를 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소망을 끊지 않으시고 계속해서 성령의 기름을 부어주십니다. 그래서 소망이 없던 사람이 살아나서 쓸모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하십니다. 한 목자님은 소망이 없던 양을 10년 동안 붙잡고 섬기셨습니다. 그랬을 때 그가 살아나고 하나님의 역사에 귀히 쓰임 받고 있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은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버림받고 비참한 인생을 살아가는 이방인들도 예수님께 대한 소문을 듣고 몰려들게 됩니다. 그동안 소망을 둘 수 없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고침 받고 충성된 주님의 일꾼이 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나 자신이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았는데, 주님의 도우심으로 건강하게 되고 사람을 살리는 목자의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세상에서는 소망을 가질 수 없더라도, 예수님 안에서는 그 누구도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모든 사람들의 참된 소망이 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자였습니다. 인생의 짐과 죄로 인해서 상하고 소망이 없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 인해서 우리는 생명을 얻고 살아났습니다. 힘을 얻고 자기를 꾸리며 개척하며 다른 사람을 돕는 목자로 살고 있습니다. 이 은혜를 받은 우리가 더욱 예수님을 배우고 힘있게 섬기는 제자로 살기를 기도합니다. 코로나 19로 인해서 영상으로 모임을 하고 있습니다. 이때 중요한 것이 내용, 콘텐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무한한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말씀을 잘 연구하고 소화해서 생명을 살리는 역사에 귀히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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