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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020mt14(9:1-17)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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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78회 작성일 20-07-05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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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마태복음 제 14 강
말씀 | 마태복음 9:1-17
요절 | 마태복음 9:13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각종 병을 치료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바람과 파도를 말씀으로 잔잔하게 하셨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죄는 하나님만이 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구원자이십니다. 아담의 타락 이래 인간은 죄와 사탄의 노예로 살았습니다.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사명을 잃고, 먹고 살기 위해 사는 인생들이 되었습니다. 인생을 사는 동안 각종 질병과 고통, 살인과 전쟁, 음란과 사기, 무기력과 허무 등으로 고생하다가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인간 고통의 근본인 죄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시간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죄 사함의 은혜를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1-8).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 가버나움에 이르셨습니다. 사람들이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마가복음 2장에 보면 그들은 사람이 많아 집으로 들어갈 수 없자 지붕을 뚫어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에 달아 내렸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이런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하고 있습니다. 그는 사람보다 예수님께 집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믿음은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취한 놀라운 행동은 믿음이 없이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믿음은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는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분임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찾아온 이들에게 큰 상을 주셨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병고침을 받기 위해 나온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님은 중풍을 고치러 나온 이 사람에게 먼저 죄 사함을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난 중풍으로 인해서 그를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었지만 예수님은 그보다 죄가 그를 더 고통스럽게 하고 있음을 보셨습니다. 사람은 코로나 19나 경제가 좋지 않아서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각 사람은 해결되지 않는 죄와 죄의식으로 인해서 시름시름 앓고 있는 것입니다. 경제가 좋아지고 생활이 편리해졌음에도 우리는 과거보다 더 불행하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에게 죄 사함을 주는 것이 중풍에서 고침을 받는 것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하기 때문에 먼저 “작은 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중풍병자는 뇌혈관이 막혀서 전신마비나 반신마비가 온 경우가 많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무기력하게 누워있는 그를 불쌍히 여긴 가족들과 친구들의 도움으로 그는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나아온 그에게 중풍에서 고침만 받아도 좋은데 더 좋은 상을 주십니다. 그의 죄를 사해 주신 것입니다. 죄의 세력에서 그를 자유롭게 하신 것입니다. 중풍 병에서 고침을 받았어도, 죄 사함을 받지 않았다면 예전보다 더 좋지 않은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변화되지 못한 옛 습관 때문에 죄를 짓고 더 심한 병에 고통 할 수 있습니다. 질병에서 나음을 받고 경제여건이 개선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죄를 사함 받고 거룩한 삶, 선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사함을 받고 서로 사랑하며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인생을 살 때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죄사함을 선포하자 서기관들이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 죄 사함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들의 생각이 어떤 점에서 악한 것일까요? 그들은 예수님을 신성모독 죄로 고소하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들의 생각을 고집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의 말씀보다도 자신의 생각을 고집한다면 악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어떻게 도우십니까? 6-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일어나서 걷게 하심으로 자신에게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나타내셨습니다. 세상에서 이 일보다도 통쾌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기 때문에 그 어떤 흉악한 죄인일지라도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사람들은 중풍병자가 죄사함을 받고 일어나 걸어가는 것을 보고 두려워했습니다. 이 두려움은 하나님 앞에서 갖게 되는 경외심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병자를 치유하고 죄 사함의 권세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둘째, 제사보다 긍휼을 원하시는 하나님(9-17). 예수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마태는 하나님의 선물, 하나님의 은혜라는 뜻입니다. 이 이름은 예수님께서 주셨을 것입니다. 마태의 본명은 레위였습니다. 레위는 제사장 자손으로서 그 백성에게 말씀을 전하고 축복하는 존귀한 지파였습니다. 레위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모든 것을 드린 지파입니다. 레위 지파는 자녀들을 철저하게 교육하여 어린 시절부터 성경 암송과 제사 등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몸에 배도록 하였습니다.
  이런 레위가 세리가 된 데에는 소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유대 나라는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청년으로서 자신의 미래를 생각할 때 비전이 없었습니다. 그는 절망 가운데 돈이나 벌고 쾌락을 즐기면서 살고자 방향을 잡았습니다. 세리 레위는 돈을 벌기 위해서 양심도 버리고 민족도 버리고 하나님도 버렸습니다. 세리 레위는 민족의 배반자, 로마의 개, 창기와 같은 죄인이라는 말도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감수하였습니다. 그는 눈물로 호소하는 동족의 피 한 방울이라도 짜내듯이 무정하게 행동하여 돈을 모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돈과 바꾼 천하의 몹쓸 죄인입니다.

  그는 자신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를 직접 기록한 유일한 제자입니다. 보통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감격과 흥분을 잊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의 기록은 너무나 담백합니다. 9절을 다시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세관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세리 레위, 사람들 눈에는 쳐다보기도 싫고, 지나가는 그림자에게 침이라도 뱉고 싶은 그를 예수님은 보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랐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에게 소망을 두고 살라는 것입니다. 돈에 목숨 걸지 말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신 예수님께 소망을 두고 살라는 것입니다. 썩어질 이 땅에 소망두지 말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살라는 뜻입니다. “나를 따르라” 이 예수님의 음성은 마태를 향한 구원의 음성, 사랑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는 주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고 일생 변함없이 따랐습니다. 자기의 목숨을 다하기 까지 외길을 걸어갔습니다. 사실 그가 예수님의 제자로 살 때 동료들 사이에서도 적응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열혈당원 시몬 같은 사람이 볼 때 세리 레위와 한 솥밥을 먹고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시몬은 세리 레위를 영접하기 어렵고 어딘가 마음이 불편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분위기를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습니다. 10,1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마태는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을 집으로 초청하여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세리의 길을 청산하고 예수님의 제자로 살게 된 것을 축하하는 자리였습니다. 많은 세리 친구들과 죄인들을 초청하여 함께 식사를 하며 송별회를 하였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힐난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입장에서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생각은 죄인들을 분리시키고 상종하지 않는 것이 죄의 확산을 막는 최선의 길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비난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이 무엇입니까? 12,1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여기서 건강한 자는 바리새인들처럼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가리키고, 병든 자는 세리와 죄인들을 지칭합니다. 예수님은 의사로서 병든 자를 치료하러 오셨습니다. 죄인도 그 영혼의 병만 치료하면 의롭게 건강하게 살 수 있습니다. 죄인이 변하여 새 사람이 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가능합니다. 세리 레위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마태가 되었듯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거듭나면 새 사람, 새 피조물이 됩니다. 죄를 사함 받고 거듭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사람과 자연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거듭난 사람들이 볼 때 나무 잎사귀가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고, 맷돌을 얹어놓은 것 같던 마음이 구름 위를 날 것 같이 가볍고, 들리지 않던 하나님의 말씀이 꿀 같이 달게 느껴집니다. 무심하던 마음에 사랑이 생기고 생명력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긍휼이 충만한 분이십니다. 그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바리새인과 같이 무심한 사람들은 이 예수님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남이야 어떻게 되건 자기만 잘되면 된다는 자기중심적인 요소와 자기 것을 꾸리고자 하는 이기주의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우리는 말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산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나의 꿈과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은 하지만 자기를 기쁘게 하고자 애를 쓸 때가 많습니다. 이렇게 궤도에서 빗나갈 때 마음의 기쁨을 잃게 됩니다. 우리가 마음에 참된 기쁨을 누리려면 예수님을 중심으로 궤도수정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 죄인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볼 때 불쌍히 여기시며 어찌하든지 돕고자 하십니다. 우리도 이런 주님의 마음을 잘 알고 연약한 자, 죄로 깊이 병든 자라도 긍휼한 마음을 가지고 도와야 합니다.
 
  셋째,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14-17).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당시 금식은 경건의 척도로 여겼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금식일에도 세리와 죄인들과 먹고 마셨습니다. 이것이 요한의 제자들에게도 불만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1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지금은 신랑 되신 예수님이 오셔서 잔치를 하는 때입니다. 그러니 혼인집에서 금식을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교는 기쁨의 종교입니다. 자유롭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빼앗길 때에는 금식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는 금식해야 합니다. 또 내 마음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을 때는 금식해야 합니다.

  16,17절을 보십시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면 덧댄 조각이 수축하면서 낡은 옷을 잡아당깁니다. 이로 인해서 헤어짐이 이전보다 더하게 됩니다. 새 포도주는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않습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으면 새 포도주가 발효하면서 팽창하기 때문에 낡은 가죽부대가 터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합니다. 새 포도주가 발효하면서 팽창해도 새 부대는 탄력이 있기 때문에 터지지 않습니다. 여기서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는 예수님과 더불어 시작된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삶을 가리킵니다. 그 삶의 내용물은 복음입니다. 복음은 새 포도주와 같이 역동적이고 생명력이 넘칩니다. 복음은 죄 사함을 베풀어주고,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하여 새 사람 되게 합니다. 복음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의 스타일과 가치체계를 요구합니다. 그래서 기존의 전통과 가치체계에 얽매여 있으면 복음을 수용할 수 없습니다. 복음을 담으려면 새 부대와 같이 신축성이 있어야 합니다. ‘새 부대’는 새로운 공동체, 제자 공동체를 가리킵니다.

  바리새인들과 요한의 제자들은 기존의 전통과 율법에 얽매여 낡은 가죽 부대와 같았습니다. 마음이 이미 굳어버렸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기 생각과 자기 의가 강하여 배우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한 마디로 성장할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들을 제자로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갈릴리 어부들과 세리 마태처럼 심령이 가난한 자들을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인간적으로 보면 내세울 만한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매너도 없어서 길을 가다가도 배고프면 밀 이삭을 잘라먹었습니다. 식사할 때에는 손을 씻지 않았습니다. 금식도 잘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마음이 순수하고 겸손했습니다. 배우고자 하는 마음, 성장하고자 하는 영적소원이 있었습니다. 생각과 삶의 자세가 유연하고 신축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이고 성장해서 예수님의 권세를 덧입은 사도들이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낡은 가죽 부대가 되는 것입니다. 배우고자 하는 마음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마음이 굳어져서 다 안다고 생각하면 새로운 것을 담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은 성장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겸손히 배우고자 하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심령에 천국이 임합니다. 매일 새롭게 배우는 마음으로 살 때 열매를 맺고 하나님의 신령한 복이 임합니다.
  코로나 19 이후에 이 사회가 많이 변하고 있습니다. 비대면 화상 온라인 강의가 활발해지고 일상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과거의 행동만 고집하면 도태될 수밖에 없습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하면서 배워야 합니다. 또 우리는 사람들이 변화하라고 강요하거나 압력을 넣기보다 내가 먼저 변화하고자 힘을 써야 합니다. 내가 바뀌어야 가정도, 공동체도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자신을 발견하며 회개하고 늘 새로워지길 기도합니다. 복음의 본질은 변하지 않지만 복음을 담는 그릇은 변해야 합니다. 복음의 본질은 변하지 않지만 복음을 전하는 도구는 변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시대에 맞는 변화를 감당하면서 복음을 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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