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021년 요10강(7:1-52) 생수의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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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요한복음 제 10 강
말씀 | 요한복음 7:1-52
요절 | 요한복음 7:37,38
생수의 강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서울에 한강이 있고 산이 있어서 아름답습니다. 강이 흐르기에 1200만명의 시민들이 이 물을 마시고 살아갑니다. 강이 흐르기에 한강 공원에서 사람들이 쉼을 누립니다. 걷거나 뛰거나 자전거를 타고 한강 공원을 다니면 몸만 상쾌한 것이 아니라 속이 다 시원합니다. 예수님은 생수의 강이십니다. 피곤하고 지친 우리가 생수의 강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쉼을 누리며 활력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예수님.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떠나간 후에 예수님은 갈릴리를 두루 다니셨습니다. 유대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유대 지방에는 돌아다니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초막절이 가까워지니 예수님의 형제들이 말하였습니다. “형님은 여기에서 떠나 유대로 가셔서, 거기에 있는 형님의 제자들도 형님이 하시는 일을 보게 하십시오. 알려지기를 바라면서 숨어서 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형님이 이런 일을 하는 바에는 자기를 세상에 드러내십시오.” 그들은 예수님이 유명해짐으로 자신들도 인정받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고 손을 흔들어 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에 목이 말랐습니다.
이 동네 저 동네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서 축제 분위기를 즐기고자 하는데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갈 의향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저자는 5절에서 말합니다.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그들은 예수님의 형제들이었지만 예수님을 보는 영적인 눈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6).” 예수님은 자신이 움직일 때에 대해서 민감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내 때” 또는 “내 시간”은 중요한 주제인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그 때를 향해서 나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기회를 찾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나 사람을 기쁘게 하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합니다. 그럴러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계획보다 하나님의 스케줄을 따라서 살아야만 합니다. 만약 우리가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고자 애를 쓴다면 줏대가 없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 사람은 이렇고 저 사람은 저렇고 이 사람이 원하는 것과 저 사람이 원하는 것이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슨 결정을 할 때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야 하지만, 사람들의 말을 듣는 것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살아 계실 때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당신이 사역을 하면서 가장 후회되는 점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사람들과 만나는 시간보다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을 더 늘렸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할 때 미리 다 정해놓고 기도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 안 세워집니다. 하나님께 묻고 듣고 한 걸음 한 걸음 순종하여 나아갈 때 하나님을 경험하며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결국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할 때 세상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을 때 자신들의 죄가 드러나자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무조건 미워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자신의 죄가 드러날 때 겸손히 회개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때 죄사함과 구원의 은혜를 맛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 후에 예수님은 자신을 나타내지 않고 은밀히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명절 중간에 예수님은 성전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유대인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여기서 ‘글’은 일반적인 글이 아니라 모세 오경, 그리고 모세 오경을 해설한 랍비들의 글들을 말합니다. 당시에 그런 글을 읽고 가르치려면 랍비 학교에서 일정한 교육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교육을 받지 않았는데도 모세 오경을 바탕으로 하였지만 그 가르침이 새로웠고 권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사람들은 “이는 어찜이냐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막 1:27)”라고 말하며 놀랐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들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알 수 없는 기쁨과 힘이 생겼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알아차렸습니다. 예를 들어 모세 오경 해설에서는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고 기록되어 있었는데, 예수님은 “네 원수를 사랑하라”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모세 오경에는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고 되어 있었지만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새로운 가르침은 당시 유대인들로서는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그런 가르침이 예수님 자신이 만들어낸 자기 가르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보면 예수님의 말씀이 옳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아무리 논리적이고 합당한 말처럼 생각되어도 실천해보아야 진리인지 거짓인지 알 수 있습니다. 무디는 순종이 하나님의 뜻을 배우는 가장 좋은 학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내 삶에 적용하여 순종할 때 그 속에 담긴 깊은 진리를 더욱 분명히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서 하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물을 아구까지 채웠고 연회장에게 떠다주라고 말씀에도 순종했습니다. 그랬을 때 물이 포도주로 변화되는 놀라운 역사를 체험했습니다. 이를 통해서 하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는 변화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평생 성경에 대해서 토론하고 공부하는 것보다 말씀에 순종할 때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레위기 19:18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출 23:4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보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지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원수’는 여호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 하나님 아닌 다른 신들을 섬기는 사람을 말합니다. 만일 이스라엘이 원수와 동맹을 맺거나 하면 자기도 모르게 원수들이 섬기는 우상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을 떠나게 됩니다. 그래서 장로들의 유전에는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고 가르쳤습니다(마 5:43). 장로들의 유전은 이스라엘의 믿음을 지켜주는 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법대로 하다 보니 이스라엘은 점점 더 좁아지게 되었습니다. 이웃의 범위가 좁아졌습니다. 바리새인들의 경우는 이웃이 자기들과 같은 바리새인뿐이었습니다. 동시에 자기와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배타적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 눈에 하나님은 완전히 배타적인 신, 아주 좁고 작은 신이 되고 말았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신자들끼리 똘똘 뭉쳐서 교제하다가 새로운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교회 공동체에 들어오는 것을 어렵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고,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원수까지도 예수님을 믿을 때 그 자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a).”
예수님이 볼 때 유대인들은 율법을 공부하고 암송하고 가르치기도 하지만 지키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이 가르치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대신에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자 안식일을 범하였다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22,23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행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행하느니라. 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으로 너희가 내게 노여워하느냐?” 예수님이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것은 율법의 정신을 실천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에 대한 목자의 상한 심정을 가지고 죄 사함과 치유의 역사를 행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역사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합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안식일에 쉼을 갖도록 율법을 주셨습니다. 병자를 온전하게 하는 것이 쉼을 주는 것입니다. 사람이 엿새 동안 힘써 자기 일을 하면 마음과 몸을 소모하게 됩니다. 그 결과 마음과 몸의 균형이 깨어집니다. 무엇보다도 자기 일에 몰두하다 보면 하나님을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한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도 멀어집니다. 그것이 지속되면 사람의 마음과 몸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람이 일만 하다 보면 마음이 삭막해질 수 있습니다. 일이 과중하거나 혹 일정에 밀려 급하게 일을 하고, 사람의 독촉을 받는 일이 계속되다 보면 마음이 급해지고 사나워집니다. 마음이 순하던 사람도 사나워질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순한 마음을 회복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일을 놓고 쉬어야 합니다. 일의 짐, 혹은 사람의 짐을 지다 보면 마음이 눌립니다. 그러면 짜증이 납니다. 사람이 짜증을 내면 자기도 힘들고 다른 사람도 힘들게 합니다. 관계도 파괴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정말 쉼, 곧 모든 짐을 내려놓는 것이 정말 필요합니다. 나의 짐을 매일 지시는 하나님, 내 일의 짐, 사람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내려놓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식일을 주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7:23 “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으로 너희가 내게 화를 내느냐?” 여기서 사람의 전신이란 몸과 마음을 다 합한 것입니다. 사람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건강하게 하는 것, 이것이 안식일을 주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안식일에도 일하십니다. 하나님을 예배할 때 하나님은 우리가 삶에서 겪은 깨어지고 부서지고, 뒤틀린 것들을 고치십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님은 안식일에도 일을 하십니다. 곧 병자를 고치십니다. 이렇게 하시는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주일에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공부하며 교제함으로 쉼을 누리고 힘을 얻어 한 주 동안 즐겁게 일할 수 있습니다.
셋째, 생수의 강 예수님. 사람들 사이에서는 예수님이 과연 그리스도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란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사람들을 그들의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서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보내신 이”, “보내신 이”, “그가 나를 보내셨다”는 말씀이 다섯 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16,18,28,29,33). 이러한 반복은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목적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크신 자비로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사 죄인들을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나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이 나를 위해 보내신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이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죄로부터 구원을 받습니다. 그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37,38절을 보십시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명절 끝 날은 목마름의 문제를 해결해주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가장 크게 감사하는 날입니다. 감사한다는 것은 목마름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목마르면 언제든지 실로암 못에 가서 물을 마실 수 있었습니다. 실로암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인데 곧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지난 한 해에 풍성한 비를 내려주셔서 많은 곡식을 추수하여 창고에 쌓아놓았습니다. 창고 안에는 곡식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바로 이런 때에 예수님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사람들을 초청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반석에서 터져 나온 샘물을 마셨지만, 목마를 때마다 실로암 못에서 물을 떠서 마실 수 있지만, 그들의 목마름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창고에 곡식이 가득 차 있지만, 그것이 사람들에게 참된 만족과 기쁨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반석에서 물을 내셔서 목마름을 해결해주신 사건을 기념하고, 한 해 풍성한 비를 내려주셔서 많은 수확을 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축제를 벌였지만, 백성들의 마음은 더욱더 공허했습니다. 만족함이 없고 오히려 곤고하고 답답했습니다. 그래서 축제가 끝난 후에 백성들은 채워지지 않은 빈 가슴을 안고 방황하다가 죄를 짓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8장에 등장하는 간음 중에 잡힌 여인입니다. 여인은 유부녀이었지만 내면의 영적인 갈증 때문에 한 남자와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물로서 육체의 갈증을 채운다고 해서, 풍성한 소출로 물질적인 갈증을 채운다고 해서,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는다고 해서, 세상에서 성공했다고 해서 목마름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적인 것으로 목마름을 해결하려고 할수록 더욱더 큰 갈증을 느낍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목마름의 근원은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린 데서 온 것이요 채우지 못할 웅덩이를 판 데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려면 예수님을 믿으면 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생수의 강이 그 배에서 흘러나옵니다. 성령님을 생수로 표현했는데 생수는 생명의 물, 곧 생명입니다. 그 생명은 예수님에게서 오는 생명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예수님의 생명이 주어지고 그 생명이 그 사람을 채울 뿐만 아니라, 생명의 강이 되어 흐른다고 합니다. 그 생명이 그 사람 안에 머물러 고여 있지 않고 흐르는 강물처럼 흐른다고 합니다. 강물은 흐르면서 많은 물고기를 키워내고 주위의 나무들에 물을 공급하여 자라게 하고 모든 생명체들을 살게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생명이 그 사람의 배에서 흘러서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어 살게 하고 꽃이 피게 하고 열매가 맺히게 합니다.
오순절 이후 성령이 오셨을 때 사도 베드로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을 때 그 자신 안에 생명과 권능이 가득했습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을 때 삼천 명이 예수님을 믿고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게 된 그 사람들은 각자 가진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풍족하게 되었습니다. 생명이 흐르고 재물이 흐르고 평안함과 기쁨이 흘렀습니다. 사랑이 흐르고 말씀이 흘러 나가야 합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생수의 강을 막는 최대의 적은 죄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죄의 쓰레기를 버리고 생수의 강이 힘차게 흐르도록 기도합시다. 또한 이번 주에 있는 세계선교보고대회를 통해서 우리 가운데 성령의 생수가 넘치게 흐르는 역사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생수의 강이 흐름으로 성장이 멈춘 사람들이 변화되고, 이 사회를 바꾸고 살릴 수 있습니다. 성령을 통한 생수의 강물이 우리 가운데 풍성하게 흐르는 역사가 일어나길 소망합니다.
말씀 | 요한복음 7:1-52
요절 | 요한복음 7:37,38
생수의 강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서울에 한강이 있고 산이 있어서 아름답습니다. 강이 흐르기에 1200만명의 시민들이 이 물을 마시고 살아갑니다. 강이 흐르기에 한강 공원에서 사람들이 쉼을 누립니다. 걷거나 뛰거나 자전거를 타고 한강 공원을 다니면 몸만 상쾌한 것이 아니라 속이 다 시원합니다. 예수님은 생수의 강이십니다. 피곤하고 지친 우리가 생수의 강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쉼을 누리며 활력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예수님.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떠나간 후에 예수님은 갈릴리를 두루 다니셨습니다. 유대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유대 지방에는 돌아다니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초막절이 가까워지니 예수님의 형제들이 말하였습니다. “형님은 여기에서 떠나 유대로 가셔서, 거기에 있는 형님의 제자들도 형님이 하시는 일을 보게 하십시오. 알려지기를 바라면서 숨어서 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형님이 이런 일을 하는 바에는 자기를 세상에 드러내십시오.” 그들은 예수님이 유명해짐으로 자신들도 인정받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고 손을 흔들어 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에 목이 말랐습니다.
이 동네 저 동네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서 축제 분위기를 즐기고자 하는데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갈 의향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저자는 5절에서 말합니다.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그들은 예수님의 형제들이었지만 예수님을 보는 영적인 눈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6).” 예수님은 자신이 움직일 때에 대해서 민감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내 때” 또는 “내 시간”은 중요한 주제인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그 때를 향해서 나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기회를 찾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나 사람을 기쁘게 하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합니다. 그럴러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계획보다 하나님의 스케줄을 따라서 살아야만 합니다. 만약 우리가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고자 애를 쓴다면 줏대가 없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 사람은 이렇고 저 사람은 저렇고 이 사람이 원하는 것과 저 사람이 원하는 것이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슨 결정을 할 때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야 하지만, 사람들의 말을 듣는 것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살아 계실 때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당신이 사역을 하면서 가장 후회되는 점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사람들과 만나는 시간보다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을 더 늘렸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할 때 미리 다 정해놓고 기도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 안 세워집니다. 하나님께 묻고 듣고 한 걸음 한 걸음 순종하여 나아갈 때 하나님을 경험하며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결국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할 때 세상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을 때 자신들의 죄가 드러나자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무조건 미워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자신의 죄가 드러날 때 겸손히 회개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때 죄사함과 구원의 은혜를 맛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 후에 예수님은 자신을 나타내지 않고 은밀히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명절 중간에 예수님은 성전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유대인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여기서 ‘글’은 일반적인 글이 아니라 모세 오경, 그리고 모세 오경을 해설한 랍비들의 글들을 말합니다. 당시에 그런 글을 읽고 가르치려면 랍비 학교에서 일정한 교육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교육을 받지 않았는데도 모세 오경을 바탕으로 하였지만 그 가르침이 새로웠고 권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사람들은 “이는 어찜이냐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막 1:27)”라고 말하며 놀랐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들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알 수 없는 기쁨과 힘이 생겼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알아차렸습니다. 예를 들어 모세 오경 해설에서는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고 기록되어 있었는데, 예수님은 “네 원수를 사랑하라”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모세 오경에는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고 되어 있었지만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새로운 가르침은 당시 유대인들로서는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그런 가르침이 예수님 자신이 만들어낸 자기 가르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보면 예수님의 말씀이 옳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아무리 논리적이고 합당한 말처럼 생각되어도 실천해보아야 진리인지 거짓인지 알 수 있습니다. 무디는 순종이 하나님의 뜻을 배우는 가장 좋은 학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내 삶에 적용하여 순종할 때 그 속에 담긴 깊은 진리를 더욱 분명히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서 하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물을 아구까지 채웠고 연회장에게 떠다주라고 말씀에도 순종했습니다. 그랬을 때 물이 포도주로 변화되는 놀라운 역사를 체험했습니다. 이를 통해서 하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는 변화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평생 성경에 대해서 토론하고 공부하는 것보다 말씀에 순종할 때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레위기 19:18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출 23:4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보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지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원수’는 여호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 하나님 아닌 다른 신들을 섬기는 사람을 말합니다. 만일 이스라엘이 원수와 동맹을 맺거나 하면 자기도 모르게 원수들이 섬기는 우상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을 떠나게 됩니다. 그래서 장로들의 유전에는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고 가르쳤습니다(마 5:43). 장로들의 유전은 이스라엘의 믿음을 지켜주는 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법대로 하다 보니 이스라엘은 점점 더 좁아지게 되었습니다. 이웃의 범위가 좁아졌습니다. 바리새인들의 경우는 이웃이 자기들과 같은 바리새인뿐이었습니다. 동시에 자기와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배타적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 눈에 하나님은 완전히 배타적인 신, 아주 좁고 작은 신이 되고 말았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신자들끼리 똘똘 뭉쳐서 교제하다가 새로운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교회 공동체에 들어오는 것을 어렵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고,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원수까지도 예수님을 믿을 때 그 자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a).”
예수님이 볼 때 유대인들은 율법을 공부하고 암송하고 가르치기도 하지만 지키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이 가르치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대신에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자 안식일을 범하였다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22,23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행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행하느니라. 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으로 너희가 내게 노여워하느냐?” 예수님이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것은 율법의 정신을 실천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에 대한 목자의 상한 심정을 가지고 죄 사함과 치유의 역사를 행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역사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합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안식일에 쉼을 갖도록 율법을 주셨습니다. 병자를 온전하게 하는 것이 쉼을 주는 것입니다. 사람이 엿새 동안 힘써 자기 일을 하면 마음과 몸을 소모하게 됩니다. 그 결과 마음과 몸의 균형이 깨어집니다. 무엇보다도 자기 일에 몰두하다 보면 하나님을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한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도 멀어집니다. 그것이 지속되면 사람의 마음과 몸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람이 일만 하다 보면 마음이 삭막해질 수 있습니다. 일이 과중하거나 혹 일정에 밀려 급하게 일을 하고, 사람의 독촉을 받는 일이 계속되다 보면 마음이 급해지고 사나워집니다. 마음이 순하던 사람도 사나워질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순한 마음을 회복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일을 놓고 쉬어야 합니다. 일의 짐, 혹은 사람의 짐을 지다 보면 마음이 눌립니다. 그러면 짜증이 납니다. 사람이 짜증을 내면 자기도 힘들고 다른 사람도 힘들게 합니다. 관계도 파괴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정말 쉼, 곧 모든 짐을 내려놓는 것이 정말 필요합니다. 나의 짐을 매일 지시는 하나님, 내 일의 짐, 사람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내려놓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식일을 주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7:23 “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으로 너희가 내게 화를 내느냐?” 여기서 사람의 전신이란 몸과 마음을 다 합한 것입니다. 사람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건강하게 하는 것, 이것이 안식일을 주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안식일에도 일하십니다. 하나님을 예배할 때 하나님은 우리가 삶에서 겪은 깨어지고 부서지고, 뒤틀린 것들을 고치십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님은 안식일에도 일을 하십니다. 곧 병자를 고치십니다. 이렇게 하시는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주일에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공부하며 교제함으로 쉼을 누리고 힘을 얻어 한 주 동안 즐겁게 일할 수 있습니다.
셋째, 생수의 강 예수님. 사람들 사이에서는 예수님이 과연 그리스도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란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사람들을 그들의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서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보내신 이”, “보내신 이”, “그가 나를 보내셨다”는 말씀이 다섯 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16,18,28,29,33). 이러한 반복은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목적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크신 자비로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사 죄인들을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나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이 나를 위해 보내신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이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죄로부터 구원을 받습니다. 그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37,38절을 보십시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명절 끝 날은 목마름의 문제를 해결해주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가장 크게 감사하는 날입니다. 감사한다는 것은 목마름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목마르면 언제든지 실로암 못에 가서 물을 마실 수 있었습니다. 실로암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인데 곧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지난 한 해에 풍성한 비를 내려주셔서 많은 곡식을 추수하여 창고에 쌓아놓았습니다. 창고 안에는 곡식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바로 이런 때에 예수님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사람들을 초청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반석에서 터져 나온 샘물을 마셨지만, 목마를 때마다 실로암 못에서 물을 떠서 마실 수 있지만, 그들의 목마름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창고에 곡식이 가득 차 있지만, 그것이 사람들에게 참된 만족과 기쁨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반석에서 물을 내셔서 목마름을 해결해주신 사건을 기념하고, 한 해 풍성한 비를 내려주셔서 많은 수확을 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축제를 벌였지만, 백성들의 마음은 더욱더 공허했습니다. 만족함이 없고 오히려 곤고하고 답답했습니다. 그래서 축제가 끝난 후에 백성들은 채워지지 않은 빈 가슴을 안고 방황하다가 죄를 짓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8장에 등장하는 간음 중에 잡힌 여인입니다. 여인은 유부녀이었지만 내면의 영적인 갈증 때문에 한 남자와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물로서 육체의 갈증을 채운다고 해서, 풍성한 소출로 물질적인 갈증을 채운다고 해서,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는다고 해서, 세상에서 성공했다고 해서 목마름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적인 것으로 목마름을 해결하려고 할수록 더욱더 큰 갈증을 느낍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목마름의 근원은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린 데서 온 것이요 채우지 못할 웅덩이를 판 데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려면 예수님을 믿으면 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생수의 강이 그 배에서 흘러나옵니다. 성령님을 생수로 표현했는데 생수는 생명의 물, 곧 생명입니다. 그 생명은 예수님에게서 오는 생명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예수님의 생명이 주어지고 그 생명이 그 사람을 채울 뿐만 아니라, 생명의 강이 되어 흐른다고 합니다. 그 생명이 그 사람 안에 머물러 고여 있지 않고 흐르는 강물처럼 흐른다고 합니다. 강물은 흐르면서 많은 물고기를 키워내고 주위의 나무들에 물을 공급하여 자라게 하고 모든 생명체들을 살게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생명이 그 사람의 배에서 흘러서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어 살게 하고 꽃이 피게 하고 열매가 맺히게 합니다.
오순절 이후 성령이 오셨을 때 사도 베드로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을 때 그 자신 안에 생명과 권능이 가득했습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을 때 삼천 명이 예수님을 믿고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게 된 그 사람들은 각자 가진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풍족하게 되었습니다. 생명이 흐르고 재물이 흐르고 평안함과 기쁨이 흘렀습니다. 사랑이 흐르고 말씀이 흘러 나가야 합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생수의 강을 막는 최대의 적은 죄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죄의 쓰레기를 버리고 생수의 강이 힘차게 흐르도록 기도합시다. 또한 이번 주에 있는 세계선교보고대회를 통해서 우리 가운데 성령의 생수가 넘치게 흐르는 역사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생수의 강이 흐름으로 성장이 멈춘 사람들이 변화되고, 이 사회를 바꾸고 살릴 수 있습니다. 성령을 통한 생수의 강물이 우리 가운데 풍성하게 흐르는 역사가 일어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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