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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21년 요7강(5:1-47)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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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87회 작성일 21-05-02 15:24

본문

2021년 요한복음 제 7 강
말씀 | 요한복음 5:1-47
요절 | 요한복음 5:25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세 번째 표적입니다.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를 말씀으로 고쳐 주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는 살아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지 배우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음으로 생명을 얻고 더 풍성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베데스다 못 가에 많은 병자들이 누워서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되었습니다. 천사가 물을 언제 움직일지 알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그 때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또한 물이 움직일 때 물에 1등으로 들어가는 사람만이 나음을 받기 때문에 서로 눈치를 보고 경쟁을 해야 합니다. 몸과 마음의 상처를 안고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싸워야 할 때 그 슬픔이 어떠하겠습니까? 누가 “인생은 꽃보다 아름답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누가 “살아 있는 것은 다 소중하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들에게 “인생은 사느냐 죽느냐의 생존게임”일 뿐입니다. 경쟁에서 이겨 나음을 받은 사람은 기쁘지만 2등부터 나머지는 패배감을 안고 살아가야 합니다. 사람들이 병든 가운데 있지만 각자의 재능이 있고 또 그것을 발휘하면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베데스다는 자비의 집이라는 말과 달리 생존경쟁이 치열한 냉엄한 현실이었습니다. 우리 사회는 베데스다의 축소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38년 된 병자가 있었습니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합니다. 우리 주변만 보아도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우리가 센터를 지은 지가 10년이 되었습니다. 홍대 정문도 동양에서 가장 큰 것으로 바뀌고, 하나 은행도 바뀌었습니다. 삐삐에서 핸드폰으로, 핸드폰에서 스마트 폰으로 바뀌었습니다. 라디오로 정보를 취하던 시대에서 흑백텔레비전으로, 이후에 컬러텔레비전으로, 이제는 텔레비전을 보지 않고 유튜브로 모든 정보를 검색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 많은 변화가 일어났지만 한 자리에서 너무 오랫동안 누워있었기 때문에 그는 누워 있는 자세가 잡혀 있었습니다. 자리는 움푹 들어가고 구걸하며 사는 것이 자연스러워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 말씀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고쳐주실 의향이 있고 능력이 있기 때문에 물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마음에 거룩한 소원을 심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다른 피조물과 달리 말씀만으로 만들지 않으시고 친히 수고하여 빚으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셔서 그와 교제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동참하도록 사람에게 사명을 복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8).”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거룩한 소원을 가지고 사명을 감당할 때 살 맛이 나고 열매가 있습니다. 머리도 좋고 건강한데 거룩한 소원이 없어서 시간을 낭비하는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한 젊은이에게 물어보니 무엇을 하고 싶은 소원이 없다고 합니다. 그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거룩한 소원을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심각한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얻기를 원했을 때 부분적으로 좋았습니다. 그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축복을 감당해야 했지만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서의 거룩한 소원이 사라졌을 때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바벨론에 멸망을 당하고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죄악된 욕망에 끌려 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거룩한 소원을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2:17에 보면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은 무슨 꿈, 무슨 비전을 가지고 살아갑니까? 

  예수님의 질문에 38년 된 병자는 무엇이라고 대답을 했습니까?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7).” 그는 자기를 못에 던져주는 사람이 없다고 불평을 했습니다. 또한 자기가 걸어갈 동안에 다른 사람들은 먼저 내려간다고 사람 탓을 했습니다. 한마디로 사회가 불공정하다는 것입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뛰고 있으니 이 사람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1등을 할 수 없습니다. 그는 세상에 홀로 던져진 외로운 존재요 무능하고 무기력한 존재일 뿐입니다. 이런 안타까운 일이 앞으로도 계속됩니다. 그런데도 그는 아직도 이 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연못에 들어가는 것 밖에는 나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방법의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를 어떻게 도우십니까? 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예수님은 그가 믿음을 보인 것도 아니고, 치료를 요청한 것도 아닌데 일방적으로 그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일어나 보겠느냐고 제안한 것이 아닙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려고 했다거나, 어떤 노력을 한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중요한 이유는 단지 긍휼이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를 통해서 예수님은 자기가 원하는 자를 살릴 권세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21절).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이 그의 병든 부분들을 치료하고 일어날 힘을 주고 일어나 걷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듣는 자에게 생명을 줍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죽은 자도 살아나게 합니다. 예수님은 죽어 장사지낸 지 나흘이 지난 나사로에게 “나사로야 나오라” 말씀하시자 죽은 자가 무덤 속에서 걸어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말씀으로 살리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들으면 믿음이 생기고 무기력한 사람이 힘을 얻고 피곤한 자들이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은 힘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누워 있다면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겠습니다. 목자님들은 도와야 할 사람들이 있는데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면 주님의 말씀을 듣고 일어나야겠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힘이십니다.

  38년 된 병자가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간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병 나은 사람에게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고 책망했습니다. 그는 자기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해서 그렇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그가 누구냐고 묻자 그는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이미 피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후에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믿음을 도우셨습니다.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더 심한 것은 죽음이나 심판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 보다 더 힘든 것은 축복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권투에서 챔피언이 되는 것보다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 더 힘든 것과 같습니다. 우리도 은혜를 받고 그 은혜를 감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은혜를 헛되이 쓰기 쉽습니다. 건강을 주니까 건강한 몸으로 쾌락을 추구합니다. 물질의 복을 주니까 향락을 위해서 씁니다. 권력을 주니까 남을 착취하는데 씁니다. 은사를 주니까 자신을 과시하는데 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헛되이 하지 않으려면 주님께 받은 은혜를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 데에 사용해야 합니다. 이렇게 은혜를 흘려보낼 때 우리의 영이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은혜를 입었을 때마다 이러한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 이 받은 은혜를 주와 이웃을 위해서 어떻게 사용해야할까요?”

  그 사람이 은혜를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기보다 사람을 의지했습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므로 유대인들이 박해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손을 놓고 쉬면 이 우주가 돌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신 것은 사람의 연약함을 알고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안식일 법을 세분화해서 39개의 시행 규칙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주신 정신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인데 이를 알지 못하고 율법을 우상과 같이 받들었습니다. 그 결과 형식과 제도에 얽매여서 병 나은 사람을 책망하고 예수님을 박해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박해하는 유대인들에게 자신이 왜 안식일에 병든 자를 고치는 지, 그리고 자신을 증언하는 분들과 증거들을 말씀하십니다. 19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철저히 아버지께 순종하십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사랑한다면 아버지가 일 하시는 것을 보고 있으면서 놀고먹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십니다.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고 동참하는 것입니다. 또 아버지께서도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십니다. 지금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것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앞장서서 행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사 병든 자들을 고치고, 죄인들의 죄를 사하고 의롭게 하려 하십니다. 죄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구원하여 영생을 주고자 하십니다. 병든 자를 살리는 것은 작은 일이요 더 큰 일 즉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심판하는 권세를 아들에게 맡기셨습니다.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입니다.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않습니다.
 
  24,25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습니다. 그는 심판에 이르지 않습니다.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옮겨졌다는 것은 현재 완료로서 이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고 계속 살고 있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는 자는 영적으로 죽었다 할지라도 살아납니다. 죽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것을 의미합니다. 영혼과 육체의 관계가 단절되면 죽음입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사람은 살아 있으나 영적으로 죽은 자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살아납니다. 듣는다는 말은 받아들인다, 믿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믿는다는 말은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고 순종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을 주는 말씀입니다.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옵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올 것입니다. 왜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란 말 대신 선을 행한 자와 악을 행한 자라고 언급할까요? 참된 신자는 선을 행하는 자, 곧 아들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삶을 사는 자들이고 불신자는 그 반대입니다. 선행과 악행은 각각 믿음과 불신의 열매입니다. 요한계시록 21:8에도 지옥 불에 떨어지는 사람의 목록에 두 번째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인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들은 이미 영생을 얻었고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나 같은 죄인을 대신해서 그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믿는 자들을 살리십니다.

  예수님을 믿을 수 있도록 증거하는 증인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 둘째는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면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증언했습니다. 셋째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역사입니다.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고, 왕의 신하의 아들을 살리시고, 38년 된 병자를 일어나 걷게 하셨습니다. 그는 이 땅에서 죄를 사하시고 그 증거로 중풍병자를 걷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시고 바람과 파도를 잔잔하게 하시고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시고 물 위를 걸으신 것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합니다. 넷째는 성경입니다. 구약 성경은 오실 예수님에 대해서 예언을 했고, 신약은 오신 예수님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는데 이 성경이 바로 예수님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모세 오경을 암송하고 성경을 엄청나게 공부했지만 성경을 믿지 않았습니다. 머리로 공부만 할 뿐이었습니다.성경에 대한 지식이 많다고 해서 예수님을 잘 믿는 것은 아닙니다. 귀신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알고 떠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구주로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속에 거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 속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생을 얻기를 원하지 않고, 사람에게서 영광을 얻기를 원했습니다. 사람들의 인정에 목이 말랐습니다. 물론 우리가 직장에서 승진을 하고 즐겁게 일을 하려면 상사가 성공하도록 섬겨야 합니다. 그래야 나도 인정을 받고 승진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럴려면 하나님 앞에서 충성을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예수님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이들을 고발할 자는 모세입니다. 모세가 예수님에 대해서 기록했는데 그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성경도 믿지 않는데 어찌 예수님의 말씀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성경을 읽고 일대일로 그룹으로 공부하고, 일용할 양식을 먹고, 성경을 암송도 하고 소감도 써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방법에만 의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의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정확하게 듣기 위해서는 평소에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대화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은 성경을 통해서입니다. 그래서 성경공부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아야만 그 분의 음성을 정확하게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에서 자라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할 때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게 되고, 기쁨과 감사가 넘치게 됩니다(골3:16).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할 때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고 문제를 해결할 지혜와 힘이 생깁니다. 우리가 매일 부딪치는 문제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할 때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성경은 이럴 때에 어떻게 하라고 말하는가?’를 생각하고 말씀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는가?’, ‘내가 전에 어떻게 했던가?’, ‘나에게 어떤 유익이 돌아오는가?’를 생각하지 말고 성경 말씀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성령님의 초자연적인 역사가 나타나서, 자신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해결될 수 없는 일이 해결되는 것을 체험할 것입니다. 열매를 맺게 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누리는 가장 큰 축복은 나 자신이 변하는 것입니다. 내가 변화되는 것을 볼 때 아내가 기뻐하고, 자녀들이 행복해 합니다. 내가 변화될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동역자들에게 소망을 줍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습니다. 하나님의 양인 우리는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를 때 생명의 풍성함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하나님께 집중하고 기도에 힘쓰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는 살아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가 지속되어 하나님과 친밀한 사랑의 관계가 깊어지기를 바랍니다.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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