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021년 요5강(4:1-26) 참된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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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요한복음 제 5 강
말씀 | 요한복음 4:1-26
요절 | 요한복음 4:23
참된 예배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사람들이 느끼는 목마름의 근원은 무엇일까요? 생수의 근원되신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이요 그리움입니다. 목마름이 하나님에 대한 예배로 귀결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를 살펴보면 물 문제에서 남편 문제로, 남편 문제에서 예배 문제로 발전합니다. 이 시간 주님께서 우리가 드리는 참된 예배를 받으시고 우리의 목마름을 해갈시켜 주시고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시는데 사마리아를 통과하고자 하십니다. 이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는 사람에 대한 차별이 없습니다. 그는 사람 사이에 있는 장벽을 허물고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러 야곱의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셨습니다. 때가 정오라 몹시 피곤하고 목이 말랐습니다.
이때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을 좀 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주시겠다가 아니라, 무엇을 달라 하시며 여인에게 말을 거십니다. 한 여인의 인생을 바꿔 놓는 위대한 만남이 물 좀 달라는 주님의 부탁으로 시작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 우리가 가진 것을 요구하기도 하십니다. 주께서 우리의 무엇을 빼앗아 가려는게 아니라 우리에게 가장 귀한 선물을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셔서 그렇게 말을 걸어 오십니다. 예수님과 여인과의 대화를 살펴보면 예수님이 여인에 대한 긍휼에 기초해서 말을 거신 것을 알게 됩니다. 요한일서 4:19에 보면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이 주도권을 가지고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먼저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먼저 연락을 하고 먼저 관심을 가지고 다가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여인을 보자마자 영혼의 목마름을 간파하셨습니다. 이 여인에 대한 연민과 긍휼이 먼저 말을 걸게 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사랑에 목이 말라 있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다섯 남자와 결혼을 했었고 다시 여섯째 남자와 살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상처가 있었고 아픔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요청에 대한 여자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굉장히 까칠한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 만큼 마음에 여유가 없습니다. 유대인이 사마리아인을 무시했고, 사마리아 남자는 사마리아 여자를 무시했고 사마리아 여자들은 이 여자를 무시했습니다. 이 여자는 사람들에게 무시를 받으면서 자신의 존재의 가벼움을 느꼈습니다. 자신의 삶에 대해서 비관하고 있고, 별로 소망을 두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들과 관계성이 깨져 있으니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외로웠습니다. 아무도 그녀를 이해해 주고 함께 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정오에 홀로 물을 길으러 나와야 할 만큼 사람들과 관계가 파괴되었습니다. 여인이 차가운 반응을 보이면 대화를 계속 이어나가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여인을 도우십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10)”며 대화를 이끄십니다. 선물은 공짜로 받는 것입니다. 선물은 누구나 좋아합니다. 선물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영원하고, 우리를 진정으로 기쁘게 하고, 우리의 생명을 풍성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 안에는 모든 충만이 그 안에 있습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십니다. 또 하나님의 선물은 성령님이십니다. 성령께서는 생수의 강이십니다. 생수의 강이 우리 안에 흐를 때 영생의 기쁨과 생명력이 넘치게 됩니다. 우리의 목마름을 영원히 없애줄 ‘영생’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3:16에서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인간의 조건이나 자격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이 하나님의 선물을 통해서 목마름을 해결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인생을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자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이 여자는 참 당돌합니다. 한편 예수님에 대한 관심이 점점 커져갑니다. 야곱은 이 여인의 이상형이었습니다.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여 14년 동안을 기다리고 또 그 많은 자녀들을 잘 기르고 이스라엘의 조상이 된 것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예수님도 이 여인에게 야곱의 우물과 자신이 주시는 물을 비교하여 말씀하십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야곱의 우물은 마셔도 다시 목이 마릅니다. 야곱의 우물은 이 세상에 속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랑에 대한 목마름이 가장 클 것입니다. 가요의 대부분은 사랑에 대한 목마름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이 다섯 남편을 바꾸었지만 사랑에 대한 목마름이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사랑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육적인 것으로 영적인 목마름을 채워줄 수 없습니다. 이런 목마름의 원인을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2:13).” 아모스 선지자는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고 했습니다(암8:11). 생수의 근원되신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할 때 무엇을 해도 만족과 기쁨이 없고 공허하다는 것입니다.
반면 예수님이 주시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됩니다. 사람들이 느끼는 목마름은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입니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고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고 그 안에서 행할 때 참 만족을 누리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혔습니다. 죄사함을 받고 이 관계를 회복해야 하나님의 사랑과 의와 평강이 내 안에 흘러들어오게 됩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된 사람은 이웃과의 관계도 회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도 용서하고, 사랑하기 힘든 사람도 사랑하면서 관계가 깊어지고 풍성해집니다. 하나님과 이웃과 관계가 깊고 풍성할 때 행복을 느낍니다.
여자가 예수님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남편을 불러 오라고 하실까요? 남편 문제는 개인의 사생활 침해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남편 문제는 여인에게 수치스러운 부분이요, 죄 문제입니다. 여인의 마음에 있는 이 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막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남편 문제를 끄집어내신 것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께 오리발을 내밀었습니다.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이는 여인에게 진실한 고백이었습니다. 자신이 이상형으로 찾던 남편이 없습니다. 자신의 사랑을 채워줄 남편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을 정죄하지 않고 그녀를 인정해 주셨습니다.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예수님께서 여인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자신을 속속들이 다 알고 계시는 예수님 앞에 감출 것이 없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예배에 대한 질문을 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20).” 예배는 자신의 온 마음과 힘과 뜻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현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예배할 때 참된 만족과 영혼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 여자가 지금까지 방황하고 목마른 인생, 남편을 찾아다니는 인생을 산 것은, 예배의 대상을 잘못 찾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이상적인 남편은 여인의 우상이었습니다. 남편을 예배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섬겼기 때문에 영혼의 만족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마음과 정성과 사랑을 다 쏟아 남자들을 사랑했지만 거기서 만족을 누리지 못하고 공허함과 상처만 깊어졌습니다.
여인은 참된 예배를 드리고 싶었지만 어디서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말하였고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 산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들은 서로 정통성을 주장하며 자신들이 옳다고 싸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자에게 예배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예수님은 예배는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23,24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영과 진리’란 ‘성령님과 진리 안에서’라는 뜻입니다. 진리란 하나님의 말씀이며 예수님이십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하고,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진리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만 예배를 받으십니다.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를 드리면 됩니다.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예수님 중심적인 예배를 통해서 죄문제를 해결받고 영생을 선물로 받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찬양은 진정으로, 기도는 믿음으로, 헌금은 감사함으로, 설교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며 은혜가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더 나아가 예배는 주일에 드리는 주일예배가 다가 아닙니다. 로마서 12:1,2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 영적 예배입니다. 매일 매일 매 순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고, 우리 몸을 그 뜻을 이루는데 드리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입니다.
여자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에게 모든 것을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여자가 예수님을 믿었을 때 하나님의 선물인 성령이 임하여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솟구치기 시작했습니다. 여자는 벅찬 감격과 기쁨을 주체하지 못해서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달려가서 사람들에게 자신이 만난 그리스도를 전하였습니다. 이 여자와 이웃과의 관계가 회복이 되었습니다. 그들도 예수님께 나아와 말씀을 듣고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마리아에 기쁨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후에 힘을 얻어서 세상에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힘을 얻어 나머지 엿새 동안 하나님과 양들과 이웃을 섬기며 선한 일에 힘쓰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의 마음에 생수의 강이 흘러나와 교회와 가정과 생업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생명의 열매를 맺는 역사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요한복음 4:1-26
요절 | 요한복음 4:23
참된 예배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사람들이 느끼는 목마름의 근원은 무엇일까요? 생수의 근원되신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이요 그리움입니다. 목마름이 하나님에 대한 예배로 귀결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를 살펴보면 물 문제에서 남편 문제로, 남편 문제에서 예배 문제로 발전합니다. 이 시간 주님께서 우리가 드리는 참된 예배를 받으시고 우리의 목마름을 해갈시켜 주시고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시는데 사마리아를 통과하고자 하십니다. 이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는 사람에 대한 차별이 없습니다. 그는 사람 사이에 있는 장벽을 허물고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러 야곱의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셨습니다. 때가 정오라 몹시 피곤하고 목이 말랐습니다.
이때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을 좀 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주시겠다가 아니라, 무엇을 달라 하시며 여인에게 말을 거십니다. 한 여인의 인생을 바꿔 놓는 위대한 만남이 물 좀 달라는 주님의 부탁으로 시작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 우리가 가진 것을 요구하기도 하십니다. 주께서 우리의 무엇을 빼앗아 가려는게 아니라 우리에게 가장 귀한 선물을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셔서 그렇게 말을 걸어 오십니다. 예수님과 여인과의 대화를 살펴보면 예수님이 여인에 대한 긍휼에 기초해서 말을 거신 것을 알게 됩니다. 요한일서 4:19에 보면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이 주도권을 가지고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먼저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먼저 연락을 하고 먼저 관심을 가지고 다가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여인을 보자마자 영혼의 목마름을 간파하셨습니다. 이 여인에 대한 연민과 긍휼이 먼저 말을 걸게 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사랑에 목이 말라 있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다섯 남자와 결혼을 했었고 다시 여섯째 남자와 살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상처가 있었고 아픔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요청에 대한 여자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굉장히 까칠한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 만큼 마음에 여유가 없습니다. 유대인이 사마리아인을 무시했고, 사마리아 남자는 사마리아 여자를 무시했고 사마리아 여자들은 이 여자를 무시했습니다. 이 여자는 사람들에게 무시를 받으면서 자신의 존재의 가벼움을 느꼈습니다. 자신의 삶에 대해서 비관하고 있고, 별로 소망을 두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들과 관계성이 깨져 있으니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외로웠습니다. 아무도 그녀를 이해해 주고 함께 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정오에 홀로 물을 길으러 나와야 할 만큼 사람들과 관계가 파괴되었습니다. 여인이 차가운 반응을 보이면 대화를 계속 이어나가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여인을 도우십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10)”며 대화를 이끄십니다. 선물은 공짜로 받는 것입니다. 선물은 누구나 좋아합니다. 선물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영원하고, 우리를 진정으로 기쁘게 하고, 우리의 생명을 풍성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 안에는 모든 충만이 그 안에 있습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십니다. 또 하나님의 선물은 성령님이십니다. 성령께서는 생수의 강이십니다. 생수의 강이 우리 안에 흐를 때 영생의 기쁨과 생명력이 넘치게 됩니다. 우리의 목마름을 영원히 없애줄 ‘영생’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3:16에서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인간의 조건이나 자격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이 하나님의 선물을 통해서 목마름을 해결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인생을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자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이 여자는 참 당돌합니다. 한편 예수님에 대한 관심이 점점 커져갑니다. 야곱은 이 여인의 이상형이었습니다.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여 14년 동안을 기다리고 또 그 많은 자녀들을 잘 기르고 이스라엘의 조상이 된 것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예수님도 이 여인에게 야곱의 우물과 자신이 주시는 물을 비교하여 말씀하십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야곱의 우물은 마셔도 다시 목이 마릅니다. 야곱의 우물은 이 세상에 속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랑에 대한 목마름이 가장 클 것입니다. 가요의 대부분은 사랑에 대한 목마름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이 다섯 남편을 바꾸었지만 사랑에 대한 목마름이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사랑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육적인 것으로 영적인 목마름을 채워줄 수 없습니다. 이런 목마름의 원인을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2:13).” 아모스 선지자는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고 했습니다(암8:11). 생수의 근원되신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할 때 무엇을 해도 만족과 기쁨이 없고 공허하다는 것입니다.
반면 예수님이 주시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됩니다. 사람들이 느끼는 목마름은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입니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고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고 그 안에서 행할 때 참 만족을 누리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혔습니다. 죄사함을 받고 이 관계를 회복해야 하나님의 사랑과 의와 평강이 내 안에 흘러들어오게 됩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된 사람은 이웃과의 관계도 회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도 용서하고, 사랑하기 힘든 사람도 사랑하면서 관계가 깊어지고 풍성해집니다. 하나님과 이웃과 관계가 깊고 풍성할 때 행복을 느낍니다.
여자가 예수님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남편을 불러 오라고 하실까요? 남편 문제는 개인의 사생활 침해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남편 문제는 여인에게 수치스러운 부분이요, 죄 문제입니다. 여인의 마음에 있는 이 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막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남편 문제를 끄집어내신 것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께 오리발을 내밀었습니다.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이는 여인에게 진실한 고백이었습니다. 자신이 이상형으로 찾던 남편이 없습니다. 자신의 사랑을 채워줄 남편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을 정죄하지 않고 그녀를 인정해 주셨습니다.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예수님께서 여인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자신을 속속들이 다 알고 계시는 예수님 앞에 감출 것이 없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예배에 대한 질문을 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20).” 예배는 자신의 온 마음과 힘과 뜻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현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예배할 때 참된 만족과 영혼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 여자가 지금까지 방황하고 목마른 인생, 남편을 찾아다니는 인생을 산 것은, 예배의 대상을 잘못 찾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이상적인 남편은 여인의 우상이었습니다. 남편을 예배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섬겼기 때문에 영혼의 만족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마음과 정성과 사랑을 다 쏟아 남자들을 사랑했지만 거기서 만족을 누리지 못하고 공허함과 상처만 깊어졌습니다.
여인은 참된 예배를 드리고 싶었지만 어디서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말하였고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 산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들은 서로 정통성을 주장하며 자신들이 옳다고 싸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자에게 예배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예수님은 예배는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23,24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영과 진리’란 ‘성령님과 진리 안에서’라는 뜻입니다. 진리란 하나님의 말씀이며 예수님이십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하고,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진리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만 예배를 받으십니다.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를 드리면 됩니다.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예수님 중심적인 예배를 통해서 죄문제를 해결받고 영생을 선물로 받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찬양은 진정으로, 기도는 믿음으로, 헌금은 감사함으로, 설교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며 은혜가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더 나아가 예배는 주일에 드리는 주일예배가 다가 아닙니다. 로마서 12:1,2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 영적 예배입니다. 매일 매일 매 순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고, 우리 몸을 그 뜻을 이루는데 드리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입니다.
여자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에게 모든 것을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여자가 예수님을 믿었을 때 하나님의 선물인 성령이 임하여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솟구치기 시작했습니다. 여자는 벅찬 감격과 기쁨을 주체하지 못해서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달려가서 사람들에게 자신이 만난 그리스도를 전하였습니다. 이 여자와 이웃과의 관계가 회복이 되었습니다. 그들도 예수님께 나아와 말씀을 듣고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마리아에 기쁨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후에 힘을 얻어서 세상에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힘을 얻어 나머지 엿새 동안 하나님과 양들과 이웃을 섬기며 선한 일에 힘쓰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의 마음에 생수의 강이 흘러나와 교회와 가정과 생업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생명의 열매를 맺는 역사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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