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021요 4강(3:1-36)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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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요한복음 제 4 강
말씀 | 요한복음 3:1-36
요절 | 요한복음 3:3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입니다. 밤이 깊도록 나눈 대화의 주제는 거듭남과 하나님 나라입니다. 니고데모는 당시 모든 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세상의 부와 명예와 권력을 다 쥐고 있었습니다. 그는 원하던 것들을 소유하면 행복하리라 기대했는데 잠시뿐이었습니다. 그는 목마름과 고독과 공허한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께 밤에 찾아왔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참 행복을 얻는 길은 무엇인지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를 통해서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누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까? 니고데모입니다. 그는 바리새인이요, 유대인의 지도자요, 이스라엘의 선생이요, 부자였습니다. 그는 유대 나라 최고의 엘리트로서 우리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조건을 다 갖추고 누리며 살아왔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은 참 행복과 평안을 얻기 위해서 소유해야 할 것들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요즈음은 집을 구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좋은 집만 얻으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젊은이들은 월세를 살아도 수입차를 타기를 원합니다. 코로나 시대에 해외여행에 대한 꿈이 많아졌습니다. 또 좋은 영화, 믿을 만한 친구, 건강, 성숙한 사랑, 창조적인 삶, 노후 대책이 잘 되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자매님들은 예쁜 얼굴, 아름다운 몸매, 가정의 안정, 자녀, 새 가구, 좋은 음식, 내적인 조화, 초콜릿 등등이 있으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니고데모는 이런 것들을 다 소유하면 행복하리라 기대했는데 그 행복은 너무나 짧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겹고 지루하고 피곤했습니다. 니고데모는 밤에 예수님께 나아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좋다는 것을 다 얻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고 성취했습니다. 그리고 누려보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나이를 먹어 머리가 희끗희끗해지고 있고, 앞에 있는 죽음을 의식하면서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말합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예수님은 그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3절을 다 같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하나님의 나라란 하나님의 통치, 그의 다스림을 의미합니다. 왕은 그 나라의 모든 것을 갖고 있습니다. 즉 사람, 땅, 각종 보물, 군대 등등 모든 것을 소유하고 통치합니다. 하나님은 왕 중의 왕으로서 우리를 통치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를 본다는 것은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나라에 갈 때 제일 먼저 할 일은 여권을 보이고 비자를 받는 일입니다. 누구든지 자격을 구비하면 입국이 허용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당연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1:12,13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당연히 아버지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하나님 나라를 지역적으로 찾으려고 하는 자는 결코 찾지 못합니다. 누가복음 17:21에서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삶에 들어오실 때 그는 우리 안에서 통치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삶의 주인으로 영접한 사람 안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롬14:17). 하나님 나라에서 그의 다스림을 받을 때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게 되고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습니다(갈 5:22,23).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스러운 나라를 완성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에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고 우리가 거기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신령한 몸, 거룩한 몸, 썩지 않을 몸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강 같이 흐르는 곳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때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라질 것들에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 더 자세히 설명하십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중생’입니다. 이는 ‘위로부터 난다’, ‘다시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위로부터 난다’는 것은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고상한 삶을 살아도 죄와 허물로 죽은 본질상 진노의 자식입니다(엡 2:1-3). 영적으로 죽었기 때문에 영적인 세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전혀 이해하지를 못합니다. 다른 나라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이 들립니다. 어머니 배속에 있는 태아는 소리는 듣지만 깜깜한 어둠 속에 있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이처럼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깜깜한 어둠 속에 있어서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인생의 목적과 의미도 알지 못하죠.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고 땅의 세계에 갇혀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아기가 태어나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보게 되는 것처럼 거듭난 사람은 땅의 세계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세계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고린도후서 5:17은 말씀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니고데모는 거듭남을 이해하지 못해서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느냐?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5,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사람이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도록 역사하십니다. 곰이 백일 동안 마늘을 먹는다고 해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원숭이가 ‘도’를 닦는다고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곰은 곰이고 원숭이는 원숭이 일뿐입니다. 곰은 곰을 낳고 사람은 사람을 낳고 성령은 하나님의 자녀를 낳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날 때 끊을 수 없던 악습이 끊어지고, 용서할 수 없던 사람이 용서가 되고, 설교가 귀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사랑이 필요할 때 사랑을 주시고, 지혜가 필요할 때 지혜를 주시고, 고난을 견디고 이길 수 있는 힘도 주십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우리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합니다. 영은 육체와 함께 인간의 구성 요소로서 중생에 해당하는 부분인 인간의 영을 가리킵니다. 사람이 거듭났다고 삶이 한꺼번에 확 바뀌지 않습니다. 인간의 요소 중 마음이나 몸이 아니라 영만 중생되는 것입니다. 죽었던 영이 다시 살아난 중생한 사람만이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됩니다.
영적으로 거듭난 사람은 성장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태어날 때부터 주위에 있는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모든 감각기관들을 갖고 태어났습니다. 여러분은 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맛과 냄새를 맡을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음성을 구별할 수 있었고 희미하지만 불빛을 볼 수 있었고, 그것은 차츰 분명하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얼마가 지난 후에는 무엇이든지 손에 쥘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는 기어다니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걷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부모님이 하는 말들을 흉내 내기 시작했습니다. 육체적 감각들의 조화를 통해 여러분의 몸은 특정한 일에 쓰일 수 있도록 완성되었습니다. 그리고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습니다. 여러분은 어린아이에서 젊은이로, 마침내 어른으로 성장하는 인생의 과정을 겪게 됩니다. 또한 적당한 시기에 재생산의 기능이 갖춰지게 됩니다. 이것은 당신이 당신을 닮은 사람을 만들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모든 것들과 함께 여러분은 책임감있는 사람이 되어 갑니다. 자신의 기술과 역량에 적합한 과제들이 맡겨집니다. 곧 여러분은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거듭나게 된 사람은 영적감각기관이 생겨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고, 영원한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 사이에서 사용하는 하나님 나라의 언어로 말을 하게 될 것입니다. 사탄의 공격으로 하나님 나라의 삶이 어떻게 무력화될 수 있는지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갈 것인지를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친구들을 초자연적인 영원한 하나님의 세계로 그들을 초대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겉 사람은 후패하지만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져서 예수님의 성품을 닮게 됩니다. 이것이 거듭난 사람의 특징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고,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말씀을 하시자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라고 말하며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교만한 그를 책망하십니다.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10,11).” 예수님은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고 물으십니다. ‘땅의 일’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성령님으로 말미암은 거듭남의 절대적 필요성과 성령님이 바람처럼 일하신다는 주권성과 신비성에 관한 것입니다. 이 정도도 믿지 못하면 하늘의 일은 꿈도 꿀 수 없습니다. ‘하늘 일’이란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높이 달려 돌아가실 일입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그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하늘 일에 대해서 말씀하실 수 있는 것은 그분만이 하늘에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구원을 받았지만 기대만큼 삶이 잘 안 풀리자 구원의 은혜를 잊고 모세에게 대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사를 보내 그들을 물려 죽게 하셨습니다. 모세의 간청으로 하나님께서 구원의 방도를 주셨는데, 구리 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달아 올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자들은 살게 하겠다는 것입니다(민21:4-9).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는 절대로 순종할 수 없는 방향입니다. 이 말씀은 사람들의 경험과 세상적인 방법 그리고 전통과 달랐습니다. 그러나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았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높이 들리신 것을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죽으심’을 ‘들림’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영광을 받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부활하시고 하나님 나라로 다시 가십니다.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높이 들리십니까?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입니다. 구리 뱀이 하나님께서 출애굽 세대에게 마련해주신 구원의 방도였듯이, 십자가에 들려 올려진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마련해주신 구원의 방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구원의 방편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만 영생을 얻습니다. 하나님이 제시하신 ‘구원의 방편을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성령님의 사역에 대한 우리의 응답입니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합니까? 16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창세 전 영원 가운데 이미 사랑으로 하나이신 삼위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피조물들을 사랑의 눈으로 보시고 보기에 좋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심지어 세상이 타락한 후에도 끊임없이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항상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세상은 하나님보다 마귀를 더 좋아하고, 빛보다 어둠을 사랑하며, 생명 대신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너무나도 싫어하고 극도로 미워하고 멀리 떠났습니다. 세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세상을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부르셨습니다. 의인은 하나도 없는 세상인데 하나님은 이런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런 세상을 사랑하는 방식이 너무나도 특이 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과 철저히 원수가 된 세상을 향해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원수인 세상에게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생명나무 같은 놀라운 식물이나 흠없이 완벽한 양 같은 동물을 내주신 것이 아닙니다. 다윗과 같이 존귀한 인물을 내주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유일한 아들을 내주어 원수인 세상에 대한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 예수님은 원수인 세상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가장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원수인 세상을 사랑하기 위해서 독생자를 처참한 죽음에 내주었으니, 이것은 얼마나 미련한 일입니까? 원수인 세상을 위해서 독생자를 죽음에 내 준 것은 하나님의 미련함이며, 원수인 세상을 위해서 독생자가 달려 죽은 십자가의 도는 어리석음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미련함과 어리석음을 택하셨습니다. 이런 미련함과 어리석음이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기까지 세상을 사랑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하나님은 세상을 위해 아들을 죽음에 내주셔야 했을까요? 첫째 이유는 독생자를 죽음에 내 주어야만 해결할 수 있을만큼 세상의 죄가 크기 때문입니다. 병의 증상 정도에 맞게 약을 처방하는 법입니다. 만일 세상의 질병이 콧물감기 정도였다면 하나님께서도 그것을 치료할 만큼만 처방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죄악이 너무나 심각하여서 독생자를 내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둘째는 독생자를 내주실 만큼 하나님의 사랑이 지극히 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위해서 약간의 사랑을 보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원수를 하루에도 일곱 번씩 일흔 번을 용서하시는 사랑입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를 탕감해주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형언할 수 없는 높고 크신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손해보시는 큰 값을 치르셨고, 우리는 값없이 영생을 얻는 이득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대이고, 우리의 믿음은 무한소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선물로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매일 매일 죄를 짓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값없이 용서해주지 않으면 우리는 한 사람도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자격으로는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값없이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평안을 누리고 참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과 그의 증언을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선물로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날마다 이 사랑 안에 거하며 전하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우리 가운데 아직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분들이 계십니까? 오늘 죽으면 천국 갈 확신이 없는 분들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거듭나 새 사람이 됩니다. 아직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않고 구원의 확신이 없는 분들을 돕기를 원합니다. 매월 마지막 주일에 그런 분들과 만남을 갖고 더 깊이 말씀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이미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거듭나 하나님 나라를 맛본 분들은 구원이 필요한 분들에게 자신이 체험한 예수님을 간증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들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돕기를 바랍니다.
말씀 | 요한복음 3:1-36
요절 | 요한복음 3:3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입니다. 밤이 깊도록 나눈 대화의 주제는 거듭남과 하나님 나라입니다. 니고데모는 당시 모든 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세상의 부와 명예와 권력을 다 쥐고 있었습니다. 그는 원하던 것들을 소유하면 행복하리라 기대했는데 잠시뿐이었습니다. 그는 목마름과 고독과 공허한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께 밤에 찾아왔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참 행복을 얻는 길은 무엇인지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를 통해서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누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까? 니고데모입니다. 그는 바리새인이요, 유대인의 지도자요, 이스라엘의 선생이요, 부자였습니다. 그는 유대 나라 최고의 엘리트로서 우리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조건을 다 갖추고 누리며 살아왔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은 참 행복과 평안을 얻기 위해서 소유해야 할 것들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요즈음은 집을 구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좋은 집만 얻으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젊은이들은 월세를 살아도 수입차를 타기를 원합니다. 코로나 시대에 해외여행에 대한 꿈이 많아졌습니다. 또 좋은 영화, 믿을 만한 친구, 건강, 성숙한 사랑, 창조적인 삶, 노후 대책이 잘 되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자매님들은 예쁜 얼굴, 아름다운 몸매, 가정의 안정, 자녀, 새 가구, 좋은 음식, 내적인 조화, 초콜릿 등등이 있으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니고데모는 이런 것들을 다 소유하면 행복하리라 기대했는데 그 행복은 너무나 짧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겹고 지루하고 피곤했습니다. 니고데모는 밤에 예수님께 나아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좋다는 것을 다 얻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고 성취했습니다. 그리고 누려보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나이를 먹어 머리가 희끗희끗해지고 있고, 앞에 있는 죽음을 의식하면서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말합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예수님은 그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3절을 다 같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하나님의 나라란 하나님의 통치, 그의 다스림을 의미합니다. 왕은 그 나라의 모든 것을 갖고 있습니다. 즉 사람, 땅, 각종 보물, 군대 등등 모든 것을 소유하고 통치합니다. 하나님은 왕 중의 왕으로서 우리를 통치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를 본다는 것은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나라에 갈 때 제일 먼저 할 일은 여권을 보이고 비자를 받는 일입니다. 누구든지 자격을 구비하면 입국이 허용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당연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1:12,13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당연히 아버지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하나님 나라를 지역적으로 찾으려고 하는 자는 결코 찾지 못합니다. 누가복음 17:21에서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삶에 들어오실 때 그는 우리 안에서 통치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삶의 주인으로 영접한 사람 안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롬14:17). 하나님 나라에서 그의 다스림을 받을 때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게 되고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습니다(갈 5:22,23).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스러운 나라를 완성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에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고 우리가 거기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신령한 몸, 거룩한 몸, 썩지 않을 몸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강 같이 흐르는 곳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때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라질 것들에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 더 자세히 설명하십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중생’입니다. 이는 ‘위로부터 난다’, ‘다시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위로부터 난다’는 것은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고상한 삶을 살아도 죄와 허물로 죽은 본질상 진노의 자식입니다(엡 2:1-3). 영적으로 죽었기 때문에 영적인 세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전혀 이해하지를 못합니다. 다른 나라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이 들립니다. 어머니 배속에 있는 태아는 소리는 듣지만 깜깜한 어둠 속에 있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이처럼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깜깜한 어둠 속에 있어서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인생의 목적과 의미도 알지 못하죠.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고 땅의 세계에 갇혀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아기가 태어나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보게 되는 것처럼 거듭난 사람은 땅의 세계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세계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고린도후서 5:17은 말씀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니고데모는 거듭남을 이해하지 못해서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느냐?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5,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사람이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도록 역사하십니다. 곰이 백일 동안 마늘을 먹는다고 해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원숭이가 ‘도’를 닦는다고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곰은 곰이고 원숭이는 원숭이 일뿐입니다. 곰은 곰을 낳고 사람은 사람을 낳고 성령은 하나님의 자녀를 낳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날 때 끊을 수 없던 악습이 끊어지고, 용서할 수 없던 사람이 용서가 되고, 설교가 귀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사랑이 필요할 때 사랑을 주시고, 지혜가 필요할 때 지혜를 주시고, 고난을 견디고 이길 수 있는 힘도 주십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우리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합니다. 영은 육체와 함께 인간의 구성 요소로서 중생에 해당하는 부분인 인간의 영을 가리킵니다. 사람이 거듭났다고 삶이 한꺼번에 확 바뀌지 않습니다. 인간의 요소 중 마음이나 몸이 아니라 영만 중생되는 것입니다. 죽었던 영이 다시 살아난 중생한 사람만이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됩니다.
영적으로 거듭난 사람은 성장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태어날 때부터 주위에 있는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모든 감각기관들을 갖고 태어났습니다. 여러분은 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맛과 냄새를 맡을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음성을 구별할 수 있었고 희미하지만 불빛을 볼 수 있었고, 그것은 차츰 분명하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얼마가 지난 후에는 무엇이든지 손에 쥘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는 기어다니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걷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부모님이 하는 말들을 흉내 내기 시작했습니다. 육체적 감각들의 조화를 통해 여러분의 몸은 특정한 일에 쓰일 수 있도록 완성되었습니다. 그리고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습니다. 여러분은 어린아이에서 젊은이로, 마침내 어른으로 성장하는 인생의 과정을 겪게 됩니다. 또한 적당한 시기에 재생산의 기능이 갖춰지게 됩니다. 이것은 당신이 당신을 닮은 사람을 만들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모든 것들과 함께 여러분은 책임감있는 사람이 되어 갑니다. 자신의 기술과 역량에 적합한 과제들이 맡겨집니다. 곧 여러분은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거듭나게 된 사람은 영적감각기관이 생겨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고, 영원한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 사이에서 사용하는 하나님 나라의 언어로 말을 하게 될 것입니다. 사탄의 공격으로 하나님 나라의 삶이 어떻게 무력화될 수 있는지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갈 것인지를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친구들을 초자연적인 영원한 하나님의 세계로 그들을 초대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겉 사람은 후패하지만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져서 예수님의 성품을 닮게 됩니다. 이것이 거듭난 사람의 특징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고,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말씀을 하시자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라고 말하며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교만한 그를 책망하십니다.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10,11).” 예수님은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고 물으십니다. ‘땅의 일’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성령님으로 말미암은 거듭남의 절대적 필요성과 성령님이 바람처럼 일하신다는 주권성과 신비성에 관한 것입니다. 이 정도도 믿지 못하면 하늘의 일은 꿈도 꿀 수 없습니다. ‘하늘 일’이란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높이 달려 돌아가실 일입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그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하늘 일에 대해서 말씀하실 수 있는 것은 그분만이 하늘에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구원을 받았지만 기대만큼 삶이 잘 안 풀리자 구원의 은혜를 잊고 모세에게 대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사를 보내 그들을 물려 죽게 하셨습니다. 모세의 간청으로 하나님께서 구원의 방도를 주셨는데, 구리 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달아 올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자들은 살게 하겠다는 것입니다(민21:4-9).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는 절대로 순종할 수 없는 방향입니다. 이 말씀은 사람들의 경험과 세상적인 방법 그리고 전통과 달랐습니다. 그러나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았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높이 들리신 것을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죽으심’을 ‘들림’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영광을 받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부활하시고 하나님 나라로 다시 가십니다.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높이 들리십니까?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입니다. 구리 뱀이 하나님께서 출애굽 세대에게 마련해주신 구원의 방도였듯이, 십자가에 들려 올려진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마련해주신 구원의 방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구원의 방편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만 영생을 얻습니다. 하나님이 제시하신 ‘구원의 방편을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성령님의 사역에 대한 우리의 응답입니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합니까? 16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창세 전 영원 가운데 이미 사랑으로 하나이신 삼위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피조물들을 사랑의 눈으로 보시고 보기에 좋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심지어 세상이 타락한 후에도 끊임없이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항상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세상은 하나님보다 마귀를 더 좋아하고, 빛보다 어둠을 사랑하며, 생명 대신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너무나도 싫어하고 극도로 미워하고 멀리 떠났습니다. 세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세상을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부르셨습니다. 의인은 하나도 없는 세상인데 하나님은 이런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런 세상을 사랑하는 방식이 너무나도 특이 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과 철저히 원수가 된 세상을 향해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원수인 세상에게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생명나무 같은 놀라운 식물이나 흠없이 완벽한 양 같은 동물을 내주신 것이 아닙니다. 다윗과 같이 존귀한 인물을 내주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유일한 아들을 내주어 원수인 세상에 대한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 예수님은 원수인 세상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가장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원수인 세상을 사랑하기 위해서 독생자를 처참한 죽음에 내주었으니, 이것은 얼마나 미련한 일입니까? 원수인 세상을 위해서 독생자를 죽음에 내 준 것은 하나님의 미련함이며, 원수인 세상을 위해서 독생자가 달려 죽은 십자가의 도는 어리석음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미련함과 어리석음을 택하셨습니다. 이런 미련함과 어리석음이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기까지 세상을 사랑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하나님은 세상을 위해 아들을 죽음에 내주셔야 했을까요? 첫째 이유는 독생자를 죽음에 내 주어야만 해결할 수 있을만큼 세상의 죄가 크기 때문입니다. 병의 증상 정도에 맞게 약을 처방하는 법입니다. 만일 세상의 질병이 콧물감기 정도였다면 하나님께서도 그것을 치료할 만큼만 처방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죄악이 너무나 심각하여서 독생자를 내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둘째는 독생자를 내주실 만큼 하나님의 사랑이 지극히 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위해서 약간의 사랑을 보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원수를 하루에도 일곱 번씩 일흔 번을 용서하시는 사랑입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를 탕감해주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형언할 수 없는 높고 크신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손해보시는 큰 값을 치르셨고, 우리는 값없이 영생을 얻는 이득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대이고, 우리의 믿음은 무한소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선물로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매일 매일 죄를 짓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값없이 용서해주지 않으면 우리는 한 사람도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자격으로는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값없이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평안을 누리고 참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과 그의 증언을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선물로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날마다 이 사랑 안에 거하며 전하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우리 가운데 아직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분들이 계십니까? 오늘 죽으면 천국 갈 확신이 없는 분들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거듭나 새 사람이 됩니다. 아직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않고 구원의 확신이 없는 분들을 돕기를 원합니다. 매월 마지막 주일에 그런 분들과 만남을 갖고 더 깊이 말씀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이미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거듭나 하나님 나라를 맛본 분들은 구원이 필요한 분들에게 자신이 체험한 예수님을 간증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들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돕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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