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Document
주일말씀 성경별메시지 심포지엄 성경 검색
문제지 성경별문제지

요한복음 2021년 부활절특강(요11:1-57)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82회 작성일 21-04-04 15:31

본문

2021년 부활절 특강
말씀 | 요한복음 11:1-57
요절 | 요한복음 11:25,2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찬양합니다. 나사로를 죽음에서 부활하게 하신 예수님은 우리도 죽음에서 다시 살리십니다. 우리가 죽으면 끝이라는 사탄의 말에 속아서 살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죽음이 주는 절망, 무기력, 허무, 남 탓, 미움, 정죄와 판단, 한계 속에 살게 됩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부활이 있다는 것을 믿을 때 우리는 소망 가운데 살 수 있습니다. 죽음의 세력에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제자들과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믿음을 심고자 애를 쓰시는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1-16). 베다니 마을에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 세 남매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부모님을 연달아 잃고 나사로를 의지하여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장인 나사로까지 병들어 시름시름 앓고 있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울지 말자고 다짐하며 서로를 다독였습니다. 그러나 나사로가 숨을 몰아쉬는 것을 볼 때마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눈물을 뚝뚝 흘렸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깊은 우울증과 답답함이 쌓여갔습니다. 하루하루 사는 것이 사는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이때 두 자매의 마음에 하나님의 지혜가 번뜩 떠올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기억하고 사람을 보냈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이 메시지만 전해도 예수님이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오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만큼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을 사랑했고 의지해왔습니다.

  나사로가 죽어간다는 전갈을 들으신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예수님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병을 끝이라고 보지 않으셨습니다. 이 병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는 기회로 보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될 것이라고 확언하셨습니다. 두 자매는 오빠가 죽어가는 병으로 고통하는 것을 볼 때 마음이 아파 죽겠는데 예수님은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사실 이 병 앞에서 마르다나 마리아나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 도움을 구하고 기다릴 수밖에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그의 영광을 보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에 예수님의 말씀보다 눈앞의 현실이 더 크게 보였습니다. 그들은 이 문제 앞에 자신들의 죄를 회개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해야 합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께 대한 실제적인 믿음이 생겨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믿음이 심겨지도록 어떻게 도우십니까?

  5,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셨지만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셨습니다. 15절에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예수님은 제자들의 믿음을 위해서 이틀을 더 유하셨습니다. 또한 마르다와 마리아의 믿음이 더 자라도록, 더 깊어지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계속 자라야 합니다. 축복의 때에 믿음이 자라는 것보다는 고난을 통해서 믿음이 자라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믿음을 키우기 위해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고, 광풍 속에서 기도하며 주님을 바라보게 하시고,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도록 하셨습니다. 우리가 겪는 모든 문제와 어려움은 믿음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자녀문제, 물질문제, 질병, 인간관계의 갈등, 자신의 연약함과 한계, 자기의 오만과 교만을 발견할 때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직면하는 문제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유대로 가기를 꺼려하는 제자들을 어떻게 도우십니까? 이틀을 지나고 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유대로 다시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라고 두려움에 떨며 대답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9,10)”고 대답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 두려움 때문에 아무 일도 하지 못합니다. 죽음의 세력에 사로잡히게 되면 사람이 이렇게 무기력합니다. 낮이 열 두 시간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있을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그 시간이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생명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제자들의 생명이 유대인의 손에 달려있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 이 세상의 빛을 보면 실족하지 아니합니다. 이 세상의 빛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인생을 비추는 빛이십니다. 그는 말씀으로 우리의 인생 길을 비추십니다. 우리가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눔으로 그의 인도하심을 받습니다. 사람이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길을 인도하시고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목자이십니다. 우리 공동체를 이끄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보고 따라가면 됩니다. 제자들이 사명을 다할 때까지는 죽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장애물 때문에 두렵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빛 되신 예수님이 그 마음에 없기 때문에 실족하는 것입니다. 현재 제자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떨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사건을 통해서 실제적인 믿음, 살아 있는 믿음, 부활신앙을 심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지만 내가 깨우러 간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잠으로 보셨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일생으로 보는데 인생은 삼생입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9개월을 보내고 이 세상에서 90년을 보냅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9개월은 이 세상의 삶을 위한 준비이듯이 이 세상에서의 삶도 영원한 삶을 위한 준비입니다. 죽음은 천국으로 들어가는 통로입니다. 우리가 잠을 잘 자고 나면 개운하듯이 죽음 이후에 잠을 자다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신령한 몸, 썩지 않을 몸, 죽지 않을 몸을 입고 영원한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 살아 있는 신자들은 홀연히 변화가 될 것입니다.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는 제자들에게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큰 소리로 말합니다. 그는 운동권 구호 같은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의심 많은 도마는 죽는다는 것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큰 소리를 쳤습니다. 이런 그가 예수님이 부활하신 모습을 보고는 “나의 주님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후에 인도 첸다이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였습니다. 그의 순교로 인해서 인도 첸다이 지방에는 거룩한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둘째,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17-37). 예수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아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만나자 울음과 원망이 터져 나왔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면서 좀 미안했던지 사족을 붙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인간적으로 말해서 예수님께서 이런 마르다에게 “미안하다, 울지 마라.”라고 말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말씀을 마르다에게 주셨습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심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예수님의 약속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녀의 믿음은 현실성이 없습니다. 지식적인 신앙이요, 미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녀의 믿음은 교리적인 지식일 뿐이었습니다. 마르다는 여전히 죽음의 권세 아래 고통하고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매우 운명적이고 불신 가운데 있었습니다. 오빠 나사로가 죽었으니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하나님의 가장 영광스러운 약속을 주셨습니다. 25,2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것은 하나님의 최고의 약속입니다. 우리는 역사상 어떤 책에서도, 도서관에 해변의 모래와 같은 많은 책들이 있다 할지라도, 이와 같이 생명을 주는 약속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약속을 믿는다면 예수님 안에서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마르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에 대해서 알았고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믿음은 머리 속에 있는 지식적인 믿음 이상이 아니었습니다. 자기의 오빠 나사로의 죽음을 포함해서 실제 생활의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아무런 영적인 힘이 없었습니다(21,22,24,27,39). 그래서 그녀의 인생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역사상 많은 사람들이 다른 나라들을 정복하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행복을 정복하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가장 최상의 사람들은 자신의 죄악된 본성을 정복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감히 죽음 권세에 도전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죽음 권세 앞에 모두가 두려워하고 절망했습니다. 마르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은 사랑했지만 정말 예수님이 지금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그의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지식적인 신앙은 귀하신 예수님께 불평밖에 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녀의 지식적인 신앙은 절망을 극복하는데 아무런 영적인 힘도 없었습니다.

  그러면 마리아는 어떠했습니까? 예수님이 계신 곳에 왔지만 마리아는 마르다와 똑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21,32b).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리어 세상이 만들어진 이래 가장 후회스러운 말을 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마리아는 예수님과 일대일로 성경을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에도 마리아는 오빠의 죽음에 대해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 마을이 다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곡을 하는 전문가들이 와서 더 슬프게 울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죽음의 권세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최근에 우리나라 최고 부자인 이건희 삼성 회장이 죽었습니다. 내노라 하는 부자들이 하나 둘 죽어갔습니다. 아니 죽지 않을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인간은 예수님 없이 죽음에 대해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참된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부활은 죽음에 대한 승리입니다. 예수님만이 죽음을 정복하고 승리하신 유일한 분이십니다.

  셋째,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38-44). 무덤 앞에서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돌을 옳겨 놓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부활을 믿는다던 마르다는 다시 현실을 보면서 믿음을 잃어버렸습니다.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님은 이런 마르다를 책망하십니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40)”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실제적인 믿음을 갖도록 도우십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나님의 영광이란 하나님의 나타나심, 임재인데 구체적으로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돌을 옮겨 놓으라는 말씀에 순종하도록 도우십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하려면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예수님 영접모임을 했습니다. 저는 특별히 한 자매님의 구원을 위해서 6개월 전부터 매일 새벽 기도를 했습니다. 이 자매님이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을 하고 소감을 발표하였습니다. 자신이 하나님 가족의 일원이 된 것이 느껴진다고 하였습니다. 한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을 때 천국에서는 잔치가 벌어진다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의 구원을 기뻐하십니다. 저도 그의 소감을 들었을 때 기쁨이 넘쳤습니다. 이번 예수님 영접 모임을 통해서 5명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두 명은 확인을 하였습니다. 각 사람의 소감을 들었을 때 평안을 느끼고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또 구원을 위해서 무슨 선행이나 노력을 하거나,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는데 이를 내려놓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이번에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어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님의 책망 후에 그들은 힘을 얻어 돌을 옮겨놓았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41b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하나님을 믿으신 예수님은 죽음으로부터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큰 일을 하고 다른 사람들을 놀랍게 하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모든 크리스천 사역자들에게 공통된 사실입니다. 그러나 99.9%는 사역의 성취를 통해서 다른 사람을 놀라게 하는데 실패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열심으로 죽은 나사로를 살리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는 인간 예수의 능력으로 일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실 것을 믿고 기도하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어떤 것도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을 믿고 기도할 때 모든 일을 할 수 있음을 배우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신 목적은 죽은 나사로를 살릴 뿐만 아니라 그의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심고자 하셨습니다.

  42절을 보십시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돌을 옮겨놓자 예수님이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셨습니다. 그러자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그의 사람들로 믿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이를 본 많은 유대인들이 그를 믿었으나 종교지도자들은 그를 죽이고자 결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이 예언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52). 예수님의 대속적인 죽음으로 그를 믿은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죽은 나사로뿐만 아니라 우리를 죽음 가운데서 다시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부활은 기독교의 심장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영접한 사람 안에, 믿는 사람 안에 살아계십니다. 이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는 내면에 역사하는 죽음 권세를 물리치고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영향력 있는 삶을 살며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으로 살 수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당하고 있는 시련과 문제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간증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1,323건 14 페이지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