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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21년 요2강(1:19-51)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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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62회 작성일 21-03-21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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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요한복음 제 2 강 
말씀 | 요한복음 1:19-51
요절 | 요한복음 1:29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우리는 지난 주 성육신하신 예수님은 본래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오늘은 6명의 증인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간증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줍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처음 만난 분들의 간증을 들을 때 함께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도 주일 예배에서 예수님을 만난 감격을 증인들을 통해서 자주 들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세례 요한의 간증(19-34).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보내신 선구자입니다. 그는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백성들에게 ‘회개하라’고 전파했습니다. 그는 백성들을 향해서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고 질타했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떨리게 했습니다. 동시에 새 삶을 시작하고자 하는 거룩한 소원을 갖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혹시 그리스도가 아닌가라고 생각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종교지도자들은 조사단을 보냈습니다. 그들은 요한에게 “네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요한은 그들의 의도를 알고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들은 또 물었습니다.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요한은 대답했습니다. “나는 아니라.” 그들이 또 물었습니다. “네가 그 선지자냐?” 요한의 대답이 어떠합니까? “아니라(No).” 그는 갈수록 짧고 단호하게 대답했습니다. 사실 그는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사역할 사람이라고 예언된 바였고(눅 1:17), 예수님도 세례요한을 가리켜 오리라 한 엘리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7:10-12, 말 4:5). 또 그는 엘리야 같은 복장을 하고 사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자신이 엘리야임을 부정한 것은 당시 사람들이 영광스러운 엘리야에 대한 기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에녹과 함께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한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엘리야가 다시 올 때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올 것을 기대했습니다. 세례요한은 오해의 소지를 제공하지 않고자 단호하게 답변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기 원합니다.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어떠했습니까? 23절을 봅시다.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소리는 메시지만 전하고 사라집니다. 그는 자신의 존재 의미를 주의 길을 곧게 하고 사라져야 하는 것으로 인식했습니다. 옷을 선전하는 모델은 자기가 돋보이지 않도록 거의 무표정에 가깝게 하고, 때로는 얼굴도 보여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선전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드러나야 합니다. 우리도 사람들의 인정보다 예수님을 드러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세례 요한은 적극적으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증거합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26,27).” 자신은 예수님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안 된다고 고백했습니다. 신발끈을 풀어드리는 것은 가장 천한 종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더 나아가 예수님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29절을 보십시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지고 간다는 말은 지고 가서 버린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일 년에 한 번씩 대 속죄일에 속제 제물을 드리고 나서 흠 없는 염소 한 마리를 데려와 그 머리에 안수하고는 사람이 살지 않는 광야로 내보냈습니다. 그러면 그 염소는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무인광야로 가서는 죄와 함께 죽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를 동에서 서가 먼 것 같이 옮기십니다. 우리가 회개한 죄에 대해서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십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집안에 있는 쓰레기를 다 모아 분리하고 쓰레기 봉투에 담아 밖에 내 놓으면 쓰레기 차가 와서 멀리 가져다 버리든지 태워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살면서 만들어낸 쓰레기들을 차에다 싣고 멀리 가서 버리는 사람과 같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죄나 혹은 다른 사람의 죄를 지적하고 판단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십니다.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바라보면 됩니다.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나온 후에 홍해 해안에 진을 쳤습니다. 바로 왕이 전차부대를 이끌고 이스라엘을 추격해 왔습니다. 앞에는 홍해, 뒤에는 바로의 전차부대, 이렇게 이스라엘은 갇히고 말았습니다. 그 때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3,14).”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길을 따라 가다가 길로 말미암아 원망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불뱀들을 보내어 물게 하였습니다. 백성들이 자신들의 범죄를 깨닫고 이 뱀들을 떠나게 해 달라고 간구하였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민 21:8).” 모세가 놋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았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높이 달리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자마다 죄 사함을 받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하나님의 어린 양은 각 사람의 죄에 대해서 따지지도, 비난하지도 않으시고, 묵묵히 지고 가십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서는 불신, 두려움의 죄를, 어떤 사람에 대해서는 탐욕을, 어떤 사람에 대해서는 사람을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죄를, 어떤 사람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은 배려하지 않고 자기 좋을 대로만 하는 죄를, 어떤 사람에 대해서는 음란의 죄를, 예수님은 각 사람의 죄에 대해서 지적하거나 따지지 않으시고, 그냥 묵묵히 지고 가십니다. 그는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우리는 다만 보기만 하면 됩니다. 저도 처음 여름 수양회에 참석하여 십자가 말씀을 듣고 나의 죄를 위해 피 흘려 죽으신 십자가 위의 예수님을 바라보았을 때, 나의 죄가 사해지고 자유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스펄전도 어느 겨울 주일 예배에 참석했는데 눈니 많이 와서 목사님이 예배에 참석을 못하였습니다. 대신 한 집사님이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스펄전은 자신의 죄로 인해서 심히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 집사님이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외치는 소리를 듣고 십자가를 바라보았을 때 죄 사함의 은혜를 깊이 누리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요한도 처음에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요한을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요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요한은 그 말씀대로 보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했습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성령 세례란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과 연합하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할 때 죄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는 것은 성령 세례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세례 요한의 두 제자의 간증(35-42). 35,36절을 봅시다.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두 제자는 안드레와 요한입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의 제자였는데 스승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이켜 그들이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었습니다. “무엇을 구하느냐?” 예수님은 그들이 따르는 목적이 무엇인지 물으셨습니다. 여러분은 왜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대답했습니다.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이는 좀 엉뚱한 대답 같습니다. 당시 제자는 스승과 함께 살면서 그 인격과 삶을 배웠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알기를 원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대면하여 알았던 것처럼 그들은 예수님을 그렇게 친밀히 배우기를 갈망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와 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와 보라”는 말은 와서 보고 배우라는 뜻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보고 배워야 합니다. 말씀 공부만으로 예수님을 배우기 어렵습니다. 지식만으로 예수님을 배울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삶으로 배우기 위해서는 본을 보고 배워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제자들에게 나를 본 받으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도 요회모임이나 팀모임을 하면서 목자님의 삶을 보고 배웁니다. 우리가 성경 공부뿐만 아니라 삶을 나누는 가운데 예수님을 배울 수 있습니다. 믿는 부모님이 있는 분들은 가정생활을 하면서 부모님들의 신앙과 삶을 배울 수 있습니다. 저는 아내에게서 뿐만 아니라 자녀들을 보고 배우는 것이 많습니다. 이들의 사랑과 섬기는 모습, 순수함을 배웁니다. 예수님은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낸 안드레에게 어떤 일어났습니까? 41절을 다 함께 읽어봅시다.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그는 형 시몬을 찾아가서 자랑했습니다.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어!”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묻기도 하고 듣기도 하고 보고 체험하면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았습니다. 그들은 구약에서 오리라 예언한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심을 알았습니다. 메시아는 구원자란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죄로부터 구원하실 분이심을 알았습니다. 또한 메시아는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 ‘왕’, ‘선지자’, ‘대제사장’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서 악인을 심판하시고 그 백성들을 사랑과 의로 다스려 주십니다. 또 선지자로서 진리의 말씀을 가르쳐 주십니다. 대제사장으로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죄 사함을 주십니다. 안드레가 세례 요한의 제자가 된 것을 보면 영적인 소원이 많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해결되지 않는 문제로 고뇌하던 것들을 예수님께 털어 놓고 그의 말씀을 듣고 교제하는 가운데 인생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그는 이 감격을 혼자서만 간직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형에게 달려가서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증거했습니다. 저도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 감격을 잊지 못해서 매일 어머님께 편지를 보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시라고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반가워하시더니 나중에는 보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저는 어머니의 구원을 위해서 매일 점심 시간을 금식을 하며 기도했습니다. 당시에 어머니는 생활전선에서 일하시며 저의 학비를 대랴 가정을 꾸려가야 했기 때문에 매우 힘들어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지금은 권사님이 되어 열심히 기도하며 봉사하고 있습니다. 저는 어머니뿐만 아니라 캠퍼스에 나아가서 친구들에게 내가 만난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그 감격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안드레는 그의 형 시몬을 예수님에게로 인도했는데, 시몬이 나중에 예수님의 수제자요, 교회의 반석이 된 베드로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한 사람이 하나님의 역사에 크게 쓰임을 받는 것은 축복입니다. 안드레는 후에 지금의 러시아 지방의 선교사로 나아가 복음을 전했고 거기서 순교했습니다. 러시아에 가면 사도 중에서 안드레를 가장 높이 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안드레가 그들의 목자였기 때문입니다. 또 러시아에서 가장 흔한 이름이 안드레이입니다.

  셋째, 빌립과 나다나엘의 간증(43-51) : 43,44절을 봅시다.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예수님은 친히 빌립에게 전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전도 방법은 매우 단순했습니다. “나를 따르라.” 빌립은 즉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 거하면서 하나님 말씀을 듣고 깨달은 것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가 전도했습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45).” 빌립은 성경에 예언된 메시아를 만났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자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빈정거렸습니다. 사실 이 말은 나사렛 사람을 비웃는 당시의 속담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지만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성장하셨습니다. 갈릴리 나사렛은 이방인의 침입을 많이 받았고 이방인들과 섞여 살았습니다. 그로 인해서 성경에 이방의 갈릴리라는 말이 기록되었을 정도입니다. 예수님은 지역 차별을 경험하셨습니다. 미국에서 아시아인에 대한 인종차별로 지난 주에도 네 명의 한국계 미국인이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각종 차별로 인해서 상처받은 사람들을 잘 이해하십니다.

  빌립은 나다나엘이 무시하는 말을 들었을 때 논쟁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와 보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은 확신이 있었습니다. 기쁨이 있었습니다. 무언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47절을 보면 나다나엘이 바로 빌립과 함께 예수님께 나아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양들에게 와 보라고 할 때 무엇을 보여주고자 합니까? 우리 가운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서로 사랑하는 모습, 서로 격려하고 부족함을 도와주는 모습,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모습, 진정한 그리스도의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예수님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 공부와 삶을 통해서 예수님을 보여주고 예수님이 메시아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와 보라는 말은 즉시로 오라는 것입니다. “와 보라!”고 하는데 다음에, 나중에 하다가 대부분 때를 놓칩니다. 

  예수님은 빌립과 나다나엘이 함께 오는 것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만나자 칭찬을 하셨습니다.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의 칭찬하시는 말씀을 듣고 어떻게 나를 아시느냐고 여쭈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벌써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 나다나엘은 고백했습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예수님은 나다나엘 한 사람을 아셨습니다. 한 개인을 아신다고 해서, 그 분이 이스라엘의 왕일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이스라엘의 왕이신 분은 다른 나라의 왕처럼 국민을 다스리는 왕이 아니라, 한 개인 한 개인을 잘 알고 다스리는 왕이십니다. 나다나엘은 그런 왕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 나라의 왕은 나라를 다스리지만, 한 개인 한 개인을 다스리지는 않습니다. 개인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개인의 아픔이 무엇인지, 개인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나다나엘은 그런 왕이 아니라, 나를 아는 그런 왕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기를 처음 본 예수님이 자기를 아는 것을 보고서 말합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새번역)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일을 보리라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50,51).” 제자들의 공통된 고백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 곧 왕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왕이십니다. 그는 사랑과 진리로 다스려 주십니다. 또 그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써 우리의 죄를 지고 가는 구원자이십니다. 우리의 죄가 넘쳐나고 그로 인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고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죄를 사해 주시는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만사를 제쳐두고라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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