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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21년 요1강(1:1-18) 말씀이 육신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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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93회 작성일 21-03-14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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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요한복음 제 1 강
말씀 | 요한복음 1:1-18
요절 |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봄이 되고 새 학기가 되어 센터 정원에 있는 나무들에 새싹이 돋아나고, 캠퍼스에도 새싹 같은 신입생들이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코로나 19로 인해서 학생들을 만나지 못하고 있어서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상황을 아시고 주관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한계를 넘어서 일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어디서 일하시는가를 찾고 우리도 거기서 일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온라인을 통해서 일을 하고 계십니다. 우리도 온라인으로 들어가서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생명과 빛과 사랑의 복음, 요한복음을 온 라인으로 공부하고 은혜를 나누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은 요한복음의 서론에 해당이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가, 또 우리에게 어떤 분이 되시는가 배울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예수님의 성육신의 은혜를 덧입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십니다(1,2). 1절을 보십시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이 세상이 시작되기 전, 영원한 세계 속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이 말씀은 성자 예수님으로서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향해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서로 사랑하고 질서가 있지만 평등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향해 그를 사랑하고 그리워합니다. 인생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마음에 품고 있는 말은 생각이요, 입 밖으로 말을 하면 말하는 사람의 인격을 나타내줍니다. 14절을 볼 때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이 자기의 말로 자기의 마음 즉 생각을 알리듯 하나님께서는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의 마음을 우리에게 알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창1:1).

  3절을 보면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주의 기원에 대해서 흥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만물이 존재하게 되었을까? 생명이 어디서 왔을까? ‘이 말씀’이신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은 우연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신 예수님이 그의 지혜와 지식으로 설계하시고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창1:3)” 이와 같이 성부 하나님이 계획하셨고, 말씀이신 성자 예수님은 직접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자기 형상대로 창조하셨고 사람과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사람에게 말씀하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소통하기 위해서 성령의 감동을 받은 대변자들을 세워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알 수 있고, 특히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생명의 주관자이십니다. 4절을 보십시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는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생명의 근원이시요, 생명의 수여자시요,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 분이시오 생명의 주인이심을 말해줍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고 이 생명은 죽은 자를 살리고, 무기력한 자를 힘있게 하고, 절망 속에 빠져 있는 자에게 희망을 심어주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생명은 사망 권세가 빼앗아 갈 수 없는 생명이요, 예수님 외에는 그 누구도 줄 수 없는 유일한 생명입니다. 우리 각자가 가지고 있는 생명은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일회적인 생명이요, 소모적인 생명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요, 모든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부활의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영접한 자는 마치 줄기에서 끊어져 시들어가던 가지가 다시 접붙인 바 되어 되살아나는 것처럼 그 인생이 살아나고, 자라나고, 역동적인 인생을 살 수가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기 전에 살았으나 죽은 자와 같았습니다. 원하는 대학에 들어갔지만 허무했습니다. 사는 게 무의미하고, 무가치하고 남에게 무관심하고, 무정, 무기력, 무분별, 무사안일, 무위도식, 무표정, 무덤덤 등 주로 무자 돌림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서 생명이 살아났습니다. 삶의 환희를 누리며 하나님을 예배하였습니다. 목자님과 말씀을 공부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살아 꿈틀거렸습니다. 그리고 일생 생명을 살리는 캠퍼스 복음 역사에  쓰임을 받고 있습니다. 

  4절 하반부를 보십시오.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태초에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그 말씀은 어둠 속에 빛을 비추셨습니다. 사람은 죄와 죽음 때문에 어둠에 갇혔습니다. 그런데 빛이신 그 말씀이 사람들에게 비추심으로써 생명을 주십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던 그 빛이 죄와 죽음에 갇힌 인생들에게 빛으로 오셨습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 우리 안에 하나님이 빛을 비추실 때 하나님을 알게 되고 자신을 알게 되고 인생이 나아갈 길을 알게 되고 성경 말씀이 깨달아지기 시작합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은 사람들에게 빛의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을 때에 그 빛이 임하자,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살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존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가난한 집에 태어났을까? 왜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셔서 어머니를 고생하게 하고 나는 왜 이렇게 고생스러운 삶을 살아야 하는가? 이렇게 어둡고 운명적인 인생에서 빛이 비추자 나를 겸손하게 하시고, 나를 연단하시고, 나의 아버지가 되셔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빛은 모든 것을 아름답게 합니다. 마음이 어둡고 눈이 어두우면 자신의 인생을 쓰레기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아름다움 얼굴을 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빛이 비추이면 자신의 아름다움을 인정하게 되고 자신의 인생에 두신 선한 뜻을 알고 감사하게 됩니다. 흑암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던 우리에게 큰 빛, 참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는 어두움이 빛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행위가 드러날까 두려워서 빛을 미워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행위가 악하기 때문에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의롭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결국 빛으로 나오게 됩니다. 예수님은 각자의 어두움을 빛으로 몰아내시고 밝고 환한 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셋째,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 요한계시록  3:20은 말씀합니다. “보아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새번역).” 전도자가 복음을 전할 때 이를 거부하는 사람도 있지만 영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하는 자에게는 생명 되신 예수님이 그 속에 있으므로 영생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실로 놀라운 특권입니다. 왕 되신 하나님의 자녀이니 왕자, 공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란 힘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명분을 넘어서서 자녀답게 살아 갈 수 있는 힘이 주어집니다. 죄를 이기는 힘, 어두움을 이기는 힘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되어갑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들의 삶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보호를 받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들을 징계도 하십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훈련을 통해서 왕자 공주다운 면모를 지니게 합니다. 훈련이 없으면 사생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질병으로, 사고로, 물질 문제 등 여러 모양으로 그 자녀를 훈련하십니다. 우리는 훈련의 때일수록 더욱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마침내 그 자녀는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혈통으로도 안됩니다. 혈통은 ‘부모의 덕’을 말합니다. ‘육정’은 ‘육체의 뜻’으로 자기 수행을 말합니다. ‘사람의 뜻’은 ‘사람의 의지’를 말합니다. 부모가 예수님을 잘  믿기 때문에 자식들이 자연히 구원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것입니다. 또 인간의 의지로는 안됩니다. 내가 지금부터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겠다고 굳게 결심해도 안 됩니다. 또한 사람의 노력으로도 안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야 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만이  사람이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의 약속의 말씀을 따라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때 성령께서 역사하사 변하여 새 사람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사 함께 거하게 하셨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것은 엄청난 사랑 때문입니다. 이전에 부사단장이신 윤폴 목자님이 군대에서 제일 말단인 이등병 이엘리야를 숙소까지 찾아와 나가서 족발을 사주었습니다. 당시 이등병은 부사단장의 얼굴을 보기도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높은 분이 직접 와서 이등병과 대화를 해 주고 식사를 섬기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로 인해 당시 이등병 엘리야가 은혜를 입었습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이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그 말씀이신 예수님,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죄를 씻겨 주셨습니다. 이 은혜를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서는 천군 천사들의 호위와 찬양을 받으시면서 일하실 수 있는데 육신을 입으시고 친히 죄인들과 함께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연약함과 질병과 질고를 다 체험하셨습니다. 예수님도 배가 고프셨고 피로하셨습니다. 그는 일하다가 지쳐 쓰러질 때도 있었습니다. 더구나 그는 인간의 슬픔과 기쁨을 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기 위해서 채찍에 맞으시고 욕을 먹으시고 가시 면류관을 쓰셨습니다.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저자 요한은 이것을 예수님의 영광으로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은 이처럼 자기를 비우고, 낮추고, 온전히 희생하는 데서 빛이 났습니다. 어머니의 영광이 온 몸을 보석이나 값비싼 옷과 머리로 치장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식들을 위해서 자신을 온전히 희생하고 헌신하는데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디모데 안나 목자님은 나이지리아에 선교사로 나아가서 25년 동안 사역하였습니다. 이 분들은 모든 것이 편리한 한국에서 살 수 있지만 모든 것이 열악한 나이지리아에서 젊은 날 선교사로 나아갔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일주일 정도 있었는데 샤워를 하다가 물이 끊어지기도 하고 전기가 수시로 나가는 것을 경험했는데 몹시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선교사님들은 이렇게 열악한 환경에서 여러 번 강도를 만나고, 말라리아에 걸리고, 외로움과 오해를 받으며 사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선교사님들은 힘들고 열악한 나이지리아 생활을 하면서 마음이 어려워지기보다 오히려 높고 높은 하늘보좌를 떠나 낮고 낮은 이 땅에 낮아져 오신 예수님의 성육신의 은혜를 생각하며 깊은 감동과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 분들의 낮아지고 희생하고 헌신하면서 말씀을 전하고 실천하는 삶을 통해서 많은 대학생들이 감동을 받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습니다. 은혜만 너무 충만해질 때 방종에 빠지기 쉽고, 진리만 너무 충만하면 차갑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은혜 100%, 진리도 100%로서 둘 다 부족함이 없이 충만합니다. 16절을 보면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부족한 것을 다 충족시켜 주심으로 넘치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식사 대접을 받았는데 여기에다 선물까지 받으면 은혜 위에 은혜라고 말합니다. 은혜 위에 은혜! 이는 파도처럼 밀려오는 은혜, 넘치는 은혜를 가리킵니다. 과거에 받은 구원의 은혜, 죄사함의 은혜뿐만 아니라 또 다른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가 과거에 받은 은혜에만 매여 있으면 안됩니다.  새롭게 부어주신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 속에도 은혜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서 그 은혜를 알지 못했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게 주어졌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고 빛이시므로 아무도 볼 수 없습니다(딤전6:16).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보면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그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고 그를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고 삶에서 경험하게 됩니다. 그 자녀된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게 됩니다. 우리는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참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요한복음을 통해서 말씀이신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이 생기고 생명의 충만함을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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