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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2021년 출2강(2:1-25) 이스라엘의 구원자를 예비하신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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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92회 작성일 21-10-10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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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출애굽기 2 강
말씀 | 출애굽기 2:1-25
요절 | 출애굽기 2:10

이스라엘의 구원자를 예비하신 하나님
“그 아기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가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의 이름을 모세라 하여 이르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하였더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왕 밑에서 노예 생활을 하는 동안 한 구원자를 준비하셨습니다. 나일 강에 던져진 한 아이를 바로 공주를 통해서 건져내시고 그를 궁중에서 키우신 것입니다. 그가 바로 모세입니다. 그를 40년  동안 궁중 교육을 시키셨습니다. 그리고 40년 동안 광야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80년 동안 한 사람을 키우심으로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구원하십니다. 우리도 여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를 배우고 구원 역사를 위해 한 사람을 키우는 일에 동참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모세의 출생과 궁중 교육(1-10). 레위 가족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들었습니다.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습니다. 어떤 아이든지 부모가 보기에는 세상에서 가장 잘 생겼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여기서 잘 생겼다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있는 아이 임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부모는 모세가 났을 때에 믿음으로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아이를 석 달 동안 숨겼습니다(히11:23). 아이가 목소리도 커지고 몸도 커졌기 때문에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아이를 위하여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 강 가 갈대 사이에 두었습니다. 그들은 절망적인 환경 속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고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힘들다고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힘들어도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때 변화가 있고 성장이 있습니다. 영어로는 “Never still”이라고 합니다. 미국 웨스트 엘에이 교회의 동역자들은 코로나 19 가운데서도 인스타그램을 통한 전도방법을 개발하여 새 양들을 얻고 말씀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패러다임 쉬프트가 잘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도 시대의 변화에 발 맞추어 구원 역사를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모세의 가족들은 기도하여 자기들이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지켜보았습니다. 즉 그의 누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알려고 멀리 서서 지켜보았습니다(4).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나일 강으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나일 강 가를 거닐고 있었습니다. 이 시녀들은 바로 공주의 경호원들이었습니다. 공주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이 시녀는 몸종입니다. 공주가 갈대 상자의 뚜껑을 열고 그 아기를 보니 아기가 응애~ 응애~ 하면서 울었습니다. 이때 공주의 모성애가 발동하여 그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기로다.” 공주는 이 아기를 아바마마의 명령을 따라 죽여야 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딸을 이기는 아버지는 없습니다. 또 정상적인 가정이라면 아버지를 무서워하는 딸도 없습니다. 바로 이때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공주에게 다가가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내가 가서 당신을 위하여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이 아기에게 젖을 먹이게 하리이까?” 바로의 딸이 허락하자 그 소녀가 가서 그 아기의 친 어머니를 불러왔습니다.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 아기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여인이 아기를 데려다가 젖을 먹여 키웠습니다. 최소한 네 살 때까지 키웠을 것입니다. 이때 아이의 인격이 형성이 된다고 합니다. 이때 어머니는 아이에게 히브리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심으며 신앙교육을 했을 것입니다. 그 아이가 자라자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가 그의 양아들이 되었습니다. 공주가 아기 이름을 모세라 하였습니다.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모세를 물에서 건진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모세는 궁중에서 왕자 교육을 받았습니다. 읽기, 쓰기, 셈하기, 말 타기, 군사교육, 궁중 예절, 천문학, 외국어 등등 지도자로서 필요한 교육을 받았습니다. “모세는 이집트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서, 그 하는 말과 하는 일에 능력이 있었습니다(행7:22 새번역).” 모세의 궁중교육은 그가 지도자로서 쓰임 받을 수 있는 소양을 길러주었습니다. 세상의 전문지식이 다가 아니지만 하나님은 그 능력을 통해서 자신의 일을 할 수 있는 준비를 시키십니다.

  바로 왕은 이스라엘의 사내아이들을 나일 강에 던져 죽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공주를 통해서 모세를 건져내시고 바로의 돈으로 이스라엘의 구원자를 양육하고 계셨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둘째, 모세의 광야 훈련(11-22). 모세가 장성하였습니다. 장성했다는 말은 사리분별을 할 수 있을 때로서 사도행전 7:23은 40세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40세는 불혹의 나이로서 여기 저기 미혹을 받지 않고 자기 소신을 펼칠 수 있는 나이입니다. 한번은 그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기는 왕궁에서 편하게 생활을 하고 있는데 자기 형제들은 반죽을 이기고 빵 굽기 대신에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 등 중노동 하는 것을 볼 때 측은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집트인 감독들은 흙을 이기고 벽돌을 굽는 속도를 내기 위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채찍을 휘둘렀습니다. 모세는 이때 어떤 이집트 사람이 한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모세는 노예인 히브리인들을 자기 형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히브리인으로서 자기 정체성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였습니다(히 11:24,25). 그는 자기 형제를 치는 이집트 사람을 볼 때 화가 치밀어 올라왔습니다. 그는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이집트 사람을 쳐 죽여 모래 속에 감추었습니다. 이튿날 다시 나가보니 이번에는 두 히브리 사람이 서로 싸우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그 잘못한 사람에게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고 타일렀습니다. 그러자 잘못한 그가 대들었습니다.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이집트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 형제끼리 싸우면서 잘못한 사람은모세로부터 받은 은혜를 배반하고 모세를 지도자나 재판관으로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히브리어에는 “네가 그 이집트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집트 사람 앞에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비밀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틀림없이 어제 모세로 인해 구원을 받은 사람입니다. 어제 그런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모세에게 조금도 감사한 마음이 없었습니다. 도리어 모세가 자신에게 법적인 재판관으로 행세하며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자 대들기 시작합니다. 한마디로 “누가 네게 그런 일을 하라고 소명을 주었느냐?”는 반발입니다. 이 사람은 모세가 이틀 동안 행했던 일에 대한 권위를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기보다 자기의 열심과 혈기로 자기 형제들을 구원하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님보다 왕자로서 자기의 지위와 권력을 앞세웠습니다. 그러나 백성의 반발을 사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의 진심을 알아주고 받아 주기를 바랐으나 그것은 착각이었습니다. 그들은 모세를 지도자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도 당당했던 모세가 아무 소리도 내지르지 못하고 도망을 치게 됩니다. 이것은 지도자나 재판관의 문제를 넘어 모세가 결코 대답할 수 없는 폐부를 찌르는 송곳 같은 질문이었습니다. “누가 너를 목자로 삼았느냐?” “누가 너를 선교사로 삼았느냐?” 이 일을 행하는 권위가 어디에서 오는 것이냐는 말은 “누가 너를 보냈느냐”는 말과 같습니다. 민족의 아픔을 보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분노에 차서 어느새 지도자의 위치에 서버린 모세였습니다. 하나님의 소명이 아니라 인간적인 감정이 앞섰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이 감정을 따라 행한다는 것은 이미 실패를 예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친다’는 단어가 많이 등장합니다. 바로는 이스라엘을 치고, 애굽 사람들은 히브리 사람들을 치고, 모세는 애굽 사람을 치고, 히브리 사람들은 같은 히브리 사람을 쳤습니다. 한마디로 ‘치고’, ‘치는’ 시대입니다. 사람들은 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습니다. 모세도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 사람을 도우려 했고, 이스라엘을 구원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집트 사람을 치고, 바로를 쳐서 죽이면 문제가 해결될까요? 여기에는 모세의 혈기, 인간적인 힘과 교만이 들어가 있습니다. ‘치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나중에 하나님이 열 가지 재앙을 통해 바로를 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십니다. 하나님만이 치실 수 있습니다. 아직은 하나님의 때가 아니었습니다. 모세는 아직 히브리 백성들에게 마음으로부터 영접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집트 왕궁에서 왕자로 자란 모세를 히브리 백성들이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살인자로서 일이 탄로된 것을 알고 두려웠습니다.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았습니다. 결국 모세는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으로 도망을 쳤습니다. 모세는 이집트 왕자에서 도망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힘과 권위, 폭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 역사를 이루기 전에 변화된 한 사람을 필요로 하셨습니다. 출애굽의 역사는 모세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십니다. 하나님과 깊은 사랑의 관계를 맺고 그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은 구원 역사를 이루십니다. 모세에게는 광야 훈련이 필요했습니다.   

  모세가 자신의 감정과 분노로 이집트 사람을 쳐 죽인다면 그것은 살인행위가 되어 버립니다. 비록 불의를 행하는 이집트 사람이지만 무분별하게 사람을 죽이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소명을 행한다면 그를 통해 펼쳐지는 죽음의 심판은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즉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때와 하나님의 때의 차이입니다.

  만약 모세가 하나님의 소명 없이 이스라엘을 구하는 일을 성공적으로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먼저 이스라엘에게는 목적지가 없어집니다. 모세라는 인간이 구원한 것이기에 이집트 땅을 대신할 약속의 땅이라는 대안이 없습니다. 결국 광야에서 헤매는 존재들이 되고 말 것입니다. 탈출은 했지만 광야와 홍해 사이에서 이집트 군대에게 결국은 다시 붙잡혀 끌려오고 말았을 것입니다. 설사 이집트 군대의 손아귀에서 벗어난다 해도 광야에서 음식과 물 공급이 없으므로 죽음의 길로 가든지, 모세는 폭동으로 축출되고 백성들은 자진해서 이집트로 돌아가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정을 다 극복하고 마침내 나라를 세웠다 해도 모세가 법을 만들고, 그가 세운 나라는 이집트와 같은 전제 군주국가로 변질되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모세가 하나님 없이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고 있다는 것은 아무리 잘 되어도 이 정도 밖에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가 40년 동안 바로의 왕궁에서 배운 모든 능력과 지식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철저히 굴복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섬길 지도자로 나서는 사람은 반드시 그 조상의 하나님을 만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만 합니다. 모세는 “누가?”라는 질문에 확실한 대답을 할준비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지도자의 정체성입니다. 이 “누가?”라는 질문에 분명히 대답할 수 없는 사람은 결국 자신의 야망을 이루는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없이 인간의 능력으로는 아무 것도 이루어 낼 수 없습니다. 고작해야 한 명의 이집트 사람을 쳐 죽이고 도망가는 것뿐입니다. 단 한 명의 이스라엘 백성도 설득할 수 없는 정의일 뿐입니다. 그리고 작은 저항에도 두 손 들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도망가 버리는 것입니다. 지도자에게 부르심이 없을 때 이런 일이 발생합니다. 모세가 하나님 없이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것에서 돌아서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오랜 계획을 이루어 갈 때 다른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제 모세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며 개인적인 부르심을 받는 것입니다.
 
  미디안 땅에 이르러 모세는 피곤하고 목이 말라 우물 곁에 앉았습니다. 미디안 제사장에게 예쁜 일곱 딸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와서 물을 길어 구유에 채우고 그들의 아버지의 양 떼에게 먹이려 하는데 건달 목자들이 와서 그들을 쫓아버렸습니다. 의로운 모세가 일어났습니다. 그는 살인 전력이 있지만 이번에는 좀 더 부드러운 방법으로 여자들을 도와서 그 양 떼에게 물을 먹였습니다. 그들이 그들의 아버지 르우엘에게 이를 때, 아버지가 오늘은 어찌하여 이같이 속히 돌아오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이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자,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그 사람을 버려두고 왔느냐 그를 청하여 음식을 대접하라” 하였습니다. 모세가 그와 동거하기를 기뻐하매 르우엘이 그의 딸 십보라를 모세에게 주었습니다. 르우엘은 일곱 명이나 되는 딸들을 시집보낼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답답했는데 건장한 청년을 보니 굴러들어온 호박과 같았습니다. 그는 기쁨으로 모세를 딸과 결혼을 시켰습니다. 십보라가 아들을 낳으매 모세가 그의 이름을 게르솜이라 하였습니다. 이는 내가 타국에서 나그네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모세는 처가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겉 보리 서 말만 있으면 처가살이를 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시집살이도 힘들지만 처가살이도 힘든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장인 어른은 “양 치러 가야지”라고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하루 종일 양을 치고 돌아오면 처제들의 수다를 들어주어야 했습니다. 식사를 하고 나면 아내가 설거지를 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는 광야 생활을 하면서 양을 치고, 집안 일을 하고 철저히 섬기는 훈련, 낮아지는 삶을 살아야했습니다. 이를 통해 왕궁에서 자란 왕자가 종들의 고역을 헤아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동족들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인간의 몸을 입고 말구유에 오심으로 죄인들의 목자가 된 것처럼 모세는 노예 백성들의 목자로 준비가 되어갔습니다.

  모세는 자신이 시간을 허비하고 나그네로서 정처없이 방황하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이 기간에 그를 지도자로서 준비시키고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양치는 기간은 모세의 혈기를 빼는 기간이요, 낮아지고 섬기는 훈련을 받는 시간이었습니다. 자존심이 깨지고, 장인과 처제들 등살에 시달리며 사람을 섬기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렇게 똑똑하고 힘있는 모세가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단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혈기와 힘을 빼게 하시는데 40년을 보내게 하시고 기다려 주셨습니다. 그를 철저하게 낮추신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해서는 철저히 자신이 깨어지고 부서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모세는 성질이 급한 사람이기에 인내 훈련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일의 성취가 아니라 한 사람의 변화와 성숙이 더 중요했습니다. 우리는 급한데 하나님은 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의 생각 보다 훨씬 크고 깊고 넓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일이 먼저가 아니라 사람이 먼저입니다. 민12:3은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도망자의 삶, 양 치는 목자의 삶을 산 기나긴 세월에 대해서 성경은 명확한 이유를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모세가 바로의 왕궁에서 자라던 40년과 미디안 광야에서의 40년 기간에 대해서 철저하게 침묵을 하고 있습니다. 고작해야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십보라와 결혼을 해서 아들을 낳았고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치며 보냈다는 것뿐입니다. 이 여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사명인으로 산다면 이스라엘이라는 길 잃은 양떼들이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미디안 광야 40년 여정은 구원의 주체가 누구인가에 대한 명확한 답을 얻는 장소와 시간이 될 것입니다. 이 시간은 모세가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는 중재자로서 준비되는 기간이었습니다.

  셋째, 이스라엘을 기억하신 하나님(23-25). 여러 해 후에 이집트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었습니다. 그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습니다. 기억하셨다는 의미는 친밀하게 아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잊으신 것 같고, 버리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 고통 받는 그 백성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의욕과 열정과 패기로 가득 찬 모세를 40년 전에 쓰실 수도 있었지만 이스라엘의 처절한 부르짖음을 삭히시며 인내하셨습니다. 새 시대를 열기 위해서 철저한 준비를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기다리십니다. 자신의 열정으로 나서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정으로 나서는 사람을 기다리십니다. 지도자는 이와 같이 하나님의 기나긴 아픔을 가슴에 함께 새기고 그것을 풀어 나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열정을 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인간의 능력과 열정이라는 것은 고작 한 사람의 반대에도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자신의 도움을 받아 구원을 받은 사람이 돌변하여 자신을 공격할 때 실망감으로 좌절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도망가버리는 정도 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고작해야 한 사람을 구원하는 것에도 진이 빠져버리고, 그 한 사람도 바르게 설득하지 못하는 어설픈 정의감에 빠진 실패자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소리 없이 들레지 않고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 주위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가 하시는 일에 초청하기 위해서 사랑의 관계를 맺으십니다.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 일에 초청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초청을 받고 그 일에 믿음으로 순종하고자 할 때 갈등이 생깁니다. 이런 갈등을 조정하고 순종할 때 하나님을 우리의 삶 가운데서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 예를 다음 강의부터 나타내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작은 모세들을 키우기 원하시고 또 키우고 계십니다. 말씀 공부와 소감 쓰기, 기도 생활과 일용할 양식 먹는 생활, 요회모임과 가정과 직장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들로 키우고 계십니다. 우리가 깨어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체험하며 그의 종으로 준비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어머니를 통한 신앙 교육, 이집트의 궁중에서 궁중교육, 미디안 광야에서 광야 훈련을 받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구원 역사를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가십니다. 이를 위해서 한 사람을 부르시고 그를 준비시키고 훈련하십니다.그 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 한 사람이 바로 여러분 각자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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