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2021년 출1강(1:1-22) 노예가 된 이스라엘
페이지 정보

본문
2021년 출애굽기 1 강
말씀 | 출애굽기 1:1-22
요절 | 출애굽기 1:14
노예가 된 이스라엘
“어려운 노동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곧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 가지 일이라 그 시키는 일이 모두 엄하였더라.”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한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젊어서 고생을 해 봐야 사람이 성숙해지고 철이 들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목자님들은 형제들이 군대를 갈 때 장교보다는 졸병으로 가도록 도왔습니다. 장교로 군대생활을 하면 리더십을 키우는 좋은 점이 있지만 병으로 생활하면서 좀 더 고생을 하고 겸손을 배우도록 했습니다. 자매님들은 베이비씨터 훈련을 했습니다. 이를 통해서 섬기는 훈련, 겸손 훈련을 했습니다. 이런 훈련을 받은 분들이 선교사로 나가서 힘들게 자립을 하면서 여러 모양의 양들을 섬기며 제자로 키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사백년 동안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도록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노예생활을 하도록 하셨을까요? 우리는 왜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고 힘들게 노동을 하면서 살아야 할까요?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오늘 말씀을 묵상하기를 원합니다.
첫째,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1-7). 야곱과 함께 각각 자기 가족을 데리고 이집트에 이른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은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스불론과 베냐민과 단과 납달리와 갓과 아셀이요 야곱의 허리에서 나온 사람이 모두 칠십이었습니다. 요셉은 이집트에 있었습니다. 야곱의 허리란 환도 뼈의 힘줄이 있는 자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얍복 강에서 밤새도록 야곱과 씨름을 하시고 그의 환도 뼈를 치셨습니다. 야곱은 그의 환도 뼈가 부서지자 눈물로 하나님의 복을 구하고 변화가 되었습니다. 즉 야곱이 이스라엘로 변화되어 새로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35:11에서 디나 사건 후에 회개하고 벧엘로 올라온 야곱에게 이런 약속을 하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하나님은 창세기 1:28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복을 주셨습니다. 아브람을 택하시고 하늘의 별같이(창22:17,26:4), 땅의 티끌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많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을 이집트에서 성취하셔서 한 민족을 이루셨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이스라엘은 상상을 초월해서 인구가 증가했습니다. 여기서 다섯 개의 단어를 사용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더라. 역사상 400년 만에 70명이 200만 명이 넘는 경우는 없었다고 합니다. 자식 하나 없던 아브라함 한 사람을 생각하면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 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까 의심스러웠지만 하나님은 500년 만에 그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자손 70인을 이집트로 인도하신 것은 왜 일까요? 여러 부족들이 치고 싸우는 가나안과 달리 이집트는 보호된 환경이었습니다. 이집트는 지리적으로 홍해와 사막으로 막혀 있어서 외부의 침입이 거의 없었습니다. 또 이집트가 강대국이었기 때문에 침입할 세력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집트의 나일 강 하류 삼각주 지역인 고센 땅에서, 즉 그 풍요로운 환경 속에서 이스라엘이 번성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풍부한 양식과 보호를 받는 환경 속에서 자식을 많이 낳을 수 있었습니다. 본래 이스라엘은 유목민이었으나 고센 땅에 정착하면서 많은 자식을 낳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최적의 장소에서 이스라엘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창대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세계 만민을 복 주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만민 구속 계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을 구원하시고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통해서 교회 공동체를 이루시고 이 공동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루고자 하십니다. 헌신된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보다 한 교회, 한 민족을 통해서 할 수 있는 일이 훨씬 더 큽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계획하시고 인도하시고 이루어 가시는 만민 구원 역사에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를 보고 그 일에 동참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노예가 된 이스라엘(8-14). 8절을 보십시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이집트를 다스리더니”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란 ‘새로운 왕조’를 말합니다. 이 왕은 제18 왕조와 새 왕국을 건설한 아모세(Ahmose/ Amosis, 주전 1570-46)인데 그는 힉소스(Hyksos)를 물리치고 왕국을 건설하였습니다. 힉소스는 ‘외국 땅의 지배자들(rulers of foreign lands)’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본래 비옥한 초승달 지역의 북쪽에 살던 셈족으로 주전1670년경에 이집트에 와서 아모세에 의해 쫓겨날 때까지 통치하였습니다. 아모세가 창건한 새 왕국(1570-1085)은 이집트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 국가였습니다. 약 250년 동안(1570-1310) 이집트를 강력한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은 하나님에 대해서도 몰랐습니다.
친분이 있고 우호적인 관계에서는 자신의 욕심을 차리기 위해서 상대방을 도구로 이용하기는 매우 힘듭니다. 이런 관계를 청산하게 되면 벗이요 은인인 존재를 한 순간에 적으로 뒤바꿀 수 있습니다. 바로 왕은 자기 백성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자,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나갈까 하노라(9,10).” 바로 왕의 속 두려움이 관계를 깨뜨렸습니다. 전쟁이 나게 되면 전 왕조와 합세하여 자신들과 싸우고 이 땅에서 나갈 것이라고 오해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숫자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요셉과 같은 사람의 숫자가 늘어난다는 점에서 세상에 이득이 되지 결코 해가 되지는 않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많아지고 지위가 높아지면 그가 속한 공동체 전체에 지대한 유익이 된다는 것을 삶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크리스천들이 섬기는 생활은 다른 사람들을 성공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는 그러한 것을 보지 못하고 이스라엘에 대한 두려움에 기초해서 행동하였습니다.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에게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였습니다(11). 실제로 사람이 삶이 어렵고 힘들면 자식을 낳아 기를 여력이 없습니다. 오늘날 2030세대 청년들이 삶이 어렵기 때문에 54%가 결혼을 하지 못하고 안하겠다고 하고, 45%가 아이를 낳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결혼을 하려면 주택을 마련하고 아이를 낳아 양육을 해야 하는데 그러한 것이 어렵기 때문에 결혼도 포기하고 아기를 낳는 것도 포기하는 청년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바로 왕은 이스라엘의 노동력을 쥐어짜서 자신이 원하는 것도 만들고 그 가중한 노동을 통해 생존조차 힘겹게 만들어 생식능력을 무너뜨리고자 했습니다. 고고학적인 발굴로 람세스 2세의 통치 15년 즈음에 기록된 한 두루마리에 따르면 40명의 노예들이 매일 8만개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량의 벽돌을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적은 식량, 뙤약볕, 과중한 노동, 채찍이라는 강제노동에 이스라엘을 몰아붙임으로 바로는 자신이 원하는 건축물을 만들어 갔습니다.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은 귀금속을 보관하는 창고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 달리 이스라엘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12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여 퍼져나가니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이스라엘 남자들은 학대를 받을수록 근육이 강해지고 생식욕이 강해졌습니다. 그래서 더욱 아이들을 더 많이 낳고 퍼져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을 엄하게 시켜 어려운 노동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였습니다. 곧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 가지 일이라 그 시키는 일이 모두 엄하였습니다(14).
상식적으로 학대를 받으면 번성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런 학대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더욱 강하게 만드셨습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남자들의 체력 훈련을 시켜주는 꼴이 되었습니다. 바로의 계획과 정책이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계획에 간섭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자 이스라엘은 생명력이 점점 충만해졌습니다. 밥맛이 좋으니 아무 음식이나 잘 먹었습니다. 창조 역사를 이루어 가고자 하시는 하나님과 이를 파괴하고자 하는 바로 간의 싸움이 성경 역사 속에 계속됩니다.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바로의 노예 생활을 허락하셨을까요? 그들이 바로의 다스림 아래에서 고통을 당함으로 노예 상태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사정을 이해하도록 하셨습니다. 제사장 나라로 살기 위해서 노예와 같이 사는 다른 민족들을 불쌍히 여기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그들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가를 알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자기를 알지 못하는 왕 밑에서 노예 생활을 하면서 그들이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도록 도우시기 위함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들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훈련을 시키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쓰시려면 그들이 강해져야 합니다. 한 민족을 제사장 나라로 쓰기 위해서 낮추시고 강하게 훈련하십니다. 힘겨운 노예생활이 없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에 눌러 앉아 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집트에 동화되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노예 생활을 하면서 고통 가운데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자유롭게 살기를 갈망했습니다.
셋째, 하나님을 경외하는 산파들을 통한 보호(15-22). 이집트 왕은 극심한 탄압과 강제 노동으로 산아제한 정책이 실패하자 산파들에게 어떤 명령을 내렸습니까? “이집트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사람과 부아라 하는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해산을 도울 때에 그 자리를 살펴서 아들이거든 그를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이집트 왕은 이스라엘 아이들을 받는 산파들을 시켜서 사내아이들이 태어나면 그 자리에서 모두 죽이고 딸이면 살리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하지만 산파들은 눈에 보이는 이집트 왕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더 두려워했습니다. 누가복음12:4,5에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산파들은 자신의 현실적 유익보다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선택했습니다. 어느 시대나 하나님의 백성을 살리고 번성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죽이고 없애는 것은 사탄의 짓입니다.
산파들은 이스라엘 여인들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며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이 생겼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와 지식의 근본입니다(전 12:13). 산파들이 이집트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렸습니다. 이집트 왕이 산파들을 불러 심문을 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이같이 남자 아기들을 살렸느냐?” 이집트 왕의 심문은 추상같았습니다. 그러나 산파들은 태연하면서도 지혜롭게 대답했습니다. “히브리 여인은 이집트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19).”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그 백성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졌습니다. 하나님은 산파들이 바로에게 해를 입지 않게 보호하셨습니다. 산파들이 바로에게 변명할 때 은혜와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셨습니다. 본문에는 이집트의 왕의 이름도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출애굽기 2장에서는 모세의 부모의 이름조차 한 레위인으로만 언급되고 실제 이름은 나중에야 언급되었습니다(출6:20, 민26:59). 그러나 산파 중 십브라와 부아라 하는 사람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언급했습니다. 두 산파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십브라와 부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바로의 계획은 좌절되고 하나님의 뜻은 계속 진행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존중하시고 자기를 멸시하는 자를 멸시하십니다. 하나님은 연약한 여인들을 통해서 구원역사를 이루십니다. 십브라와 부아, 모세의 어머니와 누이, 바로 공주와 시녀들을 통해서 구원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믿음 있는 여인들을 통해서 영적인 산파역할을 하고 계십니다. 오늘날도 자매 목자님들과 사모님들을 통해서 생명 구원 역사를 이루십니다.
바로는 산파를 통해 이스라엘의 인구를 억제하려고 했는데, 하나님이 산파를 통해 오히려 더 번성하게 하셨습니다. 산파들은 설사 자신들이 죽음으로 내몰릴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지키겠다는 열심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참 지혜를 소유한 자들이 있는 곳에는 헌신이 있고, 생명이 살아납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떠합니까? 인구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2020년 출생아 수는 27만 명입니다. 작년 국내의 낙태는 불법까지 합하면 50만건 정도라고 합니다. 이제는 낙태가 합법화되고 있습니다. 2020년 전세계 사망률 1위는 낙태로서 4270만 명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스라엘 산파들의 믿음을 우리가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산파를 축복하신 하나님이 우리 역사에 개입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생명의 파수군들을 배치하셔서 이 백성을 도와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왕은 산파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이스라엘 사내아이들을 제거하려고 한 계획이 실패하자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하였습니다. 그는 이제 이집트 모든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나일 강에 던져버릴 수 있는 권한을 주었습니다(22).
우리도 이 세상에 살면서 지금 당하는 고난이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왜 내가 직장에서 상관에게 왕따를 당하고, 시달림을 당하게 하시는가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런 응답도 안하시고, 개입도 안하시는 것 같습니다. 나만 고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나에 대해 무관심하시고, 나를 버리신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통해 당신의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이나 민족을 크게 쓰시기 위해서 반드시 불같은 용광로 속에서 연단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받는 고난을 새 생명을 낳는 창조적인 산통으로 바꾸십니다.
바로 왕은 하나님도 모르고 이스라엘 자손의 과거와 미래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잘 아십니다. 그들의 과거를 아시고 현재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미래를 아십니다. 하나님은 노예생활을 통해서 그들을 훈련하십니다. 이 민족은 고난을 받으며 고난의 면류관을 썼습니다. 이 고난을 받으면서 생명을 낳고 키웠습니다. 우리가 식민통치를 받고 지독한 가난을 경험하고 6.25 전쟁이라는 아픔을 겪고 민주화의 고난을 겪었는데 이러한 모든 것이 고난 받는 인류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면 모든 이방인들이 귀를 기울입니다. 고난을 받은 사람이 지금 고난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고난을 통해서 더욱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법을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고난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이를 잘 견디어 내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살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고난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면서 이 세상에서 제사장 나라로, 목자로 귀히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출애굽기 1:1-22
요절 | 출애굽기 1:14
노예가 된 이스라엘
“어려운 노동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곧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 가지 일이라 그 시키는 일이 모두 엄하였더라.”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한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젊어서 고생을 해 봐야 사람이 성숙해지고 철이 들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목자님들은 형제들이 군대를 갈 때 장교보다는 졸병으로 가도록 도왔습니다. 장교로 군대생활을 하면 리더십을 키우는 좋은 점이 있지만 병으로 생활하면서 좀 더 고생을 하고 겸손을 배우도록 했습니다. 자매님들은 베이비씨터 훈련을 했습니다. 이를 통해서 섬기는 훈련, 겸손 훈련을 했습니다. 이런 훈련을 받은 분들이 선교사로 나가서 힘들게 자립을 하면서 여러 모양의 양들을 섬기며 제자로 키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사백년 동안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도록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노예생활을 하도록 하셨을까요? 우리는 왜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고 힘들게 노동을 하면서 살아야 할까요?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오늘 말씀을 묵상하기를 원합니다.
첫째,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1-7). 야곱과 함께 각각 자기 가족을 데리고 이집트에 이른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은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스불론과 베냐민과 단과 납달리와 갓과 아셀이요 야곱의 허리에서 나온 사람이 모두 칠십이었습니다. 요셉은 이집트에 있었습니다. 야곱의 허리란 환도 뼈의 힘줄이 있는 자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얍복 강에서 밤새도록 야곱과 씨름을 하시고 그의 환도 뼈를 치셨습니다. 야곱은 그의 환도 뼈가 부서지자 눈물로 하나님의 복을 구하고 변화가 되었습니다. 즉 야곱이 이스라엘로 변화되어 새로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35:11에서 디나 사건 후에 회개하고 벧엘로 올라온 야곱에게 이런 약속을 하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하나님은 창세기 1:28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복을 주셨습니다. 아브람을 택하시고 하늘의 별같이(창22:17,26:4), 땅의 티끌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많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을 이집트에서 성취하셔서 한 민족을 이루셨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이스라엘은 상상을 초월해서 인구가 증가했습니다. 여기서 다섯 개의 단어를 사용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더라. 역사상 400년 만에 70명이 200만 명이 넘는 경우는 없었다고 합니다. 자식 하나 없던 아브라함 한 사람을 생각하면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 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까 의심스러웠지만 하나님은 500년 만에 그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자손 70인을 이집트로 인도하신 것은 왜 일까요? 여러 부족들이 치고 싸우는 가나안과 달리 이집트는 보호된 환경이었습니다. 이집트는 지리적으로 홍해와 사막으로 막혀 있어서 외부의 침입이 거의 없었습니다. 또 이집트가 강대국이었기 때문에 침입할 세력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집트의 나일 강 하류 삼각주 지역인 고센 땅에서, 즉 그 풍요로운 환경 속에서 이스라엘이 번성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풍부한 양식과 보호를 받는 환경 속에서 자식을 많이 낳을 수 있었습니다. 본래 이스라엘은 유목민이었으나 고센 땅에 정착하면서 많은 자식을 낳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최적의 장소에서 이스라엘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창대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세계 만민을 복 주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만민 구속 계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을 구원하시고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통해서 교회 공동체를 이루시고 이 공동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루고자 하십니다. 헌신된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보다 한 교회, 한 민족을 통해서 할 수 있는 일이 훨씬 더 큽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계획하시고 인도하시고 이루어 가시는 만민 구원 역사에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를 보고 그 일에 동참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노예가 된 이스라엘(8-14). 8절을 보십시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이집트를 다스리더니”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란 ‘새로운 왕조’를 말합니다. 이 왕은 제18 왕조와 새 왕국을 건설한 아모세(Ahmose/ Amosis, 주전 1570-46)인데 그는 힉소스(Hyksos)를 물리치고 왕국을 건설하였습니다. 힉소스는 ‘외국 땅의 지배자들(rulers of foreign lands)’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본래 비옥한 초승달 지역의 북쪽에 살던 셈족으로 주전1670년경에 이집트에 와서 아모세에 의해 쫓겨날 때까지 통치하였습니다. 아모세가 창건한 새 왕국(1570-1085)은 이집트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 국가였습니다. 약 250년 동안(1570-1310) 이집트를 강력한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은 하나님에 대해서도 몰랐습니다.
친분이 있고 우호적인 관계에서는 자신의 욕심을 차리기 위해서 상대방을 도구로 이용하기는 매우 힘듭니다. 이런 관계를 청산하게 되면 벗이요 은인인 존재를 한 순간에 적으로 뒤바꿀 수 있습니다. 바로 왕은 자기 백성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자,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나갈까 하노라(9,10).” 바로 왕의 속 두려움이 관계를 깨뜨렸습니다. 전쟁이 나게 되면 전 왕조와 합세하여 자신들과 싸우고 이 땅에서 나갈 것이라고 오해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숫자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요셉과 같은 사람의 숫자가 늘어난다는 점에서 세상에 이득이 되지 결코 해가 되지는 않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많아지고 지위가 높아지면 그가 속한 공동체 전체에 지대한 유익이 된다는 것을 삶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크리스천들이 섬기는 생활은 다른 사람들을 성공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는 그러한 것을 보지 못하고 이스라엘에 대한 두려움에 기초해서 행동하였습니다.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에게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였습니다(11). 실제로 사람이 삶이 어렵고 힘들면 자식을 낳아 기를 여력이 없습니다. 오늘날 2030세대 청년들이 삶이 어렵기 때문에 54%가 결혼을 하지 못하고 안하겠다고 하고, 45%가 아이를 낳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결혼을 하려면 주택을 마련하고 아이를 낳아 양육을 해야 하는데 그러한 것이 어렵기 때문에 결혼도 포기하고 아기를 낳는 것도 포기하는 청년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바로 왕은 이스라엘의 노동력을 쥐어짜서 자신이 원하는 것도 만들고 그 가중한 노동을 통해 생존조차 힘겹게 만들어 생식능력을 무너뜨리고자 했습니다. 고고학적인 발굴로 람세스 2세의 통치 15년 즈음에 기록된 한 두루마리에 따르면 40명의 노예들이 매일 8만개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량의 벽돌을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적은 식량, 뙤약볕, 과중한 노동, 채찍이라는 강제노동에 이스라엘을 몰아붙임으로 바로는 자신이 원하는 건축물을 만들어 갔습니다.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은 귀금속을 보관하는 창고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 달리 이스라엘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12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여 퍼져나가니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이스라엘 남자들은 학대를 받을수록 근육이 강해지고 생식욕이 강해졌습니다. 그래서 더욱 아이들을 더 많이 낳고 퍼져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을 엄하게 시켜 어려운 노동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였습니다. 곧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 가지 일이라 그 시키는 일이 모두 엄하였습니다(14).
상식적으로 학대를 받으면 번성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런 학대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더욱 강하게 만드셨습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남자들의 체력 훈련을 시켜주는 꼴이 되었습니다. 바로의 계획과 정책이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계획에 간섭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자 이스라엘은 생명력이 점점 충만해졌습니다. 밥맛이 좋으니 아무 음식이나 잘 먹었습니다. 창조 역사를 이루어 가고자 하시는 하나님과 이를 파괴하고자 하는 바로 간의 싸움이 성경 역사 속에 계속됩니다.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바로의 노예 생활을 허락하셨을까요? 그들이 바로의 다스림 아래에서 고통을 당함으로 노예 상태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사정을 이해하도록 하셨습니다. 제사장 나라로 살기 위해서 노예와 같이 사는 다른 민족들을 불쌍히 여기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그들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가를 알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자기를 알지 못하는 왕 밑에서 노예 생활을 하면서 그들이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도록 도우시기 위함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들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훈련을 시키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쓰시려면 그들이 강해져야 합니다. 한 민족을 제사장 나라로 쓰기 위해서 낮추시고 강하게 훈련하십니다. 힘겨운 노예생활이 없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에 눌러 앉아 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집트에 동화되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노예 생활을 하면서 고통 가운데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자유롭게 살기를 갈망했습니다.
셋째, 하나님을 경외하는 산파들을 통한 보호(15-22). 이집트 왕은 극심한 탄압과 강제 노동으로 산아제한 정책이 실패하자 산파들에게 어떤 명령을 내렸습니까? “이집트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사람과 부아라 하는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해산을 도울 때에 그 자리를 살펴서 아들이거든 그를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이집트 왕은 이스라엘 아이들을 받는 산파들을 시켜서 사내아이들이 태어나면 그 자리에서 모두 죽이고 딸이면 살리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하지만 산파들은 눈에 보이는 이집트 왕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더 두려워했습니다. 누가복음12:4,5에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산파들은 자신의 현실적 유익보다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선택했습니다. 어느 시대나 하나님의 백성을 살리고 번성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죽이고 없애는 것은 사탄의 짓입니다.
산파들은 이스라엘 여인들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며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이 생겼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와 지식의 근본입니다(전 12:13). 산파들이 이집트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렸습니다. 이집트 왕이 산파들을 불러 심문을 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이같이 남자 아기들을 살렸느냐?” 이집트 왕의 심문은 추상같았습니다. 그러나 산파들은 태연하면서도 지혜롭게 대답했습니다. “히브리 여인은 이집트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19).”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그 백성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졌습니다. 하나님은 산파들이 바로에게 해를 입지 않게 보호하셨습니다. 산파들이 바로에게 변명할 때 은혜와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셨습니다. 본문에는 이집트의 왕의 이름도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출애굽기 2장에서는 모세의 부모의 이름조차 한 레위인으로만 언급되고 실제 이름은 나중에야 언급되었습니다(출6:20, 민26:59). 그러나 산파 중 십브라와 부아라 하는 사람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언급했습니다. 두 산파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십브라와 부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바로의 계획은 좌절되고 하나님의 뜻은 계속 진행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존중하시고 자기를 멸시하는 자를 멸시하십니다. 하나님은 연약한 여인들을 통해서 구원역사를 이루십니다. 십브라와 부아, 모세의 어머니와 누이, 바로 공주와 시녀들을 통해서 구원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믿음 있는 여인들을 통해서 영적인 산파역할을 하고 계십니다. 오늘날도 자매 목자님들과 사모님들을 통해서 생명 구원 역사를 이루십니다.
바로는 산파를 통해 이스라엘의 인구를 억제하려고 했는데, 하나님이 산파를 통해 오히려 더 번성하게 하셨습니다. 산파들은 설사 자신들이 죽음으로 내몰릴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지키겠다는 열심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참 지혜를 소유한 자들이 있는 곳에는 헌신이 있고, 생명이 살아납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떠합니까? 인구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2020년 출생아 수는 27만 명입니다. 작년 국내의 낙태는 불법까지 합하면 50만건 정도라고 합니다. 이제는 낙태가 합법화되고 있습니다. 2020년 전세계 사망률 1위는 낙태로서 4270만 명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스라엘 산파들의 믿음을 우리가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산파를 축복하신 하나님이 우리 역사에 개입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생명의 파수군들을 배치하셔서 이 백성을 도와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왕은 산파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이스라엘 사내아이들을 제거하려고 한 계획이 실패하자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하였습니다. 그는 이제 이집트 모든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나일 강에 던져버릴 수 있는 권한을 주었습니다(22).
우리도 이 세상에 살면서 지금 당하는 고난이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왜 내가 직장에서 상관에게 왕따를 당하고, 시달림을 당하게 하시는가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런 응답도 안하시고, 개입도 안하시는 것 같습니다. 나만 고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나에 대해 무관심하시고, 나를 버리신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통해 당신의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이나 민족을 크게 쓰시기 위해서 반드시 불같은 용광로 속에서 연단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받는 고난을 새 생명을 낳는 창조적인 산통으로 바꾸십니다.
바로 왕은 하나님도 모르고 이스라엘 자손의 과거와 미래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잘 아십니다. 그들의 과거를 아시고 현재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미래를 아십니다. 하나님은 노예생활을 통해서 그들을 훈련하십니다. 이 민족은 고난을 받으며 고난의 면류관을 썼습니다. 이 고난을 받으면서 생명을 낳고 키웠습니다. 우리가 식민통치를 받고 지독한 가난을 경험하고 6.25 전쟁이라는 아픔을 겪고 민주화의 고난을 겪었는데 이러한 모든 것이 고난 받는 인류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면 모든 이방인들이 귀를 기울입니다. 고난을 받은 사람이 지금 고난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고난을 통해서 더욱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법을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고난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이를 잘 견디어 내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살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고난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면서 이 세상에서 제사장 나라로, 목자로 귀히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