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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21년 요26강(21:1-25)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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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93회 작성일 21-09-19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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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요한복음 제 26 강
말씀 | 요한복음 21:1-25
요절 | 요한복음 21:15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과 깊이 대화하신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니고데모와 밤늦게 까지 대화하시고 사마리아 여인과 우물 가에서 대화를 하셨습니다. 38년 동안 병으로 누워 있는 사람과 대화하셨습니다. 부활하신 후 지난 주에는 도마를 일대일로 깊이 도우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를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를 만나십니다.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의 아픈 상처는 아직 치유되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지만 마음에 기쁨이 없고 장래에 대한 소망도 없고 삶의 의욕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를 찾아가셔서 해변에서 아침 식사를 나누며 대화를 나누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씩 물으시고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부탁하십니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사랑의 대화는 지금도 우리의 마음을 울립니다. 우리도 주님과 이런 사랑의 교제를 깊이 나눌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도마를 만난 후에 예수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습니다.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었습니다. 도마는 혼자 투쟁하던 사람인데 예수님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신앙고백을 한 이후로는 제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는 더 이상 다른 사람들과 교제를 끊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지혜로운 결정이었습니다. 며칠 후에 그들은 냉혹한 현실에 직면했습니다. 그들은 배가 고팠습니다. 생존을 위한 길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겠소”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소”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들이 나가서 배를 탔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에는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고기를 잡는 ‘비결’에는 잘못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단지 그것을 의지했기 때문에 단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것뿐입니다. 그들은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주님의 말씀이 귓가에 맴돌았습니다. 그들은 제자로서도 실패하고 자립도 못하니 참으로 막막한 심정이었습니다. 자신들의 모습을 볼 때 한 숨만 푹푹 나왔습니다.

  과거에 베드로는 꿈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일하고 먹고 살기 때문에 자신도 일하고 먹고 살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꿈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보고 예수님이 세상에 메시아의 나라를 이루실 때를 상상하면서 그의 꿈도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자 그의 꿈도 갈릴리 바다의 거품처럼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더구나 그는 원수들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깊이 절망했습니다. 죽고 싶었지만 너무나 젊어서 죽을 수도 없었습니다. 바다에 나가 그물을 내렸지만 아무 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 때가 부활하신 예수님에게는 베드로를 도울 수 있는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 후에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약속하신대로 갈릴리 해변에 서 계셨습니다.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야 너희들 거기서 뭐해, 빨리 안 나와”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어이, 친구들, 자네들 고기라곤 한 마리도 못 잡았지? … 자네들 오른쪽으로 한 번 그물을 내려 보게나. 그러면 조금 잡을 수 있을 걸세!(5,6)” 노련한 어부들은 낯선 사람들 특히 땅 위에 서 있는 사람이 하는 조언은 즉각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어조에는 확신을 불어넣는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자존심을 부인하고 순종하여 그물을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었습니다. 그물을 당기는 제자들의 손끝에 고기들의 파닥거리는 생명력이 전달되면서 그들의 마음이 쿵닥쿵닥 뛰기 시작했습니다. 입가에 미소가 번져나가고 마음에 밝은 태양 빛이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형편을 잘 아십니다. 그는 사나 죽으나 사명을 감당하라고 하기 전에 살 수 있는 의욕과 힘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이 장면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의 장면과 비슷합니다. 누가복음 5장에서 시몬 베드로는 밤새도록 그물을 내렸으나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깊은 데로 나가, 그물을 내려서 고기를 잡아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밤새도록 애를 썼으나 아무 것도 잡지 못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그물을 내렸습니다. 그때 그물이 찢어질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때 그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그 후에 그들이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많은 고기를 잡게 해 주심으로 제자들의 실패를 만회시켜주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성공한 사람에게는 상을 주고 실패한 사람에게는 벌을 줍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제자로서, 어부로서 실패한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것에 마음을 쓰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실패한 베드로에게 많은 고기를 잡게 하심으로 예수님 안에서 회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 안에 실패는 없습니다. 많은 실패와 절망 후에 예수님께 나아오는 자는 누구든지 회복해 주십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실 때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고린도후서 5:17은 말씀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지난 14일 여의도 순복음 교회의 조용기 목사님이 천국으로 가셨습니다. 그는 대조동 공동묘지 옆 깨밭에 천막을 치고 5명과 함께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는 17세에 폐결핵에 걸려 6개월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찾아 오셔서 오대양 육대주를 다니며 복음을 전할 꿈을 주시고 그를 살려 주셨습니다. 그는 강단에 올라설 때마다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성령님, 지금부터는 성령님께서 설교하실 시간입니다. 성령님께서 앞장서 주시면 저는 그저 성령님을 뒤따라가겠습니다.” 이렇게 성령님을 의지했을 때 그는 세계에서 가장 큰 70만 명의 교회를 이루고 많은 선한 일을 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보통 사람들은 바다로 뛰어들 때 입고 있던 옷을 벗어버립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반대로 겉옷을 두른 후에 뛰어 내림으로 예수님께 대한 엄청난 존경과 사랑을 나타냈습니다.

  나머지 제자들은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육지에 올라왔습니다. 제자들은 흐뭇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9b).” 예수님은 빈 손으로 심방오지 않았습니다. 숯불과 생선과 떡까지 싸가지고 오셨습니다. 빨간 숯불 위에는 은빛 나는 전어들과 말랑말랑한 빵이 고소한 냄새를 내며 누릿누릿하게 익어가고 있었습니다. 빨갛게 타오르는 숯불을 보면서 베드로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에 대제사장의 집 뜰에서 모닥불을 쬐며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자신의 과거가 생각나서 심히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신을 위해서 직접 불을 피워놓고 그 위에 생선과 빵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지금 잡은 생선을 조금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가서, 그물을 땅으로 끌어내렸습니다. 그물 안에는 고기가 그렇게 많았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습니다. 12,1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식사를 함께 하자는 초청은 단순한 사교적 행위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제하고 속마음을 나누자는 초청입니다. 함께 먹고 대화할 때 사랑을 느끼고 관계가 친밀해집니다. 식구는 늘 함께 먹고 마시고 대화를 합니다. 엠마오 상의 제자들도 예수님과 함께 먹으면서 영적인 눈이 뜨여졌습니다. 우리도 양들과 함께 먹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새로운 관계를 이루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은 다락방에서 대야와 수건을 가져와 그들의 발을 씻겨주심으로 그들의 실제적인 필요를 섬기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호숫가에서 마련해 주시는 식사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빵과 물고기를 나누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차려주신 밥상」이라는 책에서 저자는 예수님의 사역이 주로 사람들과 식사를 나누면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냈습니다. “기독교 공동체의 식사는 많은 것을 이루어 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를 잘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을 맛보게 합니다. 불신자들과 함께 우리 가운데 계신 하나님의 실체를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함께 먹는 것입니다. 식사는 새 공동체를 만들거나 무너진 공동체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밥상에서 관계를 맺는 사람은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밥상에서 섬기는 리더는 더 이상 냉담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과 피의 희생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최고의 선물은 그들의 죄를 씻기 위해서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생명을 주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드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자신과의 식사에 참여하라고 권유하고 계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나눈 식사는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상징하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를 바라보게 합니다(계 19:9). 지금 그 분의 초청에 응답하는 것은 그 때의 축제에 우리가 참여할 수 있음을 보장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침 식사를 하고 난 후에 베드로와 대면하셨습니다. 비록 다른 제자들도 분명 그 대면에 참여하고 있지만 베드로와의 대화는 공적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여기서 하시는 일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함으로써 공적인 망신을 당했기 때문에 그를 복권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예수님은 그를 반석이라는 의미를 가진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이름에 걸맞는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방식으로 베드로에게 자신의 지도력을 위임하기 위해서 시몬의 모습 그대로 대면하십니다. 시몬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언제나 시몬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 이상이 될 수 있는 능력이 그에게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시몬이 일단 예수님을 신뢰하기만 하면 반석인 베드로가 되어 그의 증거와 지도력으로 교회의 밑둥이 될 것입니다. ‘이 사람들보다’라는 말씀은 그가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3)’라는 자랑을 떠올리게 합니다. 베드로는 이전에 자신을 잘 몰랐습니다. 그는 항상 자신이 요한이나 야고보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그의 충성은 독보적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자기 의로 가득하고,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찾아오셔서 떡과 고기를 주시고 사랑의 관계를 회복했을 때에야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가를 깨달았습니다. 그는 베드로전서 2:24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베드로는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를 회복했을 때 나음을 경험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나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는 이제 주님과 자신에 대해 깨어진 마음으로 말합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15).’ 예수님은 똑 같은 질문을 두 번 더 던지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16).’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17)’ 그리고 그 때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며 교회 사역을 위임하십니다.

  예수님은 왜 이렇게 세 번씩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을까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르고 섬기기 전에 그의 삶에 있는 죄들이 처리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점에 대해서만큼은 매우 집요하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심지어 상처를 받고 어쩌면 당황했을지도 모를 지경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회개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하십니다.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합니다(히12:14)’ 예수님과의 관계는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슬프게 하고, 그 뜻에 어긋나게 행한 것들을 그 분의 임재 안에서 모두 처리할 때부터 시작됩니다. 주님은 우리의 실패가 아무리 절망적이고 우리의 수치가 아무리 뿌리가 깊다 하더라도, 그 분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새롭게 하셔서 그 분을 섬기는 일에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에게는 실패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실패는 패배가 아니라 성장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실패를 사용하십니다. 베드로의 주님께 대한 사랑이 진실해지고 겸손해졌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그를 사랑하도록 도와주십니다. 우리에게는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사랑을 받아야 우리가 주님도 사랑하고 사람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섬길 때 사랑이 없으면 그 사람을 수단으로 보게 됩니다. 사람을 만날 때마다 ‘그가 나에게 유익이 될까’를 먼저 생각합니다. 보상이 따라오지 않으면 실망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마음이 상하도록 사랑의 마음을 확인하셨습니다. 주님은 나에게도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 어린 양을 먹이라”는 분명한 방향을 주십니다. 궁극적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의 양들을 먹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양 무리를 두고 하나님께 가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대신하여 양 무리를 맡아서 돌볼 충성스러운 일꾼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 번씩이나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고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목양의 기초는 예수님께 대한 깊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해야만 양들을 사랑하고 헌신적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성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어떤 영혼이라도 끝까지 감당하고 섬길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만큼 양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친구를 위한 가장 큰 사랑은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양 무리를 이처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목자들이 예수님이 맡겨 주신 양을 예수님처럼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한 때 제자들과 함께 한적한 곳에 쉬러 가셨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보고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셨습니다(막 6:34). 예수님이 보실 때 이 세상의 모든 문제는 양들에게 목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 그는 우리에게 산 소망과 영원한 구원과 하나님 나라를 우리의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은 매우 소중합니다. 베드로 한 사람이 변화되면 사탄 숭배자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로 변화됩니다. 한 사람 바울이 변화되었을 때 전 세계가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자신과 같은 목자가 필요함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보내시고 우리를 통해서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목자로 부르심을 받고 주님과 함께 동역하는 것은 매우 큰 특권입니다.

  예수님은 장차 베드로가 순교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네 팔을 벌린다는 것은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할 것을 완곡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도의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막 8:34,35).”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는 것은 진정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길입니다. 자기의 것을 희생해서 나누어 줄 때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체험하고 기쁨과 자유를 누립니다.

  베드로는 자기만 죽는게 억울했는지 요한은 어떻게 되는지 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네게 무슨 상관이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남의 일에 참견 말고 네 일이나 잘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사역은 다를 것입니다. 베드로는 목자가 될 것이고 요한은 예언자가 될 것입니다. 베드로는 설교자가 될 것이지만 요한은 저술가가 될 것입니다. 베드로는 순교를 하지만 요한은 오랫동안 살면서 고난을 받으며 요한계시록을 쓰고 죽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이 증언하고 기록한 것들이 참됩니다. 우리가 그의 증언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계입니다.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하고 그 다음이 이웃과의 관계입니다. 관계를 깨뜨리는 것이 죄와 죄책감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죄책감을 제거하기 위해서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십니다. 베드로는 그 질문에 상처를 받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대한 사랑을 고백함으로 예수님과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되고 수제자로서 초대 교회를 세우는 일에 헌신하였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기 전에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이 무엇일까요? ‘과연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가 아닙니다. ‘나에게 시간이 있는가?’도 아닙니다. ‘이 일은 내가 좋아하는 일인가?’도 아닙니다. ‘나는 주님을 사랑하는가?’입니다. 예수님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신 다음에 내 양을 먹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맡기신 양들을 사랑으로 돌보게 돼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증거는 양을 먹이는 것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양들은 목자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우리의 가정교회에서 이런 사랑의 역사가 왕성하게 일어나서 집 안에 있는 양들과 캠퍼스의 양들과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양들을 담고 그 영혼을 구원하고 제자 삼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요한복음을 마치면서 이 한마디는 기억해야겠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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