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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2022년 출12강(20:22-22:17) 제사장 나라 백성의 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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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61회 작성일 22-01-23 13:47

본문

2022년 출애굽기 제 12 강 
말씀 | 출애굽기 20:22-22:17
요절 | 출애굽기 21:1

제사장 나라 백성의 법규
“네가 백성 앞에 세울 법규는 이러하니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남편으로 이스라엘을 신부로 영접하십니다.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32).” 19장을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맺은 결혼 서약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모세의 청혼(3-6), 모세의 중매(7), 신부의 승낙(8), 신부의 성결 예식(9-15), 결혼 예식(16절 이하), 신랑 입장(18,19), 신부입장(20-25), 신부서약(20:1-24:7), 성혼 선포(24:8), 피로연(24:9-11), 기념 촬영(24:12-18) 등으로 진행됩니다. 오늘 말씀은 신부서약에 해당이 됩니다. 결혼에서 신랑신부 서약이 있습니다. 신부에게 묻겠습니다. 신부 OO자매님은 신랑 OO 형제님을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남편으로 영접하고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하거나 병들거나 부유하거나 가난하게 되는 모든 경우에도 사랑하고 존경하며 순종하고 동역하겠습니까? 예. 왜 서약이 중요할까요? 자신이 하나님의 신부임을 자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 서약입니다. 모든 율법과 예언을 두 마디로 한다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이를 한 마디로 더 줄인다면 이웃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다(롬13:8)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에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다면 공동체를 지키는 율법이 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자기 힘으로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고자 하는 율법주의는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또 법이 이웃을 비난하고 판단하는 도구가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법보다 늘 앞서야 한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입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알아가고, 이웃 사랑이 깊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라(20:22-26). 여호와께서 주신 첫 번째 법규는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나 금으로나 너희를 위하여 신상을 만들지 말라”입니다. 이는 십계명 중 제 2계명에 대한 적용입니다. 우상은 하나님 대신에 우리가 찾고 의지하는 대상입니다. 사람들이 우상을 만드는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자기의 번영과 안정을 위해서 우상을 만들고 자기가 마음대로 조정하려고 합니다. 우상에게 금을 입히고 은을 입힙니다. 우상에게 자기의 힘을 쏟아 부어 크고 위대하게 보이게 만듭니다. 그럴수록 자신은 피폐하게 됩니다. 우상은 허무한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자도 허무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예배할 때에 흔한 흙으로 토단을 쌓고 돌로 제단을 쌓거든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제단을 화려하게 꾸미려 하지 말고 하나님께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예배를 드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를 경배하는 일에 집중해야 되지 부수적인 일에 마음을 더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을 영접했을 때 마르다는 음식 준비로 마음이 바빴고 자기를 도와주지 않는 동생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주님의 발 앞에 앉아서 그의 말씀을 듣는 일에 집중했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밥 한 그릇, 국 한 그릇이면 족하다고 하시면서 말씀을 듣도록 도우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도 기도제목에 매이기보다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과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먼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와 교제하면서 그의 뜻을 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은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십니다.

  예배를 드릴 때에 층계로 내 계단을 오르지 말라 네 하체가 그 위에서 드러날까 함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알몸이 드러나지 않도록 속옷을 입으라고 하십니다. 오늘날 코로나로 인해서 비대면 예배를 드릴 때에 혹시나 침대에서 잠옷 차림으로 예배를 드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왕 앞에 나갈 때 잠옷 차림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왕 되신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예배해야 그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십니다.

  둘째, 네 이웃을 사랑하라(21:1-27). 하나님께서는 백성 앞에 법규를 세우셨습니다. 이는 십계명의 시행세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히브리 종을 사면 그는 여섯 해 동안 섬길 것이요 일곱째 해에는 몸값을 물지 않고 나가 자유인이 될 것입니다. 이 법은 종의 법이 아니라 자유인의 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시켜 주셨는데 다시 종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우리나라도 종이 있었는데 갑오개혁 이후 종들을 해방시켰습니다. 한국에서 최초의 노비 해방자는 개화파 정치인 윤치호였습니다. 1895년 2월 13일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윤치호는 자기 집의 노비문서를 불로 소각하고, 노비들에게 재산을 주어 독립시켰습니다. 1895년 12월 서재필 귀국 이후 윤치호와 서재필은 노비를 해방시킬 방안을 계획하였습니다. 이들은 적당한 시기가 오면 이를 공론화시키기로 작정하고 1897년 이를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상정하였습니다. 개화기에 기독교 신자들이 노비해방을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여운형은 클라크 선교사의 권유로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노비문서를 불태워버림으로써 집에서 부리던 노비들을 해방하였습니다. 감리교신문인 《조선 그리스도인 회보》에 양반 부인이 노비를 부리는 것이 하나님께 죄가 된다는 신념으로써 여성노비를 해방하였으며, 자신의 수양딸로 입양하였다는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종은 없지만 어떤 점에서 많은 사람이 종처럼 살고 있습니다. 술의 종, 게임의 종, 물질 욕심의 종, 도박과 주식의 종, 미움의 종, 웹툰이나 음란물의 종이 되어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우리를 구원해주셨습니다. 우리를 죄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은혜를 기억하고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의 눈치를 보며 살지 말고 하나님의 눈초리를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영구히 종이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삶의 어려움으로 잠시 종살이를 할지라도 그 삶이 영구화되지 않게 하십니다. 신명기 15:13-14에서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때에는 빈 손으로 가게 하지 말고 네 양 무리 중에서와 타작 마당에서와 포도주 틀에서 그에게 후히 줄지니 곧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그에게 줄지니라.” 종이 일한 것에 대해서 퇴직금을 주고 그가 자립할 수 있도록 도우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자유인으로 살도록 도왔습니다. 

  자발적으로 종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만일 상전이 그에게 아내를 주어 그의 아내가 아들이나 딸을 낳았으면 그의 아내와 그의 자식들은 상전에게 속할 것이요 그는 단신으로 나갈 것이로되 만일 종이 분명히 말하기를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인이 되지 않겠노라 하면  상전이 그를 데리고 재판장에게로 갈 것이요 또 그를 문이나 문설주 앞으로 데리고 가서 그것에다가 송곳으로 그의 귀를 뚫을 것이라 그는 종신토록 그 상전을 섬기리라(4-6). 이 말씀에서 볼 때 영구히 종이 되는 것에 선결 조건이 있습니다. 아내와 자녀에 대한 사랑보다 상전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앞서고 있다는 것입니다. 상전의 음모로 인한 것이 아니라 종이 상전을 사랑함으로 인해서 그의 종이 되어야 종의 인권이 보장되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또 종신토록 종이 되고자 할 때 상전이 재판장에게 가서 판결을 받아야 합니다. 여기서 재판장이라는 단어가 ‘엘로힘(하나님)’이라는 것에 의미가 있습니다. 분명 사람에게 판결을 받지만 재판하는 사람도, 판결을 받는 사람도 모두 이집트에서 종 되었던 데서 구원하여 내신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자세로 판결을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을 때 불의와 부정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상전도 종도 모두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노사 관계가 발전하여 노동 시간과 복지에 힘을 쓰고 일반 시민들이 저녁 시간이 있는 사회를 만들어 갈 때 하나님의 뜻이 이 나라에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여성의 인권에 대해서도 깊이 다루고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의 딸을 여종으로 팔았으면 그는 남종 같이 나오지 못할지며 만일 상전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여 상관하지 아니하면 그를 속량하게 할 것이나 상전이 그 여자를 속인 것이 되었으니 외국인에게는 팔지 못할 것이요 만일 그를 자기 아들에게 주기로 하였으면 그를 딸 같이 대우할 것이요 만일 상전이 다른 여자에게 장가 들지라도 그 여자의 음식과 의복과 동침하는 것은 끊지 말 것이요 그가 이 세 가지를 시행하지 아니하면, 여자는 속전을 내지 않고 거저 나가게 할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상관한다는 것은 동침한다는 뜻입니다. 상전이 자기 아내로 삼고자 사온 종은 ‘음식, 의복, 동침하는 것’을 끊어서는 안 됩니다. 여성이 무차별적으로 버림받는 것을 막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것이 보장이 되지 않으면 속전은 내지 않고 홀몸으로 보내야 합니다.  그 집에서 푸대접을 받으며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홀몸으로 사는 것이 낫다고 여긴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성의 인권을 존중히 여기십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보충하는 법규가 있습니다. 사람을 쳐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나 만일 사람이 고의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그의 손에 넘긴 것이면 도피성으로 피하여 생명을 보전하게 해야 합니다. 사람이 그의 이웃을 고의로 죽였으면 그를 하나님의 제단에서라도 잡아내려 죽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 것입니다. 사람을 납치한 자가 그 사람을 팔았든지 자기 수하에 두었든지 그를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살인죄와 유괴죄, 부모 구타와 저주 등 생명을 해하는 경우 무거운 사형으로 다스립니다.

  오늘날 사회법에서 불효를 했다고 해서 사형을 시키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법이 죽어버린 것은 아닙니다. 비록 세상이 눈감아 준 불효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눈을 결코 피할 수 없습니다. 결국 부모를 저주하는 자는 “그의 등불이 흑암 중에 꺼짐을 당할”것입니다(잠20:20). 그리고 잠언 30:17에 보면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고 했습니다. 부모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저주하는 자는 범사에 잘 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왜 성경은 불효에 대해서 이렇게 엄하게 징계하는 것일까요? 이는 부모는 하나님의 대리자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언약 공동체 내에서 존경을 받기에 합당한 자였고 이들을 때리는 자는 하나님이 그들 위에 세워 놓으신 권위에 대한 불복종이며 아울러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입니다. 자기에게 생명을 주고 양육한 부모를 함부로 대하고 저주하는 자는 배은망덕한 자입니다. 배은망덕한 자에게 임하는 징계는 매우 중합니다. 우리가 받은 바 은혜를 기억하고 갚아야 합니다. 또한 부모에게 효도를 하는 것은 모든 덕의 기본입니다. 또한 우리는 부모님과 같은 윗사람에 대한 경의를 표해야 합니다. 노인과 원로들이 존경을 받아야 사회에 질서가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를 잘 세우는 것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성경은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부모도 아이들을 주의 계명과 율례로 양육하고 노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죄인들이기에 서로 용서하고 품어주어야 관계를 회복하고 바르게 유지할 수 있습니다. 관계가 풍성할 때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하나가 돌이나 주먹으로 그의 상대방을 쳤으나 그가 죽지 않고 자리에 누웠다가 지팡이를 짚고 일어나 걸으면 그를 친 자가 형벌은 면하되 그간의 손해를 배상하고 그가 완치되게 해야 합니다. 치료비를 물어 줄 뿐만 아니라 손해에 대한 배상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종을 학대함이 징계의 차원이 아니라 주인의 직권을 남용하는 학대라면 그 종은 해방되어야 합니다. 종의 눈을 상하게 하거나 이빨이 빠지게 하면 이에 대한 보상으로 종을 놓아 주어야 합니다. 눈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눈과 치아를 동급으로 취하고 있는데 당시는 눈이나 이가 빠지면 대체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은 치아가 빠지면 임플란트를 해서 끼워넣습니다. 눈은 대체품이 없습니다.  당시 종은 상전의 재산이지만 죽음이나 부상을 당하지 않도록 보호하라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임신한 여인을 쳐서 낙태하게 하였으나 다른 해가 없으면 그 남편의 청구대로 반드시 벌금을 내라고 합니다. 태아는 인간의 생명을 지녔지만 독립적인 인간과 같이 다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21:23-25을 보십시오.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이것을 동해복수법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복수를 자유롭게 하려는 인간의 본성을 억제시키고 처벌의 한계를 정하려는 것입니다. 라멕은 한 대 맞으면 77배를 복수하겠다고 단언하였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타락한 마음입니다. 한 마디 욕을 먹으면 백 마디 욕을 해 대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당한 보복, 과도한 보복을 금하시고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복수의 악순환을 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원수를 갚고자 하면 나도 악한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동해복수법을 통해서 최대한 죄를 억제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또 동해보복을 통해 약자, 힘 없는 자를 보호하고자 하십니다. 함무라비 법전은 상류계급이 피해자일 경우만 동해보복법을 적용하고 상류계층이 가해자이며 하층민이 피해자일 경우 금전보상이 원칙이었습니다. 즉 돈 가진 사람은 돈으로 처벌 받을 사람을 구하였습니다. 힘있는 자는 불법을 돈으로 해결했습니다. 무전유죄, 유전무죄였습니다.

  이스라엘은 경제적, 사회적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어 공평하게 적용되었습니다. 힘있는 자도 그만한 대가를 반드시 치러야 합니다. 이것이 강자의 폭력을 막는 수단이 됩니다. 처벌에 있어서 감정적이 되면 몇배로 갚아주기 쉽습니다. 그러나 냉정하게 처벌하되 어느 한도를 넘어서지 않도록 했습니다. 보복의 악순환이 오기 때문이죠. 예수님은 자기를 때리고 치는 자들, 죄 범한 자에게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아버지,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셋째, 배상에 관한 법(21:28-22:17) : 소가 남자나 여자를 받아서 죽이면 그 소는 반드시 돌로 쳐서 죽여야 하고 그 고기는 먹지 말아야 합니다. 임자는 형벌은 면하지만 소가 본래 받는 버릇이 있고 그 임자는 그로 말미암아 경고를 받았으되 단속하지 아니하며, 남녀를 막론하고 받아 죽이면 그 소는 돌로 쳐 죽일 것이며 임자도 죽이라고 합니다. 소가 종을 받으면 소 임자가 은 삼십 세겔을 그의 상전에게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소는 돌로 쳐서 죽여야 합니다. 이렇게 소를 죽이는 것은 동물계가 사람의 주권과 지배에 복종되어야 한다는 창조질서를 분명하게 말해 줍니다. 종들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보상을 받아야 합니다. 소가 다른 사람의 소를 죽이면 배상만 하게 됩니다. 차가 사람을 치이면 손해 배상이 크지만 차가 차를 부딪쳐서 대물배상을 해야 할 경우는 배상이 그렇게 크지 않습니다.

  사람이 구덩이를 파고 열어 두거나 구덩이를 파고 덮지 않아서 소나 나귀가 빠지면 그 구덩이 주인이 배상해야 합니다. 오늘날 맨홀에 빠져서 다치거나 죽는 경우를 가끔 신문지상에서 읽을 수 있는데 이미 구약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와 있습니다. 구덩이에 빠져서 죽은 짐승은 구덩이 주인이 차지할 것이나 짐승의 임자에게는 배상으로 돈을 주어야 합니다. 이 사람의 소가 저 사람의 소를 받아서 죽이면 살아 있는 소를 팔아 그 값을 반으로 나누고 또한 죽은 것도 반으로 나누라고 합니다.

  사람이 소나 양을 도둑질하여 잡거나 팔면 그는 소 한 마리에 소 다섯 마리로 갚고 양 한 마리에 양 네 마리로 갚아야 합니다. 소는 양보다 비싸기 때문에 배상도 무겁습니다. 이는 남의 재산을 보호하고 귀하게 여겨야 함을 말해 줍니다. 후진국에 여행을 가면 짐 가방에서 물건들이 하나 둘 없어집니다. 그러나 선진국에서는 잃은 물건도 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후진국과 선진국의 차이는 단지 경제적인 차이가 아니라 도덕적인 차이, 국민들의 수준에서 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 성장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계명의 다스림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실 하나님의 법도를 행하는 나라가 대국인 것입니다.

  5-15절에는 재산법에 관한 내용입니다. 짐승이 밭 작물을 먹을 경우와 밭에 불이 날 경우 그 손해를 배상해야 합니다. 사람을 믿고 맡긴 물건을 잘못 보관한 경우 두 배로 갚아야 합니다. 그러나 맡은 물건이 실수로 상하였으면 이를 보상할 책임은 없습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진의가 드러나지 않는 마음의 범죄 또한 존재합니다. 그러나 법 적용은 드러난 것뿐만 아니라 드러나지 않는 마음 속까지도 이끌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마음까지도 살펴야 합니다. 빌려간 짐승이 상하든지 죽으면 배상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의 물건을 맡으면 책임성 있게 관리를 해주어야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은행들이 국민들의 돈을 맡아서 유익을 남기도록 해 주어야 하는데 자기들의 이익을 챙기기에 바쁜 모습을 봅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이 공의와 인애를 실천하기를 원하십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 앞에서 양심을 살피며 살도록 말씀하십니다. 그 백성이 자유인으로 살며, 사회복지법, 자연 보호법을 마련하여 에덴동산의 회복을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긍휼과 자비가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살피며 살 때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이미 이 땅에 임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 완전한 하나님 나라가 오지 않았습니다. 오늘 내가 실천해야 할 사랑의 계명, 한 가지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 나라를 소망하며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힘쓰며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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