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누가복음 서론(문바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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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복음서 비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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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
들어가는 말 - 2
Ⅰ. 신약성경 배열 - 2
Ⅱ. 공관복음서 문제 - 3
Ⅲ. 공관복음서 문제 해결 - 5
Ⅳ. 사복음서의 존재 목적 - 10
Ⅴ. 사복음서 비교 - 11
1. 기록 성격 - 11
2. 주제 - 12
3. 구조 - 14
4. 상황 - 16
5. 신학 - 17
6. 사복음서의 비교 해석 - 22
나가는 말 - 25
들어가는 말
사복음서는 한 분 역사의 예수에 관한 목격자들 증언에 기초한, 네 개의 이야기다. 왜 예수는 한 분인데 예수에 관한 이야기는 네 개일까? 왜 한 분 예수를 이야기하는 사복음서 안에도 마찰과 모순이 존재할까? 성령께서는 네 개의 복음서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상당히 심각하고 많은 문제가 생겨남에도 불구하고 사복음서를 주신 목적이 무엇일까?
나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건전한 입장을 찾고자 한다. 이를 위해 사복음서가 시간이 아닌, 규모의 순서에 따른 배열임을 말하고, “공관복음서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다. 이어서 공관복음서 문제 해결을 위한 다양한 견해를 정리한 후 나의 입장을 밝힐 것이다. 사복음서의 존재 목적을 생각한 후, 사복음서를 여러 각도에서 비교 종합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사복음서를 비교하는 다양한 방식들을 소개하고 마무리 하고자 한다.
사복음서 비교 서론을 통해서, 매년 복음서를 반복하여 공부하는 우리 공동체에게 새로운 의욕과 심정을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Ⅰ. 사복음서 배열
신약성경은 시간의 순서가 아니라, 대체로 규모의 순서에 따라 배열되었다. 초대교회는 큰 것을 앞에 두고 작은 것을 뒤에 놓는 성질이 있었다. 아래 표에 보듯이, 신약성경의 각 섹션이(복음서, 서신서, 공동서신 등)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 배열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복음서 안에서 큰 책인 마태복음이 먼저 왔다. 그리고 마가복음이 맨 마지막에 와서 마태·누가·요한·마가로 배열될 수 있었다. 하지만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이 흡사하여 마가복음을 앞에 끌어다 놓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Ⅱ. 공관복음서 문제
공관복음(Synopsis)이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마태·마가·누가복음은 같은 부분이 상당수 있다. 이는 동시에 다른 부분이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왜 같은 부분이 있고 다른 부분이 있을까? 왜 공관복음서 안에 마찰과 모순이 있을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저자의 사상이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책 안에서 앞뒤에 상이점은 시간이 흘렀기 때문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공간의 변화에 따라 사상의 차이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불투만(Bultmann)은 팔레스타인 유대 신학(히브리어, 아람어), 팔레스타인 헬라 신학(헬라어), 이방인 신학(헬라어)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시간의 차이든, 공간의 차이든 현대 신학자들은 성경이 왜 차이가 있는가에 집중한다. 각 책의 독특한 신학을 찾아내는데 몰두한다. 물론 차이가 있다. 하지만 우리는 차이뿐 아니라 왜 공통점이 생기는가에 대해 더 큰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먼저 배열 순서와 내용에 따라 공관복음의 일치와 불일치 문제를 살펴보기로 하자.
1. 순서상 일치와 불일치
1) 문단 순서가 일치하는 부분은, 예수께서 활동을 준비하고 시작하신 것, 갈릴리 후기 활동, 예수의 수난이다.
2) 문단 순서가 일치하지 않는 부분은, 주로 예수의 갈릴리 초기 활동이다.
3) 문단 순서와 상관없이 각 복음서에 고유한 부분이 있다.
일치
불일치
고유
마 1-2장
눅 1-2장
예수의
활동준비와 시작
마 3:1-4:25
막 1:1-28
눅 3:1-4:37
마 5:1-7:29
예수의
갈릴리 초기 활동
마 8:1-13:58
막 1:29-6:13
눅 4:38-9:9
예수의
갈릴리 후기 활동
마 14:1-18:35
막 6:14-9:50
눅 9:10-50
눅 9:51-18:14
예수의 수난
마 19:1-28:20
막 10:1-16:20
눅 18:15-24:53
4) 주목할 것은, 순서상 불일치하는 부분에서 나타나는 부분적 일치다. 순서가 불일치하는 부분에서도, 항상 짝을 이루는 내용이 있다. 이는 역사적으로 짝을 이루어 일어난 사건임을 보여준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활동준비
일치
일치
갈릴리 초반
뒤죽박죽
뒤죽박죽
갈릴리 중반
일치
일치
수난
일치
일치
⑴폭풍을 잔잔하게 하신 것과 거라사 광인
(마 8:23-27; 28-34/막 4:35-41; 5:1-20/눅 8:22-25; 26-39)
⑵레위 부름과 요한 제자 금식
(마 9:9-13; 14-17/막 2:13-17; 18-22/눅 5:27-32; 33-39)
⑶안식일 밀밭과 손 마른 자
(마 12:1-8,9-21/막 2:23-28; 3:1-6/눅 6:1-5,6-11)
2. 내용상 일치와 불일치
공관복음에서 내용만 가지고 보면, 7가지의 경우의 수가 있다.
Ⅲ. 공관복음서 문제의 해결
위의 7가지 경우에서, 왜 세 복음서가 공통될까? 왜 두 복음서만 공통될까? 왜 특수 부분이 있을까? 이 문제를 고민한 사람이 2세기 말 이레니우스(Irenaeus)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은 기독교는 마태·마가·누가복음이 마찰을 일으키는 종교인데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고 공격하였다. 이레니우스는 『이단논박』에서, 세상에 동서남북 네 방향이 있고 네 방향에서 바람이 불기 때문에, 우리에게 네 기둥 곧 사복음서가 있다고 하였다. 또한, 하늘에 4가지 생물 곧 사자·송아지·사람·독수리가 있듯이, 땅에도 사복음서가 있다고 하였다.(Against Heresies, 3.11.8) 이렇게 이레니우스는 여러 복음을 인정하는 영지주의와 누가복음만 인정하는 막시온(Marcion)을 동시에 반박하였다. 이레니우스의 설명이 교회의 전통적인 입장으로 사용되었다.
한편, 2세기 타디안(Tatian)은 4권의 복음서를 연대기적인 하나의 관통복음(διὰ τεσσάρων)을 만들었다. 디아테사론은 시리아 지역에서 5세기까지 사용되었지만, 교회의 정죄를 받고 사복음사로 대체되었다.
그러다가 5세기 어거스틴(Augustine)은 사용설을 주장한다. 마태복음이 제일 먼저 기록되고, 마가가 마태를 축약하고, 마태·마가를 참고하여 누가복음을 기술되었다고 하였다. 이에 대한 도전이 생겨났다.
1. 원복음설
1778년 레싱(G.E. Lessing)은 아람어 원문서에서 마태·마가·누가복음이 나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아람어 원문서를 사용했으면 마태·마가·누가복음이 거의 같은 분량이어야 하는데, 마가복음만 왜 현저히 짧은지 설명할 수 없다.
2. 전승설
1818년 기셀(J.C.L. Gieseler)는 처음에 아람어 구전이 있었고, 거기서 2개의 그리스어 번역 곧 그리스어 번역1, 그리스어 번역2가 생겨났다고 했다. 거기서 마태·마가·누가가 가져다 쓰다 보니, ‘공관복음서 문제’가 생겼다고 한다. 그러나 그리스어 번역1,2 사본이 발견되지 않았다. 대문자 사본 300개, 소문자 사본 2,800개, 총 3,100개 사본은 우리가 가진 마태·마가·누가복음에 준하는 사본들이지 그 앞에 어떤 성경사본이 발견되지 않았다.
3. 사용설
1789년 그리스바흐(J.J. Griesbach)가 공관복음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면서, 어거스틴을 수정했다. 마태를 누가가 사용했고, 마태·누가를 마가가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현상이 드물기 때문에, 일반화시킬 수 없다. 누가가 마태를 사용했다면 누가의 고유한 부분은 어디서 왔는가? 마가가 마태·누가를 사용했다면 마가의 고유한 부분은 어디서 왔는가?
저물매 해 질 무렵에
Ὀψίας δὲ γενομένης Δύνοντος δὲ τοῦ ἡλίου
(마 8:16) (눅 4:40)
저물어 해 질 때에
Ὀψίας δὲ γενομένης, ὅτε ἔδυ ὁ ἥλιος,
(막 1:32)
4. 단편설
1817년 F.D.E. Schleiermacher는 처음에 여러 개의 단편으로 있었고, 마태가 조금, 마가가 조금, 누가가 조금씩 가져다 썼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면, 순서의 일치가 왜 생겼지 설명하지 못한다.
5. 두 자료설
1838년 C.H. Weisse는 마태와 누가가, 마가와 Q 자료(예수 어록집)에서 기원했다고 했다. 이는 사용설을 거꾸로 뒤집은 것이다. 즉 마가를 두 번째, 세 번째 자리에 놓지 않고 첫 번째 자리에 놓자고 역발상을 한 것이다. 7가지 경우의 수에서, 마태·마가·누가의 공통부분과 마태·누가의 공통부분은 마가에서 오고, 마가에는 없는데 마태와 누가에만 일치하는 부분은 Q 자료(Quelle, 샘, 원천)에 왔다는 것이다. 이를 ‘두 자료설’이라 부른다.
이는 굉장히 설득력 있다. 왜냐하면, 순서적으로 마태·누가가 마가와 순서가 일치할 때는 항상 마태와 누가 둘의 순서가 일치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마가를 표준으로 삼고, 마태와 마가를 비교해보거나 누가와 마가를 비교해보면, 마태와 마가가 순서가 일치하는 부분에서는 항상 마태와 누가도 순서가 일치하더라는 것이다.
또한, 내용적으로 마가가 마태와 누가에 비해 짧고(lectio brevior) 어렵다(lectio difficilior)는 것이다. 그래서 짧고 어설픈 마가가 우선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함정이다. 왜냐하면, 논리적으로 거꾸로도 성립되기 때문이다. 즉 마태와 누가를 표준으로 하여, 마태와 누가의 순서가 일치하는 부분에서, 마가는 항상 마태를 따르고 누가를 따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짧고 어설픈 마가복음이 먼저라는 것에 대해 5가지 비판이 가능하다. ①마가가 마태와 누가에 비해 원시적이지 않다. 순서가 잘 정리되어 있다. ②마가복음은 마태, 누가에 비해 언제나 난해하거나 간략하지 않다. 어떤 이야기는 더 정교하다. 예를 들어 세례 요한을 사형시키는 부분에서, 마태는 12절, 마가는 16절, 누가는 2절로 설명한다(마 14:1-12; 막 6:14-29; 눅 9:7-9). 그러면 2절밖에 안 되는 누가는 틀린 건가? 누가가 틀렸다면 마가우선설도 틀린 것이다. ③분량에서 마가는 마태과 누가에 비해서 더 긴 본문이 많다. ④또한, 마가 특수자료를 마태와 누가는 왜 사용하지 않았는지 설명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예수의 가족 이야기, 홑이불 버리고 도망간 청년 이야기, 스스로 자라는 씨의 비유는 왜 빼놓았는가? ⑤마태와 누가는 마가와 같은 소재가 있다. 예를 들어 마가복음의 나병환자 치유와 오병이어 사건에서 불쌍히 여겼다는 말씀이 나온다(막 1:14; 6:34). 그런데 마태와 누가는 왜 불쌍히 여겼다는 말이 없는가? 같은 소재를 가진 부분도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소일치, Minor Agreements) 다시 말해서, 마태와 누가는 일치하는데, 마가가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 그래서 마가복음 우선설은 맞지 않는다.
한편, Q 자료는 예수의 어록을 담고 있다고 해서 “말씀의 원천”이라고 부른다. 마태와 누가에서, 마가에 없는 부분은 주로 ‘예수의 말씀’에 해당하는 산상설교다. 이것이 예수 어록(Q) 가설의 근거가 되었다. 하지만 정작 예수 어록(Q) 가설을 증명할만한 사본이 없다. 게다가 초대교회 교부들이 그것을 증명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예수 어록(Q) 가설도 받을 수 없다.
이를 정리하면, 마태·누가가 마가에 의존했다고 보기 어렵다. 만일 의존했다면 반드시 우선설을 말하게 된다. 마가가 우선하면 나머지는 하위 성경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성경을 정경으로 받는다. 하나님은 영감을 통해서 각각 독립적으로 복음서를 주셨다고 믿는다.
6. 독립설
각 복음서의 전체 절수 중에서 내용적으로 유사한 절수를 보면, 서로 간의 독립적인 부분이 상당히 많다는 것이 밝혀진다. 아울러 세 복음서에서 상호 간의 유사성을 완전히 벗어나는 특수자료는 마태복음 25.99%, 마가복음 3.09%, 누가복음 39.9%다. 특수자료의 비율이 마가에서 저조하지만, 마태는 1/4, 누가는 1/3 이상을 가진다. 마가복음을 제쳐두고라도, 마태와 누가복음은 굉장히 독립적이다. 순서적으로도 문단이 같으면 문장이 다르고 문장이 같으면 단어가 다르다(예, 마 3:1-12/막 1:1-8/눅 3:1-18). 분명히 세 복음서는 각각 동일하고 독립적인 권위를 가진다. 그렇다면, 왜 공관복음서에서 공통점과 상이점이 존재할까?
1) 상이점이 생긴 이유
⑴ 사건의 규모 때문이다. 사건이 기록보다 큰 법이다. 기록은 사건보다 항상 작다. 모든 사건을 다 기록할 수 있는 기록자는 없다. 사건 중에 어느 부분을 취사 선택하게 된다.
⑵ 전승의 과정에서 상이성이 생겼다. 전승을 해도 모든 내용을 전승하는 게 아니다. 감추고, 빼고, 잊어버린 부분이 있다.
⑶ 기록자의 자유가 있다.
이를 종합하면, 사건의 규모, 전승의 과정, 기록자의 자유라는 조건 때문에 상이점이 생겼다.
2) 공통점이 생긴 이유
⑴ 순서의 규범이 있었기 때문이다. 순서의 규범을 상세하게 확대한 것이 공관복음서다. 전체적인 순서는, 예수께서 갈릴리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세례 요한을 만났다. 그리고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그 후에 갈릴리 사역을 시작하시고, 예루살렘을 체험하시고, 죽고 부활하셨다. 초대교회는 이 순서를 반드시 지켰다. 이는 초대교회가 신앙 고백할 때 반드시 지키려는 신앙의 규범이었다. 이것이 들어 있어야 초대교회는 복음으로 인정했다.
마태
마가
누가
서론
1,2장
1,2장
세례 요한
3:1-12
1:1-13
3:1-22
예수
갈릴리 활동
3:13-18:35
1:14-9:50
3:23-9:50(19:27)
유다 활동
19:1-28:15
10:1-16:20
9:51(19:28)-24:53
사도들
28:16-20
사도행전
⑵ 내용적으로, 유명한 사건(facta nota)과 유명한 말(verba nota)이 잘 기억이 되었기 때문이다.
⑶ 모든 복음서가 공통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내용이 있었다. 공관복음서는 그런 것을 유지하려는 의지가 있었다. 초대교회는 공관복음이 상이성이 있지만, 공통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았다. 교부들도 다양성이 통일성에 의해 통제받고 있음을 알았다.
결론적으로, 공관복음서의 공통성은 교회의 거대한 반석이었다. 우리가 복음서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부분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훨씬 견고한 기반 위에 교회가 서는 길임을 절대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Ⅳ. 사복음서의 존재 목적
공통점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왜 우리의 믿음의 기초는 독립된 사복음서일까? 독립된 한 복음서만으로도 예수를 알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복음서가 존재한 목적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합당한 원리가 있기 때문이다. “두 증인의 입으로나 또는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신19:15b) 사복음서의 독립적인 증인들은 보충적인 방식으로 예수의 정체성과 행하신 일을 더 자세하고 더 풍성하게 확증한다. 우리는 네 증인을 통해,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시고 고난받으신 것의 완전한 그림을 얻을 수 있다. Eta Linnemann, Is there a synoptic problem? (trans. Robert W. Yarbrough; Baker, 1992), 206-207.
Ⅴ. 사복음서 비교
사복음서의 공통된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다. 그러나 지향하는 바는 다르다. 처음에 말하는 것이 그 책이 지향하는 바다. 마태복음에서 예수가 ‘그리스도’(1:1; 16:16)라는 고백이 중요하다. 마가복음은 거기에 하나를 덧붙인 것이, ‘하나님의 아들’(1:1; 15:39)이다. 누가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나 하나님의 아들뿐만 아니라, 예수가 ‘역사적 인물’(1:1)이며 그분에 관한 ‘프라그마(Practical facts)’를 말하려는데 관심이 많다. 요한복음은 예수를 ‘말씀’(1:1, 로고스)으로 소개하고 그분의 말씀을 장황하고 자세하게 기술한다.
이와 같은 독립된 사복음서는 각각의 기록 성격, 주제, 문학 형식 및 구조, 상황과 신학을 채택하였다.
1. 사복음서의 기록 성격
공관복음이 혼용되던 시대, 파피아스는 130년경 『주님의 말씀에 대한 해설』에서 각 책의 성격을 규정한다.
먼저 “마태는 히브리 방언(‘Εβραιδι διαλεκτω)으로 그 말씀들을 정리/종합(συνεταζατο)했고, 각 사람이 할 수 있는 대로 그것들을 번역했다”고 했다. 즉 마태는 “잘 정리해서 배열”한 것이다. 그 정리를 히브리적 방식으로 했기 때문에, 책 안에 반복과 병행이 많다. 누가·마가는 반복 용법이 마태에 비교 현저히 떨어진다.
이에 비해, “마가는 베드로의 통역자(ἑρμηνευτὴς)였고 그가 기억하는 것들을 정확하게(ἀκριβῶς) 기록하였지만, 주님의 말씀과 행적을 순서대로(τάξει) 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주님을 듣지도 않았고 따라 다니지도 않았기 때문인데, 후에 베드로를 따라 다녔다. 이 사람(베드로)이 필요에 따라(πρὸς τὰς χρείας) 교훈들을 행했지만 주님의 말씀의 종합(σύνταξιν τῶν κυριακῶν…λογίων)을 만들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마가는 어떤 잘못도 저지른 것이 아니며 그가 기억하는 대로 몇 가지(ἐνια)를 기록했다. 그는 한 가지를 생각했는데, 그것은 그가 들은 것 가운데 어떤 것도 생략하거나 위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파피아스 당시 마가복음이 열등하다는 비판이 있었다. 하지만, 파피아스는 마가가 정확하게 기록했다고 옹호한다. 의도적으로 누가복음 서론에 나오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마가와 누가복음이 동일한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 누가가 자세히 기록한 것처럼 마가도 자세히 기록한 것이다. 하지만 마가는 누가처럼 순서대로 기록하지 않았다. 또 마태처럼 주님의 말씀의 종합을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마가가 마태에 비해 내용이 짧고, 분량이 줄어 있는 것은 모든 내용을 다 쓰겠다는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가는 필요에 따라 기록했을 뿐이다. 특히 마가는 예수의 말씀보다 행하심에 관심을 가지고 씨름했다.
한편, 누가는 기독교 세 번째 세대로서 복음서를 다르게 쓰고자 했다(눅1:1-4). 제1세대는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1:2, αὐτόπται καὶ ὑπηρέται), 제2세대는 “사람이 많은지라”(1:1, πολλοὶ), 제3세대는 “나도”(1:3, κἀμοὶ)
누가는 근원부터(ἄνωθεν, 근원성) 썼다. 예를 들어 마태는 예수의 출생부터, 마가는 요한의 등장부터 썼지만, 누가는 세례 요한의 탄생부터 썼다. 누가는 자세히(ἀκριβῶς, 세밀성) 썼다. 마태·마가에 없는 내용이 누가에 아주 많다. 누가는 차례대로(καθεξῆς, 질서성) 썼다. 즉 교회의 전통적 순서를 잘 따랐다.(요한의 사역, 예수의 출생, 예수의 활동, 죽음, 부활, 승천, 승천 이후의 일들까지)
그런데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 크게 다르다. 대부분의 학자가 요한복음의 독립성을 강하게 확신한다. 공관복음은 한 가지 주제를 짧게 다루는 일간지에 비유한다면, 요한복음은 한 사건을 깊고 길게 진술하는 월간지에 비유할 수 있다. 또 공관복음은 지리에 관심이 많지만, 요한복음은 시간에 관심이 많다. 공관복음이 세 유월절을 한 유월절로 압축한 것을, 요한복음은 한 유월절을 세 유월절로 풀어서 기록하고 나서 마지막 유월절을 강조했다. 요한은 자신만의 주제, 어휘, 연대기를 사용하여 독특한 복음서를 썼다.
2. 사복음서의 주제
마태복음의 주제는 “성취”다. 마태는 10회에 걸려 성취 인용구를 반복한다.(1:22-23; 2:15; 2:17-18; 2:23; 4:14-16; 8:17; 12:17-21; 13:35; 21:4-5; 27:9-10,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함이러라”) 마태는 예수와 구약 성경 사이의 성취적 관계를 직접적으로 강조한다.
마가복음의 주제는 “십자가의 길”이다. 마가복음의 시작은 길이 없는 광야에 길을 만드는 세례 요한으로 시작하여(1:2-13), 길이 없는 무덤에서 끝난다(15:42-16:8). 그리고 길 위에서(8:27-10:45) 제자도가 이루어진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길 끝에 십자가가 있음을 반복하여 말씀한다(8:31-32; 9:31-32; 10:33-34).
누가복음의 주제는 “구원역사”다. 누가는 예수께서 세상에서 행하러 오신 것과 사람들에게 주고자 하신 것이 구원임을 강조하고(눅19:10) 실제적인 구원의 축복들을 다양하게 기술한다. 그리고 누가는 이러한 구원을 세계사 속에서 끌고간다.
눅2:1 Augustus(주전 30년 - 주후 14년)
눅3:1 Tiberius(주후 14-37년)
Gaius Caligula(주후 37-41년)
행18:2 Claudius(주후 41-54년)
행28:19 Nero(주후 54-68년)
세속사는 로마 황제가 이끌어 가지만, 누가가 보기에 진정한 역사는 구원역사다. 아우구스투스 때 예수께서 태어나시고, 티베리우스 때 예수께서 등장하시고, 클라우디우스 때 교회가 왕성하게 자라다가, 네로 때 핍박을 받지만, 교회는 죽지 않는다. 누가는 이를 구원역사로 기술한다.
누가가 볼 때, 세속사는 일종의 틀이다. 세속사가 없이는 구원역사가 있을 수 없다. 다만 세속사와 구원역사가 같이 가다가 마지막에는 구원역사만 남는다. 그것이 하늘나라의 천상교회다. 누가는 누가행전을 통해 로마 황제들이 다 사라지고 “주” 예수만 남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만 구원역사가 없으면 역사는 의미가 없고 구원역사가 있으려면 역사도 같이 종말까지 가야 한다. 누가는 두 역사가 겹쳐있지만 잘 구분할 수 있는 역사적 안목을 제공한다.
요한복음의 주제는 “영생의 말씀”이다. 요한은 공관복음과는 다른 시각에서 예수를 바라본다.
이상을 종합하면 마태는 구약의 성취를, 마가는 십자가의 길을, 누가는 구원역사를, 요한은 영생의 말씀을 주제로 채택하였다. 그 가운데 누가는 역사가요 신학자로서 구원역사를 보여주었다.
3. 사복음서의 구조
마태복음은 5중 구조다. 5-7장은 산상설교(제자도), 10장은 선교명령, 13장은 하늘나라 비유, 18장은 공동체 교훈, 24-25장은 미래에 대한 교훈이다. 각 강화의 끝에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가 5번 반복된다(7:28; 11:1; 13:53; 19:1; 26:1). 이를 근거로 벤자민 베이컨(B.W.Bacon)은 마태복음을 모세오경에 비교하여 예수가 새로운 모세(New Moses)라고 설명한다. 이외에 킹스베리(Kingsbury)는 “예수께서 비로서~시작하셨다”(4:17; 16:21)란 말로 세 부분으로 구분한다. ⑴메시야 예수의 인격(1:1-4:6)/ ⑵메시야 예수의 선포(4:17-16:20, 4:17)/ ⑶메시야 예수의 고난, 죽음, 부활(16:21-28:20, 16:21)
또한 “갈릴리”를 중심으로 지형학적 구분도 가능하다. ⑴예수의 탄생과 요한의 활동(1:1-3:12)/ ⑵예수의 첫째 활동(3:13-18:35, 3:13)/ ⑶예수의 둘째 활동(19:1-28:20, 19:1)
마태복음 안에 “갈릴리”(16번)는 다른 복음에서보다 더 많이 반복된다. 예루살렘 11번, 애굽 4번, 나사렛 3번, 요단강 6번, 광야 9번, 가버나움 4번, 유대 8번.
갈릴리를 강조하는 이유는 이방 선교를 위해서다.
마가복음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구조다. R.T. 프란스는 예수의 활동 지역에 따라, 광야(1:1-13), 갈릴리(1:14-8:21),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도중(8:22-10:52), 예루살렘(11:1-16:8)으로 구분한다. 지리적 구조에서 갈릴리와 예루살렘은 대조적인 장소다. 갈릴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목적을 승리적으로 이루시는 곳(14:28; 16:7)이지만, 예루살렘은 죄와 죽음의 도시(3:22; 7:1; 10:33; 11:18; 14-15장)다.
한편, W. Marxsen은 마가복음을 수난사라고 말한다. 예수의 수난에 대해서 쓰려고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예수의 갈릴리 활동을 쓰게 되고, 갈릴리 활동을 쓰려다 보니, 세례 요한의 이야기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수난 이야기가 거꾸로 자랐다는 것이다. 이에 기초하여 마틴 켈러(M. Kähler)는 마가복음을 “자세한 서론을 가진 수난사”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마가복음 자체가 “복음의 시작”(1:1)을 선포하고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 위의 예수를 기술한다.
누가복음은 “예루살렘/성전 중심” 구조다.
성전에서 시작(예수의 시작을 예고하는 이의 탄생을 알리는 장소, 1:5-23)
예루살렘 성전으로 여행(예수의 사역의 절정의 장소, 9:51-19:27)
성전으로 돌아옴(예수의 시작을 알리는 이들의 탄생 준비 장소, 24:52-53)
누가복음의 구조는 9:51-19:27의 독특한 위치와 기능에서 마태·마가와 구별된다. 마태·마가와 달리 누가는 시작부터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고 밝힌다. 예루살렘의 중요성을 13:32-34에서 특히 강조한다.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누가에게 예루살렘은 핍박의 장소이면서, 궁극적인 승리의 장소다.
마태는 갈릴리를 강조하지만, 결국 누가는 예루살렘을 강조한다. 마태는 밖으로 나가는 것을 강조하지만, 누가는 나가기는 하지만 뭔가 원심을 가지며 중심을 두려고 한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대한 강조가 다른 복음서보다 강하다. 예루살렘이 마태에 12번, 마가에 10번에 비해, 누가에 33번 언급되어 3배가 많고, 사도행전에만 60번이 등장한다. 누가에게는 복음이 멀리 가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복음의 근원이 중요하다. 누가는 ‘근원성’을 따지는 사람이다.
요한복음은 “유월절” 구조다. 요한복음은 유월절이 가까웠다는 말로 세 단락이 된다(요2:13; 6:4; 11:55,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유월절 첫번째 방문은 가나 혼인잔치 이후에 성전 청결 사건이다(2:13,23); 두번째 방문은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으로 발생한다(6:4); 세번째 방문은 수난기간 전체다(11:55; 12:1; 13:1; 18:28,39; 19:14).
공관복음은 유월절을 하나만 설명하지만, 요한복음은 유월절이 3번 나온다. 요한복음의 절반은 100주간의 활동이다. 그러나 세 번째 유월절은 1주간의 활동이다. 책의 분량은 1:1이지만, 시간의 분량은 100:1이다. 요한은 마지막 유월절의 1주간을 엄청나게 강조한다. 이는 유월절을 통해서 예수께서 어떻게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셨는가를 말하기 위해서다.
이상을 종합하면 마태는 5중 구조를 통한 성취주제를, 마가는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해 가는 예수의 수난사를, 누가는 예루살렘/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원심구조를, 요한복음은 철저한 유월절 시간 구조를 채택하였다.
그 가운데 누가는 구심력을 가진 예루살렘/성전으로 모여드는 유대교의 패턴이, 다양한 인종과 언어와 소통하는 복음이 퍼져나가는 원심력의 패턴으로 뒤집히는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구조화했다는 생각이 든다.
4. 사복음서의 상황
마태복음은 유대교와 이방인에 대한 이중적인 관계에 서 있다. 마태는 자신의 시점을 “오늘”(σήμερον)로 놓고, 과거로는 아브라함까지 2000년을 올라가고, 미래로는 세상의 끝날까지 간다. 마태는 과거 이스라엘의 역사를 전제로 하면서, 동시에 자신으로부터 시작하여 미래의 교회 역사까지 내다본다. 마태의 현재는 두 가지 대상, 곧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놓여있고, 유대인과는 마찰을, 이방인과는 선교이면서 경계를 보여준다. 즉 마태는 마지막에 모든 족속에게 가라고 하지만, 이방인에게 동화되면 안 된다는 말한다. 마태의 오늘은 두 가지 상황에 놓여있는 것이다(“오늘날까지”, ἕως τῆς σήμερον, 27:8; μέχρι τῆς σήμερον, 28:15)
아브라함
오늘
세상 끝날
1:1 이스라엘의 역사
유대인
마찰과 갈등
마태의 상황
교회의 역사 28:20
이방인
선교와 경계
마가복음은 박해받는 교회의 상황이 나타난다. 어떤 상황인지 확실하게 말할 수 없지만, 그리스도인들이 박해 앞에서 인내해야 한다는 내용이 많다(8:34; 10:30; 13:8).
누가복음은 기독교를 변증한다. 누가복음은 데오빌로 각하에게 보내는 넓은 의미의 서신이며 기독교 변증서다. 데오빌로는 분명 기독교가 무신론이라는 당시의 비방을 믿지는 않았다. 하지만 헬라 세계의 지식인들은 기독교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접하고 있었다. 그들 중에 기독교에 대한 진위를 판단해야 하는 자들도 있었다. 누가행전의 변증적인 성격은 바로 이 때문이다. 특히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로마에 대한 호의적인 내용들 곧 로마 백부장의 믿음(7:1-10), 가이사의 것을 가이사에게 돌리라는 말씀(20:20-26), 빌라도의 3번 무죄선언(23:4,14,22)은 누가의 의도가 기독교 변증임을 시사한다.
요한복음은 기록목적이 기록 상황을 보여준다. 요한복음 20:30,31에서 두 개의 ἵνα(히나)절을 통해서 2가지 목적, 즉 선교적, 교육적 목적을 밝히고 있다. 요한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
이상을 종합하면, 마태는 유대교와 이방인을 대상으로 하는 이중적인 상황에, 마가는 박해받는 상황에, 누가는 기독교를 변증해야 하는 상황에, 요한은 예수가 누구신지를 알게 하고, 영생을 확신하도록 도와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특히 누가는 기독교 3세대로서 초대교회를 이방인에게 변증할 필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5. 사복음서의 신학
1) 기독론 비교
마태복음은 다른 복음서보다 “그리스도”를 더 많이 반복한다. 서론에서(1:1). 예수의 탄생사에서(1:1,16), 세례 요한의 질문에서(11:2), 수난사에서(26:63), 예수는 그리스도다. 또한 마태는 구약과 비교하여 예수는 “~보다 더 큰 이”(μεῖζόν, πλεῖον)라고 반복한다. 성전모형론(12:6), 요나모형론(12:41), 솔로몬 모형론(12:42)에서 예수는 제사장보다, 선지자보다, 왕보다 더 크시다.
마가복음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한다. 마가는 초자연적인 수단들, 즉 하늘과 귀신의 음성으로, 십자가 앞의 백부장의 고백으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증한다. 마가는 하나님의 아들을 고백하면 박해를 당당하게 견딜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마가복음의 메시야 비밀이론은(1:25,34; 3:12 등) W. Wrede는 역사비평적으로 메시아 비밀이론을 말한다. 예수 자신은 메시아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십자가 사건 이후에 제자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믿기 시작한다. 자신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은 예수와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한 제자들 사이의 간격을 메우기 위해서 마가가 복음서를 쓰면서 메시아 비밀이론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Wrede는 마가가 예수께서 메시임에도 불구하고 메시아로 인정받지 못하고 배척당하여 처형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구속사적 이유가 있다. 예수를 이적을 가지고 이해하면 안 되고 십자가와 부활로 이해해야 맞다는 것이다.
누가복음의 예수는 “역사적 인물”이다. 그래서 “πρᾶγμα”(1:1)가 누가의 화두다. 그래서 누가는 예수의 인간적인 면과 초인간적인 면을 강조한다. 주목할 점은 초인간적인 면에서, ‘성령’과 관련된다는 것이다. 성령에 의한 탄생(1:35), 성령이 내려오심(3:22), 성령이 위에 계심(4:18), 승천하신 예수께서 성령을 보내주심/부어주심(24:49; 행2:33)이다.
또 누가만이 예수가 ‘주’라는 견해를 보여준다. 1-5장에서 14번의 ‘주’는 하나님을 가리킨다(1:6,11,58,66; 2:9,22,23,24,26,39; 3:4; 5:17). 하지만 다음 장들에서 14번은 예수를 가리킨다(7:13,19; 10:1,39,41; 11:39,41; 11:39; 12:42; 13:15; 17:5,6; 18:6; 19:8; 22:61; 24:34). 예수는 천사의 선포처럼 하나님의 아들 “주”이시며(1:32,35), 하늘의 음성처럼 “주”이시며(3:22; 9:35), 귀신들이 알듯이 “주”이시다(4:34,41; 8:28).
또 누가의 ‘인자’(ὁ 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는 승귀 쪽을 강조한다. 누가복음의 인자의 3가지 중요한 용례는, 지상사역(19:10), 수난과 부활(17:25; 22:48; 24:7), 재림(17:22; 18:8; 21:36)을 다 포괄한다. 마가의 인자는 수난 쪽을 강조하지만, 누가의 인자는 승귀 쪽을 강조하는 미묘한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요한복음의 예수는 표적을 행하신 분이다. 공관복음에 나오는 29가지 이적과 3가지만 공통되고 다른 이적이 나온다. 그리고 요한의 로고스 기독론은 구약의 “דָּבַר”(다바르)에서 출발한 것이 분명하다(시33:6). 그러므로 예수는 표적을 보이는 분이시지만, 말씀이신 하나님이다. 도마의 결론처럼 예수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20:28)이다.
이상을 종합하면, 네 편의 복음서가 공통적으로 예수를 하나님으로 결론 내린다. 구약을 성취하신 그리스도, 수난당하신 하나님의 아들, 이 땅에 사신 주, 위에서 내려오신 말씀은,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고백으로 모아진다.
2) 교회론 비교
⑴ 기도
누가는 기도를 9%(전체 1151절 중에 104절)강조하는데, 비해 마태는 3.1%(전체 1071절 중에 34절), 마가는 1.6%(전체 678절 중에 11절), 요한은 2.9%(전체 879절 중에 26절)로 기도를 말한다. 누가는 각 복음서 비율, 평균 4배 이상을 예수를 기도하는 분으로 소개한다. 특히 누가복음에 예수의 9번의 기도가 소개되고 있다. 세례받으실 때(3:21), 기적을 행한 날이 지난 후(5:15,16), 제자들을 택하시기 전(6:12), 자신이 고난받아야 하실 것을 처음으로 예언하시기 전(9:18-22), 변화산에서(9:29), 70인이 돌아왔을 때(10:17-21), 제자들이 어떻게 기도할지 가르치기 전에(11:1), 겟세마네 동산에서(22:39-46), 십자가에서(23:34,46)다.
아울러 누가는 기도에 대한 특수자료를 사용하여, 예수의 예루살렘 여행 초기의 친구의 청을 들어주는 비유(11:5-8)와 여행 후기의 과부의 간청을 들어주는 재판관의 비유(18:1-8)와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18:9-14)를 인클루지오 기법으로 기도를 배치한다.
제자의 기도 중에 첨가된 새로운 한 가지는 예수의 재림을 위한 기도다. 제자는 예수의 재림까지 단지 기도함으로 신앙을 유지할 수 있다. 제자는 세상 염려와 즐거움을 기도로 이기고(8:14), 핍박과 고난을 기도로 이겨야 한다(8;13; 22:32,40,46). 단지 기도하는 자만이 인자가 오실 때 합격할 수 있다(18:1-8; 21:36).
누가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되지만(11:9/마7:7) 모든 기도가 응답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기대한 내용 대신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11:13). 누가는 믿음의 모든 능력은 인정하지만(17:6/마17:20), 기도의 모든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마21:22/막11:24에 비해서). 누가는 기도로 하나님을 억압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⑵ 제자도
공관복음의 제자의 범위를 보면, 마가의 제자는 대체로 12명 정도로 제한한다. 하지만, 누가는 12명을 넘어선다. 누가에만 70인 제자 파송사건이 나온다(눅10:1-16). 70인의 제자는 “그 제자의 많은 무리”(눅6:17)와 “제자의 온 무리”(눅19:37)로 확대된다. 누가의 확대된 제자 범위는 사도행전의 제자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행6:1,7; 9:1,10,26). 이에 비해 “사도”는 누가복음에 6번, 사도행전에 30번 사용되어 ‘사도전 전승’, 혹은 ‘초기공교회주의’를 나타낸다.
공관복음의 제자에 대한 평가를 보면, 마가는 제자를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막8:21) 마태는 동일한 책망이 한 번 나오고, 마지막에 제자들이 의미를 깨달은 것으로 매듭지어진다(마16:12). 그러나 누가에는 이 기사가 아예 없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에서 마가는 책망만 소개되고(막8:33), 누가는 책망이 없지만(눅9:18-27), 마태에는 다른 복음서에 없는 칭찬(마16:17-19)과 책망(마16:23)도 함께 기록되었다.
또한, 마가복음의 제자들은 예수의 수난 예고 후에 자리에 욕심을 낸다(막10:37). 그러나 마태는 같은 사건에서, 자리 청원자가 제자가 아니라, 제자의 어머니라고 밝힌다(마20:20).
이밖에도 마가는 제자들의 믿음의 부족(막4:40; 9:19), 이해의 부족(4:13; 6:51-52; 7:18-19; 8:17-18,21; 9:32; 10:38), 분별력의 부족(8:32-33; 10:13-16), 두려움(4:41; 6:50; 9:32; 10:32)과 자리 욕심(9:33-37; 10:35-45)을 묘사한다. 이에 반해 누가는 제자들이 깨닫지 못한 이유를 제시하여 무지를 합리화시켜준다(눅9:45; 18:34, “그들로 깨닫지 못하게 숨긴 바 되었음이라”).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장면에서, 마가와 누가는 모두 예수께서 기도하실 때 제자들은 잠들었지만, 누가만 제자들이 깨어있지 못한 이유를 밝혀준다(눅22:45, “슬픔으로 인하여”). 누가에는 잠든 제자들에 대한 책망이 없다(눅22:46, cf 막14:37).
또한, 예수께서 체포되실 때, 마태와 마가에는 제자들이 예수를 버리고 도망친다(막14:50; 마26:56). 그러나 누가는 이를 생략한다. 그리고 누가에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제자들이 그 자리에 나타난다(눅23:49, “예수를 아는 자들 다”).
이를 종합하면, 복음서의 제자의 평가는 마태는 양면적, 마가는 부정적, 누가는 긍정적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공관복음이 제시하는 제자모델을 보면, 마태의 제자모델은 회당 유대교와의 갈등이 배경이 된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회당에서 축출되거나 축출될 상황에 놓여있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다른 복음서보다 ‘배우라’(μάθετε)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마9:13; 11:29; 24:32), 제자들이 ‘깨달았다’(συνίημι)는 말이 많이 사용한다(13:51; 16:12; 17:13). 마태의 제자는 일반 성도들을 대표하는 대표적 모델로서 긍정과 부정의 양면성을 띤다. 마태의 제자는 책망을 피하고, 바른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 예수의 말씀을 부지런히 배우는 학문공동체다.
마가의 제자모델은 억제모델이다. 마가는 교회가 박해받는 상황에서, 왜 고난을 받아야 하고, 박해 상황에서 제자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제시하기 위해 예수의 수난에 집중한다. 예수가 가신 수난의 길을 제자는 뒤따라야 한다(막8:31; 9:31; 10:33-34). 그러나 제자들은 처음에는 무지의 단계에서, 오해의 단계를 거쳐, 마침내 배척의 단계에 이르러 모두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친다. 독자는 이런 제자들의 부정적인 모습을 피해가야 한다.
그러나 누가의 제자모델은 임박한 종말이나 박해의 위협이 거의 없는 안정적인 상황에 놓여있다. 그래서 누가는 일상적인 삶의 윤리를 강조한다. 세례 요한의 설교를 들은 3그룹(무리, 세리, 군병)이 공통적으로 묻는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τί οὖν ποιήσωμεν, 눅3:10,12,14; 행2:27) 이는 다른 복음서에는 없다. 누가는 이에 ‘사회적 복음’을 전한다. 이런 내용이 누가복음 중앙(9:51-19:27)에서 누가복음 특수자료의 약 80%를 차지한다. 누가복음 9:51-19:27은 여행 주제라기보다는, 여행 이후 제자들이 직면하게 될 상황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가르침이다. 누가는 자신이 처한 사회적 상황에서, 제자의 범위를 열두 제자에서 무리로 확대하고, 윤리적 삶을 소개하고 제자의 삶을 격려한다.
특히 주목할 점은, 누가는 성별과 나이를 초월하여 제자의 모델을 제시한 것이다. 누가복음 14장 후반부 “제자가 되는 길”에 이어 15장에 나오는 3가지 비유의 주인공은 “여자”다.
잃은 양
1/100
들판
목자
목자의 역할은 현장을 찾아다닌다. 양은 돌아올 줄을 모른다.
잃은 드라크마
1/10
집
여자
여자는 빛과 빗자루 등의 도구가 필요하다. 동전은 발이 없다.
잃은 아들
1/2
집에서
먼 나라
아버지
아버지는 가장 수동적이다. 아들을 가게 한다. 결국, 아들은 자기가 돌아온다.
이 비유에서 세 가지 잃어버린 것 중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드라크마다. 왜냐하면, 동전은 발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발 없는 동전에 비유된 사람을 구원하려면 여자가 나서야 한다. 이는 여성의 역할을 강조한다. 랍비들은 여자를 하나님으로 비유하지 않지만, 예수는 여자를 하나님으로 비유하신다.
또한, 누가복음은 13명의 여성 제자 가운데, 예수 발밑에서 말씀을 듣는 마리아를 제자로 설정한다.(10:39,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또한 마리아의 처녀 잉태는 여자의 역할의 절정이다. 또한 예수의 사역을 위해 자기 소유를 아끼지 않은 것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들이었다. 이 내용은 누가복음에만 나온다(8:2,3; 행9:36,39; 12:12; 16:14; 18:2,18,26).
누가는 여성뿐만 아니라, “노인”에 관심을 가진다. 사가랴, 엘리사벳, 시므온, 안나다. 시므온(2:25-35)은 의로움, 경건, 신중함, 믿음, 사랑, 인내 등을 고루 갖춘 인물이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시므온은 노인의 사명을 잘 보여준다. 그것은 복을 빌어주는 것이다. 이삭이 야곱에게, 야곱이 열두 아들에게, 모세는 열두 지파에게 복을 빌어주었다. 시므온은 마리아와 아기 예수에게 축복했다. 노인은 자기가 경건과 믿음을 가졌을 뿐 아니라 후배에게 복을 빌어주는 사명을 충실히 감당했다.
“여성 노인”은 84세 안나(2:36-38)다.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 안나가 성전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은 믿음의 테두리를 떠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안나는 주야로 금식하고 기도하고 섬기고 감사했으며 속량을 기다렸고 그것을 젊은이들에게 가르쳤다. 안나는 노인 제자의 모델이었다. 다른 복음서에 노인 이야기가 희박한 가운데 누가는 노인 제자 모델의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누가는 모든 세대를 아울러 윤리적 모델이 되는 제자를 설명하려고 했다.
또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누가복음에 나타나는 부자의 회심 가능성이다.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다음의 이야기를 보면,
1:53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6:24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12:16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6:19 부자와 나사로
18:18, 22-23 부자 관리.
19:1-10 삭개오.
비유의 한 부자는 상당한 경지에 이른 자였다.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12:19). 본래 영혼은 하나님만이 만족시킬 수 있지만, 이 부자의 경우, 부가 그의 영혼을 만족시켰다. 영혼을 지키지 못한 부자는 구원의 가망이 없다. 영혼이 도로 취해진 부자는 불지옥으로 간다(16:24). 이 경고를 받은 부자는 구체적으로 영생을 갈망하는 부자 관리였다. 그러나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했다(18:23). 그래서 제자에서 탈락했다. 이 부자의 구원은 사람이 할 수 없다. 그런데 19장에서 예수께서 세리장의 집에 들어가시자 부자가 바뀌었다. 이처럼 누가는 구체적인 한 부자의 구원 가능성을 논증해내었다. 부자도 제자에 포함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상을 종합하면, 예수의 제자는, 바른 정체성을 갖기 위해 늘 배우고 깨달으며, 고난을 감내하며, 약자를 배려하고 세대를 초월하는 제자라고 할 수 있다. 누가는 여성 제자, 노인 제자, 부자 제자까지 폭넓게 다룬 것으로 보인다.
6. 사복음서의 비교 해석
사복음서를 비교하는 방식을 6가지로 볼 수 있다.
1) 추가와 생략
마태의 안식일 밀밭 논쟁(마 12:1-8/ 막 2:23-28/ 눅 6:1-5)
마12:7은 호6:6로부터 인용되어 추가되었다. 이는 ‘구약의 성취’라는 마태복음의 특징이다.
비유로 가르치는 이유 설명(마 13:10-17/ 막 4:10-12/ 눅 8:9-10)
마태의 여섯 절(마13:12-17)은 사6:9-10을 인용하여 추가되어 ‘구약의 성취’를 보여준다.
마태의 팔복과 누가의 사복사화(마 5:3-11/ 눅 6:20-26)
마태는 “심령이 가난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누가는 “가난한 자”, “주린 자”로 복 있는 자를 기술한다. 해석자는 ‘심령’과 ‘의’의 추가/생략의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마태의 관심은 영적인 측면에, 누가의 관심은 물질적인 측면이다. 또한 팔복은 3인칭으로, 사복사화는 2인칭으로 되어 있다. 인칭의 의도를 파악해야 한다.
2)확대와 축소
거라사 광인(마 8:28-34/ 막 5:1-20/ 눅 8:26-39)
마태의 기술은 마가·누가의 기술보다 현저히 짧다. 마태는 왜 간결할까? 마가와 누가는 왜 자세히 기술할까?
마태의 산상설교와 누가의 평지 설교(마 5-7장/ 눅 6:20-49)
두 설교 모두 복(팔복/사복사화)으로 시작하여 집 짓는 자 비유로 끝나고, 설교 후에 백부장의 종 치유 사건이 일치한다. 그러므로 두 설교는 동일한 설교로 보인다. 그리고 누가의 평지설교 내용 대부분이 마태의 산상설교에서 발견된다. 산성설교는 누가복음의 흩어져 있는 가르침을 대단히 많이 포함한다. 마태는 다양한 가르침을 모아 확대한 것 같다. 설교자는 산성설교와 평지설교가 구분되는 강조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3) 문맥의 차이
잃은 양 한 마리의 비유(마 18:12-14/ 눅 15:3-7)
마태복음
누가복음
18:10-11 작은 형제를 업신여기지 말라
15:1-2 죄인을 영접하신 예수를 비난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
18:12-14 잃은 양 한 마리의 비유
15:3-7 잃은 양 한 마리의 비유
마태의 양은 교회 안의 성도와 일치하고, 누가의 양은 구원이 필요한 세상 죄인과 일치한다.
성령을 훼방하는 죄(마 12:31-32/ 막 3:28-30/ 눅 12:10)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12:22-30 바알세불 논쟁
3:22-27 바알세불 논쟁
12:8-9 사람 앞에서 인자를 시인하거나 부인하는 결과
12:31-32 성령을 훼방하는 죄
3:28-30 성령을 훼방하는 죄
12:10 성령을 훼방하는 죄
마태·마가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그릇된 태도를 지적하고, 누가는 사람 앞에서 인자를 시인하거나 부인하는 결과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교훈을 준다.
소금과 빛(마 5:13-16/ 막 4:21; 9:49-50/ 눅 8:16; 14:34-35)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5:3-12 팔복
4:1-20 씨뿌리는 자의 비유
9:42-48 실족시키는 문제
8:4-15 씨뿌리는 자의 비유
14:25-33 제자가 되는 결단
5:13-16 소금과 빛
4:21 빛
9:49-50 소금
8:16 빛
14:34-35 소금
4) 배열의 차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마 13:8,23/ 막 4:8,20)
마태는 “100배, 60배, 30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이고, 마가는 “30배, 60배, 100배가 되었느니라”이다. 복음에 대한 사람들의 부정적인 반응 때문에, 마가의 점증적 순서를 마태는 역순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예수의 시험 당하신 순서(마 4:1-11/ 눅 4:2-13)
마태는 돌로 떡을 만들라,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 경배하라의 순이다. 누가는 돌로 떡을 만들라, 경배하라,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의 순이다. 누가의 성전에 대한 관심이 성전에 관한 시험을 마지막에 두게 했을 수 있다.
속옷/겉옷(마 5:40/ 눅 6:29)
마태는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인데, 누가는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이다. 이 차이는 상황 설정과 문화적 배경에 근거할 수 있다. 마태는 재판과 관련된 상황이기 때문에 순서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구약에 겉옷은 담보의 가치가 없기 때문에, 고발자는 속옷을 담보로 잡으려고 고발하는 것이다(출22:25-27; 신24:12-13).
그러나 누가는 고발 상황이 아니라 강도를 만난 상황이다. 강도는 겉옷을 먼저 빼앗으려 한다. 누가는 이방인 독자들에게 마태의 구약적 배경 이해가 어렵다고 생각하여 강도 상황으로 제시했을 수 있다.
5) 자료와 시각의 차이
예수의 계보(마 1:1-17/ 눅 3:23-38)
두 계보는 구조 자체가 다르다. 차이점과 독특한 내용을 통해서 메시지가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
누가복음
마태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데
마태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는 데
다윗의 아들 중 솔로몬의 계열(왕족의 계보)를 따르는데,
마태는 마리아를 제외하고 4명의 여인들
누가는 아래서 위로 올라간다.
누가는 아담에서 끝난다.
누가는 나단의 계열(선지자의 계보)을 따른다.
마태복음
누가복음
마태는 요셉 중심으로 기술한다. 하나님의 사자는 모든 지시를 요셉에게 한다. 마태는 예수를 다윗의 후손으로 드러낸다(1:1)
누가는 마리아 중심으로 기술한다.
누가의 여자에 대한 특별한 관심이 마리아의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한 것 같다.
예수 탄생 기사(마 1-2장/ 눅 1-2장)
6) 독특한 가르침과 이야기
마태의 특수 중에, 전도의 범위를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으로 한정하는 마10:5-6과 15:24이 있다. 특히 10:5에서 사마리아에도 전도하지 말 것을 명백히 언급한다. 여기서 사마리아는 마태복음 안에서 유일하게 사용되었다. 이러한 전도의 한정과 마28:18-20의 이방인 선교에 대한 예수의 명령은 무슨 관계일까?
반면, 누가의 특수 중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10:30-37)와 유일하게 감사하러 온 사마리아 나병환자 이야기(17:11-19)가 있다. 누가는 사마리아인들을 유대인들보다 훨씬 더 본받을 만하다고 평가한다. 누가의 사마리아에 대한 관심은 사도행전에 계속된다(행1:8; 8장)
한편, 마태의 특수 중에, 동방박사 이야기(2:1-13)는 마태의 이방인에 대한 관심이 누가에 비해 덜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방인이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이를 멀리서 찾아와 경배한다. 유대인에게 불쾌한 이야기를 마태는 복음서에 포함시켰다.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마태의 이방인에 대한 입장이 단순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나가는 말
지금까지 “사복음서 비교”라는 주제를 가지고 다양한 내용을 정리해보았다. 사복음서의 배열은 시간보다 규모의 순서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공관복음서 문제” 해결을 위한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나의 입장은 독립설이다. 복음서들의 상이성과 공통성의 원인을 정리하면서, 공통성에 주목하는 것이 사복음서 저자들과 초대교회의 의도에 맞으며 더 큰 유익이 될 거라는 소견을 밝혔다. 공통성에 주초를 두면서 사복음서의 차이를 비교하여, 예수의 말씀과 행적과 고난과 부활의 이야기를 더 자세하고 더 풍성하게 알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큰 축복이요 사랑임을 생각해보았다.
물론 사복음서를 비교에서 사상을 종합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시도해 보았다. 사복음서 신학 비교에서 기독론과 교회론을 중심으로 생각해보았을 때, 사복음서는 서로 다른 화음으로 예수가 하나님이심을 선포하고 있었다. 아울러 사복음서의 제자도 비교는 매우 흥미로웠다. 그 가운데 누가복음의 제자도는 현재 우리 공동체의 상황에서 분명히 기여할 바가 있다고 생각이 되었다.
이번 학기 누가복음 단권을 공부하지만, 사복음서를 함께 비교하고, 사복음서의 차이뿐 아니라 공통점에 주목할 때 우리 모임이 더욱 견고해지리라 생각한다. 사복음서의 차이와 마찰을 공부하는 것은 지성을 갖춘 우리에게 매우 흥미롭고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사복음서의 공통점을 유심히 살펴본다면 초대교회와 교부들의 성경 이해에 더욱 근접해지고 건강한 공동체를 이루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또한, 사복음서의 상황을 비교하면서 현재 우리의 시대에 필요한 제자양성의 모델을 찾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흔히들 누가복음에서 급진적인 제자의 모델을 생각하지만, 나의 생각에는 오히려 통합적이고 현실적인 모델이 누가의 견해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특히 노인과 여성 제자, 더 나아가 부자 제자가 함께 가는 누가의 교회론적 제자 모델은 현재 우리 모임의 형편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노인과 여성은 물론이요 부유한 자까지 구원 가능성을 끊지 않고 함께 예수의 “길동무”가 되어 “즐겁게” 또 “끝까지” 갈 수 있는 공동체가 누가복음이 제시하는 교회가 아닐까?
저는 이번 “사복음서 비교”를 통해서 복음서 공부에 대한 새로운 의욕과 소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코로나19 이후 오미크론 확산으로 인해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 같은 하나님의 구원역사 속에서도 마지막에 남게 될 천상교회와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우리를 생각하며 큰 위로를 받게 되었습니다. 나는 20대 청년시절 예수를 만나 제자가 되었고, 중년의 시절을 거쳐, 이제 노인이 되어가는 혹은 된 나의 모습을 볼 때, 인생이 크게 꺾인 것 같고 실패한 것 같은 생각이 밀려왔습니다. 그러나 사복음서를 통해서, 한 분 예수가 더 많은 예수로 진행하는 역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올해 주님의 제자가 된 혹은 될 동역자들과 함께 즐겁게 끝까지 이 길을 가게 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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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
들어가는 말 - 2
Ⅰ. 신약성경 배열 - 2
Ⅱ. 공관복음서 문제 - 3
Ⅲ. 공관복음서 문제 해결 - 5
Ⅳ. 사복음서의 존재 목적 - 10
Ⅴ. 사복음서 비교 - 11
1. 기록 성격 - 11
2. 주제 - 12
3. 구조 - 14
4. 상황 - 16
5. 신학 - 17
6. 사복음서의 비교 해석 - 22
나가는 말 - 25
들어가는 말
사복음서는 한 분 역사의 예수에 관한 목격자들 증언에 기초한, 네 개의 이야기다. 왜 예수는 한 분인데 예수에 관한 이야기는 네 개일까? 왜 한 분 예수를 이야기하는 사복음서 안에도 마찰과 모순이 존재할까? 성령께서는 네 개의 복음서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상당히 심각하고 많은 문제가 생겨남에도 불구하고 사복음서를 주신 목적이 무엇일까?
나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건전한 입장을 찾고자 한다. 이를 위해 사복음서가 시간이 아닌, 규모의 순서에 따른 배열임을 말하고, “공관복음서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다. 이어서 공관복음서 문제 해결을 위한 다양한 견해를 정리한 후 나의 입장을 밝힐 것이다. 사복음서의 존재 목적을 생각한 후, 사복음서를 여러 각도에서 비교 종합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사복음서를 비교하는 다양한 방식들을 소개하고 마무리 하고자 한다.
사복음서 비교 서론을 통해서, 매년 복음서를 반복하여 공부하는 우리 공동체에게 새로운 의욕과 심정을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Ⅰ. 사복음서 배열
신약성경은 시간의 순서가 아니라, 대체로 규모의 순서에 따라 배열되었다. 초대교회는 큰 것을 앞에 두고 작은 것을 뒤에 놓는 성질이 있었다. 아래 표에 보듯이, 신약성경의 각 섹션이(복음서, 서신서, 공동서신 등)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 배열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복음서 안에서 큰 책인 마태복음이 먼저 왔다. 그리고 마가복음이 맨 마지막에 와서 마태·누가·요한·마가로 배열될 수 있었다. 하지만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이 흡사하여 마가복음을 앞에 끌어다 놓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Ⅱ. 공관복음서 문제
공관복음(Synopsis)이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마태·마가·누가복음은 같은 부분이 상당수 있다. 이는 동시에 다른 부분이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왜 같은 부분이 있고 다른 부분이 있을까? 왜 공관복음서 안에 마찰과 모순이 있을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저자의 사상이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책 안에서 앞뒤에 상이점은 시간이 흘렀기 때문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공간의 변화에 따라 사상의 차이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불투만(Bultmann)은 팔레스타인 유대 신학(히브리어, 아람어), 팔레스타인 헬라 신학(헬라어), 이방인 신학(헬라어)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시간의 차이든, 공간의 차이든 현대 신학자들은 성경이 왜 차이가 있는가에 집중한다. 각 책의 독특한 신학을 찾아내는데 몰두한다. 물론 차이가 있다. 하지만 우리는 차이뿐 아니라 왜 공통점이 생기는가에 대해 더 큰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먼저 배열 순서와 내용에 따라 공관복음의 일치와 불일치 문제를 살펴보기로 하자.
1. 순서상 일치와 불일치
1) 문단 순서가 일치하는 부분은, 예수께서 활동을 준비하고 시작하신 것, 갈릴리 후기 활동, 예수의 수난이다.
2) 문단 순서가 일치하지 않는 부분은, 주로 예수의 갈릴리 초기 활동이다.
3) 문단 순서와 상관없이 각 복음서에 고유한 부분이 있다.
일치
불일치
고유
마 1-2장
눅 1-2장
예수의
활동준비와 시작
마 3:1-4:25
막 1:1-28
눅 3:1-4:37
마 5:1-7:29
예수의
갈릴리 초기 활동
마 8:1-13:58
막 1:29-6:13
눅 4:38-9:9
예수의
갈릴리 후기 활동
마 14:1-18:35
막 6:14-9:50
눅 9:10-50
눅 9:51-18:14
예수의 수난
마 19:1-28:20
막 10:1-16:20
눅 18:15-24:53
4) 주목할 것은, 순서상 불일치하는 부분에서 나타나는 부분적 일치다. 순서가 불일치하는 부분에서도, 항상 짝을 이루는 내용이 있다. 이는 역사적으로 짝을 이루어 일어난 사건임을 보여준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활동준비
일치
일치
갈릴리 초반
뒤죽박죽
뒤죽박죽
갈릴리 중반
일치
일치
수난
일치
일치
⑴폭풍을 잔잔하게 하신 것과 거라사 광인
(마 8:23-27; 28-34/막 4:35-41; 5:1-20/눅 8:22-25; 26-39)
⑵레위 부름과 요한 제자 금식
(마 9:9-13; 14-17/막 2:13-17; 18-22/눅 5:27-32; 33-39)
⑶안식일 밀밭과 손 마른 자
(마 12:1-8,9-21/막 2:23-28; 3:1-6/눅 6:1-5,6-11)
2. 내용상 일치와 불일치
공관복음에서 내용만 가지고 보면, 7가지의 경우의 수가 있다.
Ⅲ. 공관복음서 문제의 해결
위의 7가지 경우에서, 왜 세 복음서가 공통될까? 왜 두 복음서만 공통될까? 왜 특수 부분이 있을까? 이 문제를 고민한 사람이 2세기 말 이레니우스(Irenaeus)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은 기독교는 마태·마가·누가복음이 마찰을 일으키는 종교인데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고 공격하였다. 이레니우스는 『이단논박』에서, 세상에 동서남북 네 방향이 있고 네 방향에서 바람이 불기 때문에, 우리에게 네 기둥 곧 사복음서가 있다고 하였다. 또한, 하늘에 4가지 생물 곧 사자·송아지·사람·독수리가 있듯이, 땅에도 사복음서가 있다고 하였다.(Against Heresies, 3.11.8) 이렇게 이레니우스는 여러 복음을 인정하는 영지주의와 누가복음만 인정하는 막시온(Marcion)을 동시에 반박하였다. 이레니우스의 설명이 교회의 전통적인 입장으로 사용되었다.
한편, 2세기 타디안(Tatian)은 4권의 복음서를 연대기적인 하나의 관통복음(διὰ τεσσάρων)을 만들었다. 디아테사론은 시리아 지역에서 5세기까지 사용되었지만, 교회의 정죄를 받고 사복음사로 대체되었다.
그러다가 5세기 어거스틴(Augustine)은 사용설을 주장한다. 마태복음이 제일 먼저 기록되고, 마가가 마태를 축약하고, 마태·마가를 참고하여 누가복음을 기술되었다고 하였다. 이에 대한 도전이 생겨났다.
1. 원복음설
1778년 레싱(G.E. Lessing)은 아람어 원문서에서 마태·마가·누가복음이 나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아람어 원문서를 사용했으면 마태·마가·누가복음이 거의 같은 분량이어야 하는데, 마가복음만 왜 현저히 짧은지 설명할 수 없다.
2. 전승설
1818년 기셀(J.C.L. Gieseler)는 처음에 아람어 구전이 있었고, 거기서 2개의 그리스어 번역 곧 그리스어 번역1, 그리스어 번역2가 생겨났다고 했다. 거기서 마태·마가·누가가 가져다 쓰다 보니, ‘공관복음서 문제’가 생겼다고 한다. 그러나 그리스어 번역1,2 사본이 발견되지 않았다. 대문자 사본 300개, 소문자 사본 2,800개, 총 3,100개 사본은 우리가 가진 마태·마가·누가복음에 준하는 사본들이지 그 앞에 어떤 성경사본이 발견되지 않았다.
3. 사용설
1789년 그리스바흐(J.J. Griesbach)가 공관복음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면서, 어거스틴을 수정했다. 마태를 누가가 사용했고, 마태·누가를 마가가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현상이 드물기 때문에, 일반화시킬 수 없다. 누가가 마태를 사용했다면 누가의 고유한 부분은 어디서 왔는가? 마가가 마태·누가를 사용했다면 마가의 고유한 부분은 어디서 왔는가?
저물매 해 질 무렵에
Ὀψίας δὲ γενομένης Δύνοντος δὲ τοῦ ἡλίου
(마 8:16) (눅 4:40)
저물어 해 질 때에
Ὀψίας δὲ γενομένης, ὅτε ἔδυ ὁ ἥλιος,
(막 1:32)
4. 단편설
1817년 F.D.E. Schleiermacher는 처음에 여러 개의 단편으로 있었고, 마태가 조금, 마가가 조금, 누가가 조금씩 가져다 썼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면, 순서의 일치가 왜 생겼지 설명하지 못한다.
5. 두 자료설
1838년 C.H. Weisse는 마태와 누가가, 마가와 Q 자료(예수 어록집)에서 기원했다고 했다. 이는 사용설을 거꾸로 뒤집은 것이다. 즉 마가를 두 번째, 세 번째 자리에 놓지 않고 첫 번째 자리에 놓자고 역발상을 한 것이다. 7가지 경우의 수에서, 마태·마가·누가의 공통부분과 마태·누가의 공통부분은 마가에서 오고, 마가에는 없는데 마태와 누가에만 일치하는 부분은 Q 자료(Quelle, 샘, 원천)에 왔다는 것이다. 이를 ‘두 자료설’이라 부른다.
이는 굉장히 설득력 있다. 왜냐하면, 순서적으로 마태·누가가 마가와 순서가 일치할 때는 항상 마태와 누가 둘의 순서가 일치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마가를 표준으로 삼고, 마태와 마가를 비교해보거나 누가와 마가를 비교해보면, 마태와 마가가 순서가 일치하는 부분에서는 항상 마태와 누가도 순서가 일치하더라는 것이다.
또한, 내용적으로 마가가 마태와 누가에 비해 짧고(lectio brevior) 어렵다(lectio difficilior)는 것이다. 그래서 짧고 어설픈 마가가 우선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함정이다. 왜냐하면, 논리적으로 거꾸로도 성립되기 때문이다. 즉 마태와 누가를 표준으로 하여, 마태와 누가의 순서가 일치하는 부분에서, 마가는 항상 마태를 따르고 누가를 따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짧고 어설픈 마가복음이 먼저라는 것에 대해 5가지 비판이 가능하다. ①마가가 마태와 누가에 비해 원시적이지 않다. 순서가 잘 정리되어 있다. ②마가복음은 마태, 누가에 비해 언제나 난해하거나 간략하지 않다. 어떤 이야기는 더 정교하다. 예를 들어 세례 요한을 사형시키는 부분에서, 마태는 12절, 마가는 16절, 누가는 2절로 설명한다(마 14:1-12; 막 6:14-29; 눅 9:7-9). 그러면 2절밖에 안 되는 누가는 틀린 건가? 누가가 틀렸다면 마가우선설도 틀린 것이다. ③분량에서 마가는 마태과 누가에 비해서 더 긴 본문이 많다. ④또한, 마가 특수자료를 마태와 누가는 왜 사용하지 않았는지 설명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예수의 가족 이야기, 홑이불 버리고 도망간 청년 이야기, 스스로 자라는 씨의 비유는 왜 빼놓았는가? ⑤마태와 누가는 마가와 같은 소재가 있다. 예를 들어 마가복음의 나병환자 치유와 오병이어 사건에서 불쌍히 여겼다는 말씀이 나온다(막 1:14; 6:34). 그런데 마태와 누가는 왜 불쌍히 여겼다는 말이 없는가? 같은 소재를 가진 부분도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소일치, Minor Agreements) 다시 말해서, 마태와 누가는 일치하는데, 마가가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 그래서 마가복음 우선설은 맞지 않는다.
한편, Q 자료는 예수의 어록을 담고 있다고 해서 “말씀의 원천”이라고 부른다. 마태와 누가에서, 마가에 없는 부분은 주로 ‘예수의 말씀’에 해당하는 산상설교다. 이것이 예수 어록(Q) 가설의 근거가 되었다. 하지만 정작 예수 어록(Q) 가설을 증명할만한 사본이 없다. 게다가 초대교회 교부들이 그것을 증명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예수 어록(Q) 가설도 받을 수 없다.
이를 정리하면, 마태·누가가 마가에 의존했다고 보기 어렵다. 만일 의존했다면 반드시 우선설을 말하게 된다. 마가가 우선하면 나머지는 하위 성경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성경을 정경으로 받는다. 하나님은 영감을 통해서 각각 독립적으로 복음서를 주셨다고 믿는다.
6. 독립설
각 복음서의 전체 절수 중에서 내용적으로 유사한 절수를 보면, 서로 간의 독립적인 부분이 상당히 많다는 것이 밝혀진다. 아울러 세 복음서에서 상호 간의 유사성을 완전히 벗어나는 특수자료는 마태복음 25.99%, 마가복음 3.09%, 누가복음 39.9%다. 특수자료의 비율이 마가에서 저조하지만, 마태는 1/4, 누가는 1/3 이상을 가진다. 마가복음을 제쳐두고라도, 마태와 누가복음은 굉장히 독립적이다. 순서적으로도 문단이 같으면 문장이 다르고 문장이 같으면 단어가 다르다(예, 마 3:1-12/막 1:1-8/눅 3:1-18). 분명히 세 복음서는 각각 동일하고 독립적인 권위를 가진다. 그렇다면, 왜 공관복음서에서 공통점과 상이점이 존재할까?
1) 상이점이 생긴 이유
⑴ 사건의 규모 때문이다. 사건이 기록보다 큰 법이다. 기록은 사건보다 항상 작다. 모든 사건을 다 기록할 수 있는 기록자는 없다. 사건 중에 어느 부분을 취사 선택하게 된다.
⑵ 전승의 과정에서 상이성이 생겼다. 전승을 해도 모든 내용을 전승하는 게 아니다. 감추고, 빼고, 잊어버린 부분이 있다.
⑶ 기록자의 자유가 있다.
이를 종합하면, 사건의 규모, 전승의 과정, 기록자의 자유라는 조건 때문에 상이점이 생겼다.
2) 공통점이 생긴 이유
⑴ 순서의 규범이 있었기 때문이다. 순서의 규범을 상세하게 확대한 것이 공관복음서다. 전체적인 순서는, 예수께서 갈릴리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세례 요한을 만났다. 그리고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그 후에 갈릴리 사역을 시작하시고, 예루살렘을 체험하시고, 죽고 부활하셨다. 초대교회는 이 순서를 반드시 지켰다. 이는 초대교회가 신앙 고백할 때 반드시 지키려는 신앙의 규범이었다. 이것이 들어 있어야 초대교회는 복음으로 인정했다.
마태
마가
누가
서론
1,2장
1,2장
세례 요한
3:1-12
1:1-13
3:1-22
예수
갈릴리 활동
3:13-18:35
1:14-9:50
3:23-9:50(19:27)
유다 활동
19:1-28:15
10:1-16:20
9:51(19:28)-24:53
사도들
28:16-20
사도행전
⑵ 내용적으로, 유명한 사건(facta nota)과 유명한 말(verba nota)이 잘 기억이 되었기 때문이다.
⑶ 모든 복음서가 공통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내용이 있었다. 공관복음서는 그런 것을 유지하려는 의지가 있었다. 초대교회는 공관복음이 상이성이 있지만, 공통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았다. 교부들도 다양성이 통일성에 의해 통제받고 있음을 알았다.
결론적으로, 공관복음서의 공통성은 교회의 거대한 반석이었다. 우리가 복음서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부분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훨씬 견고한 기반 위에 교회가 서는 길임을 절대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Ⅳ. 사복음서의 존재 목적
공통점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왜 우리의 믿음의 기초는 독립된 사복음서일까? 독립된 한 복음서만으로도 예수를 알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복음서가 존재한 목적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합당한 원리가 있기 때문이다. “두 증인의 입으로나 또는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신19:15b) 사복음서의 독립적인 증인들은 보충적인 방식으로 예수의 정체성과 행하신 일을 더 자세하고 더 풍성하게 확증한다. 우리는 네 증인을 통해,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시고 고난받으신 것의 완전한 그림을 얻을 수 있다. Eta Linnemann, Is there a synoptic problem? (trans. Robert W. Yarbrough; Baker, 1992), 206-207.
Ⅴ. 사복음서 비교
사복음서의 공통된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다. 그러나 지향하는 바는 다르다. 처음에 말하는 것이 그 책이 지향하는 바다. 마태복음에서 예수가 ‘그리스도’(1:1; 16:16)라는 고백이 중요하다. 마가복음은 거기에 하나를 덧붙인 것이, ‘하나님의 아들’(1:1; 15:39)이다. 누가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나 하나님의 아들뿐만 아니라, 예수가 ‘역사적 인물’(1:1)이며 그분에 관한 ‘프라그마(Practical facts)’를 말하려는데 관심이 많다. 요한복음은 예수를 ‘말씀’(1:1, 로고스)으로 소개하고 그분의 말씀을 장황하고 자세하게 기술한다.
이와 같은 독립된 사복음서는 각각의 기록 성격, 주제, 문학 형식 및 구조, 상황과 신학을 채택하였다.
1. 사복음서의 기록 성격
공관복음이 혼용되던 시대, 파피아스는 130년경 『주님의 말씀에 대한 해설』에서 각 책의 성격을 규정한다.
먼저 “마태는 히브리 방언(‘Εβραιδι διαλεκτω)으로 그 말씀들을 정리/종합(συνεταζατο)했고, 각 사람이 할 수 있는 대로 그것들을 번역했다”고 했다. 즉 마태는 “잘 정리해서 배열”한 것이다. 그 정리를 히브리적 방식으로 했기 때문에, 책 안에 반복과 병행이 많다. 누가·마가는 반복 용법이 마태에 비교 현저히 떨어진다.
이에 비해, “마가는 베드로의 통역자(ἑρμηνευτὴς)였고 그가 기억하는 것들을 정확하게(ἀκριβῶς) 기록하였지만, 주님의 말씀과 행적을 순서대로(τάξει) 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주님을 듣지도 않았고 따라 다니지도 않았기 때문인데, 후에 베드로를 따라 다녔다. 이 사람(베드로)이 필요에 따라(πρὸς τὰς χρείας) 교훈들을 행했지만 주님의 말씀의 종합(σύνταξιν τῶν κυριακῶν…λογίων)을 만들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마가는 어떤 잘못도 저지른 것이 아니며 그가 기억하는 대로 몇 가지(ἐνια)를 기록했다. 그는 한 가지를 생각했는데, 그것은 그가 들은 것 가운데 어떤 것도 생략하거나 위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파피아스 당시 마가복음이 열등하다는 비판이 있었다. 하지만, 파피아스는 마가가 정확하게 기록했다고 옹호한다. 의도적으로 누가복음 서론에 나오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마가와 누가복음이 동일한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 누가가 자세히 기록한 것처럼 마가도 자세히 기록한 것이다. 하지만 마가는 누가처럼 순서대로 기록하지 않았다. 또 마태처럼 주님의 말씀의 종합을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마가가 마태에 비해 내용이 짧고, 분량이 줄어 있는 것은 모든 내용을 다 쓰겠다는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가는 필요에 따라 기록했을 뿐이다. 특히 마가는 예수의 말씀보다 행하심에 관심을 가지고 씨름했다.
한편, 누가는 기독교 세 번째 세대로서 복음서를 다르게 쓰고자 했다(눅1:1-4). 제1세대는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1:2, αὐτόπται καὶ ὑπηρέται), 제2세대는 “사람이 많은지라”(1:1, πολλοὶ), 제3세대는 “나도”(1:3, κἀμοὶ)
누가는 근원부터(ἄνωθεν, 근원성) 썼다. 예를 들어 마태는 예수의 출생부터, 마가는 요한의 등장부터 썼지만, 누가는 세례 요한의 탄생부터 썼다. 누가는 자세히(ἀκριβῶς, 세밀성) 썼다. 마태·마가에 없는 내용이 누가에 아주 많다. 누가는 차례대로(καθεξῆς, 질서성) 썼다. 즉 교회의 전통적 순서를 잘 따랐다.(요한의 사역, 예수의 출생, 예수의 활동, 죽음, 부활, 승천, 승천 이후의 일들까지)
그런데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 크게 다르다. 대부분의 학자가 요한복음의 독립성을 강하게 확신한다. 공관복음은 한 가지 주제를 짧게 다루는 일간지에 비유한다면, 요한복음은 한 사건을 깊고 길게 진술하는 월간지에 비유할 수 있다. 또 공관복음은 지리에 관심이 많지만, 요한복음은 시간에 관심이 많다. 공관복음이 세 유월절을 한 유월절로 압축한 것을, 요한복음은 한 유월절을 세 유월절로 풀어서 기록하고 나서 마지막 유월절을 강조했다. 요한은 자신만의 주제, 어휘, 연대기를 사용하여 독특한 복음서를 썼다.
2. 사복음서의 주제
마태복음의 주제는 “성취”다. 마태는 10회에 걸려 성취 인용구를 반복한다.(1:22-23; 2:15; 2:17-18; 2:23; 4:14-16; 8:17; 12:17-21; 13:35; 21:4-5; 27:9-10,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함이러라”) 마태는 예수와 구약 성경 사이의 성취적 관계를 직접적으로 강조한다.
마가복음의 주제는 “십자가의 길”이다. 마가복음의 시작은 길이 없는 광야에 길을 만드는 세례 요한으로 시작하여(1:2-13), 길이 없는 무덤에서 끝난다(15:42-16:8). 그리고 길 위에서(8:27-10:45) 제자도가 이루어진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길 끝에 십자가가 있음을 반복하여 말씀한다(8:31-32; 9:31-32; 10:33-34).
누가복음의 주제는 “구원역사”다. 누가는 예수께서 세상에서 행하러 오신 것과 사람들에게 주고자 하신 것이 구원임을 강조하고(눅19:10) 실제적인 구원의 축복들을 다양하게 기술한다. 그리고 누가는 이러한 구원을 세계사 속에서 끌고간다.
눅2:1 Augustus(주전 30년 - 주후 14년)
눅3:1 Tiberius(주후 14-37년)
Gaius Caligula(주후 37-41년)
행18:2 Claudius(주후 41-54년)
행28:19 Nero(주후 54-68년)
세속사는 로마 황제가 이끌어 가지만, 누가가 보기에 진정한 역사는 구원역사다. 아우구스투스 때 예수께서 태어나시고, 티베리우스 때 예수께서 등장하시고, 클라우디우스 때 교회가 왕성하게 자라다가, 네로 때 핍박을 받지만, 교회는 죽지 않는다. 누가는 이를 구원역사로 기술한다.
누가가 볼 때, 세속사는 일종의 틀이다. 세속사가 없이는 구원역사가 있을 수 없다. 다만 세속사와 구원역사가 같이 가다가 마지막에는 구원역사만 남는다. 그것이 하늘나라의 천상교회다. 누가는 누가행전을 통해 로마 황제들이 다 사라지고 “주” 예수만 남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만 구원역사가 없으면 역사는 의미가 없고 구원역사가 있으려면 역사도 같이 종말까지 가야 한다. 누가는 두 역사가 겹쳐있지만 잘 구분할 수 있는 역사적 안목을 제공한다.
요한복음의 주제는 “영생의 말씀”이다. 요한은 공관복음과는 다른 시각에서 예수를 바라본다.
이상을 종합하면 마태는 구약의 성취를, 마가는 십자가의 길을, 누가는 구원역사를, 요한은 영생의 말씀을 주제로 채택하였다. 그 가운데 누가는 역사가요 신학자로서 구원역사를 보여주었다.
3. 사복음서의 구조
마태복음은 5중 구조다. 5-7장은 산상설교(제자도), 10장은 선교명령, 13장은 하늘나라 비유, 18장은 공동체 교훈, 24-25장은 미래에 대한 교훈이다. 각 강화의 끝에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가 5번 반복된다(7:28; 11:1; 13:53; 19:1; 26:1). 이를 근거로 벤자민 베이컨(B.W.Bacon)은 마태복음을 모세오경에 비교하여 예수가 새로운 모세(New Moses)라고 설명한다. 이외에 킹스베리(Kingsbury)는 “예수께서 비로서~시작하셨다”(4:17; 16:21)란 말로 세 부분으로 구분한다. ⑴메시야 예수의 인격(1:1-4:6)/ ⑵메시야 예수의 선포(4:17-16:20, 4:17)/ ⑶메시야 예수의 고난, 죽음, 부활(16:21-28:20, 16:21)
또한 “갈릴리”를 중심으로 지형학적 구분도 가능하다. ⑴예수의 탄생과 요한의 활동(1:1-3:12)/ ⑵예수의 첫째 활동(3:13-18:35, 3:13)/ ⑶예수의 둘째 활동(19:1-28:20, 19:1)
마태복음 안에 “갈릴리”(16번)는 다른 복음에서보다 더 많이 반복된다. 예루살렘 11번, 애굽 4번, 나사렛 3번, 요단강 6번, 광야 9번, 가버나움 4번, 유대 8번.
갈릴리를 강조하는 이유는 이방 선교를 위해서다.
마가복음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구조다. R.T. 프란스는 예수의 활동 지역에 따라, 광야(1:1-13), 갈릴리(1:14-8:21),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도중(8:22-10:52), 예루살렘(11:1-16:8)으로 구분한다. 지리적 구조에서 갈릴리와 예루살렘은 대조적인 장소다. 갈릴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목적을 승리적으로 이루시는 곳(14:28; 16:7)이지만, 예루살렘은 죄와 죽음의 도시(3:22; 7:1; 10:33; 11:18; 14-15장)다.
한편, W. Marxsen은 마가복음을 수난사라고 말한다. 예수의 수난에 대해서 쓰려고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예수의 갈릴리 활동을 쓰게 되고, 갈릴리 활동을 쓰려다 보니, 세례 요한의 이야기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수난 이야기가 거꾸로 자랐다는 것이다. 이에 기초하여 마틴 켈러(M. Kähler)는 마가복음을 “자세한 서론을 가진 수난사”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마가복음 자체가 “복음의 시작”(1:1)을 선포하고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 위의 예수를 기술한다.
누가복음은 “예루살렘/성전 중심” 구조다.
성전에서 시작(예수의 시작을 예고하는 이의 탄생을 알리는 장소, 1:5-23)
예루살렘 성전으로 여행(예수의 사역의 절정의 장소, 9:51-19:27)
성전으로 돌아옴(예수의 시작을 알리는 이들의 탄생 준비 장소, 24:52-53)
누가복음의 구조는 9:51-19:27의 독특한 위치와 기능에서 마태·마가와 구별된다. 마태·마가와 달리 누가는 시작부터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고 밝힌다. 예루살렘의 중요성을 13:32-34에서 특히 강조한다.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누가에게 예루살렘은 핍박의 장소이면서, 궁극적인 승리의 장소다.
마태는 갈릴리를 강조하지만, 결국 누가는 예루살렘을 강조한다. 마태는 밖으로 나가는 것을 강조하지만, 누가는 나가기는 하지만 뭔가 원심을 가지며 중심을 두려고 한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대한 강조가 다른 복음서보다 강하다. 예루살렘이 마태에 12번, 마가에 10번에 비해, 누가에 33번 언급되어 3배가 많고, 사도행전에만 60번이 등장한다. 누가에게는 복음이 멀리 가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복음의 근원이 중요하다. 누가는 ‘근원성’을 따지는 사람이다.
요한복음은 “유월절” 구조다. 요한복음은 유월절이 가까웠다는 말로 세 단락이 된다(요2:13; 6:4; 11:55,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유월절 첫번째 방문은 가나 혼인잔치 이후에 성전 청결 사건이다(2:13,23); 두번째 방문은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으로 발생한다(6:4); 세번째 방문은 수난기간 전체다(11:55; 12:1; 13:1; 18:28,39; 19:14).
공관복음은 유월절을 하나만 설명하지만, 요한복음은 유월절이 3번 나온다. 요한복음의 절반은 100주간의 활동이다. 그러나 세 번째 유월절은 1주간의 활동이다. 책의 분량은 1:1이지만, 시간의 분량은 100:1이다. 요한은 마지막 유월절의 1주간을 엄청나게 강조한다. 이는 유월절을 통해서 예수께서 어떻게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셨는가를 말하기 위해서다.
이상을 종합하면 마태는 5중 구조를 통한 성취주제를, 마가는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해 가는 예수의 수난사를, 누가는 예루살렘/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원심구조를, 요한복음은 철저한 유월절 시간 구조를 채택하였다.
그 가운데 누가는 구심력을 가진 예루살렘/성전으로 모여드는 유대교의 패턴이, 다양한 인종과 언어와 소통하는 복음이 퍼져나가는 원심력의 패턴으로 뒤집히는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구조화했다는 생각이 든다.
4. 사복음서의 상황
마태복음은 유대교와 이방인에 대한 이중적인 관계에 서 있다. 마태는 자신의 시점을 “오늘”(σήμερον)로 놓고, 과거로는 아브라함까지 2000년을 올라가고, 미래로는 세상의 끝날까지 간다. 마태는 과거 이스라엘의 역사를 전제로 하면서, 동시에 자신으로부터 시작하여 미래의 교회 역사까지 내다본다. 마태의 현재는 두 가지 대상, 곧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놓여있고, 유대인과는 마찰을, 이방인과는 선교이면서 경계를 보여준다. 즉 마태는 마지막에 모든 족속에게 가라고 하지만, 이방인에게 동화되면 안 된다는 말한다. 마태의 오늘은 두 가지 상황에 놓여있는 것이다(“오늘날까지”, ἕως τῆς σήμερον, 27:8; μέχρι τῆς σήμερον, 28:15)
아브라함
오늘
세상 끝날
1:1 이스라엘의 역사
유대인
마찰과 갈등
마태의 상황
교회의 역사 28:20
이방인
선교와 경계
마가복음은 박해받는 교회의 상황이 나타난다. 어떤 상황인지 확실하게 말할 수 없지만, 그리스도인들이 박해 앞에서 인내해야 한다는 내용이 많다(8:34; 10:30; 13:8).
누가복음은 기독교를 변증한다. 누가복음은 데오빌로 각하에게 보내는 넓은 의미의 서신이며 기독교 변증서다. 데오빌로는 분명 기독교가 무신론이라는 당시의 비방을 믿지는 않았다. 하지만 헬라 세계의 지식인들은 기독교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접하고 있었다. 그들 중에 기독교에 대한 진위를 판단해야 하는 자들도 있었다. 누가행전의 변증적인 성격은 바로 이 때문이다. 특히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로마에 대한 호의적인 내용들 곧 로마 백부장의 믿음(7:1-10), 가이사의 것을 가이사에게 돌리라는 말씀(20:20-26), 빌라도의 3번 무죄선언(23:4,14,22)은 누가의 의도가 기독교 변증임을 시사한다.
요한복음은 기록목적이 기록 상황을 보여준다. 요한복음 20:30,31에서 두 개의 ἵνα(히나)절을 통해서 2가지 목적, 즉 선교적, 교육적 목적을 밝히고 있다. 요한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
이상을 종합하면, 마태는 유대교와 이방인을 대상으로 하는 이중적인 상황에, 마가는 박해받는 상황에, 누가는 기독교를 변증해야 하는 상황에, 요한은 예수가 누구신지를 알게 하고, 영생을 확신하도록 도와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특히 누가는 기독교 3세대로서 초대교회를 이방인에게 변증할 필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5. 사복음서의 신학
1) 기독론 비교
마태복음은 다른 복음서보다 “그리스도”를 더 많이 반복한다. 서론에서(1:1). 예수의 탄생사에서(1:1,16), 세례 요한의 질문에서(11:2), 수난사에서(26:63), 예수는 그리스도다. 또한 마태는 구약과 비교하여 예수는 “~보다 더 큰 이”(μεῖζόν, πλεῖον)라고 반복한다. 성전모형론(12:6), 요나모형론(12:41), 솔로몬 모형론(12:42)에서 예수는 제사장보다, 선지자보다, 왕보다 더 크시다.
마가복음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한다. 마가는 초자연적인 수단들, 즉 하늘과 귀신의 음성으로, 십자가 앞의 백부장의 고백으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증한다. 마가는 하나님의 아들을 고백하면 박해를 당당하게 견딜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마가복음의 메시야 비밀이론은(1:25,34; 3:12 등) W. Wrede는 역사비평적으로 메시아 비밀이론을 말한다. 예수 자신은 메시아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십자가 사건 이후에 제자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믿기 시작한다. 자신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은 예수와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한 제자들 사이의 간격을 메우기 위해서 마가가 복음서를 쓰면서 메시아 비밀이론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Wrede는 마가가 예수께서 메시임에도 불구하고 메시아로 인정받지 못하고 배척당하여 처형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구속사적 이유가 있다. 예수를 이적을 가지고 이해하면 안 되고 십자가와 부활로 이해해야 맞다는 것이다.
누가복음의 예수는 “역사적 인물”이다. 그래서 “πρᾶγμα”(1:1)가 누가의 화두다. 그래서 누가는 예수의 인간적인 면과 초인간적인 면을 강조한다. 주목할 점은 초인간적인 면에서, ‘성령’과 관련된다는 것이다. 성령에 의한 탄생(1:35), 성령이 내려오심(3:22), 성령이 위에 계심(4:18), 승천하신 예수께서 성령을 보내주심/부어주심(24:49; 행2:33)이다.
또 누가만이 예수가 ‘주’라는 견해를 보여준다. 1-5장에서 14번의 ‘주’는 하나님을 가리킨다(1:6,11,58,66; 2:9,22,23,24,26,39; 3:4; 5:17). 하지만 다음 장들에서 14번은 예수를 가리킨다(7:13,19; 10:1,39,41; 11:39,41; 11:39; 12:42; 13:15; 17:5,6; 18:6; 19:8; 22:61; 24:34). 예수는 천사의 선포처럼 하나님의 아들 “주”이시며(1:32,35), 하늘의 음성처럼 “주”이시며(3:22; 9:35), 귀신들이 알듯이 “주”이시다(4:34,41; 8:28).
또 누가의 ‘인자’(ὁ 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는 승귀 쪽을 강조한다. 누가복음의 인자의 3가지 중요한 용례는, 지상사역(19:10), 수난과 부활(17:25; 22:48; 24:7), 재림(17:22; 18:8; 21:36)을 다 포괄한다. 마가의 인자는 수난 쪽을 강조하지만, 누가의 인자는 승귀 쪽을 강조하는 미묘한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요한복음의 예수는 표적을 행하신 분이다. 공관복음에 나오는 29가지 이적과 3가지만 공통되고 다른 이적이 나온다. 그리고 요한의 로고스 기독론은 구약의 “דָּבַר”(다바르)에서 출발한 것이 분명하다(시33:6). 그러므로 예수는 표적을 보이는 분이시지만, 말씀이신 하나님이다. 도마의 결론처럼 예수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20:28)이다.
이상을 종합하면, 네 편의 복음서가 공통적으로 예수를 하나님으로 결론 내린다. 구약을 성취하신 그리스도, 수난당하신 하나님의 아들, 이 땅에 사신 주, 위에서 내려오신 말씀은,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고백으로 모아진다.
2) 교회론 비교
⑴ 기도
누가는 기도를 9%(전체 1151절 중에 104절)강조하는데, 비해 마태는 3.1%(전체 1071절 중에 34절), 마가는 1.6%(전체 678절 중에 11절), 요한은 2.9%(전체 879절 중에 26절)로 기도를 말한다. 누가는 각 복음서 비율, 평균 4배 이상을 예수를 기도하는 분으로 소개한다. 특히 누가복음에 예수의 9번의 기도가 소개되고 있다. 세례받으실 때(3:21), 기적을 행한 날이 지난 후(5:15,16), 제자들을 택하시기 전(6:12), 자신이 고난받아야 하실 것을 처음으로 예언하시기 전(9:18-22), 변화산에서(9:29), 70인이 돌아왔을 때(10:17-21), 제자들이 어떻게 기도할지 가르치기 전에(11:1), 겟세마네 동산에서(22:39-46), 십자가에서(23:34,46)다.
아울러 누가는 기도에 대한 특수자료를 사용하여, 예수의 예루살렘 여행 초기의 친구의 청을 들어주는 비유(11:5-8)와 여행 후기의 과부의 간청을 들어주는 재판관의 비유(18:1-8)와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18:9-14)를 인클루지오 기법으로 기도를 배치한다.
제자의 기도 중에 첨가된 새로운 한 가지는 예수의 재림을 위한 기도다. 제자는 예수의 재림까지 단지 기도함으로 신앙을 유지할 수 있다. 제자는 세상 염려와 즐거움을 기도로 이기고(8:14), 핍박과 고난을 기도로 이겨야 한다(8;13; 22:32,40,46). 단지 기도하는 자만이 인자가 오실 때 합격할 수 있다(18:1-8; 21:36).
누가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되지만(11:9/마7:7) 모든 기도가 응답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기대한 내용 대신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11:13). 누가는 믿음의 모든 능력은 인정하지만(17:6/마17:20), 기도의 모든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마21:22/막11:24에 비해서). 누가는 기도로 하나님을 억압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⑵ 제자도
공관복음의 제자의 범위를 보면, 마가의 제자는 대체로 12명 정도로 제한한다. 하지만, 누가는 12명을 넘어선다. 누가에만 70인 제자 파송사건이 나온다(눅10:1-16). 70인의 제자는 “그 제자의 많은 무리”(눅6:17)와 “제자의 온 무리”(눅19:37)로 확대된다. 누가의 확대된 제자 범위는 사도행전의 제자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행6:1,7; 9:1,10,26). 이에 비해 “사도”는 누가복음에 6번, 사도행전에 30번 사용되어 ‘사도전 전승’, 혹은 ‘초기공교회주의’를 나타낸다.
공관복음의 제자에 대한 평가를 보면, 마가는 제자를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막8:21) 마태는 동일한 책망이 한 번 나오고, 마지막에 제자들이 의미를 깨달은 것으로 매듭지어진다(마16:12). 그러나 누가에는 이 기사가 아예 없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에서 마가는 책망만 소개되고(막8:33), 누가는 책망이 없지만(눅9:18-27), 마태에는 다른 복음서에 없는 칭찬(마16:17-19)과 책망(마16:23)도 함께 기록되었다.
또한, 마가복음의 제자들은 예수의 수난 예고 후에 자리에 욕심을 낸다(막10:37). 그러나 마태는 같은 사건에서, 자리 청원자가 제자가 아니라, 제자의 어머니라고 밝힌다(마20:20).
이밖에도 마가는 제자들의 믿음의 부족(막4:40; 9:19), 이해의 부족(4:13; 6:51-52; 7:18-19; 8:17-18,21; 9:32; 10:38), 분별력의 부족(8:32-33; 10:13-16), 두려움(4:41; 6:50; 9:32; 10:32)과 자리 욕심(9:33-37; 10:35-45)을 묘사한다. 이에 반해 누가는 제자들이 깨닫지 못한 이유를 제시하여 무지를 합리화시켜준다(눅9:45; 18:34, “그들로 깨닫지 못하게 숨긴 바 되었음이라”).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장면에서, 마가와 누가는 모두 예수께서 기도하실 때 제자들은 잠들었지만, 누가만 제자들이 깨어있지 못한 이유를 밝혀준다(눅22:45, “슬픔으로 인하여”). 누가에는 잠든 제자들에 대한 책망이 없다(눅22:46, cf 막14:37).
또한, 예수께서 체포되실 때, 마태와 마가에는 제자들이 예수를 버리고 도망친다(막14:50; 마26:56). 그러나 누가는 이를 생략한다. 그리고 누가에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제자들이 그 자리에 나타난다(눅23:49, “예수를 아는 자들 다”).
이를 종합하면, 복음서의 제자의 평가는 마태는 양면적, 마가는 부정적, 누가는 긍정적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공관복음이 제시하는 제자모델을 보면, 마태의 제자모델은 회당 유대교와의 갈등이 배경이 된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회당에서 축출되거나 축출될 상황에 놓여있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다른 복음서보다 ‘배우라’(μάθετε)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마9:13; 11:29; 24:32), 제자들이 ‘깨달았다’(συνίημι)는 말이 많이 사용한다(13:51; 16:12; 17:13). 마태의 제자는 일반 성도들을 대표하는 대표적 모델로서 긍정과 부정의 양면성을 띤다. 마태의 제자는 책망을 피하고, 바른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 예수의 말씀을 부지런히 배우는 학문공동체다.
마가의 제자모델은 억제모델이다. 마가는 교회가 박해받는 상황에서, 왜 고난을 받아야 하고, 박해 상황에서 제자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제시하기 위해 예수의 수난에 집중한다. 예수가 가신 수난의 길을 제자는 뒤따라야 한다(막8:31; 9:31; 10:33-34). 그러나 제자들은 처음에는 무지의 단계에서, 오해의 단계를 거쳐, 마침내 배척의 단계에 이르러 모두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친다. 독자는 이런 제자들의 부정적인 모습을 피해가야 한다.
그러나 누가의 제자모델은 임박한 종말이나 박해의 위협이 거의 없는 안정적인 상황에 놓여있다. 그래서 누가는 일상적인 삶의 윤리를 강조한다. 세례 요한의 설교를 들은 3그룹(무리, 세리, 군병)이 공통적으로 묻는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τί οὖν ποιήσωμεν, 눅3:10,12,14; 행2:27) 이는 다른 복음서에는 없다. 누가는 이에 ‘사회적 복음’을 전한다. 이런 내용이 누가복음 중앙(9:51-19:27)에서 누가복음 특수자료의 약 80%를 차지한다. 누가복음 9:51-19:27은 여행 주제라기보다는, 여행 이후 제자들이 직면하게 될 상황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가르침이다. 누가는 자신이 처한 사회적 상황에서, 제자의 범위를 열두 제자에서 무리로 확대하고, 윤리적 삶을 소개하고 제자의 삶을 격려한다.
특히 주목할 점은, 누가는 성별과 나이를 초월하여 제자의 모델을 제시한 것이다. 누가복음 14장 후반부 “제자가 되는 길”에 이어 15장에 나오는 3가지 비유의 주인공은 “여자”다.
잃은 양
1/100
들판
목자
목자의 역할은 현장을 찾아다닌다. 양은 돌아올 줄을 모른다.
잃은 드라크마
1/10
집
여자
여자는 빛과 빗자루 등의 도구가 필요하다. 동전은 발이 없다.
잃은 아들
1/2
집에서
먼 나라
아버지
아버지는 가장 수동적이다. 아들을 가게 한다. 결국, 아들은 자기가 돌아온다.
이 비유에서 세 가지 잃어버린 것 중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드라크마다. 왜냐하면, 동전은 발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발 없는 동전에 비유된 사람을 구원하려면 여자가 나서야 한다. 이는 여성의 역할을 강조한다. 랍비들은 여자를 하나님으로 비유하지 않지만, 예수는 여자를 하나님으로 비유하신다.
또한, 누가복음은 13명의 여성 제자 가운데, 예수 발밑에서 말씀을 듣는 마리아를 제자로 설정한다.(10:39,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또한 마리아의 처녀 잉태는 여자의 역할의 절정이다. 또한 예수의 사역을 위해 자기 소유를 아끼지 않은 것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들이었다. 이 내용은 누가복음에만 나온다(8:2,3; 행9:36,39; 12:12; 16:14; 18:2,18,26).
누가는 여성뿐만 아니라, “노인”에 관심을 가진다. 사가랴, 엘리사벳, 시므온, 안나다. 시므온(2:25-35)은 의로움, 경건, 신중함, 믿음, 사랑, 인내 등을 고루 갖춘 인물이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시므온은 노인의 사명을 잘 보여준다. 그것은 복을 빌어주는 것이다. 이삭이 야곱에게, 야곱이 열두 아들에게, 모세는 열두 지파에게 복을 빌어주었다. 시므온은 마리아와 아기 예수에게 축복했다. 노인은 자기가 경건과 믿음을 가졌을 뿐 아니라 후배에게 복을 빌어주는 사명을 충실히 감당했다.
“여성 노인”은 84세 안나(2:36-38)다.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 안나가 성전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은 믿음의 테두리를 떠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안나는 주야로 금식하고 기도하고 섬기고 감사했으며 속량을 기다렸고 그것을 젊은이들에게 가르쳤다. 안나는 노인 제자의 모델이었다. 다른 복음서에 노인 이야기가 희박한 가운데 누가는 노인 제자 모델의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누가는 모든 세대를 아울러 윤리적 모델이 되는 제자를 설명하려고 했다.
또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누가복음에 나타나는 부자의 회심 가능성이다.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다음의 이야기를 보면,
1:53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6:24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12:16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6:19 부자와 나사로
18:18, 22-23 부자 관리.
19:1-10 삭개오.
비유의 한 부자는 상당한 경지에 이른 자였다.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12:19). 본래 영혼은 하나님만이 만족시킬 수 있지만, 이 부자의 경우, 부가 그의 영혼을 만족시켰다. 영혼을 지키지 못한 부자는 구원의 가망이 없다. 영혼이 도로 취해진 부자는 불지옥으로 간다(16:24). 이 경고를 받은 부자는 구체적으로 영생을 갈망하는 부자 관리였다. 그러나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했다(18:23). 그래서 제자에서 탈락했다. 이 부자의 구원은 사람이 할 수 없다. 그런데 19장에서 예수께서 세리장의 집에 들어가시자 부자가 바뀌었다. 이처럼 누가는 구체적인 한 부자의 구원 가능성을 논증해내었다. 부자도 제자에 포함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상을 종합하면, 예수의 제자는, 바른 정체성을 갖기 위해 늘 배우고 깨달으며, 고난을 감내하며, 약자를 배려하고 세대를 초월하는 제자라고 할 수 있다. 누가는 여성 제자, 노인 제자, 부자 제자까지 폭넓게 다룬 것으로 보인다.
6. 사복음서의 비교 해석
사복음서를 비교하는 방식을 6가지로 볼 수 있다.
1) 추가와 생략
마태의 안식일 밀밭 논쟁(마 12:1-8/ 막 2:23-28/ 눅 6:1-5)
마12:7은 호6:6로부터 인용되어 추가되었다. 이는 ‘구약의 성취’라는 마태복음의 특징이다.
비유로 가르치는 이유 설명(마 13:10-17/ 막 4:10-12/ 눅 8:9-10)
마태의 여섯 절(마13:12-17)은 사6:9-10을 인용하여 추가되어 ‘구약의 성취’를 보여준다.
마태의 팔복과 누가의 사복사화(마 5:3-11/ 눅 6:20-26)
마태는 “심령이 가난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누가는 “가난한 자”, “주린 자”로 복 있는 자를 기술한다. 해석자는 ‘심령’과 ‘의’의 추가/생략의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마태의 관심은 영적인 측면에, 누가의 관심은 물질적인 측면이다. 또한 팔복은 3인칭으로, 사복사화는 2인칭으로 되어 있다. 인칭의 의도를 파악해야 한다.
2)확대와 축소
거라사 광인(마 8:28-34/ 막 5:1-20/ 눅 8:26-39)
마태의 기술은 마가·누가의 기술보다 현저히 짧다. 마태는 왜 간결할까? 마가와 누가는 왜 자세히 기술할까?
마태의 산상설교와 누가의 평지 설교(마 5-7장/ 눅 6:20-49)
두 설교 모두 복(팔복/사복사화)으로 시작하여 집 짓는 자 비유로 끝나고, 설교 후에 백부장의 종 치유 사건이 일치한다. 그러므로 두 설교는 동일한 설교로 보인다. 그리고 누가의 평지설교 내용 대부분이 마태의 산상설교에서 발견된다. 산성설교는 누가복음의 흩어져 있는 가르침을 대단히 많이 포함한다. 마태는 다양한 가르침을 모아 확대한 것 같다. 설교자는 산성설교와 평지설교가 구분되는 강조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3) 문맥의 차이
잃은 양 한 마리의 비유(마 18:12-14/ 눅 15:3-7)
마태복음
누가복음
18:10-11 작은 형제를 업신여기지 말라
15:1-2 죄인을 영접하신 예수를 비난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
18:12-14 잃은 양 한 마리의 비유
15:3-7 잃은 양 한 마리의 비유
마태의 양은 교회 안의 성도와 일치하고, 누가의 양은 구원이 필요한 세상 죄인과 일치한다.
성령을 훼방하는 죄(마 12:31-32/ 막 3:28-30/ 눅 12:10)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12:22-30 바알세불 논쟁
3:22-27 바알세불 논쟁
12:8-9 사람 앞에서 인자를 시인하거나 부인하는 결과
12:31-32 성령을 훼방하는 죄
3:28-30 성령을 훼방하는 죄
12:10 성령을 훼방하는 죄
마태·마가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그릇된 태도를 지적하고, 누가는 사람 앞에서 인자를 시인하거나 부인하는 결과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교훈을 준다.
소금과 빛(마 5:13-16/ 막 4:21; 9:49-50/ 눅 8:16; 14:34-35)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5:3-12 팔복
4:1-20 씨뿌리는 자의 비유
9:42-48 실족시키는 문제
8:4-15 씨뿌리는 자의 비유
14:25-33 제자가 되는 결단
5:13-16 소금과 빛
4:21 빛
9:49-50 소금
8:16 빛
14:34-35 소금
4) 배열의 차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마 13:8,23/ 막 4:8,20)
마태는 “100배, 60배, 30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이고, 마가는 “30배, 60배, 100배가 되었느니라”이다. 복음에 대한 사람들의 부정적인 반응 때문에, 마가의 점증적 순서를 마태는 역순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예수의 시험 당하신 순서(마 4:1-11/ 눅 4:2-13)
마태는 돌로 떡을 만들라,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 경배하라의 순이다. 누가는 돌로 떡을 만들라, 경배하라,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의 순이다. 누가의 성전에 대한 관심이 성전에 관한 시험을 마지막에 두게 했을 수 있다.
속옷/겉옷(마 5:40/ 눅 6:29)
마태는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인데, 누가는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이다. 이 차이는 상황 설정과 문화적 배경에 근거할 수 있다. 마태는 재판과 관련된 상황이기 때문에 순서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구약에 겉옷은 담보의 가치가 없기 때문에, 고발자는 속옷을 담보로 잡으려고 고발하는 것이다(출22:25-27; 신24:12-13).
그러나 누가는 고발 상황이 아니라 강도를 만난 상황이다. 강도는 겉옷을 먼저 빼앗으려 한다. 누가는 이방인 독자들에게 마태의 구약적 배경 이해가 어렵다고 생각하여 강도 상황으로 제시했을 수 있다.
5) 자료와 시각의 차이
예수의 계보(마 1:1-17/ 눅 3:23-38)
두 계보는 구조 자체가 다르다. 차이점과 독특한 내용을 통해서 메시지가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
누가복음
마태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데
마태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는 데
다윗의 아들 중 솔로몬의 계열(왕족의 계보)를 따르는데,
마태는 마리아를 제외하고 4명의 여인들
누가는 아래서 위로 올라간다.
누가는 아담에서 끝난다.
누가는 나단의 계열(선지자의 계보)을 따른다.
마태복음
누가복음
마태는 요셉 중심으로 기술한다. 하나님의 사자는 모든 지시를 요셉에게 한다. 마태는 예수를 다윗의 후손으로 드러낸다(1:1)
누가는 마리아 중심으로 기술한다.
누가의 여자에 대한 특별한 관심이 마리아의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한 것 같다.
예수 탄생 기사(마 1-2장/ 눅 1-2장)
6) 독특한 가르침과 이야기
마태의 특수 중에, 전도의 범위를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으로 한정하는 마10:5-6과 15:24이 있다. 특히 10:5에서 사마리아에도 전도하지 말 것을 명백히 언급한다. 여기서 사마리아는 마태복음 안에서 유일하게 사용되었다. 이러한 전도의 한정과 마28:18-20의 이방인 선교에 대한 예수의 명령은 무슨 관계일까?
반면, 누가의 특수 중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10:30-37)와 유일하게 감사하러 온 사마리아 나병환자 이야기(17:11-19)가 있다. 누가는 사마리아인들을 유대인들보다 훨씬 더 본받을 만하다고 평가한다. 누가의 사마리아에 대한 관심은 사도행전에 계속된다(행1:8; 8장)
한편, 마태의 특수 중에, 동방박사 이야기(2:1-13)는 마태의 이방인에 대한 관심이 누가에 비해 덜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방인이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이를 멀리서 찾아와 경배한다. 유대인에게 불쾌한 이야기를 마태는 복음서에 포함시켰다.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마태의 이방인에 대한 입장이 단순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나가는 말
지금까지 “사복음서 비교”라는 주제를 가지고 다양한 내용을 정리해보았다. 사복음서의 배열은 시간보다 규모의 순서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공관복음서 문제” 해결을 위한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나의 입장은 독립설이다. 복음서들의 상이성과 공통성의 원인을 정리하면서, 공통성에 주목하는 것이 사복음서 저자들과 초대교회의 의도에 맞으며 더 큰 유익이 될 거라는 소견을 밝혔다. 공통성에 주초를 두면서 사복음서의 차이를 비교하여, 예수의 말씀과 행적과 고난과 부활의 이야기를 더 자세하고 더 풍성하게 알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큰 축복이요 사랑임을 생각해보았다.
물론 사복음서를 비교에서 사상을 종합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시도해 보았다. 사복음서 신학 비교에서 기독론과 교회론을 중심으로 생각해보았을 때, 사복음서는 서로 다른 화음으로 예수가 하나님이심을 선포하고 있었다. 아울러 사복음서의 제자도 비교는 매우 흥미로웠다. 그 가운데 누가복음의 제자도는 현재 우리 공동체의 상황에서 분명히 기여할 바가 있다고 생각이 되었다.
이번 학기 누가복음 단권을 공부하지만, 사복음서를 함께 비교하고, 사복음서의 차이뿐 아니라 공통점에 주목할 때 우리 모임이 더욱 견고해지리라 생각한다. 사복음서의 차이와 마찰을 공부하는 것은 지성을 갖춘 우리에게 매우 흥미롭고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사복음서의 공통점을 유심히 살펴본다면 초대교회와 교부들의 성경 이해에 더욱 근접해지고 건강한 공동체를 이루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또한, 사복음서의 상황을 비교하면서 현재 우리의 시대에 필요한 제자양성의 모델을 찾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흔히들 누가복음에서 급진적인 제자의 모델을 생각하지만, 나의 생각에는 오히려 통합적이고 현실적인 모델이 누가의 견해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특히 노인과 여성 제자, 더 나아가 부자 제자가 함께 가는 누가의 교회론적 제자 모델은 현재 우리 모임의 형편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노인과 여성은 물론이요 부유한 자까지 구원 가능성을 끊지 않고 함께 예수의 “길동무”가 되어 “즐겁게” 또 “끝까지” 갈 수 있는 공동체가 누가복음이 제시하는 교회가 아닐까?
저는 이번 “사복음서 비교”를 통해서 복음서 공부에 대한 새로운 의욕과 소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코로나19 이후 오미크론 확산으로 인해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 같은 하나님의 구원역사 속에서도 마지막에 남게 될 천상교회와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우리를 생각하며 큰 위로를 받게 되었습니다. 나는 20대 청년시절 예수를 만나 제자가 되었고, 중년의 시절을 거쳐, 이제 노인이 되어가는 혹은 된 나의 모습을 볼 때, 인생이 크게 꺾인 것 같고 실패한 것 같은 생각이 밀려왔습니다. 그러나 사복음서를 통해서, 한 분 예수가 더 많은 예수로 진행하는 역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올해 주님의 제자가 된 혹은 될 동역자들과 함께 즐겁게 끝까지 이 길을 가게 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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