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2022년 민8강(15장)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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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민수기 제 8 강
말씀 | 민수기 15장
요절 | 민수기 15:41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었느니라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니라.”
지난 주에 우리는 이스라엘 열두 두령의 정탐 보고를 배웠습니다. 열 두령의 부정적인 보고를 듣고 온 백성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이집트로 돌아가고자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전염병으로 멸하고자 하였지만 모세의 중보기도를 들으시고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40년을 방황하면서 죽게 됩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소망의 말씀을 주십니다. 그 자손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해야 할지,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야 할지, 하나님의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방종하게 하는 마음을 어떻게 다스릴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역사는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물 흐르듯이 흘러갑니다. 광야에 들어가서 지내야 하는 그들은 광야에서 죽어갈 것이지만 후손들을 교육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섬겨야 합니다. 우리가 역사의식을 가지고 주님의 말씀을 듣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내가 주어 살게 할 땅에 들어가서 향기로운 제사를 드리라고 하십니다(1-16).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반역한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를 말씀을 주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주어 살게 할 땅에 들어가서 여호와께 화제나 번제나 서원을 갚는 제사나 낙헌제나 정한 절기제에 소나 양을 여호와께 향기롭게 드릴 때에” 어떻게 해야 할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반역으로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향기로운 제사를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신앙은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입니다. 관계를 깨뜨리는 것이 죄입니다. 속죄를 통해서 관계를 깨트리는 죄를 처리하고 관계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제사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번제, 소제, 전제, 낙헌제, 화목제, 거제 등등. 번제는 짐승을 불로 태워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소제는 곡식을 곱게 갈아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전제는 포도주를 다른 제물과 함께 부어드리는 제사입니다. 낙헌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자발적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절기제는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나팔절 등에 드리는 제사입니다. 거제는 첫 열매를 들어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제사입니다. 거제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취하고 제사에 함께 한 사람들이 음식을 나누면서 화목을 이룹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각종 제사 앞에 ‘향기로운’이라는 수식어가 6번이나 반복해서 나옵니다. 이를 볼 때 제사라고 다 똑같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흠향하시는 제사가 따로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4장에서도 아벨이 믿음으로 드린 제사를 하나님이 기쁘게 받아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경외함으로 드리는 제사, 두렵고 떨림으로 드리는 제사를 하나님이 받으십니다. 시편 51:17에 보면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죄를 진실되게 고백하고 회개하는 제사를 하나님이 받으십니다. 독일은 나치의 만행을 지금도 회개하고 다른 나라에 용서를 구합니다. 시리아 난민을 백만 명을 받아들였습니다.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일에도 앞장서고 있습니다. 그들의 이런 자세가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고 본받을 만한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상한 마음으로 회개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깊이 체험하게 됩니다.
또 시 50:23에 보면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제사, 헌신이 담긴 제사를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사랑을 받은 것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고, 사랑을 받은 것이 많은 사람은 희생적으로 헌신합니다. 제물의 규모에 따라 고운 가루와 포도주의 양을 비례하여 드리라고 하십니다. 초점은 힘대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이 주일예배가 하나님께 향기로운 예배가 될 수 있도록 하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둘째, 부지중에 범한 죄와 고의로 범한 죄(22-31). 24절을 보십시오. “회중이 부지중에 범죄하였거든 온 회중은 수송아지 한 마리를 여호와께 향기로운 화제로 드리고 규례대로 소제와 전제를 드리고 숫염소 한 마리를 속죄제로 드릴 것이라.” 부지중에 죄를 지었지만 깨달았을 때에 속죄제를 드려야 합니다. 회중, 곧 공동체 전체가 부지 중에 범죄했을 때는 죄가 크기 때문에 수송아지 한 마리와 숫염소 한 마리를 드려야만 합니다. 또 소제와 전제를 드려야 합니다. 한 사람이 죄를 범한 경우에는 일년된 암염소를 속죄제물로 드립니다. 한 개인의 죄보다 공동체 전체의 죄가 더 크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개인이든 공동체든 죄가 있으면 반드시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다 보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짐승을 잡아서 속죄 제사를 드리고 죄값을 치루어야만 합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죄는 관계를 파괴하기 때문에 죄를 짓고도 가만히 있으면 사이가 벌어집니다. 나는 모르고 있지만 상대방은 상처를 받고 힘들어 하기 때문에 가까이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깨달았을 때 반드시 용서를 구하고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나 죄 중에서도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있습니다. 30,3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본토인이든지 타국인이든지 고의로 무엇을 범하면 누구나 여호와를 비방하는 자니 그의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라 그런 사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멸시하고 그의 명령을 파괴하였은즉 그의 죄악이 자기에게로 돌아가서 온전히 끊어지리라.” 처음부터 악한 의도를 가지고 죄를 범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진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고 명령을 파괴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축복해 주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의적으로 죄를 범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출애굽기 32장에서도 고의적으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음란하게 섬겼습니다. 그 죄로 말미암아 3000명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16장에 나오는 고라의 반역사건 때는 250명이 불에 타서 죽고 14700명이 전염병으로 죽었습니다. 민수기 25장에 바알브올 음행사건 때문에 24000명이 전염병으로 죽었습니다. 이처럼 고의적으로 죄를 범하면 무서운 심판을 당하게 됩니다. 이런 저주가 임하지 않으려면 함부로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죄를 퍼뜨리고 자랑합니다. 그러나 죄는 합리화한다고 무시되는 것이 아닙니다. 당장은 넘어가는 것 같은데 후에 역사의 심판을 받습니다. 사람들의 비난은 피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5:33,34에 보면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했습니다. 우리는 죄를 미워하고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하겠습니다.
우리 인생들은 너무나 약해서 죄에 넘어질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반드시 지켜야만 하고, 고의로 죄를 범하면 끊어진다는 것도 압니다. 그런데 알면서도 죄를 짓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여기에 딜레마가 있습니다. 이 딜레마를 해결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을 속죄제물로 허락하사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게 하셨습니다. 흠없고 점없는 예수님의 피로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어떤 추한 죄인도 예수님의 보혈을 믿으면 죄 사함을 받는 길을 여셨습니다. 히브리서 9:26-28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이전에 제사는 너무나 번거로웠습니다. 죄를 지을 때마다 숫양을 잡고 비둘기를 잡아 제사를 드려야만 했습니다. 이방인들은 죄의식도 없이 죄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리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담당하셨습니다. 단번에 죄 값을 다 치루셨습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8:1,2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어 주시고 믿는 자 안에 내주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거룩한 삶을 살고 싶은 소원도 주시고 능력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순종함으로 죄를 이기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부어 주시는 사랑을 덧입고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 때마다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 찬양합시다. 보혈의 능력을 덧입을 때 죄의 소욕을 이기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을 통해서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고 의롭게 살 수 있는 길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셋째, 안식일을 범한 것에 대한 벌(32-36).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 거류할 때에 안식일에 어떤 사람이 나무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나무하는 자를 발견한 자들이 그를 모세와 아론과 온 회중 앞으로 끌어왔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처치할는지 지시하심을 받지 못한 고로 가두었습니다. 35,36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 사람을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진영 밖에서 돌로 그를 칠지니라. 온 회중이 곧 그를 진영 밖으로 끌어내고 돌로 그를 쳐죽여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하니라.” 하나님께서는 왜 이토록 엄중한 벌을 내리게 하셨을까요? 안식일에 나무를 한 것이 죽어야 할 만큼 큰 죄인가요? 하나님께서 이런 벌을 내리신 것은 그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범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 법을 알면서도 범함으로 하나님을 멸시한 것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께 대한 공격적이며 반항적인 자세로 하나님을 훼방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6일 동안 창조하시고 7일째 안식하셨습니다. 초기 혼돈과 흑암이 깊었던 세계는 하나님의 창조행위를 통해서 조화와 질서를 가진 아름다운 세계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땅과 안식일을 제정하심으로 온전한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도 바로를 위한 노동을 하다가 죽을 인생들을 구원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으로 삼고자 한 것입니다. 안식일은 단순히 쉬는 날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와 그의 모든 피조물의 회복을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서 최대의 의무이며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범한 자에게 회중에서 끊어지는 최대의 처벌이 가해졌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이 근본적으로 사람을 위해 정해진 것이며 또한 예수님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2:28,29). 이는 창조의 궁극적인 목적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피조물이 안식하는 것에 있음을 의미합니다(히 4:1-13). 이를 저항하는 것이 곧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며 사하심을 얻지 못하는 죄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주일예배를 드리는 것이 누가 누구를 섬기기 위한 것인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가 자기를 위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을 위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예배할 것인가의 문제는 드려도 되고 안 드려도 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예배는 ‘생사의 문제’가 달린 심각한 이슈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를 배우고 죽음에 대해서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의 참된 위로, 유일한 위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죽어야 합니다.
넷째, 나의 하나님이 되려고 세상에서 인도하여 내심(37-41).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그들의 옷단 귀에 청색 술을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술은 그들이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그들의 방종하게 하는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행하여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오늘날 옷술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암송하면서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 살 수 있도록 인도합니다.
41절을 보십시오.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었느니라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니라.” 하나님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것은 그 말씀을 지켜 순종하고 섬김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그의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는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때 우리는 그의 보호하심과 인도와 위로를 받고 그의 축복을 경험하며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서 그의 뜻을 이루시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성을 맺고 그 사랑과 거룩함을 아는 데서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천안 센터의 한 목자님은 매일 양식쓰기를 시작했는데 자꾸 어두운 생각이 올라와서 더 말씀을 붙들고자 성경다독에 도전했습니다. 말씀을 다독하다보니 점점 말씀에 재미를 붙여서 61일 만에 성경 일회독을 마쳤습니다. 매일 양식을 쓰고, 틈만 나면 성경을 읽다보니 쓸데없이 인터넷 서핑하고, 유튜브 보던 것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말씀다독으로 마음에 평안이 임하자 부부싸움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또 양들과 자녀들을 위한 기도가 응답을 받게 되었습니다. 산후우울증에 시달리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꿈과 비전을 덧입고 주변사람들과 적극적으로 은혜를 나누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말씀은 내게 보물입니다. 말씀이 나의 생각을 다스릴 때 성령님이 충만히 내 삶에 임재하십니다. 나는 죄 투성이의 소망없는 사람인데 이런 나에게 말씀을 주심으로 나를 존귀하게 하여 주십니다. 죄가 나를 다스리면 절망뿐이지만 말씀을 잘 배우고 순종하면 소망이 넘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려고 죄에서 구원해 주시고, 예배하게 하시고, 풍성한 복을 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축복의 때에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힘쓰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민수기 15장
요절 | 민수기 15:41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었느니라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니라.”
지난 주에 우리는 이스라엘 열두 두령의 정탐 보고를 배웠습니다. 열 두령의 부정적인 보고를 듣고 온 백성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이집트로 돌아가고자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전염병으로 멸하고자 하였지만 모세의 중보기도를 들으시고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40년을 방황하면서 죽게 됩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소망의 말씀을 주십니다. 그 자손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해야 할지,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야 할지, 하나님의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방종하게 하는 마음을 어떻게 다스릴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역사는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물 흐르듯이 흘러갑니다. 광야에 들어가서 지내야 하는 그들은 광야에서 죽어갈 것이지만 후손들을 교육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섬겨야 합니다. 우리가 역사의식을 가지고 주님의 말씀을 듣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내가 주어 살게 할 땅에 들어가서 향기로운 제사를 드리라고 하십니다(1-16).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반역한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를 말씀을 주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주어 살게 할 땅에 들어가서 여호와께 화제나 번제나 서원을 갚는 제사나 낙헌제나 정한 절기제에 소나 양을 여호와께 향기롭게 드릴 때에” 어떻게 해야 할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반역으로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향기로운 제사를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신앙은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입니다. 관계를 깨뜨리는 것이 죄입니다. 속죄를 통해서 관계를 깨트리는 죄를 처리하고 관계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제사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번제, 소제, 전제, 낙헌제, 화목제, 거제 등등. 번제는 짐승을 불로 태워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소제는 곡식을 곱게 갈아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전제는 포도주를 다른 제물과 함께 부어드리는 제사입니다. 낙헌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자발적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절기제는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나팔절 등에 드리는 제사입니다. 거제는 첫 열매를 들어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제사입니다. 거제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취하고 제사에 함께 한 사람들이 음식을 나누면서 화목을 이룹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각종 제사 앞에 ‘향기로운’이라는 수식어가 6번이나 반복해서 나옵니다. 이를 볼 때 제사라고 다 똑같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흠향하시는 제사가 따로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4장에서도 아벨이 믿음으로 드린 제사를 하나님이 기쁘게 받아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경외함으로 드리는 제사, 두렵고 떨림으로 드리는 제사를 하나님이 받으십니다. 시편 51:17에 보면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죄를 진실되게 고백하고 회개하는 제사를 하나님이 받으십니다. 독일은 나치의 만행을 지금도 회개하고 다른 나라에 용서를 구합니다. 시리아 난민을 백만 명을 받아들였습니다.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일에도 앞장서고 있습니다. 그들의 이런 자세가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고 본받을 만한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상한 마음으로 회개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깊이 체험하게 됩니다.
또 시 50:23에 보면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제사, 헌신이 담긴 제사를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사랑을 받은 것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고, 사랑을 받은 것이 많은 사람은 희생적으로 헌신합니다. 제물의 규모에 따라 고운 가루와 포도주의 양을 비례하여 드리라고 하십니다. 초점은 힘대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이 주일예배가 하나님께 향기로운 예배가 될 수 있도록 하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둘째, 부지중에 범한 죄와 고의로 범한 죄(22-31). 24절을 보십시오. “회중이 부지중에 범죄하였거든 온 회중은 수송아지 한 마리를 여호와께 향기로운 화제로 드리고 규례대로 소제와 전제를 드리고 숫염소 한 마리를 속죄제로 드릴 것이라.” 부지중에 죄를 지었지만 깨달았을 때에 속죄제를 드려야 합니다. 회중, 곧 공동체 전체가 부지 중에 범죄했을 때는 죄가 크기 때문에 수송아지 한 마리와 숫염소 한 마리를 드려야만 합니다. 또 소제와 전제를 드려야 합니다. 한 사람이 죄를 범한 경우에는 일년된 암염소를 속죄제물로 드립니다. 한 개인의 죄보다 공동체 전체의 죄가 더 크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개인이든 공동체든 죄가 있으면 반드시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다 보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짐승을 잡아서 속죄 제사를 드리고 죄값을 치루어야만 합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죄는 관계를 파괴하기 때문에 죄를 짓고도 가만히 있으면 사이가 벌어집니다. 나는 모르고 있지만 상대방은 상처를 받고 힘들어 하기 때문에 가까이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깨달았을 때 반드시 용서를 구하고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나 죄 중에서도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있습니다. 30,3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본토인이든지 타국인이든지 고의로 무엇을 범하면 누구나 여호와를 비방하는 자니 그의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라 그런 사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멸시하고 그의 명령을 파괴하였은즉 그의 죄악이 자기에게로 돌아가서 온전히 끊어지리라.” 처음부터 악한 의도를 가지고 죄를 범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진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고 명령을 파괴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축복해 주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의적으로 죄를 범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출애굽기 32장에서도 고의적으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음란하게 섬겼습니다. 그 죄로 말미암아 3000명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16장에 나오는 고라의 반역사건 때는 250명이 불에 타서 죽고 14700명이 전염병으로 죽었습니다. 민수기 25장에 바알브올 음행사건 때문에 24000명이 전염병으로 죽었습니다. 이처럼 고의적으로 죄를 범하면 무서운 심판을 당하게 됩니다. 이런 저주가 임하지 않으려면 함부로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죄를 퍼뜨리고 자랑합니다. 그러나 죄는 합리화한다고 무시되는 것이 아닙니다. 당장은 넘어가는 것 같은데 후에 역사의 심판을 받습니다. 사람들의 비난은 피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5:33,34에 보면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했습니다. 우리는 죄를 미워하고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하겠습니다.
우리 인생들은 너무나 약해서 죄에 넘어질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반드시 지켜야만 하고, 고의로 죄를 범하면 끊어진다는 것도 압니다. 그런데 알면서도 죄를 짓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여기에 딜레마가 있습니다. 이 딜레마를 해결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을 속죄제물로 허락하사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게 하셨습니다. 흠없고 점없는 예수님의 피로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어떤 추한 죄인도 예수님의 보혈을 믿으면 죄 사함을 받는 길을 여셨습니다. 히브리서 9:26-28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이전에 제사는 너무나 번거로웠습니다. 죄를 지을 때마다 숫양을 잡고 비둘기를 잡아 제사를 드려야만 했습니다. 이방인들은 죄의식도 없이 죄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리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담당하셨습니다. 단번에 죄 값을 다 치루셨습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8:1,2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어 주시고 믿는 자 안에 내주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거룩한 삶을 살고 싶은 소원도 주시고 능력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순종함으로 죄를 이기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부어 주시는 사랑을 덧입고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 때마다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 찬양합시다. 보혈의 능력을 덧입을 때 죄의 소욕을 이기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을 통해서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고 의롭게 살 수 있는 길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셋째, 안식일을 범한 것에 대한 벌(32-36).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 거류할 때에 안식일에 어떤 사람이 나무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나무하는 자를 발견한 자들이 그를 모세와 아론과 온 회중 앞으로 끌어왔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처치할는지 지시하심을 받지 못한 고로 가두었습니다. 35,36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 사람을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진영 밖에서 돌로 그를 칠지니라. 온 회중이 곧 그를 진영 밖으로 끌어내고 돌로 그를 쳐죽여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하니라.” 하나님께서는 왜 이토록 엄중한 벌을 내리게 하셨을까요? 안식일에 나무를 한 것이 죽어야 할 만큼 큰 죄인가요? 하나님께서 이런 벌을 내리신 것은 그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범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 법을 알면서도 범함으로 하나님을 멸시한 것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께 대한 공격적이며 반항적인 자세로 하나님을 훼방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6일 동안 창조하시고 7일째 안식하셨습니다. 초기 혼돈과 흑암이 깊었던 세계는 하나님의 창조행위를 통해서 조화와 질서를 가진 아름다운 세계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땅과 안식일을 제정하심으로 온전한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도 바로를 위한 노동을 하다가 죽을 인생들을 구원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으로 삼고자 한 것입니다. 안식일은 단순히 쉬는 날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와 그의 모든 피조물의 회복을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서 최대의 의무이며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범한 자에게 회중에서 끊어지는 최대의 처벌이 가해졌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이 근본적으로 사람을 위해 정해진 것이며 또한 예수님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2:28,29). 이는 창조의 궁극적인 목적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피조물이 안식하는 것에 있음을 의미합니다(히 4:1-13). 이를 저항하는 것이 곧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며 사하심을 얻지 못하는 죄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주일예배를 드리는 것이 누가 누구를 섬기기 위한 것인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가 자기를 위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을 위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예배할 것인가의 문제는 드려도 되고 안 드려도 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예배는 ‘생사의 문제’가 달린 심각한 이슈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를 배우고 죽음에 대해서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의 참된 위로, 유일한 위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죽어야 합니다.
넷째, 나의 하나님이 되려고 세상에서 인도하여 내심(37-41).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그들의 옷단 귀에 청색 술을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술은 그들이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그들의 방종하게 하는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행하여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오늘날 옷술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암송하면서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 살 수 있도록 인도합니다.
41절을 보십시오.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었느니라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니라.” 하나님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것은 그 말씀을 지켜 순종하고 섬김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그의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는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때 우리는 그의 보호하심과 인도와 위로를 받고 그의 축복을 경험하며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서 그의 뜻을 이루시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성을 맺고 그 사랑과 거룩함을 아는 데서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천안 센터의 한 목자님은 매일 양식쓰기를 시작했는데 자꾸 어두운 생각이 올라와서 더 말씀을 붙들고자 성경다독에 도전했습니다. 말씀을 다독하다보니 점점 말씀에 재미를 붙여서 61일 만에 성경 일회독을 마쳤습니다. 매일 양식을 쓰고, 틈만 나면 성경을 읽다보니 쓸데없이 인터넷 서핑하고, 유튜브 보던 것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말씀다독으로 마음에 평안이 임하자 부부싸움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또 양들과 자녀들을 위한 기도가 응답을 받게 되었습니다. 산후우울증에 시달리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꿈과 비전을 덧입고 주변사람들과 적극적으로 은혜를 나누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말씀은 내게 보물입니다. 말씀이 나의 생각을 다스릴 때 성령님이 충만히 내 삶에 임재하십니다. 나는 죄 투성이의 소망없는 사람인데 이런 나에게 말씀을 주심으로 나를 존귀하게 하여 주십니다. 죄가 나를 다스리면 절망뿐이지만 말씀을 잘 배우고 순종하면 소망이 넘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려고 죄에서 구원해 주시고, 예배하게 하시고, 풍성한 복을 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축복의 때에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힘쓰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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