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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022년 눅9강(7:1-17) 청년아 일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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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39회 작성일 22-05-09 09:01

본문

2022년 누가복음 제 9 강
말씀 | 누가복음 7:1-17
요절 | 누가복음 7:14
청년아 일어나라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5월은 계절의 여왕이라고 합니다. 또한 가정의 달이기도 합니다. 가정을 구원하고 복되게 하는 일은 창조주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가정을 회복하는 일에 힘쓰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과부의 외아들이 죽었을 때 큰 슬픔이 온 도시를 뒤덮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셔서 그 청년을 살리심으로 사람들에게 소망을 심으셨습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께서 오늘 우리와도 함께 하셔서 관에 누운 청년들을 일으키시고 일어나 빛을 발하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백부장의 믿음(1-10). 예수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주시기를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이 백부장은 갈릴리 분봉 왕인 헤롯 안디바 밑에서 백 명의 군인들을 통솔하는 장교였습니다. 백부장은 무역과 세금과 치안 업무를 관장하는 군인으로서 다양한 국적을 지닌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 최하위 군인이 75데나리온을 받았을 때, 백부장은 3,750-7500데나리온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때 종은 사고 팔 수 있는 재산의 일부였기 때문에 병들면 쓸모없다고 내다 버리기 일쑤였습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은 다 죽어가는 종을 한 인격체로 여기고 사랑하였습니다. 어찌하든지 종을 살리고자 애를 썼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가 백부장이었기 때문에 그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소상히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귀신도 쫓아내고, 중풍병자도 살려내고, 맹인의 눈을 뜨게 하였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런 분이라면 자기의 종도 살릴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해 주시기를 청하였습니다. 이에 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였습니다.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로마인과 유대인은 적대적인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은 유대민족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하여 회당까지 지어주었습니다. 이로 볼 때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로마인이었지만 유대인을 무시하지 않고 그들의 문화를 존중하였습니다. 그들을 압제하고 임의로 부려먹기보다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적대적인 유대인들을 친구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군인이었지만 인간적으로 매력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종뿐만 아니라 유대인에게까지 연민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유대인의 회당을 지어주려면 큰 희생이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이 교회를 염려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박혀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기 어려운 것을 실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백부장과 같은 자세를 갖는다면 전도의 길이 열릴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새번역 데살로니가전서 1:5,6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복음을 말로만 전한 것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전하였습니다. 우리가 여러분 [가운데서], 여러분을 위하여, 어떻게 처신하였는지를,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많은 환난을 당하면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서, 우리와 주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복음 전도가 말씀과 큰 확신과 올바른 처신으로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처신을 바꾸는 것이 전도입니다. 진실하게 살려는 노력, 연민의 마음, 희생하는 노력이 전도입니다. 백부장은 종을 불쌍히 여겼고, 예수님은 외아들을 잃은 과부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 얼마나 연민을 느끼고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일생 죄를 짓다가 영원한 지옥에 떨어질 사람들에 대한 연민의 마음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한 사람이라도 주님께로 인도하여 치료하고 살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인이 50명 정도밖에 안 되는 미주리 주의 아주 작은 교회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중학교 여자 아이가 암에 걸려 수술 후 항암치료를 받았습니다. 머리카락이 다 빠져서 머리를 밀었습니다. 사춘기 여학생으로 매우 예민하던 시절이라 그 머리로는 교회에 나올 수 없었습니다. 교회를 몇주 빠져 연락해보니, 머리 때문에 못 나온다는 것이었습니다. 교인들이 회의를 하여 성도 모두가 이 아이를 위해 머리를 깎기로 결정했습니다. 동네 미장원 주인은 멀쩡한 사람들이 자꾸 머리를 밀어 달라고 오니까 이상해서 물었습니다. 우리 교회 어린 여학생 때문이라는 얘기를 듣고 방송국에 전화하였고 취재가 시작되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 여학생은 주일에 머리를 가리기 위해 털모자를 쓰고 교회에 나왔습니다. 예배당 문을 여는 순간 전부 대머리 된 성도들이 앉아있고 자기만 털모자를 쓰고 있었습니다. 살며시 털모자를 벗고 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방송국의 앵커우먼이 나는 크리스천은 아니지만 내가 만약 교회 간다면 이런 교회를 다니고 싶다고 말하며 이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교회입니다. 우리도 이런 교회 한번 만들어 봐야 하지 않을까요?

  예수님께서 백부장에 집에 가까이오자,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무슨 요청을 했습니까?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6,7).” 백부장은 예수님을 실제로 보지 않았지만 예수님을 놀라게 할 만한 믿음을 소유했습니다. 예수님이 장로들의 간청을 받아들여서 그들과 함께 가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집을 향해서 온다는 소식을 듣고 백부장은 두 번째로 벗들을 보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집에 들어오시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전달했습니다. 거룩하신 주이신 예수님이 이방인인 자기 집으로 들어오게 하실만한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비천함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주여(Lord), 수고하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백부장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비천함을 깊이 발견했습니다. 그는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는 권세자들이 가진 말의 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말씀만 하셔도 종의 병이 나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공간을 초월해서 역사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말씀은 시공간을 초월해서 역사하는 권위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가 어떻게 말의 권세를 알았을까요? 8절을 보십시오.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말의 권위가 어디서 올까요? 자리에서 권위가 오기도 하지만 그것은 마음으로부터의 순종을 이끌어 내지는 못합니다. 사랑과 섬김에서 권위가 생깁니다. 말하는 사람의 권위는 사랑과 섬김에서 옵니다. 사랑의 관계가 깊이 맺혀질 때 순종으로 이어집니다. 또한 말씀을 듣는 사람의 자세도 중요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에서 나옵니다. 이 백부장은 자신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으로서 절대순종을 배웠습니다. 군인이 전쟁 중에 상관이 “돌격 앞으로!” 명령을 내리면 목숨을 걸고 나아가 싸워야 합니다. 그것이 군인입니다. 그가 순종의 본을 보일 때 자기 수하에 있는 병사에게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고, 이것을 하라 하면 하였습니다. 그는 자기 수하에 있는 병사들을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강하게 훈련하였을 것입니다. 사랑의 관계가 되지 않은데 순종을 요구한다면 잘 먹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과 섬김의 기초 위에 순종을 배울 때 큰 믿음의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네 가지 밭의 비유에서도 착하고 좋은 밭은 열매를 맺되 삽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을 결부할 때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히4:2).

  예수님은 백부장의 말을 전해 들으시고 놀랍게 여기셨습니다. 그를 따르는 무리에게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며 놀라움을 표현하셨습니다. 백부장의 “이만한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백부장은 예수님께 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와 능력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와 능력이 모든 질병을 고쳐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 같은 능력을 나타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직접 그 사람에게 다가가서 몸에 손을 대야만 고침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직접 보고 만나야만 구원의 은혜를 체험하고 그 분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분의 말씀의 권위와 능력은 시대를 초월해서 역사하십니다. 백부장이 보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나아 있었습니다(10).

  오늘 이 시대 속에서도 예수님의 말씀은 능력으로 역사하셔서 죄 사함을 베푸시며 거듭나게 하시며 병든 내면을 치유하셔서 변화된 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백부장의 이야기는 우리에게도 그 믿음을 본받으라고 요구합니다. 우리 선교사님들이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여 외국에 나아가서 언어를 배우고, 자립을 하고, 영혼을 구원하여 제자 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 시대의 “이만한 믿음”의 역사입니다. 믿음으로 결혼하는 역사, 하나님을 믿음으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역사, 기도의 응답을 받는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둘째, 청년아 일어나라(11-17). 그 후에 예수님이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 때 많은 무리가 동행하였습니다.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죽은 자를 메고 나아왔습니다.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였습니다. 이 여인은 남편을 잃고 나서 외아들에게 소망을 두고 의지하며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외아들마저 죽었을 때 이 과부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땅이 꺼지고,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살 소망도 잃어버렸습니다. 웃음기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녀의 슬픔이 얼마나 컸던지 장례식에 그 도시의 많은 사람들이 동행했습니다.

  13절을 보면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을 수식하는 말로서 “주”라는 단어를 저자 누가가 처음 사용하였습니다(눅7:19; 10:1; 11:39; 12:42; 17:5,6). “주”라는 호칭은 예수님이 높임 받고 하나님 우편에 앉은 것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 칭호입니다(행2:23-36).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을 하던 기간 중에 지니고 있던 권위를 알려줍니다. 

  죽음은 잔인한 약탈자입니다. 죽음은 사람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갑니다. 죽음은 사람의 형편과 사정을 봐주지 않습니다. 남편도 죽고 홀로 남은 외아들이라고 그 형편을 봐주지 않습니다. 어린아이, 어른을 가리지 않고 죽음은 갑자기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문제는 그 누구도 이런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인을 불쌍히 여기사 그녀의 슬픔에 깊은 공감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울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과부를 위로하기 위해서 그곳에 있었다면 대부분 할 말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울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위로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슬픔을 가져가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빈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여인의 아들을 살리실 수 있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이 주는 두려움과 고통과 상실감과 무기력 속에서 살아가는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모든 인간은 죽음 앞에서 무력합니다. 석가는 죽음의 행렬을 보고 출가했습니다. 석가가 이 과부를 볼 때 “인생은 고해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의 주님이시며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를 잃어서 슬피 우는 여인에게 “울지 말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셨습니다. 관을 멘 자들이 섰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청년을 어떻게 살리셨습니까? 14b,1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청년은 인생에서 가장 푸를 때입니다. 힘이 넘치고 왕성하게 활동할 때입니다. 청년은 피곤해도 자고 일어나면 금방 회복됩니다. 청년은 순수하고 비전에 넘칩니다.

  그러나 관 속에 누워 있는 청년은 어떠합니까? 그는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비전도 없고 활동도 없습니다. 무기력합니다.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슬픔을 안겨줍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런 청년에게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청년이 일어나 앉고 말도 하였습니다. 그는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하고 일어나 빛을 발하는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5:25은 말씀합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는데,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그리고 그 음성을 듣는 사람들은 살 것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는 살아납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듣고 영접하는 자들을 죽음의 나라에서 생명의 나라로, 어두움의 나라에서 빛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죽고 다시 살아나심으로서 부활이요 생명의 주인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원하는 사람에게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세상에서 목숨보다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세력을 제압하시고 그 소중한 목숨을 살리십니다.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였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랫동안 하나님이 자신들을 떠나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예수님의 사역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돌보시는 사건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영적으로 하나님과 관계없는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십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고후 5:17).” 

  사무엘 울만이 쓴 ⌜청춘⌟이란 시는 청년다운 것이 무엇인가 잘 알려줍니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느 기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상태를 말한다. 그것은 장밋빛 뺨, 앵두 같은 입술, 하늘거리는 자태가 아니라 강인한 의지, 풍부한 상상력, 불타는 열정을 말한다. 청춘이란 인생의 깊은 샘물에서 오는 신선한 정신, 유약함을 물리치는 용기, 안일을 뿌리치는 모험심을 의미한다. 때로는 이십의 청년보다 육십이 된 사람에게 청춘이 있다.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우리가 늙는 것이 아니다. 이상을 잃어버릴 때 비로소 늙는 것이다. 세월이 우리의 주름살을 늘게 하지만 열정을 가진 마음을 시들게 하지는 못한다. 고뇌, 공포, 실망 때문에 기력이 땅으로 들어갈 때 비로소 마음이 시들어버리는 것이다. 육십 세이든 십 육세이든 모든 사람의 가슴 속에는 놀라움에 끌리는 마음, 젖 먹는 아이와 같이 미지에 대한 끝없는 탐구심, 삶에서 환희를 얻고자 하는 열망이 있는 법이다. 그대와 나의 가슴 속에는 남에게 잘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간직되어 있다. 아름다움, 희망, 희열, 용기, 영원한 세계에서 오는 힘, 이 모든 것을 간직하고 있는 한 언제까지나 그대는 젊음을 유지할 것이다. 영감이 끊어져 정신이 냉소라는 눈에 파묻히고 비탄이란 얼음에 갇힌 사람은 비록 나이가 이십 세라 할지라도 이미 늙은이와 다름없다. 그러나 머리를 드높여 희망이란 파도를 탈 수 있는 한 그대는 팔십 세일지라도 영원한 청춘의 소유자인 것이다.” 우리가 이 시대의 문제를 볼 때 답답함을 느끼고 울분을 느낍니다. 누가 이런 청년들에게 희망을 주고 용기를 주어서 청년답게 살 수 있게 해 줄 수 있을까요? 오직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서 처절하게 죽으셨지만 사흘 만에 무덤을 헤치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절망, 절대적인 패배에서 영원한 생명, 영원한 승리라는 절대적인 희망을 이루셨습니다. 이런 부활의 주님을 영접하고 그와 연합된 삶을 살 때, 부활의 생명력을 공급해주십니다. 그 생명력은 내면에 역사하는 모든 죽음의 세력을 물러나게 합니다. 절망과 좌절, 두려움과 불안, 무기력과 패배 속에서 벗어나서 도전하고 개척하여 역사를 창조할 수 있는 힘을 공급해주십니다. 생명은 자라나서 열매를 맺게 합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척박한 환경 고달픈 현실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일어나게 하고 성장하게 하고 열매 맺게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일어나 빛을 발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슬픔에 찬 사람들을 위로하고, 연약한 사람들을 섬기며, 진리를 몰라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전해 길을 찾고 하나님 나라를 발견하고 누리며 살도록 섬겨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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