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25년 창13강(18:1-19:38) 아브라함을 동역자로 삼으신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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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창세기 제 13 강
말씀 | 창세기 18:1-19:38
요절 | 창세기 18:18,19
아브라함을 동역자로 삼으신 하나님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오늘 말씀은 아브라함이 ‘섬김’에 헌신하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하고자 하시는 일을 아브라함에게 알리십니다. 즉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고자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중보기도를 통해서 롯과 의인들을 구원하는 역사에 하나님의 동역자로 쓰임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혼자서 일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섬김과 기도를 통해서 구원 역사를 함께 이루어 나가십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어떻게 이 시대를 섬길 수 있는지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섬김으로 하나님의 동역자가 된 아브라함 가정(18:1-19).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날이 뜨거울 때에 아브라함이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눈을 들어 보았습니다.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었습니다.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혔습니다. 그는 99세의 나이였지만 섬기는 일에는 민첩했습니다. 또 겸손했습니다. 그는 나그네들의 마음에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섬기고자 그들을 초청합니다. “손님들께서 저를 좋게 보시면, 이 종의 곁을 그냥 지나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을 좀 가져 오라고 하셔서, 발을 씻으시고, 이 나무 아래에서 쉬시기 바랍니다. 손님들께서 잡수실 것을, 제가 조금 가져 오겠습니다. 이렇게 이 종에게로 오셨으니, 좀 잡수시고, 기분이 상쾌해진 다음에 길을 떠나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대답하였습니다. “좋습니다. 정 그렇게 하라고 하시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히브리서 13:2은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나그네를 대접하기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어떤 이들은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대접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나그네를 대접했다는 것은 섬김이 몸에 배인 것을 나타냅니다. 사실 그 나이에는 섬김을 받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막 10:45). 섬김을 받는 자가 큰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가 큰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매우 성숙한 모습이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혼자 섬기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으로 가서 사라에게 말합니다. “빨리 고운 밀가루 21리터를 가지고 와서, 반죽을 하여 빵을 좀 구우시오.” 아브라함이 집짐승 떼가 있는 데로 달려가서, 기름진 좋은 송아지 한 마리를 끌어다가, 하인에게 주니, 하인이 재빨리 그것을 잡아서 요리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요구르트와 우유와 하인이 만든 송아지 요리를 나그네들 앞에 차려 놓았습니다. 그들이 나무 아래에서 먹는 동안에, 아브라함은 서서, 시중을 들었습니다.
복음 역사와 환대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주일 예배나 각종 모임에서 정성스럽게 만든 음식을 나눕니다. 식사 준비는 사랑의 수고가 필요합니다. 식사 후에 교제하고 말씀을 나누게 되면 마음이 활짝 열려서 속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하게 됩니다. 이런 섬김이 양들과 동역자들에게 큰 힘이 되고 위로가 됩니다. 대접을 받는 분들은 음식만 먹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먹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랑을 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대개 사모님들이 식사 준비를 하고 식사가 끝나고 설거지는 형제목자님들이 함으로 섬김의 도를 실천하고 본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 삶의 변화는 먼저 생각이 바뀌고, 감동을 받고, 의지적인 결단을 통해 행동이 바뀝니다. 이런 행동이 계속될 때 그것이 습관이 되고 나중에는 성품이 바뀌고 운명이 바뀝니다. 우리는 많이 배우면 내가 변한 줄로 착각을 합니다. 여기에다가 가르치는 일을 하면 더 변화가 되었다는 확신이 듭니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한 착각입니다. 아무리 많이 배우고 가르쳐도 내가 실천하지 않으면 변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 삶의 변화는 진리를 배우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섬김을 통해서 옵니다. 제자는 섬김의 본을 보고 배우면서 변화되어 갑니다.
우리는 내가 섬기려면 많은 것을 충분히 가지고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없는 가운데서 섬기는 분들을 볼 때 마음에 감동이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지난 주 화요일 마이카 형제는 수프를 만들어서 조한나 목자님과 손요섭 형제를 대접했습니다. 곽슬기 자매는 학생 모임에 샌드위치를 만들어와 서 섬겼습니다. 직장을 가진 형제자매들이 청년학생모임을 섬깁니다. 이외에도 곳곳에 목자님들과 사모님들의 여러 모양의 섬김과 헌신이 있습니다. 이를 일일이 다 말하려면 제 메시지가 끝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우리 목자님들과 사모님들의 섬김이 자연스럽게 청년 학생들에게 영향을 끼쳐서 청년 학생들도 섬기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를 보면서 저는 감동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없는 가운데서 믿음으로 섬길 때에 하나님께서 예기치 못한 곳에서 필요를 채워주시고 상급을 주십니다. 이것은 섬김의 비밀입니다. “주라 그리하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고 주님은 약속하셨습니다. 섬김에는 수고가 따르지만 동시에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 있습니다. 거기에다가 상급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어떤 상급을 주십니까? 9,10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사라는 자신의 생리가 끊어졌기 때문에 속으로 웃었습니다.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새한글번역을 보면 “사라가 속으로 웃으며 중얼거렸다. ”힘이 바닥났는데 성욕이 내게 있겠는가? 주인 양반도 늙었고.“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십니다.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사라가 두려워서 자신이 웃지 않았다고 잡아뗐지만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섬김이 충만한 아브라함의 장막에 웃음꽃이 피었습니다. 아브라함 가정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사랑이 있고 기쁨이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섬김은 소돔으로 향하는 그들을 마중하는 것으로 마무리 됩니다. 그런데 그가 손님들을 마중하면서 더 큰 약속을 받습니다.
17-19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친구 사이에는 비밀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친구로 여기시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과 그 자녀들이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무너진 여호와의 도를 세우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그를 경외하고 율법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는 나라를 이루고자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는 율법이 많다고 생각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얽매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내 마음대로 산다고 자유로운 것일까요? 자유롭기는커녕 우상숭배와 정욕의 노예가 되고 온갖 불의를 자행하게 됩니다(롬1:21-31). 야고보 사도는 말씀합니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 1:22-25).” 새번역은 25절을 “그러나 완전한 율법 곧 자유를 주는 율법을 잘 살피고 끊임없이 그대로 사는 사람은, 율법을 듣고서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가 e행한 일에 복을 받을 것입니다.(e '행한 일로'로 번역할 수도 있음)”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도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의 말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들이다. 그리고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진리를 행할 때에 참된 자유가 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며 성령님이 우리 삶을 지배하는 영역이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근심에서 자유, 염려에서 자유, 죄책감에서의 자유, 관계에서의 자유입니다. 여호와의 도라는 것은 우리를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사는 그 사람에게 더 이상 주위 사람의 영향을 받지 않고,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고, 항상 감사하며 항상 기뻐하며 살 수 있는 자유를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행해야 할 공도를 주시는 것은 왜 일까요? 우리는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어떤 의무감에 눌리고, 항상 가책 가운데 시달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죄책감을 심어주려고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좀 자유롭게 정말 행복하게 살기를 원해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표현으로 주시는 것이 계명입니다. 이런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가 한두 번만 순종할 뿐만 아니라 반복해서 지속적으로 순종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런 나라를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둘째, 기도로 하나님의 동역자가 된 아브라함(20-33).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소돔, 고모라에 대한 심판 계획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의와 공도가 무너진 소돔과 고모라에 대해서는 심판하고자 계획하셨습니다. 두 천사는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아룁니다.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아브라함의 기도하는 자세에는 건방짐이 없습니다. 오직 깊은 겸손과 친밀함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단계별로 중보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아브라함보다 앞서서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아브라함이 간구하는 그 모든 단계를 허락하십니다. 오십 명에서 45명, 40명, 30명, 20명, 10명까지 아브라함은 의인의 숫자를 낮춥니다. 아브라함의 기도는 끈질깁니다.
그는 아무런 중보기도 없이 주저 않아서 “주의 뜻이 이루어지길 바란다.”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기도해보았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시겠지”라고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마음껏 대화를 나눈 후에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바랍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속에서 자기가 지켜야 할 선을 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는 어떤 경계선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 간절하게 청원하는 것은 주의 뜻을 알기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27).”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주여 노하지 마시옵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거기서 삼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30).”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내가 감히 내 주께 아뢰나이다.”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의 대화는 아버지와 자녀와 같은 친밀함과 경외심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으시고 심판 중에서 롯을 구원하셨습니다. 19:29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 “의인의 중보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있습니다(약 5:16).”
우리가 한 영혼이라도 심판 가운데서 구원하고 제자를 삼는 일은 사랑의 섬김과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기도하는 종들과 함께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한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삼년, 오년, 아니 십년씩 기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또 아침 저녁으로 요회의 양들과 센터의 동역자들을 위해서 중보기도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향기와 같습니다. 우리가 항상 기도해야 하지만 일정한 시간을 정해 놓고 중보기도하는 가운데 여름 수양회를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여름 수양회에도 한 명의 양들을 초청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연장선에서 청년들은 전국 청년학생연합수양회에 한명씩 데려가기 위해서 지금부터 초청할 사람의 이름을 적고 합심해서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아브라함과 같이 끈질기게 기도하는 가운데 생명을 얻는 역사를 체험하기를 기도합니다.
19장은 롯의 섬김이 어떠한지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부한 사람이었지만 나그네들을 무교병으로 대접을 합니다. 또 심판을 농담으로 여기던 롯의 사위들과 그의 아내가 잿더미가 되고 소금 기둥이 되는 내용이 나옵니다. 롯이 맺은 인생의 열매는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심판이 어디 있냐고 우습게 여기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도적 같이 임할 것입니다. 소돔, 고모라의 멸망은 하나의 역사적인 거울이 되어 오늘날 우리에게도 큰 경고를 줍니다. 하나님은 의와 공도를 버리고 육신대로 사는 자들을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동역자로 삼으셨듯이, 우리도 이 시대에 섬김과 중보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동역자로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섬김의 수고와 기도의 노동을 즐거이 감당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만민 구속 역사에 동참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창세기 18:1-19:38
요절 | 창세기 18:18,19
아브라함을 동역자로 삼으신 하나님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오늘 말씀은 아브라함이 ‘섬김’에 헌신하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하고자 하시는 일을 아브라함에게 알리십니다. 즉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고자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중보기도를 통해서 롯과 의인들을 구원하는 역사에 하나님의 동역자로 쓰임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혼자서 일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섬김과 기도를 통해서 구원 역사를 함께 이루어 나가십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어떻게 이 시대를 섬길 수 있는지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섬김으로 하나님의 동역자가 된 아브라함 가정(18:1-19).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날이 뜨거울 때에 아브라함이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눈을 들어 보았습니다.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었습니다.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혔습니다. 그는 99세의 나이였지만 섬기는 일에는 민첩했습니다. 또 겸손했습니다. 그는 나그네들의 마음에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섬기고자 그들을 초청합니다. “손님들께서 저를 좋게 보시면, 이 종의 곁을 그냥 지나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을 좀 가져 오라고 하셔서, 발을 씻으시고, 이 나무 아래에서 쉬시기 바랍니다. 손님들께서 잡수실 것을, 제가 조금 가져 오겠습니다. 이렇게 이 종에게로 오셨으니, 좀 잡수시고, 기분이 상쾌해진 다음에 길을 떠나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대답하였습니다. “좋습니다. 정 그렇게 하라고 하시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히브리서 13:2은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나그네를 대접하기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어떤 이들은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대접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나그네를 대접했다는 것은 섬김이 몸에 배인 것을 나타냅니다. 사실 그 나이에는 섬김을 받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막 10:45). 섬김을 받는 자가 큰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가 큰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매우 성숙한 모습이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혼자 섬기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으로 가서 사라에게 말합니다. “빨리 고운 밀가루 21리터를 가지고 와서, 반죽을 하여 빵을 좀 구우시오.” 아브라함이 집짐승 떼가 있는 데로 달려가서, 기름진 좋은 송아지 한 마리를 끌어다가, 하인에게 주니, 하인이 재빨리 그것을 잡아서 요리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요구르트와 우유와 하인이 만든 송아지 요리를 나그네들 앞에 차려 놓았습니다. 그들이 나무 아래에서 먹는 동안에, 아브라함은 서서, 시중을 들었습니다.
복음 역사와 환대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주일 예배나 각종 모임에서 정성스럽게 만든 음식을 나눕니다. 식사 준비는 사랑의 수고가 필요합니다. 식사 후에 교제하고 말씀을 나누게 되면 마음이 활짝 열려서 속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하게 됩니다. 이런 섬김이 양들과 동역자들에게 큰 힘이 되고 위로가 됩니다. 대접을 받는 분들은 음식만 먹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먹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랑을 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대개 사모님들이 식사 준비를 하고 식사가 끝나고 설거지는 형제목자님들이 함으로 섬김의 도를 실천하고 본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 삶의 변화는 먼저 생각이 바뀌고, 감동을 받고, 의지적인 결단을 통해 행동이 바뀝니다. 이런 행동이 계속될 때 그것이 습관이 되고 나중에는 성품이 바뀌고 운명이 바뀝니다. 우리는 많이 배우면 내가 변한 줄로 착각을 합니다. 여기에다가 가르치는 일을 하면 더 변화가 되었다는 확신이 듭니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한 착각입니다. 아무리 많이 배우고 가르쳐도 내가 실천하지 않으면 변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 삶의 변화는 진리를 배우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섬김을 통해서 옵니다. 제자는 섬김의 본을 보고 배우면서 변화되어 갑니다.
우리는 내가 섬기려면 많은 것을 충분히 가지고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없는 가운데서 섬기는 분들을 볼 때 마음에 감동이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지난 주 화요일 마이카 형제는 수프를 만들어서 조한나 목자님과 손요섭 형제를 대접했습니다. 곽슬기 자매는 학생 모임에 샌드위치를 만들어와 서 섬겼습니다. 직장을 가진 형제자매들이 청년학생모임을 섬깁니다. 이외에도 곳곳에 목자님들과 사모님들의 여러 모양의 섬김과 헌신이 있습니다. 이를 일일이 다 말하려면 제 메시지가 끝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우리 목자님들과 사모님들의 섬김이 자연스럽게 청년 학생들에게 영향을 끼쳐서 청년 학생들도 섬기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를 보면서 저는 감동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없는 가운데서 믿음으로 섬길 때에 하나님께서 예기치 못한 곳에서 필요를 채워주시고 상급을 주십니다. 이것은 섬김의 비밀입니다. “주라 그리하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고 주님은 약속하셨습니다. 섬김에는 수고가 따르지만 동시에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 있습니다. 거기에다가 상급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어떤 상급을 주십니까? 9,10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사라는 자신의 생리가 끊어졌기 때문에 속으로 웃었습니다.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새한글번역을 보면 “사라가 속으로 웃으며 중얼거렸다. ”힘이 바닥났는데 성욕이 내게 있겠는가? 주인 양반도 늙었고.“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십니다.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사라가 두려워서 자신이 웃지 않았다고 잡아뗐지만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섬김이 충만한 아브라함의 장막에 웃음꽃이 피었습니다. 아브라함 가정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사랑이 있고 기쁨이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섬김은 소돔으로 향하는 그들을 마중하는 것으로 마무리 됩니다. 그런데 그가 손님들을 마중하면서 더 큰 약속을 받습니다.
17-19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친구 사이에는 비밀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친구로 여기시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과 그 자녀들이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무너진 여호와의 도를 세우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그를 경외하고 율법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는 나라를 이루고자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는 율법이 많다고 생각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얽매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내 마음대로 산다고 자유로운 것일까요? 자유롭기는커녕 우상숭배와 정욕의 노예가 되고 온갖 불의를 자행하게 됩니다(롬1:21-31). 야고보 사도는 말씀합니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 1:22-25).” 새번역은 25절을 “그러나 완전한 율법 곧 자유를 주는 율법을 잘 살피고 끊임없이 그대로 사는 사람은, 율법을 듣고서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가 e행한 일에 복을 받을 것입니다.(e '행한 일로'로 번역할 수도 있음)”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도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의 말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들이다. 그리고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진리를 행할 때에 참된 자유가 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며 성령님이 우리 삶을 지배하는 영역이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근심에서 자유, 염려에서 자유, 죄책감에서의 자유, 관계에서의 자유입니다. 여호와의 도라는 것은 우리를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사는 그 사람에게 더 이상 주위 사람의 영향을 받지 않고,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고, 항상 감사하며 항상 기뻐하며 살 수 있는 자유를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행해야 할 공도를 주시는 것은 왜 일까요? 우리는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어떤 의무감에 눌리고, 항상 가책 가운데 시달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죄책감을 심어주려고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좀 자유롭게 정말 행복하게 살기를 원해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표현으로 주시는 것이 계명입니다. 이런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가 한두 번만 순종할 뿐만 아니라 반복해서 지속적으로 순종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런 나라를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둘째, 기도로 하나님의 동역자가 된 아브라함(20-33).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소돔, 고모라에 대한 심판 계획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의와 공도가 무너진 소돔과 고모라에 대해서는 심판하고자 계획하셨습니다. 두 천사는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아룁니다.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아브라함의 기도하는 자세에는 건방짐이 없습니다. 오직 깊은 겸손과 친밀함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단계별로 중보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아브라함보다 앞서서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아브라함이 간구하는 그 모든 단계를 허락하십니다. 오십 명에서 45명, 40명, 30명, 20명, 10명까지 아브라함은 의인의 숫자를 낮춥니다. 아브라함의 기도는 끈질깁니다.
그는 아무런 중보기도 없이 주저 않아서 “주의 뜻이 이루어지길 바란다.”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기도해보았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시겠지”라고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마음껏 대화를 나눈 후에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바랍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속에서 자기가 지켜야 할 선을 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는 어떤 경계선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 간절하게 청원하는 것은 주의 뜻을 알기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27).”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주여 노하지 마시옵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거기서 삼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30).”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내가 감히 내 주께 아뢰나이다.”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의 대화는 아버지와 자녀와 같은 친밀함과 경외심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으시고 심판 중에서 롯을 구원하셨습니다. 19:29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 “의인의 중보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있습니다(약 5:16).”
우리가 한 영혼이라도 심판 가운데서 구원하고 제자를 삼는 일은 사랑의 섬김과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기도하는 종들과 함께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한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삼년, 오년, 아니 십년씩 기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또 아침 저녁으로 요회의 양들과 센터의 동역자들을 위해서 중보기도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향기와 같습니다. 우리가 항상 기도해야 하지만 일정한 시간을 정해 놓고 중보기도하는 가운데 여름 수양회를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여름 수양회에도 한 명의 양들을 초청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연장선에서 청년들은 전국 청년학생연합수양회에 한명씩 데려가기 위해서 지금부터 초청할 사람의 이름을 적고 합심해서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아브라함과 같이 끈질기게 기도하는 가운데 생명을 얻는 역사를 체험하기를 기도합니다.
19장은 롯의 섬김이 어떠한지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부한 사람이었지만 나그네들을 무교병으로 대접을 합니다. 또 심판을 농담으로 여기던 롯의 사위들과 그의 아내가 잿더미가 되고 소금 기둥이 되는 내용이 나옵니다. 롯이 맺은 인생의 열매는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심판이 어디 있냐고 우습게 여기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도적 같이 임할 것입니다. 소돔, 고모라의 멸망은 하나의 역사적인 거울이 되어 오늘날 우리에게도 큰 경고를 줍니다. 하나님은 의와 공도를 버리고 육신대로 사는 자들을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동역자로 삼으셨듯이, 우리도 이 시대에 섬김과 중보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동역자로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섬김의 수고와 기도의 노동을 즐거이 감당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만민 구속 역사에 동참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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