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창세기5강 네가 선을 행하면(창 4: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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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창세기 5 강(JBF)
말씀/창세기 4:1-24
요절/창세기 4:7
네가 선을 행하면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오늘 말씀에는 인류 최초의 살인사건이 나옵니다. 그것도 형이 동생을 죽이는 비극적인 사건입니다. 이 사건의 주인공은 바로 가인과 아벨입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일은 이 일이 하나님께 드린 제사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죄가 갈수록 심각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이 세상을 바라볼 때 죄가 홍수처럼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도 너무나 쉽게 죄에 물들고 죄악의 탁류에 휩쓸려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죄악된 세상을 살면서 어떻게 우리의 마음을 지키며 선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오늘 말씀에서 이 질문에 대해 우리에게 분명한 답을 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죄를 다스리는 삶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진정 자유한 삶을 살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1,2절을 봅시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하나님께 범죄하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는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들은 첫째 아들의 이름을 가인이라 지었는데 그 이름의 뜻은 “얻음”이란 뜻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얻게 된 것에 깊이 감사하며 가인이란 이름을 지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둘째아들 아벨의 이름의 뜻이 특이합니다. 아벨이란 이름의 뜻은 “허무”라는 뜻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아들을 얻은 기쁨도 잠시 에덴을 떠나 사는 삶이 힘들고 허무해서 둘째아들의 이름을 허무라고 지은 것 같습니다. 그들은 자라서 가인은 농사짓는 자가 되고 아벨은 양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자기의 소산을 가지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지만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이에 대한 가인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5절을 봅시다.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가인은 그와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하나님에 대해 분노하였습니다. 누가 누군가에게 화를 낸다면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그것은 나는 옳고 네가 틀렸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가인이 왜 하나님께 안색이 변할 정도로 화를 냅니까? 그는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는데 자신은 옳은데 하나님이 잘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를 이렇게 대우하시는 것이 부당하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판단과 하나님의 결정에 반발한 것입니다. 가인이 어떻게 이처럼 하나님께 반발하고 화를 낼 수 있을까요? 그것은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하나님임을 인정하지 않고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바로 자신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만드시고 이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가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는 단순히 나무의 실과를 따 먹는 행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가 선악을 판단하는 자리에 앉으려는 교만을 의미합니다. 선악을 판단하는 자리는 오직 하나님만이 앉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범죄한 이후에 인간의 마음 안에는 하나님 없이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 살아갈려고 하는 교만의 마음이 들어온 것입니다. 이런 죄악된 본성이 처음 나타난 사람이 바로 가인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이 하나님에 대해 화를 내고 반발하는 것을 보시고 그를 돕고자 먼저 찾아와 말씀해 주셨습니다. 6.7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나님은 가인의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분노가 동생 아벨에 대한 미움으로 또한 그를 죽이고자 하는 살인의 마음으로 자라고 있음을 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이 더 죄 가운데 나아가지 않도록 죄를 향하여 나아가는 그의 발걸움을 멈추고자 찾아와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죄는 그가 그 문으로 들어오길 원하고 있고 그가 들어오면 그를 삼키려 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죄에 대해 또한 죄가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죄가 무엇인지를 답변한다면 “죄는 문을 넘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께 질문 한번 해 보겠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는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여기서 질문, 그러면 아담의 죄는 어디부터가 죄일까요? 보기를 드립니다. 첫째 선악과를 바라볼 때 둘째 선악과를 따 먹고 싶은 마음을 먹었을 때 셋째 선악과를 땄을 때 넷째 선악과를 먹었을 때 아담은 죄는 어디부터일까요? 죄에 대해 우리는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 그 명확한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따 먹는 날에는 너희가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본다면 그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따 먹으므로 범죄한 것입니다. 그 전까지는 죄가 아닙니다. 선악과를 바라볼 수도 있고 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먹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정하신 선입니다. 그러나 그 선을 넘는 순간 다시말해 그 문턱을 넘는 순간 죄가 그를 삼켜 버린 것입니다.
가인에 경우는 어떠합니까? 그는 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하나님에 대해 분노할 수 있습니다. 아벨을 미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를 죽이는데까지는 가지 말아야 합니다. 그 문을 넘는 순간 죄가 그를 삼켜 버리게 됩니다. 죄가 그를 삼킨 후에는 그 모든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상태, 회복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맙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가인에게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가인과 같이 죄의 소원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남의 것을 욕심내고 교만한 마음을 품을 수 있습니다. 음탕한 마음을 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춰야 합니다.
그러나 사탄은 우리가 거기서 멈추지 못하도록 우리를 유혹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소원을 부추깁니다. 사탄은 가인의 마음에 모든 문제의 원인은 아벨이라는 생각을 심은 것입니다. 그를 죽이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 같은 거짓 확신을 심은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그가 자신을 발견하고 죄의 소원을 다스리도록 직접 찾아와 그를 도우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를 찾아와 그의 길을 인도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한 것입니다. 그 결과 그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는 동생 아벨을 유인하여 들에서 그를 돌로 쳐 죽이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죄를 멈추고 싶어도 멈추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배후에는 죄의 소원을 부추기는 사탄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우리의 눈을 어둡게 하고 우리의 죄를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죄를 들어내며 우리가 죄인의 길에 서지 않도록 그 문을 넘지 않도록 우리를 인도하여 주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갓난아기가 순전한 젖을 사모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는 죄를 분별할 수도 죄를 다스릴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다윗의 예를 통해서도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을 하나님은 그 누구보다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다윗의 마음에도 죄의 소원이 들어왔습니다. 그는 어느 날 늦잠을 자고 일어나 궁궐을 거닐다가 목욕하고 있는 그의 부하장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보았습니다. 순간 그의 마음에 밧세바를 범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거기서 멈춰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의 마음에서 시작된 죄를 멈추게 할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습니다. 그때 그는 그의 마음에 있는 것을 행동으로 옮겼고 그 결과 그는 돌이킬 수 없는 큰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그 일로 그 자신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도 큰 상처를 입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일로 몇날 몇일을 침상을 젖히며 눈물로 회개하여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찾아와 그가 죄를 짓지 않도록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13,14절을 봅시다.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가인은 아벨을 죽이면 마음이 후련하고 행복할 줄로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동생 아벨을 죽인 후에 그를 찾아온 것은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낯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그를 만나는 자들이 그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렸습니다. 죄의 소원을 다스리지 못하고 죄의 문턱을 넘어선 순간 그는 죄의 종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그를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를 찾아오셔서 그의 이마에 표를 주시면 말씀하셨습니다. 15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하나님은 비록 가인이 범죄하였지만 그를 바로 심판하지 않으시고 그의 이마에 표를 주시고 그의 생명을 지켜 주셨습니다. 그의 이마에 주신 표는 우리 죄를 위해 피흘려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예표합니다. 하나님은 죄의 소원을 따라 심판받고 멸망받은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대속제물로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를 정죄치 않고 의롭다 하셨습니다.
우리 안에는 가인 안에 있었던 죄의 소원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다스리는 삶을 살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죄의 종이 아니라 죄를 다스리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그것은 선악의 기준이 내 판단, 내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을 찾아오셔서 말씀하시고 이것을 인정하길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했습니다. 그때 그는 죄가 그를 삼키려고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을 보지 못했고 죄악의 길을 가는 것을 멈추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은 내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한분뿐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선악의 기준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죄를 다스리는 길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에는 수많은 죄들이 입을 벌리고 넘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는 어떤 죄들이 입을 벌리고 있습니까? 그것들이 여러분을 삼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의 기준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내 삶을 붙잡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을 때 우리는 죄를 다스리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없을 때 우리는 가인과 같이 죄의 종이 되어 유리방황하는 자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매일 매순간을 하나님의 말씀과 호흡하며 죄를 다스리를 삶을 살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 합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4:7)
말씀/창세기 4:1-24
요절/창세기 4:7
네가 선을 행하면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오늘 말씀에는 인류 최초의 살인사건이 나옵니다. 그것도 형이 동생을 죽이는 비극적인 사건입니다. 이 사건의 주인공은 바로 가인과 아벨입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일은 이 일이 하나님께 드린 제사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죄가 갈수록 심각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이 세상을 바라볼 때 죄가 홍수처럼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도 너무나 쉽게 죄에 물들고 죄악의 탁류에 휩쓸려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죄악된 세상을 살면서 어떻게 우리의 마음을 지키며 선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오늘 말씀에서 이 질문에 대해 우리에게 분명한 답을 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죄를 다스리는 삶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진정 자유한 삶을 살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1,2절을 봅시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하나님께 범죄하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는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들은 첫째 아들의 이름을 가인이라 지었는데 그 이름의 뜻은 “얻음”이란 뜻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얻게 된 것에 깊이 감사하며 가인이란 이름을 지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둘째아들 아벨의 이름의 뜻이 특이합니다. 아벨이란 이름의 뜻은 “허무”라는 뜻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아들을 얻은 기쁨도 잠시 에덴을 떠나 사는 삶이 힘들고 허무해서 둘째아들의 이름을 허무라고 지은 것 같습니다. 그들은 자라서 가인은 농사짓는 자가 되고 아벨은 양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자기의 소산을 가지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지만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이에 대한 가인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5절을 봅시다.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가인은 그와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하나님에 대해 분노하였습니다. 누가 누군가에게 화를 낸다면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그것은 나는 옳고 네가 틀렸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가인이 왜 하나님께 안색이 변할 정도로 화를 냅니까? 그는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는데 자신은 옳은데 하나님이 잘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를 이렇게 대우하시는 것이 부당하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판단과 하나님의 결정에 반발한 것입니다. 가인이 어떻게 이처럼 하나님께 반발하고 화를 낼 수 있을까요? 그것은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하나님임을 인정하지 않고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바로 자신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만드시고 이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가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는 단순히 나무의 실과를 따 먹는 행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가 선악을 판단하는 자리에 앉으려는 교만을 의미합니다. 선악을 판단하는 자리는 오직 하나님만이 앉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범죄한 이후에 인간의 마음 안에는 하나님 없이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 살아갈려고 하는 교만의 마음이 들어온 것입니다. 이런 죄악된 본성이 처음 나타난 사람이 바로 가인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이 하나님에 대해 화를 내고 반발하는 것을 보시고 그를 돕고자 먼저 찾아와 말씀해 주셨습니다. 6.7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나님은 가인의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분노가 동생 아벨에 대한 미움으로 또한 그를 죽이고자 하는 살인의 마음으로 자라고 있음을 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이 더 죄 가운데 나아가지 않도록 죄를 향하여 나아가는 그의 발걸움을 멈추고자 찾아와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죄는 그가 그 문으로 들어오길 원하고 있고 그가 들어오면 그를 삼키려 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죄에 대해 또한 죄가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죄가 무엇인지를 답변한다면 “죄는 문을 넘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께 질문 한번 해 보겠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는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여기서 질문, 그러면 아담의 죄는 어디부터가 죄일까요? 보기를 드립니다. 첫째 선악과를 바라볼 때 둘째 선악과를 따 먹고 싶은 마음을 먹었을 때 셋째 선악과를 땄을 때 넷째 선악과를 먹었을 때 아담은 죄는 어디부터일까요? 죄에 대해 우리는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 그 명확한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따 먹는 날에는 너희가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본다면 그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따 먹으므로 범죄한 것입니다. 그 전까지는 죄가 아닙니다. 선악과를 바라볼 수도 있고 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먹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정하신 선입니다. 그러나 그 선을 넘는 순간 다시말해 그 문턱을 넘는 순간 죄가 그를 삼켜 버린 것입니다.
가인에 경우는 어떠합니까? 그는 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하나님에 대해 분노할 수 있습니다. 아벨을 미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를 죽이는데까지는 가지 말아야 합니다. 그 문을 넘는 순간 죄가 그를 삼켜 버리게 됩니다. 죄가 그를 삼킨 후에는 그 모든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상태, 회복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맙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가인에게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가인과 같이 죄의 소원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남의 것을 욕심내고 교만한 마음을 품을 수 있습니다. 음탕한 마음을 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춰야 합니다.
그러나 사탄은 우리가 거기서 멈추지 못하도록 우리를 유혹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소원을 부추깁니다. 사탄은 가인의 마음에 모든 문제의 원인은 아벨이라는 생각을 심은 것입니다. 그를 죽이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 같은 거짓 확신을 심은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그가 자신을 발견하고 죄의 소원을 다스리도록 직접 찾아와 그를 도우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를 찾아와 그의 길을 인도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한 것입니다. 그 결과 그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는 동생 아벨을 유인하여 들에서 그를 돌로 쳐 죽이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죄를 멈추고 싶어도 멈추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배후에는 죄의 소원을 부추기는 사탄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우리의 눈을 어둡게 하고 우리의 죄를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죄를 들어내며 우리가 죄인의 길에 서지 않도록 그 문을 넘지 않도록 우리를 인도하여 주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갓난아기가 순전한 젖을 사모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는 죄를 분별할 수도 죄를 다스릴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다윗의 예를 통해서도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을 하나님은 그 누구보다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다윗의 마음에도 죄의 소원이 들어왔습니다. 그는 어느 날 늦잠을 자고 일어나 궁궐을 거닐다가 목욕하고 있는 그의 부하장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보았습니다. 순간 그의 마음에 밧세바를 범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거기서 멈춰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의 마음에서 시작된 죄를 멈추게 할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습니다. 그때 그는 그의 마음에 있는 것을 행동으로 옮겼고 그 결과 그는 돌이킬 수 없는 큰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그 일로 그 자신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도 큰 상처를 입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일로 몇날 몇일을 침상을 젖히며 눈물로 회개하여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찾아와 그가 죄를 짓지 않도록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13,14절을 봅시다.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가인은 아벨을 죽이면 마음이 후련하고 행복할 줄로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동생 아벨을 죽인 후에 그를 찾아온 것은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낯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그를 만나는 자들이 그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렸습니다. 죄의 소원을 다스리지 못하고 죄의 문턱을 넘어선 순간 그는 죄의 종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그를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를 찾아오셔서 그의 이마에 표를 주시면 말씀하셨습니다. 15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하나님은 비록 가인이 범죄하였지만 그를 바로 심판하지 않으시고 그의 이마에 표를 주시고 그의 생명을 지켜 주셨습니다. 그의 이마에 주신 표는 우리 죄를 위해 피흘려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예표합니다. 하나님은 죄의 소원을 따라 심판받고 멸망받은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대속제물로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를 정죄치 않고 의롭다 하셨습니다.
우리 안에는 가인 안에 있었던 죄의 소원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다스리는 삶을 살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죄의 종이 아니라 죄를 다스리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그것은 선악의 기준이 내 판단, 내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을 찾아오셔서 말씀하시고 이것을 인정하길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했습니다. 그때 그는 죄가 그를 삼키려고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을 보지 못했고 죄악의 길을 가는 것을 멈추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은 내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한분뿐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선악의 기준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죄를 다스리는 길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에는 수많은 죄들이 입을 벌리고 넘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는 어떤 죄들이 입을 벌리고 있습니까? 그것들이 여러분을 삼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의 기준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내 삶을 붙잡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을 때 우리는 죄를 다스리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없을 때 우리는 가인과 같이 죄의 종이 되어 유리방황하는 자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매일 매순간을 하나님의 말씀과 호흡하며 죄를 다스리를 삶을 살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 합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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