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요한일서4강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요일 4: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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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요한일서 제4강_JBF
말씀 | 요한일서 4:1-21
요절 | 요한일서 4:7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우리는 4주에 걸쳐 요한일서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의 주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신자들을 말합니다. 신자들끼리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는 누가 누가에게 쓴 것입니까? 요한일서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에 하나인 사도요한이 에베소 교회에 쓴 서신입니다. 왜 이 서신을 쓰게 된 것입니까? 그것은 당시 영지주의자라고 불리는 이단들이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은 선하고 육을 악하다고 하는 이원론에 근거에 예수님의 성육신과 육체의 부활을 부인했습니다. 그들은 그들만이 알고 있는 신령한 지식을 받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고 한번 구원받으면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교회는 이런 이단들과 치열하게 진리의 싸움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교회 안에 이단들이 있거나 이단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있을 때 그들을 정죄하고 쫓아내야 했습니다. 그로인해 교회에는 어떤 문제가 생겼을까요? 진리의 싸움을 하는 것은 좋은데 그로인해 교회 안에는 서로 비판하고 정죄하고 미워하고 분열하는 일들이 벌어진 것입니다. 한마디로 교회 안에 사랑이 식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교회 안에 식어진 사랑의 문제를 회복하고자 본 서신을 쓰신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요한일서 1장, 2장에서는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있고 3장에서는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줄 안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사도요한 4장에 이르러 우리가 왜 서로 사랑해야 하는지를 말씀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 사랑이 무엇인지, 사랑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어떠한 신령한 축복을 누리게 되는지에 대해 본문 말씀에 기초해서 같이 말씀을 묵상하고 은혜 받기를 기도합니다.
제1장, 사랑이란 무엇인가?
7절을 읽어 봅시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성경말씀 가운데 사랑이란 단어가 가장 많이 나온 성경이 고린도전서13장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린도전서 13장을 사랑장이라고 부릅니다. 그 다음으로 사랑이란 단어가 가장 많이 나온 성경이 바로 요한일서 4장입니다. 요한일서 4장에는 사랑이란 단어가 31번이 나옵니다. 그만큼 요한일서는 형제사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요한이 그토록 강조하고 있는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사랑은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사랑에 대해 정의를 내릴 수 있을까요? 무엇이 사랑입니까? 어떤 청년이 이렇게 상담 선생님께 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과연 이것이 사랑인지 아닌지 생각해 보세요. “어머니는 저를 너무 사랑해서 고등학교 졸업반이 될 때까지 학교 버스를 타고 다니지 못하게 했답니다. 심지어 저는 어머니께 버스를 타게 해달라고 사정해야 했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다치는 것을 두려워 매일 차로 학교까지 태워다주고 다시 집으로 데려오셨는데 정말 힘드셨을 겁니다. 어머니는 정말 저를 사랑하셨거든요”
이 청년은 어머니가 그를 걱정해서 차를 태워 주시는 것이 어머니의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때문에 이 청년은 어머니의 과잉보호가 싫고 버스를 타고 싶었지만 그렇게 행동하지 못했습니다. 과연 이런 어머니의 행동이 사랑일까요? 우리가 이 질문에 답을 하려면 무엇이 사랑이고 무엇이 사랑이 아닌지를 분변할 수 있는 기준이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사랑을 하고자 할 때 중요한 전제가 바로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무엇이 사랑이고 무엇이 사랑이 아닌지를 구분할 수 있는 중요한 기준은 무엇일까요? 이에 대해 아주 훌륭한 정의를 해 주신 분이 있어서 여러분들께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는 정신과 의사인 스캇펙 박사입니다. 그는 그의 저서 아직도 가야할 길이라는 책에서 사랑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사랑이란 자기 자신이나 타인의 영적 성장을 도울 목적으로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려는 의지이다.” 물론 그의 정의가 흠잡을 때 없이 완벽하고 사랑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정의는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에 대한 그의 정의는 무엇이 사랑이지 아닌지에 대해 분별할 수 있는 중요한 기준점을 제시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훌륭한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사도요한은 이제까지 형제사랑을 역설해 왔습니다. 사랑을 하되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을 하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제까지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함만을 이야기했을 뿐 정작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루질 못했습니다. 그런데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스캇펙 박사의 사랑의 정의는 매우 중요한 기준을 알려 줍니다. 사랑한다고 할 때 그 목적은 자기 자신과 타인의 영적 성장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정의에 근거해서 볼 때 우리가 위해서 다룬 한 청년의 이야기에 나오는 어머니의 행동은 사랑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아들을 위해서 때로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데 어머니는 위험을 제거함으로 아들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그는 소심한 아이로 성장했고 이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정신과 의사를 찾아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랑한다고 할 때 우리가 정말로 간과하고 있는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이라는 위대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과 훈련의 과정들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필요한 이유는 명백합니다. 그것은 내 자신이 성장하지 않고는, 내 자신이 한계를 극복하지 않고는 타인의 성장을 도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스캇펙의 사랑의 정의에 의하면 지금 여러분들이 자기 확대 즉 성장을 위해 배우고 공부하고 노력하는 모든 일들이 사랑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도요한이 서로 사랑하자 할 때 서로는 누구를 의미합니까? 자연을 사랑하자는 것입니까? 동물을 사랑하자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을 사랑하자는 것입니다. 그 사람 안에는 나 자신에 대한 사랑도 포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배울 때에 우리는 비로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서로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이에 대한 대답은 먼저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것입니다. 사랑에서 성장하지 못하는 가장 큰 장애물은 이것을 사랑이라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스캇펙 박사의 사랑의 정의에서 중요한 개념이 “의지”라는 단어입니다. 그는 의지를 행동을 유발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욕망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욕망은 반드시 행동으로 표출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들어 “오늘 밤 수영하러 가고 싶다”는 말과 “오늘 밤 수영하러 간다”는 것의 차이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밤 수영하러 가고 싶지만 수영하러 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욕망입니다. 그런데 오늘 밤 수영하러 간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행동입니다. 따라서 사랑하려는 욕구 자체는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행위로 표현될 때 사랑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여러분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싶다고, 공부를 잘하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 생각은 욕망입니다. 이를 위해 여러분이 반드시 예습 복습을 한다면 그것은 행동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생각만 갖고 있고 행동하지 않으면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삶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의 욕망을 생각만 할 수도 있고 행동으로 옮길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여기서 중요한 것이 선택하는 의지입니다. 결론은 사랑은 사랑할려는 욕망이 아니라 사랑하기를 선택하는 의지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무엇입니까? 정리하면 사랑은 사랑하기를 선택하는 의지요 이를 위해 자기 자신을 확대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입니다. 사랑은 그 모든 과정들입니다. 그렇기에 실상 우리의 삶은 사랑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무엇이 사랑인지 무엇이 사랑이 아닌지를 분별하는 중요한 기준들에 대해 배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하기를 선택하고 사랑을 이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할 수 있는 은혜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제2장, 사랑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앞에서 사랑의 정의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루어야 할 사랑은 무엇입니까? 그 사랑을 어디서 찾을 수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 사도요한은 이렇게 답하고 있습니다. 10절을 읽어 봅시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우리가 배우고 이루어 가야할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그는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해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목적은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 방법은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자기희생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목적과 방법이 분명했습니다. 스캇펙의 정의에 따르면 하나님의 사랑이 사랑의 정의에 정확히 부합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요한이 신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이때 사랑은 막연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루어야할 사랑의 본질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화목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한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화목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화목제물은 자기가 죽는 것입니다. 자기가 죽는 것은 희생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허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를 내어주지만 대가를 바라지 않습니다. 어떻게 이런 사랑을 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사랑을 하려면 먼저는 하나님이 나를 어떠한 사랑으로 사랑하셨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기에 사랑은 내 안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될때만이 화목제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고 감동하는 은혜를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제3장, 사랑할 때 누리는 축복.
사도요한은 서로 사랑할 때 우리가 누리는 신령한 축복에 대해 말씀합니다.
첫째, 사랑할 때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됩니다. 12절을 봅시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이야 말로 복중에 복입니다.
둘째, 사랑할 때 두려움을 이깁니다. 18절을 봅시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죄인들의 마음에는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할 때 우리는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게 됩니다. 그때 마음에 두려움이 사라지고 하나님과 화평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화평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보좌 앞에 나아가 담대히 기도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에 감동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의 의지만으로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어느 정도 사랑하다 한계에 부딪힐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항상 먼저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독생자를 내어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할 때 그 사랑에 감동할 때 우리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다함이 없는 사랑입니다. 결코 고갈되지 않는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날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하게 하시고 사랑할 마음을 넘치도록 부어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로 서로 사랑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이루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게 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말씀 | 요한일서 4:1-21
요절 | 요한일서 4:7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우리는 4주에 걸쳐 요한일서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의 주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신자들을 말합니다. 신자들끼리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는 누가 누가에게 쓴 것입니까? 요한일서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에 하나인 사도요한이 에베소 교회에 쓴 서신입니다. 왜 이 서신을 쓰게 된 것입니까? 그것은 당시 영지주의자라고 불리는 이단들이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은 선하고 육을 악하다고 하는 이원론에 근거에 예수님의 성육신과 육체의 부활을 부인했습니다. 그들은 그들만이 알고 있는 신령한 지식을 받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고 한번 구원받으면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교회는 이런 이단들과 치열하게 진리의 싸움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교회 안에 이단들이 있거나 이단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있을 때 그들을 정죄하고 쫓아내야 했습니다. 그로인해 교회에는 어떤 문제가 생겼을까요? 진리의 싸움을 하는 것은 좋은데 그로인해 교회 안에는 서로 비판하고 정죄하고 미워하고 분열하는 일들이 벌어진 것입니다. 한마디로 교회 안에 사랑이 식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교회 안에 식어진 사랑의 문제를 회복하고자 본 서신을 쓰신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요한일서 1장, 2장에서는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있고 3장에서는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줄 안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사도요한 4장에 이르러 우리가 왜 서로 사랑해야 하는지를 말씀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 사랑이 무엇인지, 사랑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어떠한 신령한 축복을 누리게 되는지에 대해 본문 말씀에 기초해서 같이 말씀을 묵상하고 은혜 받기를 기도합니다.
제1장, 사랑이란 무엇인가?
7절을 읽어 봅시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성경말씀 가운데 사랑이란 단어가 가장 많이 나온 성경이 고린도전서13장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린도전서 13장을 사랑장이라고 부릅니다. 그 다음으로 사랑이란 단어가 가장 많이 나온 성경이 바로 요한일서 4장입니다. 요한일서 4장에는 사랑이란 단어가 31번이 나옵니다. 그만큼 요한일서는 형제사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요한이 그토록 강조하고 있는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사랑은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사랑에 대해 정의를 내릴 수 있을까요? 무엇이 사랑입니까? 어떤 청년이 이렇게 상담 선생님께 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과연 이것이 사랑인지 아닌지 생각해 보세요. “어머니는 저를 너무 사랑해서 고등학교 졸업반이 될 때까지 학교 버스를 타고 다니지 못하게 했답니다. 심지어 저는 어머니께 버스를 타게 해달라고 사정해야 했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다치는 것을 두려워 매일 차로 학교까지 태워다주고 다시 집으로 데려오셨는데 정말 힘드셨을 겁니다. 어머니는 정말 저를 사랑하셨거든요”
이 청년은 어머니가 그를 걱정해서 차를 태워 주시는 것이 어머니의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때문에 이 청년은 어머니의 과잉보호가 싫고 버스를 타고 싶었지만 그렇게 행동하지 못했습니다. 과연 이런 어머니의 행동이 사랑일까요? 우리가 이 질문에 답을 하려면 무엇이 사랑이고 무엇이 사랑이 아닌지를 분변할 수 있는 기준이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사랑을 하고자 할 때 중요한 전제가 바로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무엇이 사랑이고 무엇이 사랑이 아닌지를 구분할 수 있는 중요한 기준은 무엇일까요? 이에 대해 아주 훌륭한 정의를 해 주신 분이 있어서 여러분들께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는 정신과 의사인 스캇펙 박사입니다. 그는 그의 저서 아직도 가야할 길이라는 책에서 사랑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사랑이란 자기 자신이나 타인의 영적 성장을 도울 목적으로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려는 의지이다.” 물론 그의 정의가 흠잡을 때 없이 완벽하고 사랑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정의는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에 대한 그의 정의는 무엇이 사랑이지 아닌지에 대해 분별할 수 있는 중요한 기준점을 제시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훌륭한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사도요한은 이제까지 형제사랑을 역설해 왔습니다. 사랑을 하되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을 하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제까지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함만을 이야기했을 뿐 정작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루질 못했습니다. 그런데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스캇펙 박사의 사랑의 정의는 매우 중요한 기준을 알려 줍니다. 사랑한다고 할 때 그 목적은 자기 자신과 타인의 영적 성장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정의에 근거해서 볼 때 우리가 위해서 다룬 한 청년의 이야기에 나오는 어머니의 행동은 사랑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아들을 위해서 때로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데 어머니는 위험을 제거함으로 아들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그는 소심한 아이로 성장했고 이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정신과 의사를 찾아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랑한다고 할 때 우리가 정말로 간과하고 있는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이라는 위대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과 훈련의 과정들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필요한 이유는 명백합니다. 그것은 내 자신이 성장하지 않고는, 내 자신이 한계를 극복하지 않고는 타인의 성장을 도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스캇펙의 사랑의 정의에 의하면 지금 여러분들이 자기 확대 즉 성장을 위해 배우고 공부하고 노력하는 모든 일들이 사랑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도요한이 서로 사랑하자 할 때 서로는 누구를 의미합니까? 자연을 사랑하자는 것입니까? 동물을 사랑하자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을 사랑하자는 것입니다. 그 사람 안에는 나 자신에 대한 사랑도 포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배울 때에 우리는 비로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서로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이에 대한 대답은 먼저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것입니다. 사랑에서 성장하지 못하는 가장 큰 장애물은 이것을 사랑이라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스캇펙 박사의 사랑의 정의에서 중요한 개념이 “의지”라는 단어입니다. 그는 의지를 행동을 유발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욕망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욕망은 반드시 행동으로 표출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들어 “오늘 밤 수영하러 가고 싶다”는 말과 “오늘 밤 수영하러 간다”는 것의 차이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밤 수영하러 가고 싶지만 수영하러 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욕망입니다. 그런데 오늘 밤 수영하러 간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행동입니다. 따라서 사랑하려는 욕구 자체는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행위로 표현될 때 사랑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여러분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싶다고, 공부를 잘하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 생각은 욕망입니다. 이를 위해 여러분이 반드시 예습 복습을 한다면 그것은 행동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생각만 갖고 있고 행동하지 않으면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삶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의 욕망을 생각만 할 수도 있고 행동으로 옮길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여기서 중요한 것이 선택하는 의지입니다. 결론은 사랑은 사랑할려는 욕망이 아니라 사랑하기를 선택하는 의지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무엇입니까? 정리하면 사랑은 사랑하기를 선택하는 의지요 이를 위해 자기 자신을 확대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입니다. 사랑은 그 모든 과정들입니다. 그렇기에 실상 우리의 삶은 사랑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무엇이 사랑인지 무엇이 사랑이 아닌지를 분별하는 중요한 기준들에 대해 배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하기를 선택하고 사랑을 이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할 수 있는 은혜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제2장, 사랑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앞에서 사랑의 정의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루어야 할 사랑은 무엇입니까? 그 사랑을 어디서 찾을 수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 사도요한은 이렇게 답하고 있습니다. 10절을 읽어 봅시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우리가 배우고 이루어 가야할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그는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해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목적은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 방법은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자기희생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목적과 방법이 분명했습니다. 스캇펙의 정의에 따르면 하나님의 사랑이 사랑의 정의에 정확히 부합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요한이 신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이때 사랑은 막연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루어야할 사랑의 본질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화목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한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화목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화목제물은 자기가 죽는 것입니다. 자기가 죽는 것은 희생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허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를 내어주지만 대가를 바라지 않습니다. 어떻게 이런 사랑을 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사랑을 하려면 먼저는 하나님이 나를 어떠한 사랑으로 사랑하셨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기에 사랑은 내 안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될때만이 화목제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고 감동하는 은혜를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제3장, 사랑할 때 누리는 축복.
사도요한은 서로 사랑할 때 우리가 누리는 신령한 축복에 대해 말씀합니다.
첫째, 사랑할 때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됩니다. 12절을 봅시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이야 말로 복중에 복입니다.
둘째, 사랑할 때 두려움을 이깁니다. 18절을 봅시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죄인들의 마음에는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할 때 우리는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게 됩니다. 그때 마음에 두려움이 사라지고 하나님과 화평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화평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보좌 앞에 나아가 담대히 기도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에 감동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의 의지만으로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어느 정도 사랑하다 한계에 부딪힐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항상 먼저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독생자를 내어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할 때 그 사랑에 감동할 때 우리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다함이 없는 사랑입니다. 결코 고갈되지 않는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날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하게 하시고 사랑할 마음을 넘치도록 부어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로 서로 사랑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이루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게 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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