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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하박국 제2강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3: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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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베드로
댓글 0건 조회 64회 작성일 18-09-22 22:53

본문

2018년 하박국 제2강_JBF
말씀 | 하박국 3:1-19
요절 | 하박국 3:18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난 분들이 전해주는 은혜로운 간증 듣기를 좋아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병을 낫기도 하고 죽다 살아나기도 하고 역경을 극복하기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들은 그 모든 일을 이루신 하나님을 기쁨으로 증거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자주 듣는 신앙간증의 주된 내용들입니다. 우리는 이런 그들의 간증을 들을 때 살아계신 하나님을 강하게 느낍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런 간증을 듣기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이런 간증은 어떻습니까? 간절히 기도했지만 병에서 낫지 못하고 역경을 극복하지 못하고 살아나지 못하고 실패했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들을 듣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저주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우리가 이렇게 믿고 이런 믿음을 추구하는 것이 맞을까요? 하박국 말씀은 우리에게 그렇지 않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하박국 말씀은 이렇게 우리가 외면해 버린 불편한 진실에 대해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 모든 일들을 통해 우리의 삶을 섭리하고 계신다고... 우리의 삶은 우리가 원하는대로 되는 일보다 원하는지 않는대로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응답되는 것보다 응답되지 않는 기도가 더 많습니다. 기쁜 일들보다 힘들고 슬픈 일들이 더 많습니다. 행복한 일들보다 불행한 일들이 더 많습니다. 선한 일들보다 악한 일들이 더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 할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을까요? 이런 우리의 의문에 대해 하나님은 선지자 하박국을 통해 그래도 하나님을 믿어야 하고 그래도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다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야 하고 기뻐해야하는 분명한 이유를 찾고 하나님을 바르게 믿을 수 있길 기도합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기는 주전 650-627년 경으로 남유다는 온갖 불의와 강포, 부정과 부패로 온 나라가 고통가운데 있었습니다.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과 궁핍한 자들을 압제하고 착취했습니다. 그들이 행한 악으로 고통하며 부르짖는 소리가 온 나라에 가득했습니다. 하박국은 그 시대의 죄악과 그로인한 고통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나아가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도해도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나아가 이렇게 기도합니다.

“살려 달라고 부르짖어도 듣지 않으시고, "폭력이다!" 하고 외쳐도 구해 주지 않으시니, 주님, 언제까지 그러실 겁니까? 어찌하여 나로 불의를 보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악을 그대로 보기만 하십니까? 약탈과 폭력이 제 앞에서 벌어지고, 다툼과 시비가 그칠 사이가 없습니다”(합1:2,3)

하박국은 하나님이 왜 악을 허용하시는지, 왜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 그의 기도에는 “어찌하여, 어찌하여, 어찌하여”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박국은 더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유다를 갈대아 사람을 들어 심판하신다는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그는 이 소식을 들었을 때의 심정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박국 3: 16절을 읽어 봅시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이 말씀을 새번역을 보면 좀 더 리얼합니다. “그 소리를 듣고 나의 창자가 뒤틀린다. 그 소리에 나의 입술이 떨린다. 나의 뼈가 속에서부터 썩어 들어간다. 나의 다리가 후들거린다. 그러나 나는, 우리를 침략한 백성이 재난당할 날을 참고 기다리겠다.”
하박국이 하나님께 나아가 간절히 기도했지만 실상 현실은 그가 기도한 것과는 정반대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로인해 그의 갈등은 깊어졌습니다. 그의 갈등이 무엇입니까? 근동의 절대강자로 굴림하던 애굽도 바벨론에 패하고 유다의 운명이 바람 앞에 등불과 같이 위태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그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 그들을 바벨론의 손에서 지켜주시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유다의 슬픈 운명을 놓고 하나님께 나아가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선지자가 이르되 여호와 나의 하나님, 나의 거룩한 이시여 주께서는 만세 전부터 계시지 아니하시니이까 우리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기 위하여 그들을 두셨나이다 반석이시여 주께서 경계하기 위하여 그들을 세우셨나이다”(합1:12)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기도에 침묵하셨습니다. 도리어 하박국은 유다를 그들의 손에 넘기로 작정하셨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는 많은 날들을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이 그리하는 것이 옳습니까 라며 항변하였습니다. 그는 얼마나 많은 날들을 이렇게 기도하며 고뇌하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갈등했을까요? 아마도 그는 하나님에게 너무 실망한 나머지 기도할 수 없을 정도로 낙심한 적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현실을 외면할 수도 하나님을 외면할 수도 없는 수많은 밤들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하박국은 하나님께 놀라운 한 말씀을 받게 됩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

그가 받은 말씀은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교만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인은 믿음은 그의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하박국의 오랜 고뇌와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습니다. 하박국은 이 말씀을 통해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영접하게 됩니다. 그는 그의 기도가 하나님의 일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이 그의 기도보다 더 옳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때 그는 애써 외면하려 했던 불편한 진실을 직시하게 됩니다. 유다는 그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심판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의해 처절히 깨어지고 부서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신 후에 그들을 반드시 회복하실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가 받아들여야할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이것을 받아들였을 때 하나님을 향해 격렬하게 항변하던 하박국은 비로소 잠잠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이 행하실 새로운 일을 바라보게 됩니다.

3:2절을 읽어 봅시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이 말씀을 새번역으로 보면 좀 더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주님, 내가 주님의 명성을 듣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하신 일을 보고 놀랍니다. 주님의 일을 우리 시대에도 새롭게 하여 주십시오. 우리 시대에도 알려 주십시오. 진노하시더라도, 잊지 마시고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악인을 들어 의인을 심판하심이 옳지 않다고 하나님께 항변하던 하박국은 비로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하나님이 선택하신 일이 옳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도저히 받아 들일 수 없었던 유다의 심판을 받아들이고 그들을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지나가게 해달라고 하던 그의 기도는 이제 하나님의 심판을 잘 감당하고 그들이 하나님 앞에 새롭게 서도록 해달라는 기도로 바뀌었습니다. 이 말씀에 쓰인 “부흥”은 죽었던 것을 되살아나게 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유다는 그들의 죄악으로 영적으로 볼 때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바벨론을 들어 그들을 심판하시는 이유는 그들의 악을 멸하시고 그들을 다시 살리시려는 뜻입니다. 이 방법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하박국도 인정한 것입니다. 그때 그는 진노 중에라도 그들이 멸절하지 않도록 그들을 긍휼히 여겨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는 장차 바벨론을 심판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실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하박국이 바라본 하나님의 모습이 바로 3:3-15절까지의 내용입니다. 그가 바로 본 하나님의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그가 바라본 하나님은 위엄에 찬 하나님이요(3-7) 구원의 용사이신 하나님이요(8-11) 심판의 하나님(12-15)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하시려는 일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새롭게 바라보게 된 하박국의 마음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17, 18절을 읽어 봅시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하박국의 마음에는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여기서 기쁨은 감정적인 기쁨이 아닙니다. 여기서의 기쁨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소망을 의미합니다. 그는 장구한 역사를 통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 유다에게 하시려는 일이 옳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하나님을 부정했던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소망이 회복된 것입니다. 3:17절을 다시 읽어 봅시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합3:17) 이 말씀은 바벨론의 의해 초토화될 유다의 모습을 표현한 말씀입니다. 이는 참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말씀입니다. 여기 나오는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감람나무는 유다를 대표하는 열매들입니다. 거기다 밭에 먹을 것이 없고 양이나 소가 없으면 그들은 굶어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단 말입니까? 미치지 않고서야 하나님을 기뻐하는 일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런데 하박국은 나는 하나님을 인해 기뻐하겠다고 고백합니다.

그가 기뻐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는 오직 의인은 그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을 영접했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을 다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세상 역사를 주관하고 계신다는 것을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그때 그는 하나님을 주권자로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하나님 앞에 잠잠하고 그가 하시는 일을 기다리게 된 것입니다. 다음으로 그는 구원의 하나님을 기뻐한다고 고백합니다. 그가 살아가야할 현실은 고통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고통 가운데 영원히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구원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믿음은 언제나 현재가 아니라 미래의 일입니다. 그렇기에 하박국의 기쁨은 현재를 감사하고 미래를 바라보면서 기뻐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박국이 고백한 기쁨의 비밀입니다.

허드슨 테일러를 이어 중국내지선교회의 대표였던 호스트 박사는 하루도 빠짐없이 네 시간씩 선교사와 자녀들의 이름을 하나 하나 불러가며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채 몇 년이 지나기도 전에 마오쩌둥은 중국에서 약 7천명에 이르는 선교사들을 모두 추방했습니다. 쫓겨난 선교사들은 필리핀, 홍콩, 싱가포르 같은 나라들에 재배치되었습니다. 아직 미숙한 중국교회가 외부 도움을 전혀 받을 수 없게 된 상황에서 다들 실망하는 분위기였습니다. 하지만 선교사 하나 없이, 그것도 복음전도를 금지한 독재정권 아래서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폭발적인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역사는 1950년대 초 선교사들이 꿈꾸며 기도했던 제목들을 훨씬 능가합니다.

왜 우리의 삶에는 우리가 기도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고 기도하지 않은 일들이 일어나고 우리가 원하지 않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과연 그런 일들이 하나님의 일일까요? 하박국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대답은 ‘그렇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하시려는 일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이에 대해 이사야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55:8-9)

하박국의 기쁨은 하나님의 신비를 깨달은 기쁨이요 하나님의 신비를 인정하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감정적인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뢰요 소망입니다. 흔히 기독교를 기쁨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이는 현실을 부정하고 하나님이 복주실 것을 믿는 자기 체면에서 나오는 기쁨이 아닙니다. 하박국의 기쁨은 하나님이 유다의 죄를 심판하실 수밖에 없다는 냉혹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것마저도 감사한 기쁨이요 이런 그들을 수년내에 부흥케 하실 구원의 하나님을 바라본 기쁨입니다. 이런 하박국의 기쁨은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미래지향적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기독교의 기쁨의 본질입니다.

여러분의 삶에는 어떤 기쁨이 있습니까? 하는 일마다 잘되고 좋은 성적을 받고 좋은 대학에 가면 물론 기쁜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세상의 기쁨은 그때뿐이요 지나가는 기쁨입니다. 그러나 영원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 그 분의 신비 안에 자신의 현재와 미래, 그리고 역사의 현재와 미래를 바라보는 기쁨은 이 세상에서 줄 수 없는 신령한 기쁨입니다. 그러나 이 기쁨의 비밀을 아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JBF 친구들을 축복하사 하박국이 고백한 그 기쁨의 비밀을 깨닫고 그 기쁨을 전하는 자들로 세상 가운데 세워주시길 간절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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