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마가복음 제 25 강 언약의 피(막14:1-26)
페이지 정보

본문
2018년 마가복음 제 25 강_JBF
말씀 | 마가복음 14:1-26
요절 | 마가복음 14:24
언약의 피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오늘 주일말씀의 제목은 언약의 피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날 밤 유월절 만찬을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그의 죽음과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에 대한 의미를 가르치셨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피를 흘리신 것과 예수님의 피는 변할 수 없는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모두가 예수님이 흘리신 피의 의미를 깨닫고 하나님이 주시는 죄사함의 은혜를 깊이 영접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제1장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은 여인(1-11)
1,2절을 봅시다.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며 이르되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 유월절은 430년간 애굽의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이 탈출하던 날을 기념하는 유대인의 최대의 명절입니다. 그때 애굽을 급히 나오느라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갖고 나온 것을 기념해서 일주일간 무교절 절기를 지켰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에 유월절 명절을 기념하기 위해 2백만명이 모였다고 합니다.
이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예수님을 체포하면 민란이 일어날까 두려워하여 명절에는 하지 말자고 포기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급작스럽게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10,11절을 봅시다.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그들이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줄까 하고 그 기회를 찾더라.” 예수님의 제자 가룟유다가 대제사장에게 돈을 받고 예수님을 넘겨주기로 약속한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보다 돈을 더 사랑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예수님께 많은 사랑을 받고 말씀을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배반한 것입니다.
이런 가룟유다에 대해 많은 분들이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수 있도록 유다를 사용하신 것은 하나님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가룟유다의 배반은 그의 책임이 아니라 하나님의 책임이 됩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은 가룟유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습니다. 이런 오해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1절을 봅시다.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가룟유다가 배반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록된 대로 즉 하나님이 예언하신대로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가룟유다가 배반하지 않았어도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가룟유다가 그 과정에서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사탄에게 쓰임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자기 죄를 깨닫도록 여러 번 기회를 주셨지만 가룟유다는 그 모든 것을 거절하고 자기의 길로 갔습니다. 그렇기에 가룟유다의 배반은 전적으로 그의 책임입니다. 그 자신도 그것을 알았기에 괴로워하다 목을 매어 자살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가룟유다를 통해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죄와 욕심에 눈이 멀면 주님도 배반하고 결국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가룟유다처럼 예수님을 배반하고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있는 죄를 깨닫게 하시고 때마다 회개할 수 있도록 은혜 주시길 기도합니다.
가룟유다는 예수님께 많은 사랑을 받고도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받은 사랑을 기억하고 나아와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여인이 있었습니다. 3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이 여인은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였습니다. 그녀는 평소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던 믿음있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오빠 나사로가 병들어 죽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난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받은 사랑과 은혜가 너무나 커서 예수님께 드릴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그녀가 준비한 선물은 바로 인도산 나드 향유였습니다. 이 향유는 한 병에 약 2천만원이나 되는 값비싼 향유였습니다. 그녀는 이 향유를 예수님께 드릴 기회를 엿보다 그녀의 집근처에 오셨을 때 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이 향유를 그냥 드린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이 향유를 어떻게 드렸습니까? 3절을 다시한번 봅시다.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그녀는 먼저 향유를 담은 옥합을 깨뜨렸습니다. 그리고 한 방울도 남김없이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식사하시던 예수님의 머리에서는 그녀가 부은 향유가 흘렀고 온 집안에 향유 향기가 가득해졌습니다. 그런데 이를 지켜보고 있던 제자들은 분을 내며 그녀를 책망했습니다. 그들이 분을 낸 이유는 이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도 있는데 왜 향유를 허비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반응은 그들과 달랐습니다. 6-8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예수님은 그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이 일이 예수님께 어떤 점에서 좋은 일일까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이유는 왕으로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종교지도자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여러 번 이 말씀을 하셨고 그 길을 준비해야 하는데 아무도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제자가 없었습니다.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팔 마음을 먹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홀로 외롭고 힘든 십자가의 길을 가셔야 했습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려 그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마리아의 사랑과 헌신에 감동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깨어진 옥합과 흘러내리는 향유를 통해 예수님은 그가 당할 고난과 십자가를 생각하신 것입니다. 깨어진 옥합은 모진 고난으로 깨어질 그의 몸이었고 흘러내리는 향유는 그가 십자가에서 흘리게 될 피를 연상케 했습니다. 그는 마리아를 통해 자신이 당할 고난과 십자가를 새롭게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이는 그가 마리아의 사랑과 헌신에 감동하고 기뻐했듯이 하나님께서도 그의 사랑과 헌신을 얼마나 기뻐하실 것인가를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그로인해 예수님은 십자가를 감당할 힘과 위로를 얻으셨습니다.
이렇게 마리아의 헌신을 통해 감동하고 위로와 힘을 얻으신 예수님은 이런 마리아가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에는 사람들이 보기에 허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일들이 있습니다. 우리 UBF 목자님들과 선교사님들은 캠퍼스 제자양성과 세계선교를 위해 자신을 드려 일생을 헌신하십니다. 그들의 삶을 보면 목사도 아닌데 그렇게 헌신할 필요가 있는가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헌신하고도 열매가 없을 때는 인생을 허비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캠퍼스 제자양성과 세계선교에 헌신하는 일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캠퍼스 역사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캠퍼스를 향해 누가 나를 위해 갈까 일꾼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런데 어렵다고 응답하는 이들이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목자님들과 선교사님들이 그 부르심에 응답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일생을 드려 캠퍼스 역사에 헌신하고 섬기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헌신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심히 기뻐하심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시는 일, 그것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하는 삶이 진정 아름다운 삶입니다.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은 마리아를 통해 우리는 어떤 삶을 살 것인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보기에 좋고 칭찬받는 삶을 살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보기에 좋고 칭찬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마리아는 사람들에게 책망을 받고 조롱을 받았지만 예수님이 보시기에 좋은 삶을 선택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전부를 주님께 드리는 헌신의 삶이었습니다. 주님께 헌신된 삶은 사람들에게 기억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기억하십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아름다운 헌신을 기억하실 뿐 아니라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그녀의 아름다운 이야기도 전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에게 기억되는 삶을 살아야 할까요? 그것은 나를 위해 자기 목숨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예수님께 기억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에게 기억되고 예수님께 기억되지 않으면 그것은 실패한 인생입니다. 우리 모두가 마리아처럼 예수님께 기억되는 아름다운 헌신의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제2장 언약의 피(12-26)
예수님은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준비하실 때 가룟유다가 그 장소를 알지 못하도록 은밀하게 준비하셨습니다. 이는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을 하시면서 그들에게 하실 중요한 말씀들이 있었기에 어떠한 일로도 그 시간 방해를 받고 싶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하시고 싶었던 중요한 말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십자가의 의미를 가르치시는 것이었습니다. 22-24절을 봅시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이번 유월절 만찬은 이 땅에서 제자들과 함께 먹는 마지막 만찬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때의 만찬을 ‘최후의 만찬’이라고 부릅니다. 이 밤이 지나가면 예수님은 모든 인류의 죄를 위한 유월절 어린 양으로서 고난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일에 대해 여러 번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지 않았고 묻는 것조차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예수님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떡을 떼어 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이는 우리를 죄를 위해 당하신 예수님의 고난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머리에는 가시관이 씌워졌고 예수님의 온 몸은 채찍에 찢기고 멍이 들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손과 발은 뼈가 으스러지고 신경이 끊어지고 살이 찢기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이렇게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예수님의 몸은 너무나 고통스러워 촛밀처럼 녹아 내렸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이렇게 당신의 몸이 부서지고 깨어지는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잔을 나눠 주시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4절을 봅시다.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고난 받으신 예수님의 몸에서는 많은 피가 흘렀습니다. 가시관에 찔린 머리에서 피가 흘렀습니다. 채찍에 맞은 몸에서 피가 흘렀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손과 발에서 피가 흘렀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마지막 피한방울 남기지 않고 다 흘리신 후에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무엇을 이루신 것입니까? 그것은 인류의 죄를 위한 대속의 역사를 완성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흘리신 그 피는 어떠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피 곧 언약의 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시내산에서 그들에게 율법을 주시면서 하신 언약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면 그들은 세계에 대하여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짐승의 피를 흘려 이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우리는 이 언약을 ‘옛언약’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옛언약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으로 폐하여지고 말았습니다. 이는 그들이 자기의 의지로 율법의 의를 이룰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행위와는 관계없는 또 다른 의를 준비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행위와는 관계없이 우리를 의롭다하시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예수님의 피를 믿는 믿음의 의입니다. 하나님은 그 피를 믿는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의는 우리의 행위가 아닌 예수님의 피로 맺어진 언약이기에 변할 수 없는 언약입니다. 우리는 이 언약을 새언약이라 부릅니다. 새언약은 돌에 새긴 십계명 율법과 같지 않고 우리 마음에 새겨주시는 마음의 언약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볼 때 죽음의 사자가 그 집을 넘어갔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에 예수님의 피를 믿는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십니다. 우리를 정죄와 심판으로부터 구원하십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피는 우리를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일 뿐 아니라 우리의 죄를 씻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병이 나을 것을 믿는 것도 믿는 것이고 우리에게 지혜와 능력을 주실 것을 믿는 것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믿음의 핵심은 바로 예수님의 피를 믿는 믿음입니다. 그 피가 내 죄를 씻고 내 죄를 용서했고 그 피를 믿을 때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 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 약속이 변함이 없고 그 약속을 믿을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피를 믿는 믿음이 없다면 이는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이는 헛되이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언약의 피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하나님은 그 피를 믿는 자를 의롭다하십니다. 예수님은 떡을 떼어 주시면서 또한 잔을 나눠주시면서 그 피를 믿는 믿음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피를 믿는 믿음을 갖는 것이 제자에게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죽음을 앞두고 성만찬을 행하셨습니다. 우리 안에 진정 그 피를 믿는 믿음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보혈이 나를 위해 흘리신 피요, 그 피를 믿는 믿음 안에서 영생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주님의 보혈로 인침을 받은 당신의 자녀들을 모든 시험가운데서 구원하시며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십니다. 우리 JBF 친구들이 예수님의 피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죄사함과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말씀 | 마가복음 14:1-26
요절 | 마가복음 14:24
언약의 피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오늘 주일말씀의 제목은 언약의 피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날 밤 유월절 만찬을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그의 죽음과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에 대한 의미를 가르치셨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피를 흘리신 것과 예수님의 피는 변할 수 없는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모두가 예수님이 흘리신 피의 의미를 깨닫고 하나님이 주시는 죄사함의 은혜를 깊이 영접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제1장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은 여인(1-11)
1,2절을 봅시다.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며 이르되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 유월절은 430년간 애굽의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이 탈출하던 날을 기념하는 유대인의 최대의 명절입니다. 그때 애굽을 급히 나오느라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갖고 나온 것을 기념해서 일주일간 무교절 절기를 지켰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에 유월절 명절을 기념하기 위해 2백만명이 모였다고 합니다.
이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예수님을 체포하면 민란이 일어날까 두려워하여 명절에는 하지 말자고 포기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급작스럽게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10,11절을 봅시다.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그들이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줄까 하고 그 기회를 찾더라.” 예수님의 제자 가룟유다가 대제사장에게 돈을 받고 예수님을 넘겨주기로 약속한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보다 돈을 더 사랑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예수님께 많은 사랑을 받고 말씀을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배반한 것입니다.
이런 가룟유다에 대해 많은 분들이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수 있도록 유다를 사용하신 것은 하나님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가룟유다의 배반은 그의 책임이 아니라 하나님의 책임이 됩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은 가룟유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습니다. 이런 오해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1절을 봅시다.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가룟유다가 배반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록된 대로 즉 하나님이 예언하신대로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가룟유다가 배반하지 않았어도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가룟유다가 그 과정에서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사탄에게 쓰임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자기 죄를 깨닫도록 여러 번 기회를 주셨지만 가룟유다는 그 모든 것을 거절하고 자기의 길로 갔습니다. 그렇기에 가룟유다의 배반은 전적으로 그의 책임입니다. 그 자신도 그것을 알았기에 괴로워하다 목을 매어 자살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가룟유다를 통해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죄와 욕심에 눈이 멀면 주님도 배반하고 결국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가룟유다처럼 예수님을 배반하고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있는 죄를 깨닫게 하시고 때마다 회개할 수 있도록 은혜 주시길 기도합니다.
가룟유다는 예수님께 많은 사랑을 받고도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받은 사랑을 기억하고 나아와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여인이 있었습니다. 3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이 여인은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였습니다. 그녀는 평소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던 믿음있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오빠 나사로가 병들어 죽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난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받은 사랑과 은혜가 너무나 커서 예수님께 드릴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그녀가 준비한 선물은 바로 인도산 나드 향유였습니다. 이 향유는 한 병에 약 2천만원이나 되는 값비싼 향유였습니다. 그녀는 이 향유를 예수님께 드릴 기회를 엿보다 그녀의 집근처에 오셨을 때 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이 향유를 그냥 드린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이 향유를 어떻게 드렸습니까? 3절을 다시한번 봅시다.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그녀는 먼저 향유를 담은 옥합을 깨뜨렸습니다. 그리고 한 방울도 남김없이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식사하시던 예수님의 머리에서는 그녀가 부은 향유가 흘렀고 온 집안에 향유 향기가 가득해졌습니다. 그런데 이를 지켜보고 있던 제자들은 분을 내며 그녀를 책망했습니다. 그들이 분을 낸 이유는 이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도 있는데 왜 향유를 허비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반응은 그들과 달랐습니다. 6-8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예수님은 그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이 일이 예수님께 어떤 점에서 좋은 일일까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이유는 왕으로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종교지도자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여러 번 이 말씀을 하셨고 그 길을 준비해야 하는데 아무도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제자가 없었습니다.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팔 마음을 먹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홀로 외롭고 힘든 십자가의 길을 가셔야 했습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려 그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마리아의 사랑과 헌신에 감동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깨어진 옥합과 흘러내리는 향유를 통해 예수님은 그가 당할 고난과 십자가를 생각하신 것입니다. 깨어진 옥합은 모진 고난으로 깨어질 그의 몸이었고 흘러내리는 향유는 그가 십자가에서 흘리게 될 피를 연상케 했습니다. 그는 마리아를 통해 자신이 당할 고난과 십자가를 새롭게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이는 그가 마리아의 사랑과 헌신에 감동하고 기뻐했듯이 하나님께서도 그의 사랑과 헌신을 얼마나 기뻐하실 것인가를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그로인해 예수님은 십자가를 감당할 힘과 위로를 얻으셨습니다.
이렇게 마리아의 헌신을 통해 감동하고 위로와 힘을 얻으신 예수님은 이런 마리아가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에는 사람들이 보기에 허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일들이 있습니다. 우리 UBF 목자님들과 선교사님들은 캠퍼스 제자양성과 세계선교를 위해 자신을 드려 일생을 헌신하십니다. 그들의 삶을 보면 목사도 아닌데 그렇게 헌신할 필요가 있는가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헌신하고도 열매가 없을 때는 인생을 허비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캠퍼스 제자양성과 세계선교에 헌신하는 일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캠퍼스 역사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캠퍼스를 향해 누가 나를 위해 갈까 일꾼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런데 어렵다고 응답하는 이들이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목자님들과 선교사님들이 그 부르심에 응답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일생을 드려 캠퍼스 역사에 헌신하고 섬기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헌신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심히 기뻐하심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시는 일, 그것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하는 삶이 진정 아름다운 삶입니다.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은 마리아를 통해 우리는 어떤 삶을 살 것인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보기에 좋고 칭찬받는 삶을 살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보기에 좋고 칭찬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마리아는 사람들에게 책망을 받고 조롱을 받았지만 예수님이 보시기에 좋은 삶을 선택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전부를 주님께 드리는 헌신의 삶이었습니다. 주님께 헌신된 삶은 사람들에게 기억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기억하십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아름다운 헌신을 기억하실 뿐 아니라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그녀의 아름다운 이야기도 전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에게 기억되는 삶을 살아야 할까요? 그것은 나를 위해 자기 목숨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예수님께 기억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에게 기억되고 예수님께 기억되지 않으면 그것은 실패한 인생입니다. 우리 모두가 마리아처럼 예수님께 기억되는 아름다운 헌신의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제2장 언약의 피(12-26)
예수님은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준비하실 때 가룟유다가 그 장소를 알지 못하도록 은밀하게 준비하셨습니다. 이는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을 하시면서 그들에게 하실 중요한 말씀들이 있었기에 어떠한 일로도 그 시간 방해를 받고 싶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하시고 싶었던 중요한 말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십자가의 의미를 가르치시는 것이었습니다. 22-24절을 봅시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이번 유월절 만찬은 이 땅에서 제자들과 함께 먹는 마지막 만찬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때의 만찬을 ‘최후의 만찬’이라고 부릅니다. 이 밤이 지나가면 예수님은 모든 인류의 죄를 위한 유월절 어린 양으로서 고난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일에 대해 여러 번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지 않았고 묻는 것조차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예수님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떡을 떼어 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이는 우리를 죄를 위해 당하신 예수님의 고난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머리에는 가시관이 씌워졌고 예수님의 온 몸은 채찍에 찢기고 멍이 들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손과 발은 뼈가 으스러지고 신경이 끊어지고 살이 찢기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이렇게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예수님의 몸은 너무나 고통스러워 촛밀처럼 녹아 내렸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이렇게 당신의 몸이 부서지고 깨어지는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잔을 나눠 주시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4절을 봅시다.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고난 받으신 예수님의 몸에서는 많은 피가 흘렀습니다. 가시관에 찔린 머리에서 피가 흘렀습니다. 채찍에 맞은 몸에서 피가 흘렀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손과 발에서 피가 흘렀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마지막 피한방울 남기지 않고 다 흘리신 후에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무엇을 이루신 것입니까? 그것은 인류의 죄를 위한 대속의 역사를 완성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흘리신 그 피는 어떠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피 곧 언약의 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시내산에서 그들에게 율법을 주시면서 하신 언약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면 그들은 세계에 대하여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짐승의 피를 흘려 이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우리는 이 언약을 ‘옛언약’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옛언약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으로 폐하여지고 말았습니다. 이는 그들이 자기의 의지로 율법의 의를 이룰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행위와는 관계없는 또 다른 의를 준비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행위와는 관계없이 우리를 의롭다하시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예수님의 피를 믿는 믿음의 의입니다. 하나님은 그 피를 믿는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의는 우리의 행위가 아닌 예수님의 피로 맺어진 언약이기에 변할 수 없는 언약입니다. 우리는 이 언약을 새언약이라 부릅니다. 새언약은 돌에 새긴 십계명 율법과 같지 않고 우리 마음에 새겨주시는 마음의 언약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볼 때 죽음의 사자가 그 집을 넘어갔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에 예수님의 피를 믿는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십니다. 우리를 정죄와 심판으로부터 구원하십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피는 우리를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일 뿐 아니라 우리의 죄를 씻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병이 나을 것을 믿는 것도 믿는 것이고 우리에게 지혜와 능력을 주실 것을 믿는 것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믿음의 핵심은 바로 예수님의 피를 믿는 믿음입니다. 그 피가 내 죄를 씻고 내 죄를 용서했고 그 피를 믿을 때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 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 약속이 변함이 없고 그 약속을 믿을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피를 믿는 믿음이 없다면 이는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이는 헛되이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언약의 피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하나님은 그 피를 믿는 자를 의롭다하십니다. 예수님은 떡을 떼어 주시면서 또한 잔을 나눠주시면서 그 피를 믿는 믿음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피를 믿는 믿음을 갖는 것이 제자에게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죽음을 앞두고 성만찬을 행하셨습니다. 우리 안에 진정 그 피를 믿는 믿음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보혈이 나를 위해 흘리신 피요, 그 피를 믿는 믿음 안에서 영생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주님의 보혈로 인침을 받은 당신의 자녀들을 모든 시험가운데서 구원하시며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십니다. 우리 JBF 친구들이 예수님의 피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죄사함과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