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마가복음 제 21 강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마1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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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마가복음 제 21 강
말씀 / 마가복음 11:1-25
요절 / 마가복음 11:9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입니다. 예수님은 이제까지는 자신을 인자로 나타내셨습니다. 인자는 영어로 “Son of man"으로 사람의 아들을 의미합니다. 이는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란 의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예수님의 성육신이라고 말합니다. 인자되신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입성을 준비하시는 예수님은 자신을 가르켜 “주, the Lord”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백성들이 그를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외치며 열렬히 환영하였습니다. 이 EKd에 오신 예수님의 우리의 주가 되십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주되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실 일이 무엇인지와 그것의 영적인 의미를 배워보고자 합니다.
제1장. 어린나귀를 타신 예수님(1-10)
1-3절을 보십시오. 주되신 예수님은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모든 것을 가지신 왕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을 준비하시는데 어린나귀를 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어린나귀를 타고자 하셨을까요? 어린 나귀는 타고 가면 폼도 나지 않고 사람들의 놀림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시기 위해 어린나귀를 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예언하셨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슥9:9)
그럼 하나님은 왜 예수님이 어린나귀를 타도록 하셨을까요? 만일 어떤 왕이 코끼리를 타고 입성한다면 그것은 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소를 타고 입성한다면 부를 상징합니다. 말을 타고 입성한다면 권위를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나귀새끼는 무엇을 상징합니까? 그것은 겸손과 평화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나귀새끼를 타심으로 자신을 겸손과 평화의 왕으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겸손과 평화의 왕이십니다. 그는 죄인들을 섬기기 위해 죽기까지 자기를 낮추셨습니다. 그는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시기 위해 자기를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주되신 예수님은 우리를 겸손과 평화로 다스려 주십니다.
8-1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자 많은 사람은 자기 겉옷과 다른 이들은 밭에서 벤 나무 가지를 길에 펴며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를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하며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호산나”는 “지금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주되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는 일입니다. 이를 위해 그는 고난과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하나님은 천하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습니다. 주되신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십니다.
제2장.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11-19)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날이 저물자 베다니로 물러나셨다가 이튿날 베다니에서 나오실 때 배가 고프셨습니다. 그런데 멀리서 보니 무화과나무 하나가 보이는데 잎사귀가 무성했습니다. 그래서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는데 가서 보니 잎사귀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주되신 예수님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십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예수님은 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일까요? 그 이유에 대한 단서가 11절에 있습니다. 11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 가사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니라”
11절을 보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가장 먼저 하신 일은 성전을 둘러 보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성전에서 무엇을 보셨을까요? 당시 성전은 성전제사에 쓸 제물을 파는 장사꾼들의 소리와 짐승들의 울음소리로 가득했습니다. 이는 거룩한 성전이 아니라 마치 시장과도 같았습니다. 본래 성전에 쓸 제물은 성전 밖에서 구매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성전 안으로 끌어들인 것은 당시 대제사장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먼 곳에서 오는 순례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그들의 종교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성전에서 비즈니스를 하게 한 것입니다. 찬란한 금빛으로 빛나는 성전은 겉은 화려했지만 그 속은 탐욕과 거짓으로 부패해 있었습니다. 성전은 사람들에게는 무엇인가 줄 것 것처럼 기대감을 주지만 사람들은 그곳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이런 성전의 모습은 마치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와 같았습니다. 그렇기에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일은 부패한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15-19절을 보십시오.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그리고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성전에 대해 가르쳐 말씀하셨습니다. 17절을 봅시다.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예수님은 성전을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성전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성전은 하나님을 만난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성전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장사를 하고 백성들을 늑탈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이런 성전은 하나님께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장사하는 자들의 상을 엎으시고 그들을 내쫓으심으로써 본래의 기능을 잃어버린 성전의 멸망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교회, 성령이 없는 교회,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는 교회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장사를 하는 강도의 굴혈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교회에 대해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이렇게 우리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13:5) 우리는 정말로 진지하게 내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내 안에 참으로 진실된 마음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있는지 아니면 자신의 정욕을 위해 그 이름을 이용만 하고 있는지 이를 분별하지 못하면 우리는 스스로 버림받은 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주되신 주님께서 우리가 자신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참된 성전으로 바르게 세움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제3장. 하나님을 믿으라(20-25)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이튿날 예수님과 제자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저주한 무화과나무가 뿌리째로 마른 것을 보고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21) 베드로는 무화과나무를 뿌리째로 마르게 한 예수님의 능력이 어디서 온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그것에 대한 예수님은 대답은 무엇입니까? 2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예수님의 답변은 “하나님을 믿으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통해 베드로에게 모든 능력의 원천은 하나님이심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산 위에 있는 예루살렘 성전을 향한 하나님의 오랜 꿈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만방이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하나님의 전에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 길로 행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십니다. 이는 본래의 기능을 잃어버린 성전의 멸망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우리의 성전이 되시기 위해 태산과 같은 고난과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주되신 예수님은 이토록 크신 일을 어떻게 감당하실 수 있었을까요? 22절을 다시한번 읽어 봅시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그렇습니다. 주되신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이 모든 일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은 산보다 크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산이 하나님보다 크다면 하나님은 산을 옮기실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산보다 크시기에 능히 산을 옮기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보기에는 하나님보다 세상의 산들이 더 크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이 세상에 하나님보다 더 큰 문제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의 문제는 실상 단 하나 뿐입니다. 그 하나의 문제는 바로 산보다 크신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24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믿음의 구체적인 표현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는 모든 일에 기도하게 됩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진정한 믿음은 기도하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고도 걱정할 때가 있습니다. 기도하고도 의심하고 두려워할 때가 있습니다. 이는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이 없는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기도하되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심을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들으시면 응답하여 주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가 무엇이든지 기도하면 들어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실상은 우리가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왜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어떤 사람의 말을 잘 들어 줍니까? 우리는 특별히 내가 사랑하고 아주 특별하게 생각하는 사람의 말을 아주 잘 들어 줍니다. 저는 셋째 아들 신우의 말을 잘 들어줍니다. 그만큼 신우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십니까? 이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우리를 사랑하시되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은 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롬8:32) 그렇기에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이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기도하라는 것은 바로 이 하나님의 사랑을 믿음으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25절을 읽겠습니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기도할 때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는 기도를 하라고 하십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사하여 주신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세우고자 하시는 보이지 않는 성전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성전시대를 사는 유대인들은 죄를 속하려면 제물을 들고 성전에 나아가야 했습니다. 그들의 죄를 위해 제사장이 제사를 지내고 그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성전되신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죄사함을 위해 짐승의 피를 흘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를 중보할 제사장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전되신 예수님께 나아가 주의 이름으로 형제의 죄사함을 위한 기도하면 죄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유대인인 제자들에게는 이를 믿고 기도하는 것이 산을 옮기는 것만큼 어려운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들에게 이 기도를 가르치셨습니다. 또한 이를 통해 산을 옮기는 믿음보다 더 큰 믿음은 용서하는 믿음임을 가르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주의 이름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이 무엇이며 그것의 영적인 의미가 무엇인지를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주의 이름으로 오셔서 그의 백성을 섬기시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그는 이를 통해 만민이 그에게 나아와 하나님의 도를 배우며 그의 길로 행하게 될 하나님의 비전이 성취될 것을 믿으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을 때 만민을 구원하기 위해 가셔야할 태산 같은 고난과 십자가의 길을 능히 감당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으심으로 이 땅에 주의 이름으로 오신 당신의 사명을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믿을 때 주의 이름을 위해, 그의 영광을 위해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 내게 범죄한 형제를 용서하고 이 땅에 무너진 예배를 회복하고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는 사명을 능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이를 믿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며 행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일생 예수님처럼 주의 이름을 위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말씀 / 마가복음 11:1-25
요절 / 마가복음 11:9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입니다. 예수님은 이제까지는 자신을 인자로 나타내셨습니다. 인자는 영어로 “Son of man"으로 사람의 아들을 의미합니다. 이는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란 의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예수님의 성육신이라고 말합니다. 인자되신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입성을 준비하시는 예수님은 자신을 가르켜 “주, the Lord”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백성들이 그를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외치며 열렬히 환영하였습니다. 이 EKd에 오신 예수님의 우리의 주가 되십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주되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실 일이 무엇인지와 그것의 영적인 의미를 배워보고자 합니다.
제1장. 어린나귀를 타신 예수님(1-10)
1-3절을 보십시오. 주되신 예수님은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모든 것을 가지신 왕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을 준비하시는데 어린나귀를 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어린나귀를 타고자 하셨을까요? 어린 나귀는 타고 가면 폼도 나지 않고 사람들의 놀림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시기 위해 어린나귀를 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예언하셨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슥9:9)
그럼 하나님은 왜 예수님이 어린나귀를 타도록 하셨을까요? 만일 어떤 왕이 코끼리를 타고 입성한다면 그것은 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소를 타고 입성한다면 부를 상징합니다. 말을 타고 입성한다면 권위를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나귀새끼는 무엇을 상징합니까? 그것은 겸손과 평화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나귀새끼를 타심으로 자신을 겸손과 평화의 왕으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겸손과 평화의 왕이십니다. 그는 죄인들을 섬기기 위해 죽기까지 자기를 낮추셨습니다. 그는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시기 위해 자기를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주되신 예수님은 우리를 겸손과 평화로 다스려 주십니다.
8-1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자 많은 사람은 자기 겉옷과 다른 이들은 밭에서 벤 나무 가지를 길에 펴며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를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하며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호산나”는 “지금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주되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는 일입니다. 이를 위해 그는 고난과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하나님은 천하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습니다. 주되신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십니다.
제2장.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11-19)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날이 저물자 베다니로 물러나셨다가 이튿날 베다니에서 나오실 때 배가 고프셨습니다. 그런데 멀리서 보니 무화과나무 하나가 보이는데 잎사귀가 무성했습니다. 그래서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는데 가서 보니 잎사귀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주되신 예수님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십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예수님은 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일까요? 그 이유에 대한 단서가 11절에 있습니다. 11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 가사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니라”
11절을 보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가장 먼저 하신 일은 성전을 둘러 보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성전에서 무엇을 보셨을까요? 당시 성전은 성전제사에 쓸 제물을 파는 장사꾼들의 소리와 짐승들의 울음소리로 가득했습니다. 이는 거룩한 성전이 아니라 마치 시장과도 같았습니다. 본래 성전에 쓸 제물은 성전 밖에서 구매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성전 안으로 끌어들인 것은 당시 대제사장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먼 곳에서 오는 순례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그들의 종교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성전에서 비즈니스를 하게 한 것입니다. 찬란한 금빛으로 빛나는 성전은 겉은 화려했지만 그 속은 탐욕과 거짓으로 부패해 있었습니다. 성전은 사람들에게는 무엇인가 줄 것 것처럼 기대감을 주지만 사람들은 그곳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이런 성전의 모습은 마치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와 같았습니다. 그렇기에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일은 부패한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15-19절을 보십시오.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그리고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성전에 대해 가르쳐 말씀하셨습니다. 17절을 봅시다.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예수님은 성전을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성전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성전은 하나님을 만난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성전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장사를 하고 백성들을 늑탈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이런 성전은 하나님께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장사하는 자들의 상을 엎으시고 그들을 내쫓으심으로써 본래의 기능을 잃어버린 성전의 멸망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교회, 성령이 없는 교회,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는 교회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장사를 하는 강도의 굴혈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교회에 대해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이렇게 우리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13:5) 우리는 정말로 진지하게 내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내 안에 참으로 진실된 마음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있는지 아니면 자신의 정욕을 위해 그 이름을 이용만 하고 있는지 이를 분별하지 못하면 우리는 스스로 버림받은 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주되신 주님께서 우리가 자신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참된 성전으로 바르게 세움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제3장. 하나님을 믿으라(20-25)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이튿날 예수님과 제자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저주한 무화과나무가 뿌리째로 마른 것을 보고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21) 베드로는 무화과나무를 뿌리째로 마르게 한 예수님의 능력이 어디서 온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그것에 대한 예수님은 대답은 무엇입니까? 2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예수님의 답변은 “하나님을 믿으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통해 베드로에게 모든 능력의 원천은 하나님이심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산 위에 있는 예루살렘 성전을 향한 하나님의 오랜 꿈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만방이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하나님의 전에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 길로 행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십니다. 이는 본래의 기능을 잃어버린 성전의 멸망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우리의 성전이 되시기 위해 태산과 같은 고난과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주되신 예수님은 이토록 크신 일을 어떻게 감당하실 수 있었을까요? 22절을 다시한번 읽어 봅시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그렇습니다. 주되신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이 모든 일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은 산보다 크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산이 하나님보다 크다면 하나님은 산을 옮기실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산보다 크시기에 능히 산을 옮기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보기에는 하나님보다 세상의 산들이 더 크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이 세상에 하나님보다 더 큰 문제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의 문제는 실상 단 하나 뿐입니다. 그 하나의 문제는 바로 산보다 크신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24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믿음의 구체적인 표현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는 모든 일에 기도하게 됩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진정한 믿음은 기도하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고도 걱정할 때가 있습니다. 기도하고도 의심하고 두려워할 때가 있습니다. 이는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이 없는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기도하되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심을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들으시면 응답하여 주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가 무엇이든지 기도하면 들어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실상은 우리가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왜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어떤 사람의 말을 잘 들어 줍니까? 우리는 특별히 내가 사랑하고 아주 특별하게 생각하는 사람의 말을 아주 잘 들어 줍니다. 저는 셋째 아들 신우의 말을 잘 들어줍니다. 그만큼 신우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십니까? 이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우리를 사랑하시되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은 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롬8:32) 그렇기에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이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기도하라는 것은 바로 이 하나님의 사랑을 믿음으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25절을 읽겠습니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기도할 때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는 기도를 하라고 하십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사하여 주신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세우고자 하시는 보이지 않는 성전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성전시대를 사는 유대인들은 죄를 속하려면 제물을 들고 성전에 나아가야 했습니다. 그들의 죄를 위해 제사장이 제사를 지내고 그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성전되신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죄사함을 위해 짐승의 피를 흘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를 중보할 제사장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전되신 예수님께 나아가 주의 이름으로 형제의 죄사함을 위한 기도하면 죄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유대인인 제자들에게는 이를 믿고 기도하는 것이 산을 옮기는 것만큼 어려운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들에게 이 기도를 가르치셨습니다. 또한 이를 통해 산을 옮기는 믿음보다 더 큰 믿음은 용서하는 믿음임을 가르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주의 이름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이 무엇이며 그것의 영적인 의미가 무엇인지를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주의 이름으로 오셔서 그의 백성을 섬기시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그는 이를 통해 만민이 그에게 나아와 하나님의 도를 배우며 그의 길로 행하게 될 하나님의 비전이 성취될 것을 믿으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을 때 만민을 구원하기 위해 가셔야할 태산 같은 고난과 십자가의 길을 능히 감당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으심으로 이 땅에 주의 이름으로 오신 당신의 사명을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믿을 때 주의 이름을 위해, 그의 영광을 위해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 내게 범죄한 형제를 용서하고 이 땅에 무너진 예배를 회복하고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는 사명을 능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이를 믿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며 행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일생 예수님처럼 주의 이름을 위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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